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창희 Feb 07. 2023

더 글로리의 시즌제 파괴와 OTT 최적화 신화의 종말

Content Platform Context vol. 1

Summary


특별한 일이 없으면 브런치에 매거진으로 만든 <콘텐츠, 플랫폼, 콘텍스트>란 섹션에 월초에 제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영상 텍스트에 대한 글을 쓰고 올리려고 합니다. 이번 달은 이 매거진을 기획한 이유와 ‘더 글로리’에 대해 다뤄 봤습니다. OTT 시장의 문법과 기존 레거시 방송의 문법이 서로 간에 영향을 받으며 새로운 문법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더 글로리’의 파트제 공개도 이런 흐름 속에서 봐야할 것 같습니다.        


0. ‘콘텐츠플랫폼콘텍스트’, 미디어 생태계의 맥락 읽기     


내가 이 매거진에서 하고자 하는 것은 ‘텔레비전 비평’이다. 문제는 비평의 대상이다. 텍스트 비평과 산업 비평은 분명히 다른 영역이다. 가령, 원용진(2000)은 텔레비전 비평의 범주로 프로그램 내용 비평과 산업 비평을 각기 독자적인 영역으로 구분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환경에서 각각을 별도로 구분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영역을 얘기하기에 앞서 텔레비전 비평의 대상을 어디까지로 볼 것인지에 대해 규정할 필요가 있다. 텔레비전은 통상 레거시 방송 매체를 지칭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텔레비전은 “멀리서 본다(tele-vision)”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Lobato, 2019/2020). 매체를 통해 영상을 보는 행위를 모두 포괄할 수 있는 용어라는 측면(노창희, 2021)에서 본 매거진에서 다루는 비평의 대상을 포괄할 수 있는 단어라고 생각해서 비평의 대상을 텔레비전으로 규정했다. 


하지만 텔레비전 비평을 하기 위해서라도 영상 매체로 국한에서 텍스트를 다루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다음 호에서 다루고자 하는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만화라는 원작 서사를 가지고 있다. 물론, 영상 서사의 원천 소스를 다른 매체에서 가져온 역사는 장구하지만 역동적인 관계를 맺게 된 것은 아주 오래된 일은 아닌 것 같다. 여기에서 길게 할 얘기는 아니고 매체 간의 횡단과 관계 맺음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다른 호에서 다시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굳이 텔레비전 비평을 하고자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990년대 대중문화의 세례를 받은 나는 청소년기부터 문화 비평이라는 것을 해보고 싶었다. 대학원에서 공부를 시작하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미디어 산업, 정책과 관련된 일을 해왔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문화 비평에 대한 로망을 접지는 않았던 것 같고 사후적으로 지난 몇 년간 내가 해온 일을 포괄적으로 규정해 보자면 텔레비전 비평이라는 것을 해 온 것 같다는 생각을 변화가 많았던 2021년과 2022년 사이에 자주 하곤 했었다.


텔레비전에 관한 내용 비평의 주된 대상은 특정 텍스트가 될 것이고, 산업의 대상은 산업적 변화와 그 산업적 변화에 영향을 미치는 정책까지를 포괄할 수 있을 것이다. 산업과 정책은 각기 다른 비평의 대상이 될 수 있겠지만 <콘텐츠, 플랫폼, 콘텍스트>에서는 산업과 정책을 구분해서 다루지는 않을 생각이다. 텍스트 비평과 산업 비평을 두 축으로 놓고 정책을 산업에 영향을 주는 변수로 다루고자 한다. 


먹고 사는 일로 보자면 산업 비평 쪽에 관심을 둘 수밖에 없겠지만 예전부터 해오고 싶었던 일은 텍스트 비평 쪽이다. 이 두 가지를 통합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는 미디어 환경의 변화, 그리고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자리 때문이었다. OTT로 인해 영상 시장의 판이 바뀌면서 평단의 흐름도 바뀌고 있다. 내용 비평을 주로 하는 영화평론가 혹은 유튜버와 같은 평자들이 산업의 변화에 대해 논하는 것은 전혀 어색한 일이 아니다. 반면, 영상 내용 비평 자체가 학술적 장이 되기 어려운 미디어 학계에서 특정 콘텐츠가 가진 텍스트로서의 가치를 논하는 일도 전혀 어색한 일이 아니다. 정확히 얘기하기는 어렵겠지만 이는 OTT의 성장과 궤를 같이한다. 나는 산업, 정책과 관련된 일을 업으로 삼아온 연구자지만 지면에 기고할 기회가 생기면서 은근슬쩍 내용 비평과 관련된 내용을 포함시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 한편으로는 산업 비평 혹은 전반적인 산업을 조망하기 위해서라도 주요한 텍스트들이 가진 가치에 대한 평가는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콘텐츠, 플랫폼, 콘텍스트>에서는 특정 텍스트를 다루면서 텍스트의 내부와 외부를 함께 다루는 방식을 선택했다. 이번 호를 예로 들면, ‘더 글로리’의 외부에는 OTT 사업자들의 파트제 도입이라는 변화의 흐름이 담겨 있다.


콘텐츠와 플랫폼은 텔레비전뿐 아니라 현재의 미디어 생태계를 설명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형식이다. 레빈(Levine, 2015/2021)은 형식이 예술 작품을 일상생활과 구별 짓는 것이라고 보는 통상적인 입장에 동의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 레빈의 관심사는 미학적 형식과 사회적 형식 사이의 관계지만 나는 거기까지 나아갈 능력도 의도도 없다. 내가 플랫폼이라는 형식에 주목하면서 레빈의 논의를 끌어온 이유는 플랫폼은 그 자체로 독립적인 형식으로 기능하기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소수의 플랫폼만 생태계에 존재했던 시기에는 플랫폼이 콘텐츠의 형식을 조율했다. 윌리엄스가 편성이라는 흐름에 집중했던 이유는 윌리엄스가 <텔레비전론>을 쓰던 당시에는 선형 편성에 콘텐츠가 종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Williams, 1974/1996). 지금은 플랫폼과 콘텐츠가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다. 어느 쪽이 힘의 우위에 있다고 말하기보다는 콘텐츠와 플랫폼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각각의 형식에 영향을 주고 있다. 그 콘텍스트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 스트리밍 생태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맥락적 상상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노창희, 2020. 8. 10).


콘텐츠와 플랫폼 사이의 미묘한 관계가 만들어내는 콘텍스트를 읽어 내는 일은 산업을 둘러싼 이해관계자는 의도하지 않았던 함의를 찾아내는 유의미한 징후적 독해가 될 수 있다고 믿는 쪽이다. 매거진의 이름을 <콘텐츠, 플랫폼, 콘텍스트>라고 명명한 이유다.     


1. 메인 테마: ‘더 글로리의 시즌제 파괴와 OTT 최적화 신화의 종말       


텍스트 안


‘더 글로리’를 보기로 마음먹고 김은숙 드라마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기억을 떠올렸는데 자격 없는 말인 것이 딱히 기억에 남는 김은숙 드라마가 없다. 군대에 있을 때 봤던 ‘파리의 연인’ 정도가 인상적으로 남아 있는데 그것도 드라마 자체에 대한 기억보다는 재미있게 봤던 기억 자체만 남아 있다. 군대라는 특수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김은숙 드라마를 평가할 계제가 되지 못한다. 다만, 김은숙 드라마라고 했을 때 떠오르는 선입견은 있는데 그건 그만큼 김은숙 드라마가 형성한 브랜드 이미지가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더 글로리’는 김은숙과는 잘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복수극 스릴러다. 복수극 스릴러는 김은숙과 잘 어울리지 않아 보이지만 ‘더 글로리’는 상당히 흡인력 있게 전개된다. 모든 복수극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더 글로리’는 복수를 하려다 자신도 괴물이 되어 버리는 이야기다. 아니 괴물이 되어 버린다기보다는 괴물이 되기를 작정하고 달려드는 서사다. 복수극이 매력을 가지라면 주인공의 처지에 충분히 공감해야 하는데 ‘더 글로리’의 초반부 서사는 여기에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서사의 핍진성 무관하게 초반의 학폭 장면은 보기에 거북했다. 아울러, 이용자의 눈길을 끌기 위해 선택한 것으로 보이는 자극적인 묘사들이 얼마나 성공적으로 작용했을지는 의문이다.  


밀란 쿤데라는 인간은 선과 악을 구분하기를 좋아하는 존재라고 말 한 바 있다(Kundera, 1986/2013). 물론, 본인은 그 인식과는 전혀 다른 작품들을 써 왔지만. ‘더 글로리’의 흡인력은 서사의 템포에서 나온다고 생각하지만 기본적으로 명확한 선과 악의 구도에서 기인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영화와 달리 오랜 시간 이용자의 이목을 집중시켜야 하는 드라마 장르에서 선과 악의 구도를 명확하게 배치하는 것은 피하기 어려운 유혹이고, ‘더 글로리’는 선과 악의 구도를 노골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드라마다. 하지만 문동은(송혜교)은 박연진(임지연)을 포함한 학폭의 가해자와 대비될 때 선이 될 수 있을 뿐이다. 학폭 문제가 이미 오래전부터 문제가 되어온 대한민국에서 ‘더 글로리’는 사회적 이슈를 제기하는 텍스트가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 익숙하고 충분히 자극적으로 다가올 수 있는 소재를 활용하고 있는 드라마다. 사회성 짙은 드라마와는 거리가 있는 작품이라는 것이다. 


내가 주목하는 부분은 김은숙은 복수극 스릴러를 표방하고 있는 ‘더 글로리’에서도 낭만화된 로맨스를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여정(이도현)은 트라우마가 있기는 해도 로맨스물에서 등장하는 백마 탄 왕자 역할이라고 보지 않을 도리가 없는 캐릭터다. ‘더 글로리’가 가진 확장성은 기존에 김은숙 드라마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과 김은숙의 로맨스를 좋아하는 층 모두를 겨냥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에 있다. 한편으로는 양자를 다 놓칠 수도 있는 선택이 될 수도 있다. ‘더 글로리’에 대한 반응을 보면 적어도 후자보다는 전자에 가까워 보인다. 확장성 측면에서 성공을 거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3월에 공개될 파트2까지 보고 나서야 판단이 가능한 문제겠지만 말이다.     

 

텍스트 밖


개인적으로 ‘더 글로리’는 텍스트 안보다 텍스트 밖에 관심이 더 많이 가는 작품이다. 시즌제를 파괴한 것은 ‘더 글로리’가 아니라 넷플릭스다. 넷플릭스가 일괄출시 전략을 적용하지 않은 것은 ‘더 글로리’가 처음이 아니다. 하지만 넷플릭스의 시즌제 활용 전략 변화가 국내에서 화제가 되게끔 만든 것은 ‘더 글로리’다. 내가 ‘더 글로리’의 시즌제 파괴라는 자극적인 표현을 쓴 것은 ‘더 글로리’의 시즌제 쪼개기 전략이 시사하는 바가 그만큼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단위와 단위 사이의 긴장감을 극대화하는 전략은 현대 텔레비전 드라마가 최초로 활용한 것이 아니다. 19세기였던 빅토리아 시대 최고의 인기 작가였던 찰스 디킨스가 종반부에 드라마틱한 결말로 다음 부분에 대한 흥미를 유도하기 위해 사용했던 클리프 행어 결말(cliffhanger ending)은 그야말로 고전적인 수법이라고 할 수 있다. 


넷플릭스를 포함한 OTT들은 일괄출시가 아닌 방식으로 콘텐츠를 공개하기 시작했다. 콘텐츠 투자비 증가와 경쟁 심화로 콘텐츠를 쪼개서 공개하면서 가입자 이탈을 방지하고 신규 가입자를 유치하기 위한 전략으로 파트제를 도입한 것이다. 이는 레거시 방송의 편성과 유사한 행위라고도 볼 수 있다. OTT 가입자 증가와 경쟁 심화는 OTT가 텔레비전 문법을 매체의 형식적 특성을 고려해서 수용하게끔 유도하고 있다. 


넷플릭스와 대한민국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미묘한 관계를 맺고 있지만 이용자의 OTT 소비라는 측면에서 넷플릭스가 국내에서 가지는 큰 의의 중 하나는 SVOD에 대한 지불의사가 국내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 플랫폼이라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넷플릭스는 글로벌 플랫폼 사업자라고 하더라도 대한민국에서 유의미한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국내 콘텐츠에 투자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 플랫폼이기도 했다. 다른 이유도 작용 했겠지만 넷플릭스에 비해 상대적으로 국내에 연착륙하는데 고전하고 있는 디즈니 플러스의 사례는 국내 콘텐츠 투자에 등한시 하게 되면 대한민국에 정착하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일괄출시로 인해 가능해진 몰아보기(binge watch)는 넷플릭스로 인해 관습화된 OTT 소비 문법이었다. 넷플릭스는 자신들이 기존 방송사와 달리 선형적인 편성에 얽매이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이용자에게 최적화(optimization)된 서비스를 제공하는 플랫폼임을 자처해 왔다. 최적화는 넷플릭스가 표방한 기조였으며, 넷플릭스라는 혁신적인 플랫폼에 대해 경외감을 표시하는 최대치의 헌사이기도 했다. 


하지만 넷플릭스와 같은 OTT 플랫폼은 시간과 공간이 가진 물리적 제약에 구애받지 않는 것이지 콘텐츠 투자에 필요한 콘텐츠 투자 비용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존재는 아니다. 넷플릭스가 오리지널 콘텐츠 투자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전 롱테일 콘텐츠를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확보하고 이용자가 큰 기대 없이 콘텐츠를 이용했던 시기에는 최적화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가능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넷플릭스가 텐트폴 오리지널 콘텐츠 중심으로 마케팅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미 최적화 신화는 종말이 예고된 서사였는지 모른다. 매출액의 대부분 혹은 매출액을 상회하는 투자비를 들여가면서 콘텐츠를 수급해야 하는 경쟁 환경에서 최적화라는 용어는 OTT가 가진 특성의 단면을 설명할 수는 있어도 스트리밍 생태계 자체를 대변하는 용어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최적화는 언제든 복귀할 수 있는 서사다. 다만 적어도 현재의 시점에서는 최적화라는 패러다임이 주도하던 시기는 지나간 것으로 보인다. 넷플릭스의 2022년 4/4분기 실적의 핵심을 추려 보면 수뇌부 교체, 광고 요금제 확대 적용, 계정공유 금지, 투자 효율화 등을 꼽을 수 있다. 넷플릭스를 포함한 OTT 플랫폼들은 어렵게 확보한 콘텐츠를 통해 이용자들의 시청 시간 점유율을 높이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용자를 광고로부터 해방 시켜 줬다는 것도 SVOD 서비스가 가진 차별적인 정체성이었으나 광고 요금제를 도입한 이상 OTT는 더 이상 광고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플랫폼이 아니다. 계정공유는 경제적인 유인을 극대화하는 동시에 지인들과의 문화적 경험을 공유하는 OTT가 대중화시킨 구독 경제의 산물이었다. 계정공유 금지는 가구 중심으로 시청을 할 수밖에 없는 유료방송과 OTT의 모습이 유사해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적화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혁신적인 플랫폼이라는 이미지 구축을 중심으로 마케팅을 수행했던 최적화 서사를 대체할 다른 서사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물론, 이 고민의 주체는 사업자가 되겠지만 서사의 흥행성을 결정할 주체는 이용자가 될 것이다.      


참고문헌     

노창희 (2020. 8. 10). 스트리밍 이해 위한 맥락적 상상력. <아이뉴스24>.

노창희 (2021). 스트리밍 시대의 텔레비전 그리고 시청자.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엮음 (2021). <코로나19 이후의 한류>(154-185). 서울: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원용진 (2000). <텔레비전 비평론>. 파주: 한울아카데미. 

Levine, C. (2015). Forms: Whole, rhythm, hierarchy, network. 백준걸·황수경 (2021). <형식들>. 서울: 앨피.

Lobato, R. (2019). Netflix nations: The geography of digital distribution. 안세라 (역) (2020). <넷플릭스 세계화의 비밀: 넷플릭스식 OTT 플랫폼의 원리>. 서울: 유엑스리뷰.

Netflix (2023). FINAL-Q4-22-Shareholder-Letter.

Kundera, M. (1986). L'art du Roman. 권오룡 (2013). <소설의 기술>. 서울: 민음사. 

Williams, R. (1974). Television: Technology and Cultural Form. 박효숙 (역) (1996). <텔레비전론>. 서울: 현대미학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