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보부아르·푸코로 읽는 울프의 실존
서론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는 의식의 흐름이라는 독특한 소설 기법으로 쓰인 작품이다. 보통 소설은 인물이 어떤 사건에 휘말리고, 그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구조를 따른다. 그리고 등장인물들이 사건을 해결하면서 소설은 클라이맥스에 이르고 끝을 맺는다. 이는 “세상은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에서 말하듯, 고대 신화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보편적으로 사용된 서사 방식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소설의 전개 과정을 통해 자신과 소설의 주인공을 동일시하고 문제를 해결하면서 즐거움과 통쾌함을 느끼기에 가장 선호되는 스타일이다. 하지만 버지니아 울프나 제임스 조이스 같은 작가들이 사용하는 의식의 흐름 기법은 조금 다르다. 이런 소설들은 등장인물들이 등장하지만, 특정 사건과 관계 맺는 방식으로 소설이 전개되지 않는다. 큰 사건은 발생하지 않지만, 등장인물들의 의식의 흐름, 즉 내면의 목소리를 들려주면서 등장인물을 이해하도록 한다. 의식의 흐름은 시간이나 공간, 혹은 그 결합을 따라 전개되기도 한다. 혹은 시간과 공간 모두에 영향을 받은 과거 특정 시간에 대한 의식이 전개되기도 한다. 물론 의식이 전개되는 부분과 실제 등장인물이 이야기하는 부분을 구별하기가 쉽지 않고, 기승전결이라는 보통의 소설 구조를 따르지 않기 때문에 독자는 쉽게 흥미를 잃는다. 하지만 버지니아 울프에게 의식의 흐름은 극사실주의였다. 인간과 사건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흐르는 의식 속에서 비로소 탄생하고 전개된다고 그녀는 믿었다. 그리고 그녀는 의식의 흐름이라는 새로운 스타일을 통해 “등대로”라는 고전 명작을 탄생시켰다.
줄거리
“등대로”는 3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에서는 램지 가족에 초대된 램지 씨의 손님들과 램지 부인, 그리고 그들의 자식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큰 사건은 일어나지 않지만, 램지 아이들은 등대로 가고자 하는 열망을 드러낸다. 램지 부인 또한 아이들의 소망을 이루어주고 싶어 하지만, 주변 인물, 특히 남자들은 부정적인 말을 쏟아내고 이에 램지 부인과 아들 제임스는 불만을 넘어서 적대감을 드러낸다. 또한 릴리라는 여자 화가도 등장하는데, 1부에서는 큰 역할을 하지 않지만 3부에서 다시 등장하여 큰 존재감을 드러낸다.
등대로의 2부는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시점이 소설의 무대로 등장한다. 몇 년의 시간이 지나고 그 사이 1차 세계대전은 끝이 났다. 2부에서는 램지 부인, 장남 앤드루 램지, 그리고 장녀 프루 램지가 사망한 것으로 나온다. 2부는 램지 가족이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방문하지 않은 별장을 관리하는 관리인들의 심리 묘사가 주를 이룬다. 관리인들은 램지 가족에 대해 회상하면서 삶과 죽음의 허망함에 대해 이야기한다.
3부는 등대로 향하는 램지 가족의 모습을 그린다. 부인, 장남, 장녀가 사망했지만 아버지 램지와 아들 제임스, 딸 캠은 등대로 향한다. 제임스와 캠은 여전히 강압적인 아버지의 모습에 실망하고 등대로 가고 싶어 하는 열망이 식은 듯 보인다. 하지만 램지가 등대로 가는 항해 도중 제임스의 항해술을 칭찬하고, 제임스는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기쁨의 감정을 느낀다. 릴리는 등대로 향하는 램지 가족을 보면서 그림을 완성한다. 릴리는 램지 부인을 회상하면서 존경심을 표현하고, 그녀의 기억은 릴리가 작품을 완성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3부는 램지 가족이 등대에 도착하는 그 순간 릴리가 그림을 완성하는 장면을 묘사하면서 막을 내린다.
의식의 흐름과 사르트르
의식의 흐름은 사르트르가 “존재와 무”에서 묘사한 의식의 지향성과 그 궤를 같이한다.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모든 인간은 의식을 가지고 그 의식은 항상 무엇인가로 지향한다는 지향성을 이야기했다. 인간의 의식과 두뇌는 멈출 수 없기에(멈춘다면 죽음 혹은 수면 중일 것이다) 항상 어떠한 사물이나 생각으로 지향한다. “등대로”에서 버지니아 울프가 보여준 의식의 흐름의 기법 또한 비슷하다. 사람은 대화 도중 딴생각을 하기도 하는데, 이는 그 혹은 그녀의 의식이 지향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의식은 자기에게 들어온 정보를 분석하고 처리하면서 두뇌에 그 의미를 전달한다. 우리의 의식은 정보를 자연의 본질과 단순히 대응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끊임없는 비교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내가 카페에서 A라는 여자를 만나기로 했다면 카페에 들어오는 모든 여자를 A라는 여자의 특색과 비교하면서 A를 찾는 것이다. 비교 대상은 대부분 외적인 대상이 되는데, 그 이유는 나의 의식이 남에게 숨겨진 것처럼, 다른 사람의 의식도 나에게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등대로”에 나온 모든 등장인물의 의식은 위의 설명과 같다. 램지 부인을 평가하는 사람들은 그녀의 외모를 다른 대상과 끊임없이 비교한다. 등대로 갈 수 없다는 부정적 평가를 하는 아버지를 죽이고 싶다고 생각하는 제임스의 의식은 숨겨져 있다. 이러한 의식의 흐름에 대한 묘사가 진정한 인물 묘사라고 버지니아 울프는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의식이 지향성을 가지는 이유는 의식 자체가 무의 특색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의식은 텅 빈 무이기에 사물 혹은 관념에 지향하면서 자기를 정의 내리고 채워나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본질에 대한 정의가 없기 때문에 계속해서 나의 무를 채워가야 하는 나의 의식은 계속해서 실존적 의미를 찾는 것이다. 이는 매우 두렵고 버거운 일이다. 에리히 프롬이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묘사한 것처럼, 스스로 실존을 채우지 못하는 개인은 전통이나 유행에서 실존을 찾는다. 자유를 포기하고 집단에 속함으로써, 개인은 결정의 책임에서 벗어나려 한다. “등대로”에 나오는 램지, 그리고 램지 부인은 자유를 포기한 의식의 전형적인 예시다. 유명한 철학자였던 램지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철학책은 편찬했지만, Z, 즉 진리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휩싸인다. 철학자, 유명인, 그리고 존경받는 학자라는 자리에서 벗어나 아버지로서 실존을 추구할 만하지만, 여전히 사회가 정해놓은 포지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실존적 개인은 자신의 처지를 인식하고, 그 안에서 진정한 존재 의미를 모색해야 한다. 그것이 개인의 역할이자 의무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램지는 철학자 유명인이라는 틀에 자신을 가두고 그 구조 내에서만 실존을 추구한다.
램지 부인 또한 마찬가지다. 램지 부인은 남편만큼 지혜롭고 아름답고 실행력이 있지만, 결혼이라는 제도가 주는 안락함에 자신의 실존을 내던진다.(사랑스러운 아내, 자애로운 어머니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다. 이이는 사르트르가 말한 ‘자기기만’의 전형이다. 주어진 상황에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고뇌하는 선택을 포기하고 편안함에 자기를 내던진 개인은 지금의 선택이 가장 좋은 선택이라고 자기를 기만한다. 이들에게는 “편안한 본질이 실존에 앞선다.” 결혼을 통한 아내의 역할을 받아들이는 것은 램지부인이 끊임없이 표현하는 지식을 추구하려는 개인의 욕구를 포기한 것이다. 왜냐하면 여인으로서 지식을 추구하려는 개인은 사회의 억압에 시달릴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릴리는 다르다. 화가이자 예술가인 릴리는 결혼이라는 제도에 저항하면서 화가로서 창작 활동에 매진한다. 릴리의 의식은 “등대로” 소설 내내 편안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제도에 저항하고 독신으로 남으면서 자신의 의식이 선택한 실존인 화가로서의 고민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실존은 자본주의의 쳇바퀴에서 벗어나, 오직 자신만의 작품을 창조할 수 있는 예술가에게 허락된 특권처럼 보인다.
램지 부인과 보부아르
사르트르와 계약 결혼을 한 보부아르의 여성에 대한 사상이 “등대로”에서 묘사되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둘은 평생 서로를 의지하고 학문적 성과를 비교하는 지성적 파트너였기 때문에 당연한 현상일 수도 있다. 혹은 이들의 성과 의식에 대한 이해가 보편성을 띠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보부아르의 “제2의 성”에 나타난 실존을 잃어버린 여성의 모습은 램지 부인에 적절하게 묘사되어 있다.
램지 부인은 지혜롭고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존경받는다. 심지어 세계적으로 유명한 철학자인 그의 남편조차 램지 부인에게 의지할 정도다. 하지만 왜 램지 부인은 결혼이라는 제도에 자기를 얽매는 선택을 했을까? 보부아르에 따르면, 이는 여성이 가진 신체적 특징, 그리고 이를 이용한 사회 지배층의 의도적 억압 때문이다. 여성은 종의 유지를 위해 임신과 출산을 해야 하는 저주에 걸려 있다. 임신과 출산이 저주인 이유는 이에 따르는 생리와 모든 육체적 변화로 인해 여성은 남성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예전부터 남성은 임신과 출산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여성보다 육체적으로 강인했다. 그리고 생리를 하지 않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사냥이나 전쟁에 동원될 수 있다. 이러한 자연에 대항하고 무엇인가를 창조해 내는 남성의 행동은 자연에 순응하고 예상 가능한 활동을 하는 여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위치에 처하게 되었다. 농사나 자식 돌보기, 그리고 토기 생산 등은 예상 가능한데 비해, 사냥이나 전쟁은 예상 가능하지 않은 모험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적 인식의 차이는 남성들이 힘을 가지게 해 주었고, 남성들은 자기의 위치를 고수하기 위해 여성의 신체적 차이로 인한 사회적 불평등을 공고히 하기 위해 사회적, 제도적 노력을 기울였다. 여성은 남성과 같은 교육을 받지 못했고, 투표권 또한 가지지 못했다. 이러한 사회적 차별에서 여성의 의식은 창조나 도전보다는 관습에 순응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다른 의식에 존경받는 직업이나 사회적 위치를 차지할 수 없는 여성의 의식은 결혼이라는 제도 속으로 숨어들어갔고 그 안에서 실존을 채우고 행복을 느꼈다. 램지 부인 또한 가족에서 행복을 느꼈고, 이는 그녀가 다른 등장인물들에게 끊임없이 결혼을 추천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이 여성의 열등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램지와 램지 부인의 관계를 보면 알 수 있다. 램지 부인은 항상 램지와의 관계에서 승리하고, 램지는 사회에서 느끼지 못하는 편안한 감정을 부인에게서 얻는다. 또한 등장인물 모두 램지 부인을 존경한다. 그리고 “등대로”에서 유일한 창조적 모습을 보이는 릴리의 그림은 램지 부인의 기억 속에서 완성된다.
버지니아 울프 또한 매우 뛰어난 소질을 가지고 있었지만, 많은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자기만의 방』에서 울프는 여성 작가에게 창작을 가능케 하는 조건으로 경제적 독립과 물리적 공간을 강조했다. 버지니아 울프는 릴리에서 자기의 모습을 그렸다고 많은 평론가들이 이야기하지만, 오히려 내 생각에 램지 부인이 버지니아 울프의 모습인 것 같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생각하는 작가로서의 기본적인 물리적 환경을 가지지 못했었다. 사회적 억압은 아니지만 그녀를 죽음으로 내몬 사회적 불안과 스트레스 또한 램지 부인이 직면한 억압과 유사하다. 능력을 갖추었지만 여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기를 얽매는 사회 체제에 갇혀 있는 그녀를 램지 부인에게 그려낸 것은 아닐까?
등대의 의미는?
“등대로”에서 등대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 같다. 하지만 등대에 무엇이 있는지, 그리고 등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소설에서는 보여주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등대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첫째, 영화의 맥거핀 효과와 같이 등대를 사용했다. 맥거핀 효과란, 극에서 특정한 의미를 가지지는 않지만 작품의 주제를 강조하거나 캐릭터의 성장을 보여주는 데 사용되는 그 어떤 것을 말한다. 맥거핀은 알프레드 히치콕에 의해 대중화되었는데, “펄프 픽션”에 등장하는 “내용물이 밝혀지지 않은 서류 가방”이 전형적인 예시다. “펄프 픽션”에서 서류 가방에 중요한 것이 든 마냥 모든 등장인물들이 서류 가방을 쫓지만, 그 안에 어떤 것이 들어 있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하지만 “펄프 픽션”을 보는 시청자들이 가지게 된 서류 가방에 대한 의문은 시청자들의 집중력을 끝까지 유지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시청자들의 눈은 서류 가방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감독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간접적으로 그리고 자연스럽게 시청자들에게 전달된다. 이는 롤랑 바르트가 말하는 “저자의 죽음”과 비슷한 개념이라고 생각된다. 겉으로 드러난 영화의 의미는 감독의 의도에 의해 왜곡된다. 영화감독의 역할은 영화를 만들고 자기의 생각을 전달하는 것이지만, 의미는 고정되지 않아야 한다. 영화를 시청한 시청자들의 상황과 성향, 그리고 그들의 생각에 따라 정해져야 한다. 이런 이유에서 맥거핀이 사용되는 것이다. “등대로”에서 등대 또한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등대에 가야 한다는 램지 부인과 자식들의 집념을 보여주고 그곳에 갈 수 없다는 부정적인 인식을 가진 등장인물을 보여주면서 독자는 등대의 의미를 알고 싶어 한다. 하지만 끝내 밝히지 않는다. 이러한 소설의 전개는 독자의 집중력을 끝까지 유지시킬 뿐만 아니라 버지니아 울프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간접적으로 전달한다. 그리고 해석은 독자의 몫으로 넘기는 것이다.
둘째, “등대로”에서의 등대는 이상향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이상향이란, 모든 개인들이 사회적 체제나 억압으로부터 자유롭고 자신의 실존을 추구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이다. 등대에 가고자 하는 등장인물들은 모두 체제에서 억압되는 위치에 있다. 가부장제에 억압당하는 부인과 그녀의 자식들은 등대에 가고자 한다. 하지만 가부장제에서 억압하는 위치에 있는 남성들은 모두 등대로 갈 수 있는 가능성을 부정한다. “내일은 날씨 때문에 갈 수 없어.”, “등대로 가는 길은 험난해” 등의 부정적 반응은 그들이 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성향을 보여준다. (또한 등대에 살고 있는 등대지기와 아이들을 장애가 있는 개인으로 묘사하면서 이상향을 비이성, 그리고 위험성과 동일시한다.) 이는 미셸 푸코가 말한 체제 유지 방법과 비슷하다. 미셸 푸코는 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세력은 자신들의 위치를 위협할 수 있는 행위를 건강에 위협이 된다고 묘사하면서 대중 스스로 멀리하도록 한다고 주장한다. 동성애를 금지하기 위해 에이즈(AIDS)라는 병을 사용한 것이 그러한 예다. 사람들은 안전의 욕구를 가지고 있다. 아무리 나의 내면이 원하는 선택이라고 해도 그 선택이 안전을 위협한다면 포기할 가능성이 크다. 심지어 안전을 위협하는 행동이 타인에 의해 행해졌고 그것이 전염된다면?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3부에서 램지가 등대로 향하고자 하는 그 모습에서도 등대가 이상향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램지는 사회 기득권층으로 등대로의 여정을 부정하지만, 부인의 죽음으로 자신의 생각을 바꾼다. 하지만 오히려 이번에는 자식들이 등대로 가는 여정에 불만을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기득권층이 기득권을 내려놓는 그 과정에서도 억압적인 방법으로 소외계층을 억압한다. 사회 변화의 필요에 대한 설득이 아니라 억압적인 명령은 피지배계층이 사회 변혁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게 만드는 것이다. 물론 마지막에, 피지배계층에게 키를 넘기고 그들의 자율성을 인정하면서 램지와 제임스의 갈등은 해결된다.
결말
“등대로”는 새로운 기법을 사용한 소설로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이다. 읽다 보면 어느 순간이 의식의 흐름인지, 어느 순간이 직접 대화하는 순간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소설의 묘미라고 생각한다. 위에 롤랑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등대로” 또한 “저자의 죽음”을 원한 소설은 아닐까? 독자는 롤러코스터 같은 긴장감과 박진감을 느끼지는 못하지만, 의식의 흐름을 쫓아가고 놓친 부분을 다시 읽는 과정에서 소설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는 저자의 생각이 아니라 독자가 스스로 결론을 내리고 의미를 찾는 것을 원하는 것 같다. 지속적으로 문장을 찾아가고 그런 과정을 통해 다시 생각하는 과정. 의도적으로 의식의 흐름과 대화를 구별하지 않아서 어떤 면에서 어떤 생각을 해야 하는지를 독자스스로 선택하게 하는 이 기법은 저자보다는 독자에게 해석을 맡기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등대로”가 던지는 한 가지는 분명하다. 여성은 열등하지 않다는 것. 오히려 여성이 세상을 더욱 따뜻하게 그리고 나아가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가 원하는 것은 여성에 대한 특권적 정책은 아닌 것 같다. 그냥 여성이 자기의 자유롭게 선택하고 그를 존중해 주는 그런 사회를 버지니아 울프가 그린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