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할 것인가?를 읽고 by 블라디미르 레닌
서론
대부분의 생각과는 다르게, 사회주의에 대한 철학적 정립은 마르크스의 「자본론」 이전에 유럽에서 발생했다. 생시몽과 로버트 오언은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에 이미 사회주의를 위한 초석을 마련했다. 생시몽은 산업혁명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을 직접 목격하며, 공공사업과 공공교육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적 대안을 제시했다. 로버트 오언은 한 발자국 더 나아가 뉴 라너크 공장과 뉴 하모니라는 공동체를 통해 대안적 경제 체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들의 영향력은 크지 않았다. 그들은 노동자의 삶을 개선하려 노력했지만, 체제 전체를 바꾸는 혁명에는 나서지 않았다. 따라서, 제국주의와 산업혁명으로 자리 잡은 파괴적 자본주의의 근간을 흔들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 일으킨 불꽃은 사그라들었지만 절대 꺼지지 않았고, 마르크스라는 거대한 불을 낳았다.
마르크스는 그의 저서 「자본론」과 「공산당 선언」에서 역사의 주인은 부르주아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라는 선언을 통해 억압받는 계급에 꿈과 희망을 주었다. 또한 그는 "철학자들은 지금까지 세계를 해석해 왔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변화시키는 것이다"라며 지식인들에게도 새로운 길을 제시해주었다. 레닌은 마르크스가 제시한 지식인의 실천적 역할을 실제로 구현한 혁명가였다. 그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해 끊임없이 대중과 대화를 했고, 볼셰비키 혁명을 통해 실제로 러시아에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했다. 후에 소비에트 유니온으로 발전한 그의 러시아 사회주의는 사회주의의 문제점을 드러내면서 결국 멸망했다. 하지만 거대한 사회주의 국가인 소비에트 유니온으로 인해 자본주의 스스로가 문제점을 깨닫고 생존하기 위해 다양한 수정을 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수정자본주의는 노동조합의 결성을 허용하고 건강보험, 실업보험등의 사회보장제도를 확장했다. 「무엇을 할 것인가」는 레닌이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을 위해 혁명당원이 가져야 할 사명과 그 방법에 대한 책이다.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읽고 이해함으로써 사회주의의 문제점과 실패 원인에 대해서 더욱 명확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레닌은 누구인가?
서론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레닌은 볼셰비키 혁명을 통해 러시아에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한 혁명가이자 지도자였다. 그가 사회주의자가 된 이유는 당시 러시아 민중의 고통스럽고 비참한 삶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당시 러시아는 농업 국가로서 뒤늦게 산업혁명을 받아들였다. 당시 국왕이었던 니콜라이 2세는 농민들이 개인적으로 토지를 소유할 수 있도록 개혁을 추진했지만, 이는 오히려 농민들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다. 토지를 가지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지만, 대부분의 러시아 농민들은 돈이 없었고 먹고 살 길이 없어진 그들은 도시로 흘러들었다. 영국보다도 더 가혹한 도시 노동 환경이 러시아 노동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러시아 도시 노동자들의 평균노동 시간은 12시간에 달했고 봉급은 기본적인 삶을 유지하기에는 턱없이 모잘랐다. 그들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잃었고, 생명은 파리목숨처럼 하찮게 여겨졌다.. 이를 경험한 레닌은 사회주의 국가가 해결책이라고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그의 형은 러시아 황제 암살 시도자로 지목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 당시 농민들은 황제를 암살한 혁명가들을 비난하고 황제를 두둔했는데, 이 경험은 레닌이 자생성을 부정하고 상부 주도 혁명을 주장하게 된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왜냐하면, 노동자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주체인 황제를 아버지같이 섬기고 그들을 해방시키려는 혁명가는 비난했다. 이를 통해 레닌은 노동자의 자발적 변화는 불가능하다고 느꼈던 것이다. 러시아 농민의 비참한 삶과 형의 죽음은 레닌을 사회주의자로 만들었고, 그는 요주의 인물이 되었다. 사회주의 사상에 위협을 느낀 러시아 황제는 그를 시베리아로 유배시켰다. 유배 생활이 끝난 후에도 그는 러시아로 돌아오지 못했고, 스위스에서 계속해서 혁명 활동을 이어갔다.
그 후에도 러시아의 상황은 계속해서 나빠졌고, 1차 세계대전은 그 기폭제가 되었다. 1차 세계대전으로 러시아 대중은 빵 한 조각 얻을 수 없었고, 이는 폭동으로 이어졌다. 1917년 2월에 그 유명한 2월 혁명이 일어났고, 러시아 황제는 군인들에게 시위대를 향한 발포를 명령했지만 그들은 오히려 폭동에 동참했다. 이에 러시아 황제는 퇴위했고, 로마노프 왕조는 막을 내렸다. 로마노프 왕조가 막을 내린 후, 멘셰비키와 부르주아 계급이 정권을 잡았지만 그들의 소극적 개혁 조치로 인해 러시아 대중은 큰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레닌은 스위스에서 비밀리에 급히 귀국했고, 10월 25일 볼셰비키 혁명을 통해 러시아의 정권을 잡게 되었다.
레닌의 사상
레닌의 성공적인 혁명을 위한 사상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1) 혁명의 성공을 위해서는 노동자 계급뿐만 아니라 모든 억압받는 계급의 참여가 필수적이다.
(2) 모든 계급의 동참을 위해서는 자생성을 단호히 거부한다. 훈련된 혁명가들을 통한 상부 주도 혁명이 필요하다.
(3) 상부 주도 혁명은 억압받는 계급의 인식 변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4) 초기 사회주의 혁명은 민주주의를 단호히 거부한다.
(5) 따라서, 경제주의자와 테러주의자들을 단호히 거부한다.
(6) 필요시, 혁명을 위한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다.
위의 여섯 가지 명제는 지금 생각해보면 비민주적이다. 이러한 혁명의 조건은 사회주의가 러시아식 독재주의를 탄생시킬 수밖에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민중의 의견은 무시되고, 상부 지식인들의 생각에 의해 조종되는 사회—이것이 독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당시 상황과 사회주의가 직면한 어려움, 그리고 그들이 바꾸고자 하는 사상을 생각해 본다면, 위와 같은 접근법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첫째, 사회주의가 바꾸고자 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 제도가 아니라 인류 탄생 이래로 굳건히 유지되고 있는 계급사회와 자본주의다. 사람들의 인식은 계급사회와 자본주의에 길들여져 있고, 대안적 사회에 대한 인식은 미천했다. 또한 마르크스가 이야기한 것처럼 경제 체제에 의해 형성된 상부 구조는 이러한 고정관념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믿을 수 없는 사치와 비효율적인 정책으로 인해 그들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든 황제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러시아 대중들의 모습은 대안적 사회 건설이 얼마나 힘든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교육은 사람의 인식을 결정하고 체제는 사람들의 행동을 결정한다. 교육과 체제를 결정하는 힘은 상부구조에 있다. 교육과정을 만들고 법을 통해 사람들의 행동과 관념을 결정하는 상부구조의 힘은 무시할 수 없다.
둘째, 따라서 억압받는 계급은 사용자와의 협상을 통한 노동 환경의 변화가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 그 자체를 반대해야 한다. 개별 노동자의 노동 환경 변화는 그 노동자들이 속해 있는 노동조합이 추구할 역할이지 혁명이 추구할 목표가 아니다. 또한 개별 노동자의 노동 환경 변화는 체제에 대한 변화의 욕구를 떨어뜨리고, 이는 계급의 단결을 훼손한다. 경제 체제의 변화는 부르주아와 대항할 힘이 필요한데, 이는 억압받는 계급의 단결이 선행해야 가능하다. 자생성(스스로 깨닫고 목표를 추구하는 능력)은 이기적 동기를 만드는데, 이는 우리 계급 간의 반목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부르주아가 장악한 상부 구조는 이런 반목을 이용해 혁명을 막는다. 억압받는 계급의 단결을 위해서는 지식인의 역할이 중요하다. 지금 피억압 계급이 처해 있는 상황을 스스로 깨닫게 만들 수도 있지만, 이를 위해서 훈련된 혁명가들의 교육이 중요하다.
셋째, 따라서 초기 사회주의 혁명은 민주주의를 거부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발언의 자유", "노선 선택의 자유", "지도자 선정의 자유" 등을 보장하는데, 이는 공통의 목표에 의심을 가지게 하고 이기적 이득을 위해 노력하게 한다. 따라서 모든 피억압 계급이 계몽되기까지 민주주의는 배격한다. 후에 자본주의 자체의 모순을 깨닫게 된다면 민주주의하에서도 자연스럽게 혁명을 따르게 된다.민주주의와 자유는 비판적 사고를 갖춘 개인에게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 지금까지 관습과 상부 구조에 의해 세뇌된 민중에게 민주주의보다 계몽과 투쟁이 우선시된다. 민주주의는 사람들의 서로 다른 의견을 조율하는 과정이다. 의견을 조율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줘야 하는데 그런 과정에서 노동자들끼리의 반목은 불가피하다. 반목은 노동자들의 협력과 단결에 피해를 주고 이는 혁명에 장애물로 작용한다.
넷째, 폭력은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가? 폭력의 정당성은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다.
(1) 폭력이 정당하지 않은 이유는 폭력의 합목적성에 있다. 폭력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무고한 시민에 피해를 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주의 혁명이 일으키는 폭력의 피해자가 과연 무고한 시민인가? 아니다. 사회주의 혁명의 폭력의 피해자는 정부 혹은 부르주아에게 돌아가는데, 둘 다 가해자다. 정부는 스스로의 역할을 배신하고 상부 구조가 프롤레타리아를 착취하는 것을 방관했다. 법, 종교 혹은 미디어가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부르주아가 착취하는 것을 막아야 할 의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오히려 그들 편에 서서 프롤레타리아를 착취했기에 이들에 대한 폭력은 정당하다. 부르주아는 말할 필요조차 없다. 부르주아 손에서 고통받지 않은 노동자들이 있는가? 아무리 착한 부르주아라고 하더라도 자본주의 체제를 바꿀 수 있는 힘이 있음에도 그 힘을 행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가해자다. 그들의 침묵과 그들의 체제에 대한 동조는 마치 조직폭력배의 규모를 확장하는 조직원이 선한 행동을 한다고 하더라도 조직의 힘을 극대화하는 폭력배와 동등하다. 이런 이유로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다.
(2) 폭력은 폭력이 발생시키는 물리적 피해로 인해 정당성을 잃어버리기도 하는데, 이 또한 논리적이지 않다. 혁명을 위해 폭력의 물리적 피해가 비정당성의 이유가 되기 위해서는 현재 상황이 평화로워야 한다. 과연 그러한가? 현재 상황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삶은 그야말로 고통이자 지옥이다. 이러한 고통의 지옥을 없애는 폭력은 비록 단호하고 가차 없어 보이지만, 그 효과는 고통을 최대한 빨리 끝내는 것이다. 따라서 혁명을 위한 폭력의 물리적 피해는 강렬하지만 짧고, 절대적으로 적다. 따라서 폭력은 정당화된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레닌은 멘셰비키로 대표되는 경제주의자와 그리고 더 과격한 테러주의자를 단호히 거부했다. 경제주의자는 자생성과 노동 환경의 변화를 통한 사회 변화를 주장하는데, 이는 사회주의 혁명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본질적인 문제를 가진 자본주의 체제를 옹호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문제
그렇다면 왜 레닌은 수정 자본주의가 아니라 완벽한 사회주의를 주장했을까? 자본주의가 가지는 본질적인 모순은 무엇인가?
첫째,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계급을 만드는데, 이는 지배 계급의 피지배 계급 착취로 귀결된다. 자본주의 경제 체제는 자본과 생산 수단을 가진 지배 계급이 피지배 계급의 생존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모든 것이 분업화되고 산업에 의해 생산되기 때문에 지배 계급에 고용되고 그로 인해 화폐를 얻어야 한다. 화폐 없이는 삶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뒤틀린 관계는 지배 계급이 항상 유리한 조건으로 피지배 계급과 관계 맺게 하고, 경제 위기 혹은 피지배 계급의 팽창은 지배 계급에게 더 큰 힘을 부여한다. 경제 위기에서는 아무리 조건이 나쁘더라도 노동자는 노동을 해야 하기에 지배 계급의 불합리한 조건을 받아들일 것이다. 또한 피지배 계급의 수가 늘어나면 민주주의하에서 투표를 통해 사회 변화를 가능하게 하지만, 노동자의 수가 증가해 그들끼리 경쟁하는 상황도 발생한다. 노동자는 그들의 삶이 사용자에 달려있기 때문에 사용자가 더 열악한 조건을 제시한다고 하더라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이러한 노동자끼리의 경쟁은 바닥을 향해가고 이는 더 열악한 상황 더 적은 임금으로 이어진다. 이는 필연적으로 더 열악한 상황으로 노동자들을 내몰게 된다.
둘째, 경제 체제에 영향을 받는 상부 구조는 지배 계급을 대변한다. 피지배 계급과 사회는 상부 구조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사법 체제는 사람들의 행동을 강요하고, 강요된 행동은 문화와 관습이 된다. 교육 체제 또한 사람들의 의식을 결정하고 억압적인 사회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자유시장 경제를 옹호하는 교육 체제는 노동자의 고통을 필연적인 것으로 정당화한다. 이는 자본주의가 추구하는 가치와 연관 있다. 자본주의는 경제 체제가 유지되기 위해 끊임없는 생산과 소비를 요구하는데, 이를 위해 시민들이 물질적 가치를 추구하기를 강요한다. 교육, 미디어, 광고 등은 계속해서 물질로 얻을 수 있는 행복을 보여주고 시민들은 이를 따른다. 물질적 가치에 속박당한 시민들이 후에 상부 구조를 형성하고, 이 상부 구조의 참여자 또한 물질적 가치를 획득하기 위해 노동자의 착취에 일조하는 것이다. 교육자, 정치인, 법률가 등 다른 가치를 추구해야 할 사회 지도자들이 자신의 물질적인 행복 추구를 위해 노동자의 착취를 좌시하고 그로 인해 스스로 자본을 축적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하에서는 노동자를 위한 세상과 혁명은 불가능하다.
셋째,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노동은 노동자를 소외한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자본주의에서 노동자는 노동으로부터, 생산물로부터, 자기 자신으로부터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로부터 소외된다. 인간은 누구보다 창의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행동을 하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아를 가진 합리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개개인의 창의성보다는 사회 전체적인 효율성의 극대화를 추구하는데, 이를 위해 분업이라는 생산 과정을 도입했다. 분업에서 노동자는 완성품을 만들고 자신의 창조품에서 보람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부분만 만들기에 어떠한 창조적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 또한 자신이 원하는 활동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의 자아로부터 소외되고, 지배 계급과의 억압적 관계로 인해 사회 관계로부터 소외되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유지되는 한 노동자와 피억압 계급의 소외는 필연적인 것이다.
계급 간의 착취, 사회 변화의 불가능성 그리고 노동 소외는 자본주의의 내부적 모순이자 문제점이고, 이를 타파하기 위해 레닌은 수정 자본주의가 아니라 완전한 사회주의를 추구한 것이다.
레닌식 사회주의의 모순
따라서 레닌은 계급과 사유 재산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라는 마르크스의 분석을 따랐지만, 레닌식 사회주의는 그 자체의 모순으로 인해 멸망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레닌식 사회주의의 모순은 무엇일까?
레닌의 사상은 노동자와 피지배 계급에 대한 모순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레닌이 원하는 세상은 노동자와 피지배 계급을 위한 세상이다. 그들이 행동하고 결정하는 세상이 사회주의 사상이 추구하는 나라다. 하지만 위의 혁명의 조건에서 볼 수 있듯이 레닌은 노동자와 피지배 계급에 대한 의심을 가지고 있다. 자생성을 거부하고 상부 주도 방식만이 혁명의 성공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들의 의견을 듣고 반영할 수 있는 민주주의를 과감히 배격한다. 레닌은 마르크스가 말한 "때가 오면 혁명은 일어난다"를 과감히 거부하고 명령과 강요에 의한 혁명을 추구한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스탈린식의 독재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계몽된 대중에 대한 기준이 없기 때문에 독재자들은 자기의 권력 유지를 위해 강압적인 정책을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모순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것이다. 과연 인간은 선한가? 악한가? 성선설과 성악설에 대한 논의는 끊임없이 진행되어 왔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성선설과 성악설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것이기에 계급이나 출신, 그리고 이념적 배경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면 누구나 선해야 하고, 악하다면 모두가 악해야 한다. 하지만 레닌식 사회주의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두 가지 다른 해석을 한다. 부르주아와 정부는 악하다. 그들은 악하기 때문에 혁명을 통한 체제의 변화가 필수적이다. 만약에 부르주아와 정부가 본질적으로 선하지만 체제라는 요인에 의해 악해졌다면 점진적인 변화가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레닌은 그를 거부한다. 반면에 훈련에 의해 길러진 혁명 전사들은 마치 선한 것처럼 묘사된다. 그들은 과학적 유물론이라는 역사의 쳇바퀴 속에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참여자로 보여진다. 그들은 흔들림 없이 혁명의 목표를 따르기 때문에, 레닌은 이들에게 민주적 견제가 불필요하다고 보았다. 오히려 민주주의와 견제는 혁명의 효율성에 생채기만 낼 것이다. 이는 혁명 전사들의 본성은 선하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부르주아와 정부 그리고 혁명 전사들의 본성이 다른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해답은 내지 않는다. 만약 레닌식 사상과 교육에 의해 인간이 선해지고 흔들림 없이 역사의 그날을 위해 노력할 수 있다면 점진적 변화가 혁명에 우선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반되는 본성에 대한 그의 분석은 후에 돌이킬 수 없는 잔인한 국가를 낳게 된다.
셋째, 혁명이라는 거대한 목적에 매몰된 나머지 혁명 이후의 세계에 대해 아무런 논의를 하지 않는다. 국가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경제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마르크스가 이야기한 것처럼, 인간은 생존을 위해서 경제에 참여해야 하기 때문이다. 몇 천 년 유지된 자본주의를 철폐하고 새로운 경제 체제를 세우기 위해서는 혁명만큼의 노력과 치열한 고민이 필요하다. 하지만 체제를 전복하는 혁명은 인간의 모든 것을 걸더라도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러한 거대한 변혁의 파도를 일으키려는 혁명가에게 다른 생각은 사치다. 따라서 레닌은 한 번도 대안적 경제 체제에 대해 심각한 고민은 하지 않는다. 그 결과 사회주의 러시아의 경제는 경제학자가 아닌 훈련된 혁명 전사들이 차지하게 되었고, 이는 경제적 참사로 이어졌다. 이런 이유로 인해, 칼 포퍼가 그의 저서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논의한 것처럼 점진적 공학이 혁명보다 우월하다. 점진적 공학을 통해 변화시킬 수 있는 부분은 변화시키는 것이 레닌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는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결론
레닌은 세계의 반을 지배한 소비에트 유니온의 창시자이자, 칼 마르크스의 이론을 이해하고 실천한 혁명가다. 그의 이름은 소비에트 유니온의 멸망과 함께 악마화되었지만, 그의 책은 우리 사회에 큰 울림을 준다. "철학자는 세상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시키는 것이다"라는 마르크스의 이 말을 레닌보다 더 잘 실천한 철학자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가 주는 결정적 교훈은 급진적 변화는 대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대안이 없는 급진적 변화는 더 큰 혼란을 야기할 뿐이고, 이는 혁명이 보호하려는 사람들에게 더 큰 고통을 준다. 따라서 혁명의 필요성만큼 중요한 것이 혁명 후의 세상에 대한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