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는 왜 실패했는가: 루카치가 말하는 마르크스주의

by 사회철학에서 묻다

(1) 서론

게오르크 루카치는 “마르크스로 돌아가자”라는 표어 아래 자신의 철학을 전개시킨 인물이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세계는 전쟁의 파괴력에 충격에 휩싸였다. 하지만 루카치를 더욱 충격으로 몰아넣은 사건은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의 성공이다. 루카치가 생각했을 때, 유럽 사회는 마르크스가 주장했던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조건이 충분히 무르익었다. 하지만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을 제외한 모든 공산주의 혁명이 실패하는 것을 보고 루카치는 현재 마르크스주의의 문제점을 원인으로 파악했다. 이에 루카치는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 엥겔스의 자연 변증법 그리고 카우츠키의 교조적 변증법에 대해 비판을 했고, 그는 헤겔의 변증법을 다시 해석하고 그 안에서 인간을 다시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마르크스의 “소외” 이론을 발전시켜, “사물화”라는 새로운 개념을 창안했고 이는 후대에 “테오도르 아도르노” 같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그들의 저서 계몽의 변증법에서 도구적 이성이 2차 세계대전의 원인이라고 서술했고, 이는 루카치의 사물화의 영향을 받은 개념이다. 하지만 루카치의 마르크스주의는 여타 마르크스주의가 실패한 것과 같은 전철을 밟고 있다. 루카치는 공산주의 혁명이 저절로 발생하고 유토피아가 도래한다는 기계론적 마르크스주의에는 반대했지만, 강력한 공산당의 필요성과 그에 따르는 자유의 억압에는 동의했다. 이러한 그의 관념은 당의 지도자는 실패하지 않는다는 “성선설”과 같은 개념으로 읽히는데, 이는 소련, 중국 그리고 북한에 의해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줬다. 하지만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은 철학적으로도 그리고 개념적으로도 많은 것을 시사한다. 또한 마르크스가 종말을 맞은 것과 같이 이야기되지만 그의 유령은 아직도 우리 사회에 서성이고 있기에 다시 한번 그의 저서를 이해하는 것은 인류에 큰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2) 수정주의, 교조주의 비판

그렇다면 루카치가 “역사와 계급의식”에서 비판한 수정주의와 교조주의란 무엇인가?


먼저 수정주의란 마르크스의 변증법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한다. 수정주의에 따르면, 마르크스의 변증법은 현실과 맞지 않는 이론으로 폐기되어야 한다고 한다. 수정주의의 입장에서는 급진적 혁명은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기에 현재의 경제체제를 유지하면서 노동자들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방향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동조합을 통한 노동자의 인권 향상 혹은 러시아의 멘셰비키처럼 부르주아와의 협력을 통한 경제와 정치의 안정성 등이 그들의 세상을 변화시키는 방법이다.


반면에, 교조주의란 엥겔스의 자연적 변증법과 궤를 같이한다. 이들은 과학적 마르크스주의에 기반을 두고 공산주의 혁명은 자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과학이라는 주장을 한다. 그들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그 자체에 모순을 가지고 태어났다. 자본주의는 처음에는 많은 기업가들과 부르주아를 잉태하지만 경쟁이 익어가면 익어갈수록 자본은 집중되고 산업은 다양성을 잃어간다. 거대 자본에 의해 소규모 부르주아들은 프롤레타리아가 되고 끝내는 대공황으로 마감된다. 자연에서 물이 온도가 상승할 때 기체로 변하는 것처럼 양적 축적은 질적인 변화로 이어진다. 이처럼 자본주의의 양적 축적은 프롤레타리아 사회라는 질적 변화로 바뀔 것이라는 것이다.


두 가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루카치는 맹렬한 비판을 가한다.

첫째, 수정주의는 마르크스를 이해하지 못했고 부르주아의 세상을 유지하기 때문에 진정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먼저 세상에 대한 이해는 변증법으로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건은 예전에 벌어진 사건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변증법을 통해서 전체 즉, 총체성을 파악하지 못하면 진정한 세상을 이해할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수정주의적 개념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수정주의자들은 지금 노동자의 삶에 도움이 되는 어떤 정치적 점진적 변화를 주장하는데, 이는 부르주아 체제를 공고히 할 뿐 노동자를 위한 세상을 만들지 못한다. 노동자의 삶이 노동조합과 여타 정책을 통해 긍정적으로 변화했다고 하더라도 이는 눈속임일 뿐이다. 그들은 계속해서 소외될 것이고 이는 진정한 해방을 주지 못한다. 오히려 수정주의적 태도는 프롤레타리아의 단합을 저해하기에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둘째, 교조주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에서 인간을 제외시켰다는 비판을 받는다. 마르크스와 루카치에게 세상과 공산주의는 인간이다. 역사는 인간의 피와 땀으로 형성되었지 자연적으로 발생하지 않았다. 그들의 변증법은 끊임없이 변화를 해나가는 세상의 이치인데, 변화를 주도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이고 희생이다.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에, 변증법을 프롤레타리아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노동자와 공산당의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역사에서 인간이 주체적인 역할을 할 수 없다면, 주체와 객체의 교류를 통한 변증법적 변화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교조주의 또한 프롤레타리아와 공산당의 역할을 배제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 세상의 출현을 방해한다.


루카치는 이들을 비판함과 동시에 마르크스와 헤겔의 변증법을 다시 강조한다. 루카치에게 마르크스는 헤겔 그 자체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론에서 변증법을 빼면 마르크스의 이론은 소멸한다. 그렇다면 루카치가 생각한 진정한 마르크스주의란 무엇인가?


첫째, 루카치는 사회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를 중요시한다. 여기서 말하는 총체성이란, 지금의 사회현상을 떼어내어 그 사회현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역사를 기반으로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착취를 당하는 것은 산업혁명이라는 특정 사건을 통해서 생겨난 독립적 사건이 아니다. 이는 고대 자본주의, 노예제도 등의 여러 가지 역사적 사실의 변증법적 변화를 통해 여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따라서 수정주의자들의 말처럼 노동조합을 통한 점진적 변화는 노동자들에 대한 진정한 해방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왜냐하면 독립적 현상에 대한 변화는 총체적인 변화를 이끌어내지 않기에 가까운 시일에 부정적인 상황을 양산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총체적으로 지금의 문제를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프롤레타리아가 가지게 된다면, 모든 프롤레타리아들이 혁명을 위한 의식을 갖출 수 있다고 말한다. 루카치에게 총체성이란, 역사적 맥락 안에서 현재를 이해하고, 사회 구조 전반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갖추는 능력을 의미한다


둘째, 루카치의 변증법은 인간이다. 이 부분에서 헤겔에 대한 비판의식을 가진다. 헤겔은 절대정신이라는 관념이 변증법을 이끌어 나간다고 말했다. 절대정신은 신일 수도 있고, 종교일 수도 있다. 하지만 루카치가 봤을 때 이는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세상의 변화는 인간의 변화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사회체제에 의해 착취를 당한다면, 그에 반항할 것이고 이는 역사 변화의 중추가 된다. 과학적 공산주의는 이러한 인간의 발자취를 자연이라는 거대한 존재로 덮어버린다. 만약 공산주의 유토피아가 노동자들의 참여 없이 발생한다면 무의미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노력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세상은 새로운 부르주아 위협에 쉽게 굴복할 것이다. 인간이란 존재는 항상 어떠한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 의해 세상이 변화한다. 이것이 루카치의 변증법이다. 따라서 공산당은 프롤레타리아가 총체성을 파악하고 옳은 선택을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3) 계급의식과 부르주아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루카치에게 계급의식이란, 무의식적 행동의 발현이다. 특정 계급에 있는 인간은 계급이 요구하는 행동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부르주아는 부르주아라는 계급에 있기 때문에 부르주아가 요구하는 행동을 할 것이고, 프롤레타리아는 프롤레타리아라는 계급에 있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에 요구되는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이는 매우 구조주의적 생각인데, 여타 구조주의가 루카치의 계급의식은 상부구조와 하부구조의 개입이라는 측면에서 약간 다르다. 유물론이란, 물질이 인식을 규명한다는 것인데 “의식이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라는 포이어바흐의 문구로 정리될 수 있다. 하지만 루카치는 전통적 유물론자와는 다르다. 루카치의 유물론은 존재에 의해 규정된 의식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유물론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를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마르크스를 유물론자라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그의 상부구조, 하부구조론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하부구조를 이룬다. 상부구조는 법, 종교, 정치와 같은 사회의 비경제적 영역이다. 이들은 경제적 생산은 하지 않지만 사교육, 종교, 법 등은 사람들의 인식에 큰 영향을 미친다. 마르크스는 하부구조가 상부구조의 행동을 결정한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인간에 대한 판단이나 행복 그리고 성취감 등은 자본의 축적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법, 교육, 정치 등은 축적된 자본으로부터 자본을 받아내기 위해 자본에 이득이 되는 역할을 한다. 법과 정치는 있는 자의 편, 교육은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도구 등의 말은 이를 반영한다. 이러한 그의 상부구조, 하부구조론은 유물론으로 보이지만 실상 그 안을 들여다보면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 위에 설명한 것처럼, 프롤레타리아의 활동은 하부구조의 영향을 받지만 상부구조 하부구조의 교류를 통해 변증법적 변화를 이끌어가는 것은 노동자들이다.


하지만 루카치는 프롤레타리아의 한계를 인식한다. 프롤레타리아의 행동이 역사를 이끌어 가기는 하나, 상부구조의 영향을 받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는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행동하는 계급의식의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무의식을 조종하는 부르주아형 상부구조의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총체성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과 그들의 행동을 이끌어 줄 수 있는 당의 역할이다. 부르주아는 다르다. 부르주아는 자신들이 형성한 상부구조에 따라,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할 수 있는 행동을 하고 그것이 그들의 계급의식이다.


루카치의 “총체성”과 당의 역할은 그람시의 “진지전” 개념과 매우 유사하다. 그람시는 이탈리아 프롤레타리아들이 전쟁이 터지자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을 포기하고 민족의식에 기반을 둔 정부에 협력해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그에게 외부의 전쟁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성공할 수 있는 기반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는 이탈리아 프롤레타리아 행동의 원인이 의식 부족이라고 생각했고 의식의 함양을 위해 당의 역할을 강조했다. 특히 지금 시대는 미디어, 교육 등 상부구조의 역할이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당이 중심에서 프롤레타리아에게 의식 교육을 해야 하고 이는 전쟁을 위한 진지전이라고 주장했다.


(4) 부르주아의 모순과 프롤레타리아의 의무

루카치는 부르주아를 모순적 계급으로 봤지만, 그들을 무조건적으로 비난하지는 않는다. 루카치가 봤을 때, 부르주아의 행동은 그들의 계급의식에 따른 자연스러운 행동일 뿐이다. 하지만 그들은 커다란 모순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부르주아는 초창기 혁명의 정신과 모순적이다. 부르주아는 봉건제 사회의 탄압에 대항해 혁명을 일으켰고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를 만들었다. 그들은 봉건제 사회에서 억눌렸던 개성과 자유 그리고 능력에 따른 성취 등을 주장했고 성취했다. 하지만 그들이 생각했던 유토피아는 다르지만 보다 강력하게 그리고 보이지 않게 프롤레타리아를 억압한다. 프롤레타리아의 개성은 자본주의식 노동에 의해 사라졌다. 자본에 의해 조종되는 개인의 자유는 없을 뿐만 아니라 한번 프롤레타리아에 빠진 개인은 능력이 있어도 발현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는 부르주아 그 자신에게도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부르주아는 개성과 자유를 가지고 있는 것 같지만, 그들 또한 무의미한 노동과 자본축적의 노예일 뿐이다. 또한 자본주의가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자본은 부르주아를 프롤레타리아로 몰아넣을 뿐이고 그들의 유토피아는 파멸한다. 하지만 부르주아는 자본주의를 바꾸는 행동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들의 계급의식이기 때문이다.


둘째, 부르주아는 사회를 변화가 아니라 고정의 산물로 해석한다. 그들이 봉건제를 타파하고 자본주의 세상을 건설했다는 측면에서 매우 모순적이 아닐 수 없다. 그들에게 세상은 자연이고 경제 법칙은 자연의 법칙이다. 가격은 수요와 공급이라는 거스를 수 없는 법칙에 따라 형성된다. 자본주의에서 빈부격차 또한 자연적 법칙이다. 따라서 부르주아가 세상을 지배하고 특권을 챙기는 것은 거부할 수 없고 이에 대한 거부는 자연적 법칙에 대한 거부로 부정적 결말을 가져올 따름이다. 루카치는 이러한 부르주아적 사상의 문제를 칸트식 독일 관념론의 문제에서 찾는다. 칸트에 의하면 우리 즉 주체는 세상을 창조하거나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 놓은 범주에 의해 이해할 따름이다. 이는 주체와 객체가 서로 상호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따로 떨어져 있고, 이에 따라 주체는 객체에 의해 지배당한다. 자본주의는 주체 즉 인간이 인간의 오성에 의해 해석한 세상이기에 우리가 만들어냈지만, 주체가 객체에 의해 지배당하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법칙을 따른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세계관은 아담 스미스, 리카도의 경제법칙에 스며들어 있다. 존 스튜어트 밀이 분배는 인간이 바꿀 수 있는 유일한 경제학적 법칙이라고 주장하기는 했지만, 그 또한 객체의 지배에 동의했다는 측면에서 비판받아 마땅하다. 왜냐하면, 그는 생산과 소비라는 기본적 착취의 틀에서 자본주의의 자연적 법칙을 수용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라는 틀은 고정한 채, 내부에서의 분배에 초점을 두었을 뿐이다.


하지만 프롤레타리아는 다르다. 프롤레타리아는 독일 관념론의 영향을 받아 계급의식을 형성하지 않았다. 계급의식이 그 영향하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주체와 객체의 교류를 통한 변증법으로 극복할 수 있다.


첫째,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의식은 총체성을 파악한다면 자본주의의 파멸성을 인식할 수 있다. 자본주의의 파멸적인 결말과 부자연스러운 사회적 계급에 의한 착취는 프롤레타리아를 행동하게 만든다. 자본주의 하에서 프롤레타리아의 현실은 이상적이지 않다. 오히려 고통스럽다. 또한 그들은 사물화를 통해 소외되고 그 소외는 그들의 의식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둘째, 봉건제도 혹은 신분제 사회에서는 프롤레타리아가 사회를 경제적 측면에서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신분이 인식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르주아가 이루어 놓은 이 자본주의는 사회 전체를 경제적으로 엮어놓았고 이는 사회의 총체적 이해를 가능케 했다. 따라서 자본주의를 파멸로부터 구해야 할 의무가 프롤레타리아에게 부여된 것이다.


(5) 사물화 그리고 소외

루카치는 자본주의 하에서 자본을 제외한 그 무엇도 자유롭지 않다고 했다. 그는 마르크스의 소외와 그의 사물화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마르크스의 소외는 노동자의 소외를 말한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노동자는 생산물, 노동과정, 자신 그리고 타인으로부터 소외된다.


첫째, 노동자는 자신이 만든 생산물로부터 소외된다. 인간은 창조의 본능을 가지고 있고 창조를 통해 자아실현을 한다. 하지만 자본주의에서 노동자들이 창조한 생산물은 노동자의 소유에서부터 멀어진다. 그 생산물은 오로지 부르주아의 이득을 위해서만 이용되기 때문에 소외된다.


둘째, 노동자는 노동과정에서도 소외된다. 노동은 신성한 것으로 노동자가 창의성과 자율성을 발휘하는 기회다. 자신만의 방법으로 자연을 정복하고 그릇을 만들었던 개인이 자본주의에서는 오로지 효율성 향상을 위해 이용된다. 분업은 창의성과 자율성은 배제한 채 기계적으로 생산물을 생산하게 하고 이는 소외를 발생시킨다.


셋째, 노동자는 자신으로부터 소외된다. 노동자는 자신이 생각하는 본질적 특성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의 생계유지를 위해 자유를 박탈당한 채 기계적인 존재가 된다. 따라서 나의 본질로부터 소외되고 객체화된다.


넷째, 노동자는 타인으로부터 소외된다. 노동자는 자신을 생산품 생산의 기계로 취급하는 타인으로부터 소외되고 연대해야 할 다른 노동자로부터 소외된다. 왜냐하면 제한된 기회를 나누고 경쟁해야 하는 노동자들은 서로를 동지가 아니라 경쟁 대상으로만 바라보기 때문이다.


루카치는 이러한 소외 현상이 사물화를 통해 사회 전반에 만연하다고 주장했다.


첫째, 루카치는 자본주의에서는 사물의 교환가치가 사물의 사용가치보다 중요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의 목적은 제품의 사용을 통한 사회의 변화가 아니라 자본축적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이는 사물에 대한 판단이 독창성이나 유용성보다는 그 사물의 자본축적의 기능에 집중하게 된다. 따라서 이는 생산품을 생산하는 노동자에 대한 질적 평가보다는 생산품이 추구하는 자본축적을 통한 양적인 판단에 치중하게 만든다. 이런 과정에서 개개 노동자들은 자본을 위한 기계로 인식되고 이는 개인의 사물화로 이어진다.


둘째, 사물화로 인해 노동자는 생산품의 일부만을 생산하기 때문에 자본주의 전체를 파악하는 총체적 파악 능력이 결여된다. 제품의 생산부터 판매 그리고 평가까지의 모든 것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분업이 부여한 부분적 생산 그리고 자본을 추구하는 기계로서의 역할만 하는 개인은 총체적인 시스템을 파악할 수 없다. 총체성 파악의 필요성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필수조건임을 위해서 말한 바 있다.


셋째, 이러한 자본주의는 서양의 합리적 사고관의 결과다. 합리적 사고관이란 베이컨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아는 것이 힘이다”로 표현될 수 있다. 자연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계산 가능한 것 그리고 효율성으로 세상을 파악하는 이 사고관은 그 자체로 비인간적이다. 이러한 합리적 사고관은 경제뿐만 아니라 법, 사회 그리고 정치에까지 영향을 미쳤고 이는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을 이룬다.


(6) 당, 자유 그리고 비판

루카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인간의 노력을 강조했지만, 프롤레타리아의 한계까지 지적하면서 당의 강압적 개입을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프롤레타리아가 총체적 인식을 가지기 위해 당은 앞장서서 프롤레타리아를 교육하고 이끌어야 한다. 자유는 교조주의 수정주의자에게 악용될 것이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유토피아가 도래하기 전에는 인정될 수 없다.


이러한 루카치의 입장이 공산주의의 오류와 궤를 같이한다는 것이 매우 모순적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공산주의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다. 왜냐하면 소련, 중국 그리고 북한이 공산주의의 대표적 예시이고 그들의 세상은 지옥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대표적 공산주의의 지도자들은 프롤레타리아 유토피아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 유토피아를 위해 인민을 희생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모순적 현상이 발생하는 것일까?


첫째, 루카치의 인식 속에 당의 지도자는 “선하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 혁명 그리고 유토피아라는 목적을 공유한 채 개인의 영달을 위한 이기심은 없다. 하지만 루카치와 레닌은 그런 지도자를 선별할 수 있는 방법은 제시하지 않는다. 누구보다 레닌 아래서 당의 목표를 위해 달려가던 스탈린은 지도자가 되자마자 유토피아가 아니라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인민을 희생시켰다. 어떻게 선한 지도자를 뽑을지에 대한 논의가 되지 않으면 공산주의 이론은 이론에 불과할 것이다.


둘째,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가는 길은 가시밭길이다. 이는 다른 목소리를 허용치 않는다. 총체성과 프롤레타리아의 의무를 어깨에 짊어진 채, 묵묵히 나아가는 것만이 유토피아에 이르는 길이다. 이러한 인식은 당내에서의 비판의 목소리를 차단한다.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반역이요, 부르주아의 첩자다. 아무런 비판이 허용되지 않는 분위기에서 부정부패는 필연적이다.


셋째, 프롤레타리아 혁명에서 폭력은 필수적이다. 루카치는 모든 혁명은 피지배계층이 지배계층의 특권을 박탈하는 과정으로 보고 폭력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또한 자본주의는 그 자체로 폭력적이지만, 이런 폭력이 숨겨져 있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의 폭력은 정당방위라고 주장한다. 지금의 희생은 필연적인 희생이고 유토피아로 가는 길을 위한 발판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폭력은 대중의 정당성을 얻기 어려울 뿐 아니라, 권력이 폭력을 정당화하는 구조를 고착시키며, 혁명 이후에도 억압적 체제로 이어질 위험이 크다. 카뮈는 “반항하는 인간”에서 자살이 개인에게 허용되지 않는다면, 타인을 살해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내가 사는 방법은 내가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폭력은 사회에 거부감을 일으키고 부르주아가 폭력적 상황을 이용해 선동하기 매우 쉽다. 이는 혁명에 필요한 동의와 인원을 모으기 힘들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폭력에 의해 집권한 정부는 폭력에 무뎌지고 이를 정권 유지를 위해 사용할 가능성 또한 매우 크다. 프랑스 대혁명이 그 이후 단두대 혁명이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폭력을 사용한 것이 그 예시다.


루카치가 폭력을 인정하는 순간 그의 이론은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다.


첫째, 유토피아를 위해 희생되는 노동자 혹은 부르주아는 그 자체로 인간을 소외시킨다. 자본주의는 만들어진 행복과 삶을 제공한다. 자본주의는 새로운 기술을 통해 삶의 질을 향상한다. 새로운 즐길거리를 통해 이전에는 인간의 이성이 알지 못했던 행복을 만들어주기도 한다.)하지만, 폭력에 의해 희생된 인간은 그 자체로 파멸된다. 인간이 생명은 다른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둘째, “당의 지도자는 선하다.”라는 말은 그 자체로 종교적이다. 이는 종교가 교리에 대한 비판을 부정하고 타부시 하듯, 공산당에 대한 비판과 부정을 타부시 한다.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고 주장했던 마르크스는 당에 의해 이끌어 나가는 공산당을 종교의 자리로 올려놓는 모순을 범하는 건 아닐까?


또한 자유를 상실한 공산주의는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은 어떠한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한다. 또한 인간에게 행복은 필수적이다. 자본주의는 인간에게 물질적인 행복을 주고 그를 달성하기 위한 목표를 제공한다. 이는 매우 강력한 유인으로 자연적 법칙이라 불린다. 이에 대항하는 공산주의는 물질적 행복이 아니라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의 자아실현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개인이 다양한 가치를 가지게 해야 한다. 다양한 가치를 가지기 위해서는 자유로운 생각과 행동이 필수적이다. 그렇기에 자유와 폭력을 인정하는 루카치의 이론은 모순적이다.


(7) 결론

루카치의 “마르크스로 돌아가자”는 표어는 시의적절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의 마르크스 이론은 실패했다. 하지만 위에 이야기한 것처럼 마르크스의 유령은 항시 우리 옆에 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내에서 차별과 불평등은 없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마르크스의 힘이다. 마르크스는 억압받고 고통받는 프롤레타리아에게 희망을 선사했다. “역사의 주인공은 노동자다. 저 배부른 돼지가 아니다.”라는 그의 생각은 희망 없던 노동자 계급에게 불빛이 되었을 것이다. 그의 사상은 수정자본주의로 불리는 노동자를 위한 자본주의를 창출했다. 그가 없었다면 우리 사회는 산업혁명 직후의 영국과 다를 바 없을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은 고전으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다. 그의 사물화는 아직도 발생하고 있고 그의 계급의식은 지금도 관찰할 수 있다. 지겨운 개념 논쟁으로 사장되었던 마르크스 이론에 대해 다시 이야기해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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