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남의 철학: 이주, 정체성, 그리고 민주주의의 경계

by 사회철학에서 묻다

1. 서론


『이주하는 인류』는 인류 이주의 역사를 다루며, 이주가 인류 역사에 미친 막대한 영향을 설명한다. “이주하는 인류”는 새로운 기회를 따라 떠나는 자발적 이주부터 환경적 혹은 정치적 이유에 따라 떠나는 강제적인 이주 모두를 다룬다. 책에 따르면, 이주의 원인과 무관하게 이주는 인류 문화 형성의 가장 중요한 발자취 중 하나라고 말한다.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불법 이민자 이슈가 큰 부분을 차지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주의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다. 뿐만 아니라 경제 불평등, 지구 온난화, 내전 등 이주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이슈는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기에 이주와 관련된 갈등은 미래에도 계속될 것이다. 루카치의 변증법적 역사관에 따르면, 인류의 역사는 총체성을 통해 이해되어야 한다. 현재 발생하는 사건은 예외적인 현재가 만들어 낸 특별한 사건이 아니다. 이는 과거부터 이어져 온 사건들의 변증법적 교류를 통해 발전한 역사다. 이런 이유로 인해 우리는 인류 이주의 역사에 대해서 알아야 할 의무가 있다. 현재 발생하고 있는 이주 관련 갈등을 정확히 이해할 때만 이주 관련 갈등에 최적의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다. 이것이 “이주하는 인류”라는 책이 중요한 이유다. “이주하는 인류”는 “총, 균, 쇠” 혹은 “사피엔스”와 같이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논리를 파헤치는 역사책은 아니다. 오히려 “이주하는 인류”는 제3자의 입장에서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고 있다. 그리고 적절한 문제 제기를 통해 우리 스스로가 정답에 다다를 수 있도록 사료를 제시한다. 대한민국은 이민자 문제가 비교적 적다. 오랜 기간 대규모 이주가 없었기에 단일민족 정체성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고, 그로 인해 보수적 이민 정책이 지지받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급격히 고령화 시대로 진입하고 있고 이민자에 대한 국경 개방이 해결책의 하나로 제시되고 있기에 이민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2. 줄거리


“이주하는 인류”는 이주의 역사를 다룬다.


먼저 제1장에서는 초기 인류의 이동에 대해 이야기한다. 인류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호모 사피엔스가 약 7만 년 전 아프리카 대륙을 떠나 다른 대륙으로 이주했다. 호모 사피엔스는 기후 변화의 위협으로부터 정든 고향을 떠나 다른 대륙으로 향했고 이 과정에 많은 일들을 겪었다. 특히 호모 사피엔스는 네안데르탈인과 생존 경쟁에서 승리해야만 했다. “사피엔스”에서 유발 하라리는 호모 사피엔스는 네안데르탈인보다 육체적으로 약했지만 협동하는 능력을 통해 대륙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호모 사피엔스는 인지 혁명을 통해 언어의 사용, 그리고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것을 말하고 믿는 능력을 통해 조직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한 명의 전사보다는 5명의 조직된 농부들이 전쟁에 더 유리했고 이는 호모 사피엔스가 대륙을 점령하게 해 줬다. 하지만 “이주하는 인류”의 저자는 호모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을 멸종시킨 것이 아니라, 생식 과정을 통해서 네안데르탈인의 DNA가 후대에 전해진다고 했다. 지금 우리가 다르다고 생각하는 인종들의 조상이 결국은 호모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이고 이는 인종을 기반으로 한 차별의 무용론을 보여준다.


2장은 초기 농경 사회에 대해 다룬다. 우리는 역사 시간에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인류의 기원이라고 교육받는다. 이는 정주 생활이 문명의 시작이라는 관점에서만 옳은 말이다. 메소포타미아 문명 전, 인류는 유목 생활을 했는데, 잘못된 역사관이 사람들이 가지는 정주 생활에 대한 환상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농경 생활은 인간에게 재산이라는 개념을 주었고, 과거 열매를 찾아 이동하던 인류는 농사를 위해 정착하게 되었다. 농경 생활이 인류에 끼친 영향에 대해 여러 가지 의견이 있지만, 유발 하라리는 그것이 인류에 대한 최악의 사기극이라고 말한다. 농경 생활은 더 많은 노동 시간과 불평등을 인류에게 주었다. 물론 농경 생활은 사회적 발전을 동반하기는 했지만, 사회적 발전이 농민 혹은 농지에 얽매인 시민들에게도 이익이었는지는 다시 생각해 볼 만하다. 어찌 되었든 농경 생활은 정주 생활을 사회라는 공동체에 참여하는 데 필수 조건으로 만들었다. 또한 성경에도 인류의 이주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모세는 람세스의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주시켰다. 이는 인류가 종교적 신념에 의해 어떻게 이주를 감행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3장은 페니키아인과 그리스인에 대해서 다룬다. 페니키아는 기원전 1500년부터 300년까지 존재한 강력한 해상 상업국이었다. 그들의 무역 탐험은 자연스럽게 문화와 문자의 전파로 이어졌다. 그들의 문화와 문자는 그리스와 로마 문자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반면 그리스인들은 정주 생활을 이상적으로 여겼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도시 국가에서의 삶을 축복으로 여겼고, 그 밖으로 쫓겨난 망명자를 저주받은 존재로 묘사했다. 심지어 소크라테스는 망명자가 되기보다는 죽음을 선택했다. 그는 사형을 선고받은 후 친구의 도움으로 그리스를 떠날 수 있었지만, 이를 거부하고 기꺼이 사형을 받는다.


4장은 로마인과 반달족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로마는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제국 중 하나로 거대한 영토를 차지했다. 로마 제국은 다양한 민족들과 융합을 통해 더욱 발전했지만, 끝내 반달족과 훈족 등의 다른 민족의 이동으로 쇠퇴했고 끝내 멸망하게 된다.


5장은 아랍인과 바이킹족의 이주에 대해 말한다. 이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세계 각지를 떠돌게 된다. 이들은 자신의 문화를 전파하기도 하고 다른 문화를 파괴하기도 하면서 문명의 성장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6장은 대항해 시대와 글로벌 이주에 대해 다룬다. 중상주의로 당시 세계 각국은 중국 혹은 인도와의 무역로를 찾기에 혈안이 되었고 콜럼버스는 스페인 국왕으로부터 자금을 받고 지금의 아메리카를 찾게 된다. 적은 군사를 가지고도 발달된 총과 동반한 균, 그리고 효과적 정보 교환을 통해 아메리카 대륙을 점령했다. 그 후, 유럽은 신대륙에 살고 있던 인류를 노예무역을 통해 강제로 이주시켰다. 강제 이주는 눈뜨고 보지 못할 정도로 잔혹했다. 하지만 노예무역은 값싼 노동력을 유럽에 제공했고 이는 유럽 대륙의 발전을 한층 더 강화한다.


7장은 미국 식민지에 대해 설명한다. 영국의 청교도들은 자국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왔고, 미국에서 그들의 세상을 만든다. 처음에는 새로운 땅의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끝내 정착에 성공한다. 그들은 모자란 노동력을 채우기 위해 노예무역을 선도했고 이는 아프리카 사람들의 아메리카 대륙 이동으로 이어진다.


8장은 중국인의 이주와 차이나타운에 대해 이야기한다. 중국인들은 전통적으로 정주 생활을 추구했지만, 중국 중앙정부의 영향력이 모자란 중국 남부 민들은 경제적인 이유로 미국, 유럽, 호주 등의 나라로 이주했다. 많은 중국인들을 수용한 그 나라들은 중국인들을 관리하기 위해 그들만 거주하는 지역을 만들었고, 이것이 차이나타운의 기원이다. 하지만 너무 많은 중국 이민자 수에 위협을 느낀 사람들은 중국인들을 억압하고 차별했다.


9장은 시오니스트와 난민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전통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은 억압과 박해를 받았고 그들은 지금의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여긴다. 여러 가지 노력 끝에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그들은 약속의 땅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 땅에는 이미 그곳에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있었고 이는 지금의 정치적 갈등으로 이어졌다.


10장은 자유를 찾아 이주한 사람들의 삶을 이야기한다. 20세기 초, 남부에 살던 흑인들은 자유를 찾아 시카고로 이동한다. 비록 시카고에서의 삶이 빡빡하고 고통스러웠지만, 그 이전의 삶보다는 만족스러웠고 그들만의 문화를 유지할 수 있는 할렘을 만들 수 있었다.


11장은 이주 노동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노동력이 필요할 때, 국가는 그들의 국경을 열고 이주 노동자들을 반기지만, 경제 상황이 바뀌면 이주 노동자들을 짐짝 취급당한다. 미국은 남아메리카에서 온 노동자들에 의해 경제적으로 큰 도움을 받았지만, 세계화로 인해 직업을 잃어버린 미국인들의 비난의 화살은 그들을 향하고 있다. 이에 미국 정부는 최첨단 기술을 이용해 국경을 통제하고 있고 이는 불법 이주민들이 더욱 위험한 방법으로 국경을 넘도록 부추기고 있다.


3. 인류가 이주하는 이유는?


“이주하는 인류”의 저자 샘 밀러는 인류의 20%는 “호기심 유전자”를 가지고 있고 이들은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 이주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주하는 인류”는 “호기심 유전자”가 어떻게 보이는지 그리고 그게 인류의 이동과 어떠한 연관성을 가지는지를 명확히 보여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인류는 왜 이주하는 것일까? 인간이 이주가 인간이 가진 본능이 아니라면, 현실적 이유로 인해 이주를 한다고 설명하는 것이 매우 타당하다. 호기심은 추상적 개념으로 꼭 이주만이 충족시켜 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호기심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다른 욕망을 성취하기 위한 인간의 감정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주하는 인류”는 호모 사피엔스가 기후 변화로 인해 이주했다고 말한다. 기후 변화는 호모 사피엔스가 식량을 구하거나 사냥감을 구하는 데 큰 변화를 촉발했을 것이다. 이전에 열매가 열렸던 나무가 더 이상 열매를 제공하지 못했을 것이고 사냥감들이 기후 변화로 멸종했을 수도 있다. 이러한 생존의 욕망이 호모 사피엔스를 고통스러운 이주로 이끌었고 이들은 네안데르탈인과의 경쟁에서 승리하고 대륙의 지배자가 되었다.


현실적 문제가 발생시킨 문제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욕구는 후에는 매우 다른 양상으로 펼쳐진다. 초기 인류의 이주가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자연환경의 변화 때문이었다면, 근대 노동자들의 도시 이주는 인간이 만든 산업화 시스템이 그 원인이 되었다. 타 국가와의 식민지 경쟁에서 승리하기를 원했던 국가들은 급격한 산업화를 진행했다. 농지는 기계의 탄생으로 노동력의 수요가 전보다 덜했고 이 두 가지 현상은 농부들의 도시로의 이주를 강요했다. 거대 자연이 만든 기후 변화가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만든 이러한 변화는 원인은 달랐지만, 생존이라는 현실적 욕망을 만들었다. 비록 자연보다는 약하지만, 거대한 정부 앞에 농민과 노동자들의 의지는 무용지물이었다. 고향을 떠나 도시로 이동했던 그들의 모습에서 이주는 본능이 아니라 필요의 충족이라는 생각이 더욱 강해진다.


따라서, 이주를 단순히 본능으로만 설명하는 관점은 지나치게 낙관적이고 단순하다. 오히려 이주란, 쉽게 대항할 수 없는 큰 힘에 순응하는 인간의 순응적 본능의 일환으로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이주가 본능이라면, 이주민을 오히려 불구덩이로 몰아넣는 근현대사의 이주는 인류에 의해 거부되는 것이 마땅하다. 왜냐하면 본능이란 변화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인이 더 나은 삶에 의해 변화되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리처드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자연선택에 의해 사회에 적응한 본능은 남고 적응하지 못한 본능은 사라진다. 따라서, 이주의 본능보다는 나의 삶에 더 도움이 되는 본능이 남았을 것이고 그것이 정주 생활 혹은 순응이라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이주를 본능의 입장에서 바라보고자 하는 저자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이주 노동자의 억압을 본능을 거스르는 행위로 비난하고자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 또한 타당성이 없다.


4. 민주주의, 국경 그리고 불법 이주민


미국을 비롯한 경제 선진국은 불법 이주민 문제로 시끄럽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더 나은 삶을 위해 선진국으로 이동을 강행하고 있다. 물론 이들은 그들이 목표하는 국가의 허가를 받지 못한 불법 이주민으로 경제 선진국에 정주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현대 국가는 강력한 정부를 바탕으로 자국민의 보호라는 그들의 의무를 다하려고 노력한다. 현대 국가는 민주주의에서 투표라는 과정을 통해 국민으로부터 힘을 넘겨받았고 이 힘은 자국민의 보호를 우선시 여긴다. 따라서 현대 국가는 국경이라는 만들어진 선 안에서 그들의 힘을 사용할 권한을 부여받았다. 그리고 국경 안의 국민 보호를 위해 국경을 통제하고 위협이 될 만한 이주민들의 이주를 막는다. 테러리스트, 범죄자들은 국민의 안전에 위협이 될 수 있기에 입국을 통제하고 이는 거의 논란의 여지가 없다. 경제 이주민은 자국민의 직업을 빼앗고 국가의 사회보장제도를 낭비할 수 있다는 이유로 통제된다. 물론 경제 이주민에 대한 이러한 분석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투표할 권한을 가진 국민들이 이러한 논리에 의해 판단한다면 국가는 따라야 할 의무가 있다. 따라서 민주주의에서 행해지는 국경 통제는 매우 타당하다. 물론 시리아 내전 후에 유럽으로 향하던 이주민들의 죽음과 미국으로 향하기 위해 온갖 고난을 견디고 있는 남아메리카 국가의 국민들의 모습은 감정적인 동요를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감정적 동요는 국가의 정책을 결정하는 데 한 요소가 될 뿐 절대적인 요소는 될 수 없다.


하지만 조금 더 들여다보면 불법 이주민에게 행해지는 국가적 탄압의 모순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불법 이주민이란 정부가 세운 경제적 이주민의 기준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들이 강제적으로 입국하려고 할 때 붙여진다. 국가가 정한 기준은 과연 경제적 기준인가? 아니면 정치적 기준인가? 경제적 기준이라면, 정부의 핑계는 타당하다. 하지만 정치인들이 자기가 힘을 가지기 위해 자의적으로 세운 정치적 기준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미국의 유명한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에 따르면, 불법 이주민의 기준은 정치적 기준에 가까워 보인다. 그는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되고 불법 이주민들이 추방되기 시작하면 미국은 경제적 위기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불법 이주민들은 농업 그리고 공업 분야에서 값싼 노동력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소비세 등을 납부하면서 미국 재정에도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미국이 다른 경제적 선진국에 비해 생산량이 압도적으로 높은 이유는 미국이 가진 기술적 우월성에 있는데, 이는 경제 이주민을 빼고는 설명할 수 없다고 한다. 미국은 미국 시민의 요구에 의해 저소득 노동자뿐만 아니라 고학력 노동자의 숫자 또한 제한하고 있다. 미국은 원래 이주민의 나라로 불렸고 이주민들은 각자 나라에서 획득한 독특한 문화적 관점을 미국에 제공한다. 이러한 다양성은 문제 해결에 다양한 관점을 제공하고 이는 기술 발전으로 이어진다. 폴 크루그먼은 미국의 고학력자에 대한 쿼터가 필요가 적기 때문에 기술 발전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말한다. 지금 미국의 경제가 불법 이민자로 인해 이득을 보고 있고 기술 발전을 이끌던 고학력 경제 이주민들의 줄어든 숫자로 피해를 본다면 지금의 이민자 숫자는 정치적 이유로 인한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둘째, 경제 이주민에 대한 규제는 지금의 세계 경제 체제를 이루고 있는 자유무역과 대립된다. 자유무역은 물자의 자유로운 이동뿐만 아니라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주장한다. 자본은 경제 선진국에서 경제 후진국으로 이동하기도 하고, 경제 후진국에서 이동하기도 한다. 하지만 자본의 양이나 질에서 선진국이 자본의 이동으로 이득을 본다. 투자가 필요한 후진국에 경제 기반 시설을 투자하기도 하고 새로운 공장을 세우기도 한다. 그리고 거기서 발생한 경제적 이득은 다시 선진국으로 돌아간다. 자유무역은 비교우위라는 개념에 따라 모든 국가가 손해 보지 않는다는 기본 개념을 가진다. 선진국이 자유로운 자본의 이동으로 이득을 본다면, 후진국은 자유로운 노동의 이동을 통해 자유무역의 무게의 추에 균형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경제 후진국이 값싼 노동력을 수출할 수 있다면, 국내 송금을 통해 자본의 축적으로 경제 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 실례로 필리핀의 경제 발전에서 해외 노동자의 국내 송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해외 노동자들은 타국에서 벌어들인 돈을 자국으로 송금하고 이는 경제 후진국에 유효 수요를 충족시킨다. 그렇게 성장하는 경제는 국가에게 새로운 세금원이 되고 이는 자국의 행동을 제약할 수 있고 높은 이자로 부담스러울 수 있는 차관의 필요성을 희석시킨다. 따라서, 만약 선진국의 국민들이 자유무역이라는 시스템의 승자라면 시스템이 주는 불이익도 감수할 도덕적 법적 의무가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국민은 자기 소신대로 투표할 권리가 있지만, 이민자 문제에 대해서는 더 신중하게 투표할 의무가 있다. 투표 결과가 자국민뿐 아니라 수많은 이민자들에게도 중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5. 새뮤얼 헌팅턴의 “미국 우리는 누구인가”와 민주당의 압도적 패배


모든 언론이 이번 미국 대선이 백중세일 것이라고 전망했으나, 뚜껑을 까보니 그 어느 때보다 압도적인 표 차이로 해리스는 패배했다. 이번 선거 결과는 흡사 8년 전 힐러리 클린턴의 패배와 유사하다. 당시 언론은 힐러리 클린턴이 압도적 표 차이로 승리할 것이라고 내다봤지만, 결과는 모두가 다 알듯이 트럼프 대통령의 승리였다. 그때와 지금 모두 미국 민주당은 같은 실수를 했다고 뉴욕타임스 David Brooks는 그의 사설 “Voters to Elites: Do you see me now?”에서 이야기했다. 그에 따르면, 경제적 이익을 강조한 미국 민주당 인사들의 이민자 정책은 설득력이 없다는 것이다. 유권자는 경제적 이득만으로 투표하지 않는다. 유권자는 자신의 정체성에 따라 투표하는 정체성 정치에 더욱 쉽게 설득된다. 민주당은 정체성 정치에서 실패했다는 것이다. 새뮤얼 헌팅턴은 그의 책에서 미국의 정체성은 프로테스탄트 신념, 영어, 그리고 민주주의 개인주의로 설명되는 시민적 가치에 있다고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프로테스탄트 신념은 노동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긴다. 프로테스탄트 신념에서 하늘의 구원을 받을 사람은 비록 미리 정해져 있다. 이를 알 수 있는 인간도 없고 이를 바꿀 수도 없다. 그런 상황에서 인간은 불안함과 초조함에 삶을 영위하지 못한다. 내가 알 수 없다면, 구원받았듯이 행동하면 된다. 이를 스스로 증명하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기 위해 성공해야 하고 열심히 일해야 한다. 왜냐하면 신은 열심히 일하지 않고 나태한 인간들 그리고 성공하지 않은 인간을 구원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막스 베버는 그의 책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그 정신”에서 이런 프로테스탄트적 종교 신념이 근대 자본주의 발달에 막대한 기여를 했다고 설명했다. 그 이전에는 자본의 축적이나 장기적 투자는 부정적으로 보였으나 이러한 종교적 신념은 자본의 축적을 부추겼고 그 결과 지금의 자본주의가 탄생했다. 이러한 신념은 근대 미국 사회까지 이어졌고, 미국의 중산층은 자동차와 같은 제조업에 종사했다. 그들은 그들이 지금의 미국을 탄생시킨 장본인이라고 스스로를 여겼다.


둘째, 영어는 미국인들이 자기의 정체성을 정의 내리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미국인들은 영국 출신의 앵글로색슨의 후예로 영어는 그들의 공통어다. 그들의 미국인이라는 자부심은 영어가 미국의 공용어여야 했고 지금도 그러하다. 영어를 사용하지 않는 이주민들은 이방인일 뿐 그들의 사회에 뿌리내릴 수 없다. 그들은 영어로 만들어진 헌법, 정책 소개서뿐만 아니라 영어 영화, 소설 등 여러 가지 문화적 유산에도 자부심을 느낀다.


셋째, 미국은 독립 선언문을 발표하고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했는데 그때 만들어낸 민주주의는 그들의 정체성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중요한 요소다. 미국인들은 군주제와 독재 그리고 공산주의에서 억압받는 사람들을 구해낸 민주주의를 그들이 만들었고 지금 세상의 주춧돌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민주주의를 꽃피우기 위해서는 미국식 개인주의를 중요하게 여긴다. 민주주의와 개인주의를 위협하는 세력들은 그들에게는 물리쳐야 하는 적일 뿐이다.


민주당은 트럼프를 인종차별주의자로 비판하지만, 미국의 전통적 중산층 다수는 오히려 그의 정책이 잃어버린 미국적 정체성을 회복시키는 방안이라고 인식했다. 이주민들은 미국 중산층에서 직장을 빼앗아 가면서 그들의 시민적 자부심을 파괴했다. 마이애미의 쿠바 정착지에서 보듯이 몇몇 경제 이주민들의 공동체는 영어를 몰아내고 자기들만의 왕국을 건설하려고 하고 있다. 또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으로 정의되는 소수자 우대 정책 등과 같은 정책들은 미국인들이 지지하는 개인주의에 모순된다. 미국인들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개인주의는 모든 사람들에게 같은 출발선을 제공하는 정책은 지지하나, 소수자 우대 정책처럼 동일한 결과를 지향하는 정책은 반대한다. 이민자에게 일할 권리를 박탈당했다고 생각하는 미국의 전통적 중산층들은 소수자 우대 정책에서 한 번 더 소외되고 이는 그들의 분노를 야기한다. 이에 전통적 민주당 지지층이었던 중산층과 몇몇 상위 빈곤층은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했고 이는 이번 선거의 결과로 이어진다.


6. 이민자에게 요구되는 적당한 대가


새뮤얼 헌팅턴은 급격한 이민자들의 영향력 향상의 원인을 정부 정책이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미국으로 들어오는 이민자들은 미국 문화에 동화되고 미국 문화에 다양성을 창조해야지, 미국에서 그들의 국가를 형성해서는 안 된다. 이를 위해서 국가는 특정 수 이상의 이민자들을 특정 지역에 거주하게 해서는 안 된다. 미국 정부는 공교육과 캠페인 그리고 문화적 노력을 통해 계속해서 이민자들의 동화를 추진해야 한다. 또한 민주주의에서 더 많은 숫자는 정치적 영향력을 필연적으로 나타내기 때문에 적절한 분배를 통해서 경제 이주민들이 투표를 통해 자신들을 위한 영향력 행사를 제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왜냐하면 미국 또한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민주주의이기 때문에 많은 이민자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처럼, 미국은 민주주의이기 때문에 이민자들을 추방할 수도 또한 이민자들의 입국을 제어할 수도 있다. 이민자들이 자기의 문화적 그리고 경제적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 경제 선진국이라는 유토피아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인들은 계속해서 이민자에게 공격받는다고 생각하는 국민들의 심리를 자극해 힘을 얻을 것이고 이는 이민자들을 공격하는 무기가 된다. 또한 이민자들이 경제 선진국으로 에서 얻는 권리를 당연시해서도 안 된다. 물론 이들이 획득해야 하는 권리라고 주장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결국 그들은 자국민의 동의와 희생을 통해서만 일할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된다. 따라서 자기의 독특한 문화를 어느 정도 버리고 경제 선진국에 동화되려는 자세가 경제 이주민들에게 요구되는 적당한 대가라고 생각된다.


7. 결론


“이주하는 인류”는 이주민의 역사를 다룬 서적이다. 샘 밀러는 그의 책을 통해 이주민에 대한 차별이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다. 우리 모두는 네안데르탈인과 호모 사피엔스의 자손이고 경제 선진국들은 이미 여러 차례 강제 이주를 통해 이주민들에게 지옥을 선사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주를 막는 것은 역사의 발전을 막는 것이기 때문에, 이주민에 대한 열린 마음을 갖는 것을 요구하는 것 같다. 바람직한 생각이지만, 이는 허상이다. 그 어떤 나라도 자기의 정체성과 경제적 이득에 반하는 이주민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슬프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또한 이러한 현실을 만들어낸 시스템이 민주주의이기에 이주민의 이주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따라서 이주민들은 어느 정도 순응이 필요하다. 이주민들이 정착하려는 나라의 기존 정체성을 해칠 정도로 자신들의 문화를 고집하는 것은 결국 스스로에게 해가 될 수 있다.. 오히려 내어줄 것은 내어주고, 경제적 이득을 취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이주하는 인류”는 다소 아쉽다. 이는 이주민의 일상과 그들의 고통에 치중한 나머지 정말 중요한 사실에 대한 서술이 없다. 어떻게 이주할 것이고 어떻게 이주를 허락받을 것인가? 이것이 더욱 중요한 문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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