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반항, 그리고 꽃: 『댈러웨이 부인』과 실존

댈러웨이 부인을 읽고 by 버지니아 울프

by 사회철학에서 묻다

(1) 서론

“댈러웨이 부인”은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이다. “등대로”에서 이미 설명한 적 있듯이, 버지니아 울프는 “의식의 흐름”을 따르는 방법으로 소설을 전개해 나간다. 하지만 “등대로”와 “댈러웨이 부인”은 큰 차이가 있다. “등대로”가 몇 년에 걸친 시간 동안에 일어난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반면, “댈러웨이 부인”은 하루 동안 일어난 일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은 대부분 자전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고, “댈러웨이 부인” 또한 마찬가지다. 버지니아 울프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당시 시대상으로 인해 본인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뛰어난 문학가임에도 불구하고 버지니아 울프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대신에 버지니아 울프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엄청난 수의 책을 읽을 수 있었고, 아버지 친구들과의 교류를 통해 문학적 재능을 쌓은 케이스다. “댈러웨이 부인”의 첫 문장은 “꽃은 내가 사기로 했다”인데, 이는 버지니아 울프의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가 처해 있는 상황을 타파할 수 없다는 것은 인정하면서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인간이었고, 이는 댈러웨이 부인이 꽃을 직접 사는 행위에 대비시킬 수 있다고 한다. 댈러웨이 부인은 상류층에 속해 있는 인물로 여러 가지 사회적 제약 앞에 놓여 있다. 특히 그녀는 남편을 위해 파티를 개최해야 하는데, 이는 그녀의 주체적인 삶을 방해한다. 하지만 파티에 쓰일 꽃을 직접 산다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조건을 받아들이겠지만, 그 안에서 최소한의 주체성을 확보하려는 댈러웨이 부인의 몸부림으로 볼 수 있다. 이렇듯, “댈러웨이 부인”은 의식의 흐름이라는 기법과 여성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의 참혹함과 전쟁의 피해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회 등에 대한 사회적 문제도 묘사한다. 이는 추후에 더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댈러웨이 부인”은 현대 문학의 정수라고 평가받는다. 하지만 읽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문학이라는 평가도 동시에 받는다. 그렇다면 어떤 면이 “댈러웨이 부인”을 현대 문학의 정수로 만들었는지에 대해서 알아보자.


(2) 줄거리

소설 “댈러웨이 부인”은 주인공인 댈러웨이 부인이 파티를 준비하는 하루 동안 일어난 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단 하루에 일어난 이야기이기에 매우 짧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280페이지가량의 길이인 소설은 여러 사람의 자세한 심리 묘사로 이야기를 끌어간다.


“댈러웨이 부인”은 두 가지 큰 줄기의 이야기가 따로 벌어지다 파티에서 만나는 형식으로 진행되는데, 첫 번째 이야기는 댈러웨이 부인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댈러웨이 부인은 상류층의 일원으로 상류층을 위한 파티를 준비하러 꽃집으로 향한다. 꽃집에서 손수 꽃을 고른 댈러웨이 부인은 집으로 돌아오는데 두 가지 소식을 접한다. 첫째는 예전에 결혼 직전까지 갔던 피터 월시가 영국에 돌아왔다는 것, 그리고 레이디 브루턴이라는 상류층 인사가 댈러웨이 부인은 파티에 초대하지 않고 남편만 파티에 초대했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사건은 댈러웨이 부인에게 큰 감정적 동요를 일으킨다. 영국에 돌아온 피터 월시와 댈러웨이 부인은 만남을 가졌고, 댈러웨이 부인은 감정적으로 큰 교류를 하지만 자기의 사생활은 인정해 주지 않는 피터 월시보다 댈러웨이를 선택한 것이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댈러웨이 부인은 저녁에 있을 파티에 피터 월시를 초대한다.


워렌 스미스는 1차 세계대전 참전 용사다. 전쟁 중, 친한 동료를 잃고 전쟁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그는 레지아 스미스라는 부인을 두고 있는데, 그녀는 워렌 스미스를 치료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레지아 스미스는 호전되지 않는 남편의 상황에 괴로워한다. 레지아 스미스는 원래 남편을 진료하던 의사를 통해 유능한 정신과 박사인 브래드쇼 박사를 만나게 된다. 브래드쇼 박사는 능력 있는 정신과 박사이지만 매우 권위적인 인물로, 트라우마에 대한 치료는 통제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브래드쇼 박사는 워렌 스미스에 대한 치료법으로 지방에 있는 정신병원에 감금할 것을 제안하고 스미스 부부는 받아들인다. 워렌 스미스는 아내와의 결별 그리고 구속 병동에 대한 큰 두려움을 느끼고, 의사 방문에 깜짝 놀라 창문으로 뛰어내린다.


두 가지의 큰 줄기는 다시 댈러웨이 부인이 주최한 파티로 이어진다. 댈러웨이 부인의 파티에는 상류층 여러 인물들이 방문한다. 그녀의 파티에 방문한 피터 월시는 예전 친구인 샐리 세튼을 만나는데, 진취적이었던 예전의 모습과 달리 상류층의 삶에 스며든 그녀의 모습을 보게 된다. 댈러웨이 부인은 의사인 브래드쇼 박사로부터 워렌 스미스의 자살 소식을 듣게 된다. 처음에는 자신의 파티에서 자살 소식을 듣는 데서 불쾌감을 느낀다. 하지만 자유롭지 못한 자신의 삶과 대조해 보면서 삶이라는 무게를 던져버릴 수 있는 워렌 스미스의 선택에 대해 고찰한다. 댈러웨이 부인은 워렌 스미스의 죽음을 통해 삶의 유한성을 자각하고 지금의 삶을 중요하게 여길 수 있는 계기를 얻게 된다. 그전에는 사회에서 방황하던 댈러웨이 부인은 자기만의 삶에 대한 가치를 정립하고 파티로 돌아가면서 소설은 마무리되게 된다. 뒤에 하이데거와 알베르 카뮈의 부분에서 언급하겠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유한한 삶을 사는 인간의 특징을 깨달은 댈러웨이 부인은 순응보다는 체제에 대한 반항을 통해 의미 있는 삶을 만들어가고자 한다.


(3) “의식의 흐름” 기법

“댈러웨이 부인”은 위에 언급한 것처럼 “의식의 흐름”이라는 새로운 기법을 사용한 모더니즘 문학이다. 기존의 문학은 기승전결 혹은 사건의 발생 등을 통해 소설을 이끌어 나가지만, 버지니아 울프는 잔잔한 상황에서 “의식의 흐름”으로 소설을 전개해 나간다. 특정 상황에서 개인의 내면은 어떠한 방향으로 이동하는가? 그리고 행동을 하게 만드는 의식은 어떤가? 등과 같이 의식의 변화에 따라 내부의 기승전결에 의지한다. 독자는 소설에서 등장인물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등장인물에 대해서 더욱 세세하게 파악할 수 있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도 같은 기법을 사용한 소설로 유명하다. 많은 사람들이 “의식의 흐름”이라는 새로운 기법을 찬양하지만, 나는 “댈러웨이 부인”을 읽고는 조금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의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의식이란 개인이 가지고 있는 생각의 흐름이다. 그럼 생각의 흐름이란 무엇인가? 생각의 흐름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개인이 의식하에 주도적으로 만들어내는 생각. 예를 들어, “나는 공부를 하고 싶다” 혹은 “나는 여자친구를 보고 싶다” 등의 의식을 말한다. 이러한 의식은 개인의 성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확실한 인과관계를 가지고 있다. 둘째는 개인이 의식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의식을 말한다. 예를 들어, 뜬금없이 생각나는 “배가 고프다” 혹은 “심심하다” 등 의식보다는 본능에 의해 생겨나는 의식을 말한다. 의식의 흐름은 두 가지 의식을 모두 포함해서 개인의 심리를 묘사한다. 여기서 큰 문제가 발생한다. 인과관계가 뚜렷한 의식의 흐름을 통한 개인의 행동은 이해할 만하다. 왜냐하면 그런 의식과 개인의 행동은 보편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번째 의식은 어떠한가? 이러한 의식은 보편성은 없고 특수성만 가진다. 개인이 가진 본능은 사회적 관념으로부터 자유롭다. 사회적 관념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은 버지니아 울프가 아무리 특출난 관찰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녀의 관찰이 보편적 의식의 흐름을 설명해 주지 못한다는 데 있다. 프로이트가 설명한 것 처럼, 무의식에 영향을 받아 비보편적 의식의 흐름이 있을 수 있다. 혹은 특정 문화권에서의 의식의 흐름은 그 문화의 보편성에 의해 생성되었겠지만, 버지니아 울프는 이해할 수 없을 수 있다. 물론 소설이 인간의 보편적 성향을 설명해 주는 데 목적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니나, 독자들이 소설을 통해 나의 모습을 투영하는 역할을 하는 것은 맞다. 그러하다면 “의식의 흐름”이라는 기법은 독자들이 버지니아 울프 그녀만의 의식에 맞추기를 원하는 것은 아닌가?


예를 들어, 워렌 스미스가 자살할 때, 워렌 스미스의 의식의 흐름에 따라 그의 동기를 묘사한다. 하지만 그의 의식의 흐름은 관찰될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동기가 버지니아 울프 개인의 의식의 흐름인지 보편적 인간의 의식의 흐름인지 알 수 없다. 물론 겉으로 드러나는 상황과 동기를 이용하는 소설의 기법도 소설가 개인의 특수성에 기대어 만들어지기는 한다. 하지만 그런 행동은 누구나 관찰할 수 있는 객관적 행동이 원인이 되기에 독자는 등장인물에게 감정이입을 할지 안 할지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의식의 흐름은 객관적 보편성이 없기에 작가의 유려한 문체에 의해 등장인물의 의식의 흐름이 나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착각될 수 있는 것이다.


이전 “등대로”의 리뷰에서 “의식의 흐름”은 롤랑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과 궤를 같이 한다고 이야기했었다. 하지만, “댈러웨이 부인”을 읽고서는 정반대의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롤랑 바르트는 “저자의 죽음”에서 언어는 언어 체계 내부의 차이에서 생기기에 저자가 목적한 부분을 그대로 전달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독자가 가지고 있는 자기 내부의 언어의 차이를 받아들이고 그 스스로 내용을 인식해야 한다고 했다. 그것이 문학작품의 역할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댈러웨이 부인”은 “저자의 죽음”이 아니라 “저자의 의식에 독자를 포섭”한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무엇이 맞다고 할 수는 없지만, 주체를 찾아 헤매고 그로 인해 자유를 찾을 수 있는 인간의 특성상 “저자의 죽음”이 더욱 현대 사회에 필요한 개념 아닐까?


(4) 댈러웨이 부인의 선택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 자신의 상황 그리고 그 시대의 여성의 삶을 자신의 소설을 통해서 보여준다. “댈러웨이 부인”에서도 마찬가지다. 댈러웨이 부인에서 버지니아 울프는 당시 여성들의 자아를 보여주고 있다. 당시는 그녀처럼 능력이 있어도 사회적 상황에 억압된 여성들이 많았다. 댈러웨이 부인 또한, 사회적 상황에 의해 여러 가지 선택을 했고 그 선택에 가려진 채 살아가는 여성으로 묘사된다.


첫째, 버지니아 울프는 댈러웨이와 피터 월시 사이에서 고민을 하지만, 댈러웨이를 선택한다. 피터 월시는 댈러웨이보다 감정적으로 쉽게 교류하지만, 그녀를 통제하려고 하고 감정적인 선택을 한다. 반면에, 댈러웨이 부인은 댈러웨이와는 감정적 교류가 쉽지 않지만, 그와의 결혼을 통해 상류사회로 갈 수 있게 된다. 또한, 댈러웨이는 피터 월시와는 다르게 댈러웨이 부인의 사생활을 어느 정도 보장해준다. 이러한 관계는 댈러웨이 부인이 본인의 본능을 억누르고 사회적 상황에 따라 댈러웨이를 선택하게 한다. 댈러웨이의 본능은 피터 월시를 선택했다. 왜냐하면 감정적 교류란 인간이 사랑을 추구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타자와의 교류를 통해 자신을 내면적으로 도야시키는데는 나의 감정을 받아들여 다시 나에게 되돌려 줄 수 있는 감정적 상대가 필요하다. 인간은 인정욕구를 가지고 있고 이러한 욕구는 자신을 그대로 인정해주고 감정적으로 포용해줄 때만 가능하다. 이런 의미에서 월시가 더욱 좋은 선택이라고 그녀의 본능은 이야기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 사회적 분위기는 남성이 여성을 억압하는 것이 쉬웠기 때문에 피터 월시는 댈러웨이를 사랑하지만 당시의 분위기대로 사생활을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피터 월시를 통해서는 상류사회로의 길이 쉽지 않다. 따라서 댈러웨이가 선택된 것으로 보인다.


둘째, 댈러웨이는 댈러웨이 부인의 사생활은 인정해주지만 댈러웨이 부인의 능력은 인정하지 않는다. 댈러웨이는 아름다운 댈러웨이 부인을 얻기 위해 그녀가 원하는 사생활은 인정한다. 하지만, 레이디 브루턴과의 대화에서 보여주듯이 그녀의 실존과 능력은 인정하지 않는다. 댈러웨이는 레이디 브루턴의 초대에 흔쾌히 응하고 그녀를 매우 지적인 인물로 본다. 그는 그의 부인은 레이디 브루턴만큼 지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당시 사회에서 남편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여성은 자신의 능력을 꽃피우지 못한다. 댈러웨이 부인은 자신의 독백에서 자신이 레이디 브루턴보다 뛰어나다고 확신하지만 자신의 확신을 실현시킬 발판을 마련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남편을 통해서만 그녀의 확신을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본능을 억누르고 현실적 이유로 댈러웨이를 선택했지만 정도의 차이였을 뿐, 댈러웨이 부인의 자아를 억누르는 사회는 어디 가지 않고 유령처럼 그녀의 근처를 배회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 워렌 스미스와 트라우마 치료 그리고 신분제 사회

워렌 스미스는 전쟁 영웅이다. 당시 유럽은 1차 세계대전이 휩쓸었고, 책의 배경인 영국 또한 1차 세계대전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워렌 스미스는 1차 세계대전에 참가했고 동료의 죽음과 참혹한 전쟁은 그가 트라우마로 고통받게 했다.


전쟁은 정치적인 이유로 시작되지만 항상 국민들이 피해를 본다. 우리 땅이 몇 센티미터가 넓어진다고 국민들이 어떠한 이득을 보겠는가? 정치인들은 다양한 방법을 통해 국민들을 선동하고 전쟁의 피해를 전가한다. 그중에서도 군인이 가장 큰 피해를 입는다. 정상적인 나라라면 피해를 입은 군인을 보살펴줘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부품으로 취급되고 퇴역 군인이 문제를 일으키면 사회에 위협으로 간주된다. 워렌 스미스의 삶 또한 마찬가지다. 그는 전쟁 영웅이지만, 트라우마에 시달리면서 사회의 위협으로 취급된다. 적절한 치료는 주어지지 않고 오히려 치료하는 데 드는 비용을 구하기 위해 고통받아야 했다. 워렌 스미스와 같은 국민이 구해낸 세상에는 신분제 사회가 떡하니 버티고 있고 이는 워렌 스미스의 고혈을 더욱더 뽑아먹는다. 전쟁에 나가지 않았던 상류층은 전쟁의 승리라는 열매를 자기들끼리 나누고 파티를 여는 특권을 얻는다.


워렌 스미스에 대한 트라우마 치료 또한 비슷하다. 정신치료는 프로이트가 정립하기 전까지는 후진적인 수준에 머물렀다. 트라우마의 치료는 정신적인 것이기에 의사 중심이 아니라 환자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프로이트는 환자 스스로 트라우마를 일으킨 기억을 말로 하게 하고 그것을 정상적인 상태로 받아들이는 것이 트라우마의 치료라는 것을 안나 O의 사례로 밝혀냈다. 인간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을 무의식에 숨겨놓았지만, 무의식이 세운 장벽이 헐거워 의식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에게 기억의 심연을 탐구하도록 요구할 때는 환자 중심으로 접근해야 한다. 하지만, 상류층에서 존경받는 의사인 브래드쇼 박사는 권위로 가득 차 있다. 그는 환자 중심이 아니라 의사 중심의 치료를 고집했고 그 결과는 환자의 죽음으로 이어졌다.


브래드쇼가 의사로서 권위를 유지하고 자신의 치료법을 고집할 수 있었던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당시에는 의사 간 정보 교류가 활발하지 않았다. 그리고 프로이트의 치료법이 트라우마에 대한 확실한 치료법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의사 간 정보 교류가 확실치 않기 때문에 정보 자체를 몰랐을 수도 있지만, 정보를 받았다고 해도 의학적 증거가 없기에 쉽게 무시할 수 있었다. 비록 프로이트의 치료법이 세계적으로 각광받기는 했지만, 의학적 증거의 부재는 권위 있는 의사를 설득하는 데 큰 장애물로 작용했을 것이다.


둘째, 브래드쇼는 자신의 치료법에 대한 비판은 자신의 권위에 대한 비판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새로운 치료법은 새로운 권위를 양산하고 이는 자신의 권위에 치명적인 해를 끼친다. 이에 효과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치료법을 무시하고 자신의 치료법을 고집한 것이다. 이는 의사가 자기중심적일 때 쉽게 일어나는 일이다. 또한 한 번 형성된 권위는 자기증축의 힘을 가진다. 브래드쇼는 자신의 학생들과 추종자를 양산했을 것이고, 상류층의 친구들을 통해 자신의 권위를 강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는 위에 이야기한 신분제 사회의 또 다른 문제다.


새로운 의견에 대한 닫힌 사고와 유연하지 못한 그의 권위의식이 의사로서의 본분을 저버리고 워렌 스미스가 죽음을 맞이하도록 벼랑 끝으로 떠민 것으로 보인다.


(6) 댈러웨이 부인의 자아와 죽음

댈러웨이 부인은 “꽃은 내가 사기로 했다”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하지만 워렌 스미스의 죽음을 듣고서 그녀의 자아는 변화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불쾌했지만, 자신의 삶과 대조를 통해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는 방향으로 선회한다.


댈러웨이 부인의 삶에 대한 실존은 하이데거와 알베르 카뮈의 철학과 비슷하다. 하이데거는 세상에 살아있는 모든 존재 중 죽음을 인식할 수 있는 존재는 인간이 유일하다고 말했다. 인간은 죽음을 미리 경험하고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유한성을 깨닫고 그 안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고 한다. 무한한 삶을 산다면, 하루하루는 그 존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오늘 하지 못한 것은 내일, 내일 하지 못한 것은 이틀 후에 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인식 능력은 타인의 죽음을 보면서 죽음을 깨닫고 유한성 또한 깨닫는다. 그리고 유한성 안에서 나의 존재 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댈러웨이 부인은 세상이 정해 놓은 틀 안에서만 자신의 존재를 찾고자 했다. 하지만 댈러웨이 부인은 워렌 스미스의 죽음을 통해 죽음과 유한성을 깨닫고 삶의 소중한 가치를 위해 노력하고자 마음먹는다. 워렌 스미스란 존재는 오늘 이후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죽음은 갑작스럽게 닥치고 그런 죽음은 인간의 존재를 세상으로부터 지워낸다. 댈러웨이 부인 또한 마찬가지다. 특히 아름다운 댈러웨이 부인은 자신의 늙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유한한 삶이 어떠한 특징을 가지는지 깨달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녀는 더욱 적극적으로 세상에 저항하고자 마음먹는다.


알베르 카뮈의 철학은 어떻게 녹여져 있는가? 알베르 카뮈는 부조리의 철학을 주장했다. 그는 시지프 신화에서 반항하는 삶이 인간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말했다. 인간은 세상의 무관심 속에 살아가고 세상은 인간의 이해와는 별개되는 어떠한 계산으로 인간을 대한다. “착한 사람은 상을, 못된 사람은 벌을”이라는 구호는 인간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일 뿐 세상은 이러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대하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은 항상 부조리함을 느낀다. 그는 시지프 신화에서 제우스의 형벌에 내려진 시지프는 세상 앞에 던져진 인간과 같다고 말한다. 시지프는 계속해서 무거운 바위를 굴려 나가야 하는데, 이때 그가 선택해야 하는 삶은 반항하는 삶이다. 제우스의 형벌은 바꿀 수 없기에 증오하는 것은 도움이 안 된다. 자살은 제우스가 원하는 바다. 오히려 시지프는 지금의 삶을 받아들이고 그 삶에서 최고의 가치를 창출해야 한다. 이것이 반항하는 삶이다. 카뮈에게 반항은 수용이 아니다. 수용은 굴복이자 굴종이다. 카뮈에게 반항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자기의 의미를 찾고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다. 세상이 정한 한계는 바꿀 수 없지만, 그안에서 움직이고 몸부림치는 그것이 인간이고 반항이다. 댈러웨이 부인은 아마도 반항하는 삶을 선택했을 것이다. 여성에 대한 억압에 대한 반항, 신분제에 대한 반항 그리고 자기를 인정해 주지 않는 남편에 대한 반항: 이러한 반항이 그녀의 삶을 더욱 의미 있게 만들어줄 것이다. 그리고 같은 시대를 공유하는 다른 여성들도 그렇게 살기를 바라는 것이 “댈러웨이 부인”의 메시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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