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것 너머의 과학: 카를로 로벨리와 존재의 구조

1. 서론

자연에 대한 인간의 호기심은 무궁무진하다. 마치 세상을 처음 접하는 아이처럼, 과학자들은 물리학이라는 학문에 기대어 세상을 파악하려고 한다. 모든 것을 신화 혹은 종교로 설명하려 했던 고대의 세계관에서 벗어난 인간은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을 통해 세상을 설명하면서 자연을 탐구하고 발전해 나갔다. 인류의 가장 위대한 과학자 중 한 명인 뉴턴이 말했듯이, 이러한 노력은 우리가 거인의 어깨에 올라 세상을 바라보고 미래를 포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려준다.


카를로 로벨리의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는 우리가 올라타 있는 거인들에 대한 이야기이자, 그 어깨에서 보이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다. 사람들은 과학의 발전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향해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는 인간이 자신이 가진 지식의 양도 적을 뿐 아니라 관측 장비 혹은 세상의 인식 또한 과학의 발전을 저해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카를로 로벨리가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라는 책을 통해 그려내는 세계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탈자태’로 보고, 이 세 가지가 합쳐져야만 자아를 형성할 수 있다는 하이데거의 시선과 비슷하다.


하이데거는 인간은 지평으로 이를 설명하는데, 과거의 행적이 현재가 미래를 향하게 하기 때문에 세 가지를 떼어 놓을 수 없다고 말한다. 카를로 로벨리는 과거의 과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이론을 발판으로 모순을 찾고, 그를 통해 새로운 이론을 내어놓는 과학자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 모습이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 아인슈타인은 뉴턴을 통해 자신의 이론을 발전시켰고, 뉴턴 또한 갈릴레오 없이는 중력을 찾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놀라운 여정은 우리가 가져야 할 지식에 대한 태도를 알려준다.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듯이, 과거를 잊은 과학에게 미래는 없다. 카를로 로벨리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신비로운 과학의 역사를 같이 탐구해 보자.


2. 원자론의 창시자 데모크리토스

철학의 근원지라고 불리는 밀레토스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독특한 시선이 탄생했다.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로 이어지는 이 철학자들은 아르케를 찾는 데 그들의 일생을 바쳤다. 아르케란 세상을 이루는 물질인데, 이는 최초의 환원론적 사고라고 일컬어진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철학자는 데모크리토스로, 그는 세상이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했다. 세상은 쪼갤 수 없는 가장 작은 단위인 원자의 운동과 조합의 부산물일 뿐이라고 했다. 그는 원자의 배열과 운동은 목적이 없다고 말했다. 자연은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원자들의 배열을 만들어 냈기에, 우리 즉 인간과 세계는 우연한 조합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에 반대하는 철학자가 있었는데 그들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다. 서양의 철학은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고 말할 정도로 플라톤의 영향력은 어마어마했다. 플라톤은 이데아라는 개념을 통해 목적론적으로 세상을 해석했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실이 있다고 주장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주도하에 서양은 목적론적 세계관과 함께 정해진 진리를 찾는 데 몰두했고, 이는 중세의 기독교로 발전했다. 목적론적 세계관에서 자연을 탐구하는 것은 불필요하다. 아니, 오히려 불경하다. 왜냐하면 신이 목적을 가지고 세계를 창조했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세상에서 예외를 찾을 수 없다. 찾는다고 하더라도 예외의 원인에 몰두하기보다 인간의 불완전성을 탓하게 된다. 신은 완전하기에 관찰자의 문제이지 신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반증 가능성”을 과학의 필수 요소라고 이야기한 칼 포퍼와 많은 철학자들이 플라톤을 비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을 거의 다루지 않아 그의 많은 책들이 사장되었다. 하지만, 루크레티우스라는 문학가가 시와 소설을 통해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을 계승했고, 그 책들이 포조 브라치 올리니에 의해 1417년에 발견되었다. 그가 발견한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책은 갈릴레오, 케플러, 베이컨 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심지어 뉴턴과 돌턴, 그리고 다윈 또한 그 책의 새로운 시선에 매료되어 자신만의 과학적 성과를 이루어낼 수 있었다.


3. 천문학의 시작과 뉴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목적론적 세계관을 통해 편협한 세상으로 사람들을 몰아놓은 것은 사실이지만, 천문학에서만큼은 그들의 기여를 무시할 수 없다. 플라톤은 피타고라스의 정리로 알려진 피타고라스 학파의 정신을 계승했다. 피타고라스는 “세상은 수로 이루어져 있다”라고 생각했고, 수학이 세상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다. 플라톤이 세운 학교의 입구에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이곳에 들어올 수 없다”라고 쓰여 있을 정도로 수학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가졌다.


그러한 그의 믿음은 제자들에게 “천체의 움직임을 수학으로 정리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남겼고, 이 물음은 후에 프톨레마이오스라는 천문학자를 탄생시킨다. 그는 “알마게스트”라는 책을 썼는데, 이는 행성들의 운동을 예측할 수 있는 수학적인 천문학의 체계를 제시했다.


“알마게스트”에 코페르니쿠스라는 젊은 학자가 매료되었고, 그는 천문학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당시에 지배적이었던 천동설보다 지구가 태양을 도는 지동설이 “알마게스트”에 기술된 설명에 더욱 잘 맞는다는 것을 발견했고, 그는 지동설을 만든다. 그의 유지를 받든 케플러는 정확한 관측과 간단한 수학적 법칙을 추가하면 태양 주위의 행성들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기술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갈릴레오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시험을 통해 가속도를 발견하게 된다. 그 후, 갈릴레오의 가속도 실험을 통해 뉴턴은 “만유인력의 법칙”과 “가속도 법칙”을 만들게 된다. 만유인력의 법칙은 질량을 가진 물체가 서로 당긴다는 것이고, 가속도의 법칙은 특정 물체에 힘을 주면 가속한다는 것이다. 그는 위의 두 가지 법칙만 있으면 우주 만물의 운동을 설명할 수 있다고 말했고, 실제로 이를 통해 달의 움직임을 정확히 계산한다. 이는 “지구에서 떨어지는 사과와 지구 주위를 도는 달이 똑같은 법칙에 의해서 움직인다”를 설명한다. 장소도 다르고 크기도 다르고 심지어 인간이 만질 수도 없는 그 달의 운동이 사과의 운동과 똑같다는 그의 이론은 세상을 놀라게 만든다. 뉴턴의 시대에, 세상은 공간, 시간, 입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인류는 생각하게 된다.


4. 장과 빛

하지만 뉴턴조차 자기의 법칙이 완벽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두 가지 물체가 아무런 매개체도 없이 서로가 당긴다는 것에 의심을 품었다. 이를 해결한 물리학자는 마이클 패러데이와 제임스 클라크 맥스웰이었다.


패러데이는

“뉴턴이 가정한 것처럼 힘들이 떨어져 있는 물체에 작용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공간에 퍼져 있는 어떤 실체가 존재한다고 생각해야만 한다. 그것은 전자와 자기를 띤 물체에 의해 변형되고, 그다음에 물체들에게 작용한다.”

라고 주장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장’이라는 것이다. 패러데이는 공간에 아주 가는 선들의 다발이 공간을 채우고 있다고 상상했다. 그리고 그 장들이 얽히고설키면서 물체를 끌어당기고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전자기장은 존재하고 있고, 이러한 장의 개념은 미래에 뉴턴의 중력 이론에 적용된다. 패러데이 이론을 맥스웰은 방정식으로 구현해 냈고, 맥스웰 방정식은 실제로 중력을 제외한 모든 것을 정확하게 설명한다. 맥스웰은 전자기장의 역선들의 속도가 빛의 속도와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빛이 파동이라고 주장한다.


5. 특수 상대성 이론

뉴턴이 갈릴레오라는 거인의 어깨에, 패러데이와 맥스웰이 뉴턴이라는 거인의 어깨에 올라탄 것처럼, 역사상 가장 유명한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뉴턴, 패러데이, 그리고 맥스웰의 어깨에 올라타고 세상을 놀라게 한다. 뉴턴의 법칙과 맥스웰의 방정식은 빛의 속도에서 큰 대척점을 형성한다. 뉴턴의 법칙하에서 모든 물체는 가속하지만, 맥스웰 방정식에서 빛의 속도는 일정하다.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아인슈타인은 특수 상대성 이론을 만들어 낸다.


먼저 광속불변의 법칙을 알아보도록 하자. 빛이 가속한다면 세상은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율에 어긋나게 된다. 깜깜한 밤에 어떤 사람이 서 있다고 가정하자. 그의 앞에서 자전거를 탄 사람이 헤드라이트를 쓰고 그 사람에게 달려오고 있다. 그리고 자전거와 조금 떨어져 있는 아래쪽에서 마차가 서 있는 사람 쪽에 불을 비추면서 직각 방향으로 위로 올라오고 있다고 치자. 그리고 얼마 뒤 자전거와 마차가 부딪혀서 사고가 났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만약 빛이 가속한다면 자전거 탄 사람의 헤드라이트 빛이 마차의 빛보다 빠르기 때문에 관찰자는 자전거가 넘어지고 나서 마차와 충돌하는 장면을 보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인과율이 지켜지기 위해서는 빛은 가속운동을 해서는 안 되고 일정한 속도, 즉 광속불변의 법칙에 따라야 한다.




특수 상대성 이론은 두 가지 가정을 한다.

(1) 모든 등속 운동에서 물리 법칙은 같다.

(2) 모든 등속 운동에서 빛의 속도는 같다.


광속불변의 법칙에 따르면, 등속 운동에서 빛의 속도는 같다. 정지해 있는 사람이 보는 빛의 속도나, 운동하는 사람이 보는 빛의 속도는 같아야 한다. 만약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가는 기차에 탄 사람이 레이저 포인터로 빛을 위로 쏘았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모든 등속 운동에서 물리 법칙은 같다’라는 가정에 의해 기차의 움직임과 관계없이 빛은 위로 올라갔다가 아래로 내려온다. 하지만 밖에서 기차를 보는 사람의 눈에는 기차가 앞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빛이 대각선으로 올라갔다가 대각선으로 내려오는 것으로 보인다.


빛은 정말 빠르게 움직이지만, 기차 안에 있는 사람의 눈에는 빛이 위아래 1m를 갔다고 가정하고, 기차 밖에 있는 사람은 빛이 대각선의 움직임을 가져갔기에 2m를 갔다고 가정하자. 그리고 1초 동안 빛을 관찰했다고 가정하자. 속도는 움직인 거리를 시간으로 나눈 것인데, 만약 기차 안에 있는 사람과 기차 밖에 있는 사람이 같은 시간이 흘렀다면 광속불변의 법칙에 어긋나게 된다. 왜냐하면 기차 안에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빛이 1m를 1초에 갔으니 1m/s이겠지만, 기차 밖에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빛이 2m를 1초에 갔으니 2m/s가 되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은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시간을 ‘변형’했다. 즉 매우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기차 안에서 시간은 1초가 흘렀지만, 기차 밖에서 바라본 관찰자의 입장에서는 시간은 2초가 흘렀다는 것이다. 즉 움직이는 물체의 시간은 느리게 간다는 것이다.


특수 상대성 이론이 함의하는 바는 무엇인가? 특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빛보다 빠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세상의 모든 에너지를 사용해서 특정 물체에 에너지를 주입하면 어떻게 될까? 물체의 속도가 빛의 속도에 도달하고 나서 계속 주입되는 에너지는 어디로 갈까? 물체의 속도는 빛의 속도보다 빨라질 수 없기 때문에, 에너지는 무언가로 변환되어야 한다. 특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이 에너지는 질량으로 변환된다. 아인슈타인은 이를 “E=mc²”으로 설명했고, 이는 핵폭탄 개발의 초석이 된다.


6. 일반 상대성 이론

특수 상대성 이론으로 일약 스타가 된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이론이 뉴턴의 중력과 잘 맞아떨어지지 않음을 깨닫는다. 뉴턴과 맥스웰의 어깨에 올라타 세계에 새로운 미래를 제시한 아인슈타인이 이제는 자신과 뉴턴의 어깨에 다시 올라타 새로운 세상에 대한 진실을 밝히려고 한 것이다. 특수 상대성 이론이 등속운동에 관한 것이라면, 일반 상대성 이론은 가속 운동에 관한 이론이다.


아인슈타인은 두 가지 문제를 제시한다.

첫째, 중력장을 어떻게 기술할 수 있을까? 만약 물체 간에 작용하는 힘에 장이 있다면, 물체를 끌어당기는 힘에도 장이 존재해야 한다.

둘째, 뉴턴의 공간이란 무엇인가? 빈 공간은 존재하는가?


아인슈타인은 그의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 뉴턴의 공간과 중력장이 같다는 것을 밝힌다. 빈 공간이란 존재하지 않고, 공간 자체가 장인 것이다. 우리는 빈 공간 같은 단단한 상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부러질 수 있는 흐물흐물한 천 위에 놓여 있다고 상상해 보자. 무거운 물체가 그 위에 위치하면 천이 아래로 구부러지는 것이다. 따라서 무거운 물체가 위치하면 흐물흐물한 천은 아래로 구부러진다. 특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공간과 시간은 같은 것이기 때문에 휘는 것은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도 휘는 것이다.


좀 더 설명해 보자.

우리는 지구가 잡아당기는 중력에 의해 몸무게를 측정할 수 있다. 내가 배 위에서 체중계 위에 서 있고, 내 몸무게가 70kg이라면 이는 중력에 대한 무게다. 반면에 내 배가 무중력 상태에 있다면 중력이 없기에 체중계는 0kg을 가리키지만, 만약 누군가가 내가 타고 있는 물체를 중력과 같은 힘으로 위로 잡아당긴다면 똑같은 체중계에서 70kg으로 기록될 것이다. 하지만 관찰자의 입장에서, 중력이 작용하는 상황과 누군가가 내 물체를 중력과 같은 힘으로 잡아당기는 차이를 알 수 없다.


이를 “중력은 관성력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특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아주 빠른 속도로 가는 물체는 시간과 거리를 변화시킨다. 여기에 가속, 즉 관성력이 생겨도 시간과 거리는 변화할 것이다. 하지만 관성력과 중력이 같은 것이라면, 움직이지 않고 중력, 즉 무거운 물체가 놓여 있기만 해도 시간과 공간은 변화해야 한다.


이는 지구 주위를 도는 달이 중력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보다, 지구가 시공간을 휘게 했기 때문에 달이 지구 주변을 돈다고 설명하며, 이는 뉴턴의 계산보다 훨씬 정확한 계산을 가능케 한다. 뉴턴의 설명은 수성의 궤도 변화를 설명할 수 없기에, 천문학자들은 ‘볼컨’이라는 행성의 존재를 주장했지만 발견되지 않았다. 수성의 궤도 변화는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을 이용하면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다. 이처럼, 과학의 발전은 전 세대가 만들어 놓은 거대한 뿌리 위에 세워지게 된다.


7. 양자역학

카를로 로벨리는 양자역학은 입자성, 비결정성, 관계성이라는 중심 아이디어로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 아인슈타인은 “신은 주사위놀이를 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남겼을 정도로 양자역학에 의심을 표했다.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은 불완전한 학문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뒤에 다시 설명하기로 하자. 하지만, 아이러니하게 아인슈타인에게 노벨상을 준 광전효과가 양자역학의 시작이다.


맥스웰은 그의 방정식을 통해 빛이 전자기파 즉 파장이라는 것을 밝혔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광전효과”를 통해 빛이 입자라는 것을 밝혀낸다. 빛을 쏘면 전자가 튀어나오는 현상이 있는데, 이를 광전효과라 한다. 빛이 만약 파동이라면 빛을 세게 쏘면 전자가 더 많이 튀어나와야 하는데, 빛의 세기와 전자의 탈출은 연관이 없었다. 오히려 빛의 진동수가 커지면 더 많은 전자가 튀어나오는 현상이 생긴다. 다시 말하면, 빛이 파동이 아니라 입자의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각 입자의 크기가 커질 때, 즉 주파수가 커질 때 그 입자에 맞아 전자가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맥스웰과 아인슈타인의 광전효과를 합치면 빛은 입자의 성질과 파동의 성질을 모두 가진다는 것인데, 이것이 양자역학의 핵심이다. 이전에는 파장의 성격을 지녔다고 생각되었던 빛이 입자의 성질을 가진다는 것, 이것을 착안해 루이 드 브로이는 모든 물질도 빛과 같이 파동성과 입자성 둘 모두를 가진다고 말했다.


루이 드 브로이의 주장은 고전 역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었던 닐스 보어의 불연속적인 궤도를 가진 원자 모형이 설명 가능했다.


닐스 보어의 원자 모형은 다음의 3가지를 설명한다.

첫째, 고전역학의 주장과는 달리 원자핵 주위를 도는 마이너스 전자가 에너지를 잃지 않고 계속해서 운동할 수 있다.

둘째, 전자는 원자핵 주위의 불연속적인 궤도를 이동할 수 있는데 이는 원자의 색의 불완전한 스펙트럼이 설명된다. 고전역학에서 원자핵 주위를 도는 마이너스 전자가 계속해서 운동할 수 없는 이유는 전자기파의 방출로 에너지를 잃기 때문인데, 보어가 설명한 양자점프, 즉 마이너스 전자의 궤도 변화 때 에너지가 방출되고 그 이후에는 계속해서 운동을 유지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셋째, 마이너스 전자는 궤도 사이에 존재할 수 없고 정해진 궤도에서만 운동한다. 즉 원자는 무한히 쪼개질 수 없고 쪼개질 수 있는 한계가 존재한다.


닐스 보어의 원자 모형은 많은 것을 설명하는 듯싶지만, 아쉽게도 정확하게 어떻게 이런 현상들이 일어나는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닐스 보어의 제자 하이젠베르크는 행렬역학을 사용해 설명한다. 하이젠베르크의 설명은 우리가 전자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전자가 어디에 위치하는지 확률적으로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불확정성의 원리라고 부른다.


닐스 보어와 하이젠베르크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먼저 거시 세계와 미시 세계는 같은 물리적 법칙을 공유하지 않는다. 미시 세계는 매우 작기 때문에 거시 세계에서 이해할 수 없는 규칙들, 즉 입자와 파동의 성격을 모두 갖는 원자 혹은 위치와 에너지양을 동시에 측정할 수 없고, 확률로만 측정할 수 없는 불확실성 등의 특이성을 갖는다.


둘째, 에너지가 연속적이라는 믿음과는 달리 전자는 특정 궤도로만 원자핵 주위를 돌 수 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궤도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궤도의 앞과 뒤가 일치해야 한다. 그렇기 위해서는 궤도를 도는 전자가 파동의 성격을 가져야 한다. 전자는 미시세계에서의 물리 법칙을 따르기 위해서 파동의 성격을 가져야 하지만, 관측되는 순간 파동의 성격을 잃고 입자의 성격을 띤다. 이는 이중 슬릿 실험으로 더욱 힘을 얻었다.







과학자들은 전자의 형태를 전자라고 가정하고 이중 슬릿 실험을 했다. 만약에 전자가 입자라면 옆의 그림처럼 긴 통로에 전자를 쏘면 뒤에 두 가지 긴 띠가 형성되어야 한다. 하지만, 관측되지 않은 상황, 즉 완전한 진공 상태에서는 뒤에 옆의 그림처럼 간섭무늬가 발생했다. 간섭무늬가 형성되었다는 것은 전자가 파동의 성격을 띠었다는 것이다.


반면에, 전자를 관측한 상황에서 이중 슬릿 실험을 하면 위의 그림처럼 두 개의 띠가 형성되었다. 이 실험이 보여주는 것은 전자는 관측되었을 때는 입자의 성격을 띠고 관측되지 않았을 경우에는 파동의 성격을 띤다는 것이다. 관측이 전자의 성격에 영향을 미치는 이유는 우리가 전자의 위치와 에너지양을 확률로만 알 수 있는 이유와 같다. 전자는 매우 작기 때문에 관측, 즉 빛에 쏘이게 되면 위치가 이동된다. 반면에, 낮은 빛을 쏘면 에너지양은 그대로이겠지만, 위치를 알 수 없다. 파동과 입자도 마찬가지다. 전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관측이라는 행위가 전자의 성질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카를로 로벨리는 이러한 양자역학의 세계를 입자성, 비결정성, 관계성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런 성격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첫째, 입자성이란 세상을 이루는 물질의 최소 단위가 존재한다는 것을 말한다. 데모크리토스가 말했듯이 세상은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에너지가 연속적이 아니라 입자적이라는 것은 에너지 또한 쪼개질 수 있는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전자가 위치할 수 있는 위치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정보도 유한하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 인류가 세계에 대한 정보를 다 알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유한한 목표가 존재함을 말한다.


둘째, 비결정성이란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특정 목표를 가지고 탄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만약에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 그리고 중세 신학의 주장이 옳다면 신은 목적을 가지고 세상을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양자역학이 말해주듯이 모든 것은 확률로만 존재할 뿐 결정적인 어떤 목적을 가지고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다윈의 진화론과 다른 여러 가지 사회과학에도 영향을 미친다. 자연은 특정 목적을 가지고 각 자연 개체를 진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확률 속에서 무한한 수의 개체를 형성하고 그 개체들 중 자연에 선택된, 즉 적응된 개체들이 진화한다는 것이다.


셋째, 관계성은 관측과 연관되어 있다. 우리는 관계성보다는 절대성을 주장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 그리고 절대성은 확실한 인과관계에서 안정을 느끼는 인간에게 매우 매력적인 개념이다. 하지만, 관측에 의해 결정되는 미시세계의 모임으로 이루어진 거시세계 또한 절대성보다는 관계성이 세상을 더욱 잘 설명할 수 있다.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인간은 둘러봄을 통해 주변의 도구적 존재들을 다룬다. 나의 자아와 행동은 주변의 도구와 그리고 나의 궁극목적에 영향을 준 세계에 의해서 결정된다. 따라서, 절대적 의미의 인과관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관계성, 즉 우리 주변의 인간, 제도, 정치, 체제와 관계 속에서 형성된 인과관계만이 존재한다. 과거에는 노예가 주인에게 복종하는 것이 적절한 인과관계였다면, 지금은 모든 인간이 자유를 가지는 것이 적절한 인과관계인 것처럼 관계성을 기반으로 할 때만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8. 패러다임의 변화

과학의 발전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과학의 발전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적절한 태도는 무엇인가? 이 두 가지 질문이 카를로 로벨리가 그의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를 통해서 우리에게 던진 질문이다. 카를로 로벨리는 열린 태도, 즉 확실한 것은 없다, 목적론적이지 않은 관찰을 통한 의심이 과학의 발전이라고 말한다. 이를 위해 그는 우리를 그 먼 옛날 과거 그리스로 우리를 데리고 갔고 그곳에서 펼쳐졌던 우리 조상들의 지식의 향연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탈레스에서 시작된 자연에 대한 관찰 그리고 탈레스 학파가 보여주었듯이 거리낌 없이 자신의 스승의 이론을 의심하고 자신의 이론을 내세울 수 있는 그런 태도가 어떻게 과학의 발전을 가져왔는지를 보여준다.


과학은 반증 가능성, 예측 가능성, 실증적 검증을 가져야 한다.

반증 가능성이란, 모든 과학은 자신의 이론이 정답이 아니라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예측 가능성이란,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과 가속도의 법칙으로 달의 움직임을 예측했듯이 법칙을 통해 자연 현상을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아인슈타인 또한 중력은 빛도 휘게 한다고 예측했고 그의 예측이 들어맞은 것처럼 자연 현상에 대한 예측은 과학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다.

마지막으로 실증적 검증이란, 과학은 사변적 학문이 아니라 실험을 통해 검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과학자들은 검증을 통해 새로 떠오르는 새로운 과학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카를로 로벨리는 위의 3가지에 한 가지를 더한다. 그에 따르면, 과학은 아무 근거 없이 뜬구름 잡을 때 발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 거인의 어깨에 올라탈 용기를 가질 때 발전할 수 있다고 한다. 많은 과학자들이 세상을 설명하는 법칙을 만들었고 그 법칙이 설명하지 못하는 자연법칙이 발생할 때 그 법칙을 해결하는 것이 과학의 발전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뉴턴은 갈릴레오와 케플러를 통해, 맥스웰과 패러데이는 뉴턴의 법칙을 그리고 아인슈타인은 그 모두의 이론의 모순을 찾고 그 모순을 해결하면서 세상을 열어 밝혔다.


토마스 쿤은 그의 저서 “과학 혁명의 구조”에서 이를 패러다임의 전화라고 설명했다. 패러다임이란 과학이 자연세계를 설명하는 틀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자연세계를 완전하게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발견한 과학적 법칙 또한 불완전하다. 따라서, 과학자들은 자연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 전제조건을 설정한다. 패러다임은 그 전제조건 하에서 세상을 설명한다. 예를 들어, 천동설은 지구가 중심이라는 전제조건 하에서 자연세계를 설명하려 했고, 지동설은 태양이 중심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통해 자연세계를 설명하는 것이다. 뉴턴의 과학은 중력이라는 패러다임 그리고 모든 물질을 힘에 의해 가속된다는 패러다임으로 세상을 설명한다. 이처럼, 과거의 패러다임이 존재하고 패러다임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발견되면 패러다임에 위기가 닥치고 새로운 자연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과학법칙이 발견되는 것이다.


양자역학 또한 마찬가지다. 에너지는 흐림이다라는 고전역학의 계산은 산업혁명을 계기로 의심되기 시작했다. 산업혁명은 물질과 에너지의 정밀한 실험을 통해 실용 가능한 과학 발전을 추구했다. 하지만, 새로 얻은 정밀한 연구 결과는 흐림으로는 설명이 안 되고 에너지를 입자로, 즉 숫자로 측정했을 때만 설명이 되었다. 그리고 이는 후에 새로운 패러다임, 즉 양자역학으로 다가온다. 패러다임의 존재는 기득권과 이익 관계를 형성한다. 패러다임 내에서의 전문가, 학자 그리고 그러한 체계로 자신의 학문을 공부한 개개인은 패러다임을 옹호한다. 따라서, 과학의 발전을 위한 열린 마음과 검증 가능성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만이 기득권을 타파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에게 힘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양자역학이 밝혀준 불확실성과 관계성은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태도가 옳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이러한 태도는 과학자뿐만 아니라 대중 또한 가져야 한다. 산업혁명이 양자역학으로 이어졌듯, 과학은 대중의 지지와 투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과학의 발전은 과학 그 자체를 위함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를 위함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지속적으로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열린 태도로 새로운 패러다임의 등장을 고대하고, 논리적이라면 패러다임에 힘을 실어주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도 이런 교훈을 우리에게 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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