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작별하지 않는다는 것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고 by 한강

1. 서론

대한민국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은 자신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강은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상처 입고 외면되어 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써왔다. 그녀는 “소년이 온다”에서 한국 민주화에서 가장 중요한 광주 민주화 운동을 다루었고, 이는 그녀를 유명하게 만드는 작품이 되었다. 『소년이 온다』는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직접 피해를 입은 이들을 소설의 등장인물로 삼았다. 그녀는 세밀하면서도 때로는 잔혹하게 느껴질 정도로 감정에 호소하는 문체로 피해자들의 삶을 묘사했고, 이는 광주 민주화 운동을 다시 사회적 의제로 끌어올리고, 독자들이 그 의미를 곱씹게 만들었다.


하지만 “작별하지 않는다”는 매우 다르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 4.3 사건을 다룸에 있어서, 4.3 사건의 직접적 피해자를 등장시키지 않는다. 작가 자신으로 대변되는 경아와 4.3 사건의 피해자의 딸이자 경아의 친구인 인선이가 극을 이끌어 간다. 이 두 등장인물은 4.3 사건을 직접 경험하지 않았지만, 경아는 “소년이 온다”를 쓰고 난 후유증으로 악몽에 시달리고 있고, 인선이는 어머니와의 대화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4.3 사건을 느낀다.


주인공들이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니기에 『소년이 온다』만큼의 즉각적인 감정적 울림은 덜하다. 하지만 감정적 공감이 역사적 비극을 마주하는 유일하거나 가장 효과적인 접근이 아니듯이, “작별하지 않는다”는 “소년이 온다”와는 다르지만 그만의 독특한 길로 우리를 인도한다. 이러한 접근은 4.3이 5.18과는 다른 특징을 가졌기 때문인데, 이는 뒤에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한강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시작이 된다고 작가 본인이 언급한 “작별하지 않는다”에 대해서 같이 알아보자.


2. 줄거리

1부

“작별하지 않는다”는 경아와 인선이라는 2명의 등장인물이 극을 이끈다. 경아는 한강 본인을 대변하는 등장인물이다. 그녀는 “소년이 온다”를 쓰고 나서 악몽에 시달린다. 벌판에 백여 그루의 나무가 질서 없이 서 있는데, 경아의 눈에는 무덤과 흡사하다고 느껴진다. 그때 바닷물이 밀물 들어오듯 통나무들을 덮친다. 거침없이 들어오는 바닷물을 보면서 경아는 바닷물이 통나무 아래 묻혀 있을 수도 있는 유해들을 휩쓸고 가버릴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좌절과 무력감을 느끼다가 잠에서 깬다.


그 꿈을 통해 경아는 자신의 친구 인선과 함께 희생자의 넋을 기리는 프로젝트를 진행할 결심을 한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그녀들은 백여 그루의 통나무를 심고 위령제를 지내면서 억울하게 희생된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려고 한다.


인선은 나름 촉망받던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그녀는 총 3편의 작품을 만들었다. 첫 번째 작품은 베트남에서 한국군에게 강간당한 여성에 대한 작품, 두 번째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여성에 대한 작품이었다. 이 두 작품 모두에서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의 세 번째 작품은 스스로에 대한 인터뷰 형식으로 4.3 사건을 다루려고 했는데, 이전과 달리 사람들의 반응은 싸늘했고, 그 이후 그녀는 제주도에서 목공일에 전념한다.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경아는 프로젝트를 시작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4년이라는 시간이 흐른다. 여전히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경아는 인선으로부터 병원으로 와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병원으로 간 경아는 목공일을 하다 손가락이 절단되는 사고를 당한 인선을 만난다. 봉합 수술은 성공했지만, 손가락을 살리기 위한 마지막 관문이 남아 있었다.

3분마다 수술 부위를 찔러 피를 내야 죽은 신경을 되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인선은 경아에게 제주도로 갈 것을 부탁한다. 제주도에 앵무새 한 마리가 살고 있는데, 인선에 의하면 ‘오늘 가지 못하면 앵무새가 죽는다’는 것이다. 통나무 프로젝트를 제안하고도 연락 한 통 하지 못한 데 대한 부채감 때문이었을까? 그녀는 인선의 부탁을 듣고 제주도로 향한다.


때는 겨울이라 인선이 사는 중산간 마을로 가는 길은 험난하기만 하다. 심한 눈보라로 인해 집으로 가는 택시는 없고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한다. 집의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해 버스에서 내려 하염없이 걷던 경아는 눈길에 쓰러지고 만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경아의 눈에 불빛이 보이고, 그 불빛을 향해 마침내 인선의 작업실에 다다르게 된다. 인선의 작업실은 사고 당일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도착해 보니 앵무새는 이미 죽어 있었고, 경아는 앵무새를 정성스레 묻고 잠을 청한다.


2부

다음 날 눈을 떠보니 놀랍게도 경아가 묻어주었던 앵무새가 살아 있다. 놀랄 새도 없이 인선의 작업실로 가보니, 서울 병원에 있어야 할 인선이가 작업을 하며 경아를 맞이한다. 인선은 경아에게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야?”라며 놀라움 반, 반가움 반의 인사를 건넨다.


인선은 경아가 연락이 없었음에도 통나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경아에게 프로젝트의 이름을 묻는다. 경아는 인선에게 “작별하지 않는다”라고 대답한다. 인선은 경아에게 차를 한 잔 건네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인선은 자신의 가족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4.3 사건을 말해준다. 경아는 인선에게 가슴 아픈 이야기를 전해 듣고 공감한다. 그리고 인선과 함께 “작별하지 않는다” 프로젝트를 진행할 장소로 가서 그곳을 둘러본다.


3. 인선이의 잘린 손가락

인선이는 세 번째 다큐멘터리를 마치고 목공일을 배우기 위해 제주도로 가서 목공일에 전념한다. 그러다 톱에 손가락이 잘리는 사고를 당한다. 손가락을 봉합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와 봉합 수술에 성공하지만, 3주 동안 3분마다 수술 부위를 바늘로 찔러야만 하는 마지막 관문이 남았다. 그녀는 포기하고 싶었지만 의사는 손가락이 잘린 채로 둔다면 평생 ‘환상통’에 시달릴 수 있다고 경고한다. 환상통이란 신체의 일부가 잘려 나갔음에도 그 부위에 고통을 느끼는 현상을 말한다.


한강은 인선이의 손가락을 통해 우리가 역사의 고통을 마주하는 방법을 말하는 듯하다. 굉장히 짧은 민주주의 역사를 가진 대한민국은 상처를 치유할 시간도 없이 너무나도 많은 역사적 아픔을 가지고 있다. 일제강점기를 끝으로 해방되어 ‘좋은 세상이 오겠지’라고 믿었던 것도 잠시,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사상적 대립이 헐벗은 한반도를 통째로 집어삼켰다.


이데올로기의 대립은 사람들에게 많은 상처를 남겼지만, 우리는 상처를 마주하고 치유하려 하기보다는 ‘과거에 매몰되면 미래로 나아갈 수 없다’고 하면서 상처를 외면했다. 물론 이해할 만한 부분도 있다. 대한민국은 ‘한강의 기적’을 통해 그 어느 나라보다 빠른 속도로 경제성장을 이뤘다. 과거에 대한 대면, 사과 그리고 그에 대한 보상과 반성은 경제성장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적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우리에게는 커다란 진창일 따름이니까.


이로 인해 제주도 4.3 사건과 여순 사건 등으로 인해 희생된 희생자들은 외면되었고, 그 누구도 그들의 넋을 달래주지 못했다. 이는 여전히 우리에게 환상통으로 남아 있다. 이제는 존재하지 않지만 끊임없이 아파해야 하는 운명의 굴레 속에 우리 스스로를 밀어넣었다고 한강은 인선이의 손가락을 통해 말하는 듯하다.


하지만 인선이가 포기하지 않고 3분마다 상처 부위를 찌르는 선택을 했듯, 한강은 자신의 작품이 우리의 환부를 찌르는 바늘과 같은 역할을 하길 바라는 것 같다. 작중 인선이 스스로 찌르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워 간병인이 대신 찔러주듯이, 한강의 작품들은 간병인의 역할을 하면서 우리 사회의 상처 부위를 계속 찌르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이미 늦었을 수도 있지만, 한강은 너무 늦지 않았음을, 그리고 고통의 끝에는 치유와 봉합이 기다리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하는 듯하다.


4. 인선이의 어머니와 인선이

인선이는 처음에는 어머니가 너무 싫었다고 말한다.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는 그녀의 어머니, 악몽에서 벗어나기 위해 베개 아래 실톱을 두는 그녀의 어머니. 무엇에 쫓기는지 항상 두려움에 빠져 있고 넋이 나간 듯 사는 그녀의 어머니는 인선이에게 애처로움보다는 원망이 더 컸을 것이다.


그녀의 어머니에 대한 원망은 가출로 이어졌고, 인선이는 큰 사고를 당한다. 그러자 어머니가 병원으로 찾아온다. 거기서 인선이는 어머니의 과거 이야기를 듣게 된다. 언니와 손을 잡고 학교 운동장에서 살해된 어머니 아버지를 찾았던 그녀, 총에 맞아 큰 부상을 입은 막내를 언니와 둘이 들쳐 업고 당숙네로 뛰어갔던 그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에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어 막내 동생의 입에 피를 넣어 주며 이상한 행복감을 느꼈던 12살의 소녀.


큰오빠를 찾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다가 마침내 만났지만 “머리 스타일이 이상해”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다시 헤어진 그녀. 언니는 큰오빠가 사망했다고 생각했지만, 어머니는 오빠의 흔적을 쫓기 위해 신문과 자료에 매달렸다. 어머니의 과거 이야기를 듣고 인선이는 마침내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해의 순간도 잠시, 많은 이야기를 전한 그녀의 어머니는 치매에 걸리고 다시 인선이에게 고통을 남기고 돌아가신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은 이성적이고 자주적이라는 인간중심주의자들의 믿음과 달리 무의식에 따라 행동한다. 인간이 가진 많은 능력 중 가장 신기하면서도 강력한 능력은, 떠올리면 삶을 살아갈 수 없을 정도의 끔찍한 기억을 무의식 속에 묻어 두는 것이다.


삶을 영위하기엔 너무 고통스러운 그런 기억들은 떨쳐버릴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기억이 곧 인간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지금만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아는 지평을 가지고 있기에 과거의 경험과 기억이 현재를 형성하고, 현재의 행동이 미래를 창조한다. 떨쳐낼 수 없지만, 그렇다고 온전히 기억하기도 어려운 것이 바로 이런 트라우마다.


실종되고 사망한 오빠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이 “머리가 이상해”였다는 기억은 인선이 어머니의 삶을 파괴할 수 있다. 그래서 그녀는 그 기억을 무의식에 묻어버린다. 무의식은 우리가 삶을 계속할 수 있도록 그 기억들을 꽁꽁 싸매어 심연으로 던져 버린다. 그러나 던져진 기억은 숨겨졌을 뿐 사라진 것이 아니기에, 트라우마는 인간의 영혼을 파괴해 버린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인선이의 어머니의 영혼은 파괴되었다. 보통의 일상을 산 우리는, 파괴된 영혼을 가진 다른 인간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그들의 행동과 생각은 ‘보통의 사람’과 다르기에,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인선이의 어머니가 가족인 인선이조차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했듯, 가족이 아닌 이들에게는 더 큰 거부감이 들 수 있다.


역사적 사건의 희생자들을 위한 여러 가지 법률이 우리나라에는 존재하지만, 매번 그 법률에 의구심을 품는 사람들이 있다. “공평하지 않아”, “나약해”, “그 사람들이 진정 피해자라는 것을 어떻게 보장해?” 등의 논리로 피해자들을 벼랑 끝으로 몰아넣는다. 그러나 이들은 이미 희생자의 영혼이 파괴되었고, 피해자의 삶이 관조자의 삶과 같을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피해자들에게 스스로를 증명하라는 것은, 어떻게든 살아가기 위해 무의식에 묻어 두었던 기억을 다시 꺼내고 증언하라는 의미다. 인선이의 어머니가 인선이와 화해하기 위해 꺼내 놓은 “트라우마”가 그녀를 치매라는 비인간적 상태로 몰아간 것처럼, 결국 이는 피해자의 삶을 두 번 파괴하는 셈이 된다.


한강은 “작별하지 않는다”와 “소년이 온다”를 통해 우리 사회의 비겁한 태도를 비난한다. “이야기하고 증명해.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너희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어.”라는 태도 말이다. 이 태도의 끝은 공정이나 정의가 아니라, 과거 가해자의 재림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준다.


5. 인선이의 3작품과 4.3 사건

인선이는 3편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는데, 공교롭게 가장 잘 풀릴 것 같았던 세 번째 작품에서만 혹평을 받는다. 첫 번째 작품은 베트남 전쟁, 두 번째는 만주 독립운동, 마지막은 제주 4.3 사건이라는 데서 힌트가 숨어 있다.


인간은 스스로를 자주적이고 지혜로운 존재라고 자부하지만, 인선이의 작품을 통해 그렇지 않다는 것을 한강은 말한다. 우리가 느끼는 슬픔이나 아픔 또한 사회에 의해 형성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베트남 전쟁의 참상은 오랫동안 숨겨져 왔지만, 대한민국 정부가 어느 정도 대면하여 인정하기로 한 역사적 사건이다.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은 말할 것도 없이 널리 알려져 있고, 우리는 거기에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4.3 사건은 다르다. 노무현 정부에서 4.3 사건을 공식 인정하기 전까지 철저하게 숨겨졌고, 누구도 이야기하기를 꺼려했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4.3 사건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정치적 이득이 없었기 때문이다. 독립운동을 부정할 만큼 대담한 정치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베트남 전쟁은 우리가 저지른 잘못이지만 미국이라는 거대 국가의 강요에 의해 참전했다는 ‘면책 논리’가 가능하다. 하지만 4.3 사건은 그렇지 않다. ‘관광 명소’가 되기 전까지 그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았던 제주도라는 섬에서 발생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또한, 4.3 사건은 북한 남로당에 의해 발생한 사건으로 보기도 했기에, 이를 옹호하거나 다루는 순간 ‘빨갱이’라는 오명을 쓸 수 있었다. 이로 인해 4.3 사건은 우리의 기억에 존재하지 않는 일이 되었다. 게다가 4.3 사건의 희생자는 어떤 방식으로도 충분히 추모되지 못했다.


베트남과 만주는 물론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일이지만, 그보다 더 가깝고 아픈 기억인 제주도의 4.3 사건은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인선이의 4.3 다큐멘터리가 무시되었던 것처럼, 현실에서도 4.3 사건은 제대로 된 추모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는 중요성이나 감정의 결여 때문이라기보다는, 권력자에 의해 의도적으로 선택된 결과다.


6. 눈과 새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눈’과 ‘새’는 각각 억압과 희망으로 대립된다. 먼저 인선이의 앵무새는 경아가 잃어버린 프로젝트에 대한 열망을 다시 심어 주는 역할을 한다. (앵무새의 생존 여부가 단순한 ‘사소한 이벤트’가 아니라, 과거의 아픔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상징적 장치가 된다.) 제주도로 가지 않았다면, 그리고 가는 중에 인선이의 집으로 가는 것을 포기했다면 “작별하지 않는다”는 그대로 묻혔을 것이다. 하지만 인선이의 새를 살려야 한다는 집념 하나로 인선이의 작업장까지 향했고, 이는 프로젝트를 되살리는 계기가 된다.


물론 인선이의 새는 이미 사망했지만, 앵무새의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열망과 새로운 세상에 대한 밑거름이 된다. 반면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눈은 ‘가로막음’과 ‘죽음’을 뜻한다. 인선이의 집으로 가는 길을 험난하게 만드는 것은 눈이다. 한없이 내리는 눈은 그 무엇보다 높이 쌓여 경아의 발걸음을 계속 붙잡는다. 또한 눈은 죽음이다.


인선이 어머니가 시체가 쌓인 운동장에서 경험한 것처럼, 죽은 시체에 닿은 눈은 좀처럼 녹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에는 다른 힌트가 있다. 눈이 우리를 가로막아 진실에 다다르는 길을 험난하게 만들지만, 결국 그 눈을 녹이는 것은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경아가 산 기슭에서 미끄러져 정신을 잃었을 때, 그녀를 인선이의 작업장으로 향하게 한 것은 불빛이었다. 그 불빛은 인선이 사고 당시, 마을 사람들이 일부러 꺼두지 않았던 작업장의 불빛이었다. 시체에 묻은 눈은 녹지 않는다. 반대로 말하면, 살아 있는 인간에게 내려앉은 눈은 녹는다. 거대한 눈보라에서 벗어나는 것은 결국 인간의 연대다.


둘째로, 새와 눈은 모두 속이 비어 있다. 새는 날아야 하기에 뼈가 비어 있고 내장도 가벼우며 단순하다. 그 때문에 날 수 있고, 자신을 지탱해 주던 나뭇가지를 부러뜨리지 않고 앉을 수 있다. 하지만 눈도 속이 비어 있어 무분별하게 모든 것을 흡수하면서 내린다. 그러면서 커지고 무거워져 세상을 고요하고도 무겁게 덮어 버린다. 결국 나뭇가지는 무거워진 눈 때문에 부러진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세계-내-존재’라고 말한다. 이는 비본래적 인간으로,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자유로운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빈말과 호기심에 둘러싸여 세상이 원하는 대로 사는 사람을 뜻한다. 눈은 이 세계-내-존재의 비본래적 인간을 묘사한다. 눈은 내리면서 주변의 모든 것을 무차별하고 무분별하게 흡수한다.


그렇게 커진 눈은 다른 사람들의 길을 막고, 심지어는 자신을 지탱해 준 나뭇가지를 파괴한다. “작별하지 않는다”에 나오는 군인들과 경찰들은 눈과 같다. 생각하지 않고 사유하지 않는다. 그냥 주변의 생각을 흡수하고 다른 눈을 따라 하염없이 내린다. 하지만 새는 비워 낸다. 세계-내-존재가 되지 않도록 스스로를 비워 내고, 날아오르기 위해 죽음도 감수한다.


모든 공룡이 멸망했을 때도 살아남아 후세에 유전자를 전한 것은 새였다는 사실처럼, 새는 본래적 가치에 충실하다. 한강은 우리에게 ‘눈 같은 태도’가 아닌 ‘새 같은 태도’를 요구한다. 세상에 있는 정보를 무분별하게 흡수해 덩치를 키우기보다는, 비워 내면서 스스로 생각하고 본래적 삶을 살라고 말이다.


7. 새의 죽음과 폭력적 인간

경아는 인선이의 집에서 죽어 있는 앵무새를 발견하고 정성껏 묻어 준다. 어떠한 교류도 없었지만, 앵무새의 죽음 앞에 경건해지고 최선을 다한다. 경아가 버스에서 내려 눈보라를 뚫고 걸어가는 나이 많은 “삼촌”을 보고 걱정스러움을 떨치지 못하듯, 인간은 타인을 배려하는 존재다.


그러나 4.3 사건에서 묘사되는 군인들과 경찰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어린아이부터 여자 노인들까지, 누가 봐도 공산당과 관계없는 사람들까지 살해한다. 그리고 가장 끔찍한 고문도 서슴지 않는다.


인간은 타인을 배려하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한없이 약하기도 하다. 라인홀드 니부어는 “도덕적 개인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인간의 나약함을 폭로한다. 도덕적인 인간도 집단 내에서 보편성을 위해 자신의 도덕성을 쉽게 벗어던지고 집단에 순응한다. 집단이 비도덕적 행위를 요구하면 그대로 따르고, 집단의 일부가 되는 것을 받아들인다.


당시 군인들과 경찰들도 마찬가지다. ‘공산당을 때려잡는 애국자’가 되기 위해 자신의 도덕성을 버리고 비도덕적 집단의 일부가 되는 것을 용인했다. 또한 “작별하지 않는다”에서는 북한에서 귀순한 이북 말을 쓰는 군경이 더욱 폭력적이었다고 묘사한다. 이들은 북한에서 공산당에게 가족을 잃은 피해자들인데, 그 분노를 4.3 사건 당시 ‘빨갱이’로 지목된 피해자들에게 쏟아부었다.


이들의 분노는 정당하지 않다. 분노라는 감정 자체는 인정할 수 있지만, 무고한 이들을 향해 폭력을 행함으로써 해소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의미다. 피해자였던 그들의 가족들도 그들이 괴물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이다. 개인에 대한 비난은 정당하지만, 문제의 핵심은 “이들이 왜 이런 행동을 했을까?”가 아니라 “어떻게 이런 폭력이 정당성을 얻었을까?”에 있다.


인간은 어떠한 감정이든 가질 수 있다. 배려심도, 분노도 가능하다. 하지만 인간의 감정을 통제하고 더 살기 좋은 사회로 만드는 것은 국가다. 국가는 법과 제도, 교육을 통해 인간의 분노를 가라앉히고 타인을 배려하는 존재로 만들 수도 있고, 그 반대로 만들 수도 있다.


북한에서 공산당의 피해를 입고 내려온 이들의 분노를 더 폭력적으로 만든 것은 그들을 ‘도구적 존재’로 본 국가다. 따라서 우리의 논의는 “어떻게 국가가 인간을 도구적 존재가 아닌 그 자체로 대할 수 있을까?” 혹은 “국가는 인간이 가진 분노를 순화하여 타인을 배려하는 존재로 만들 수 있을까?”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몇몇 사람들은 민주주의가 무르익고 국민들의 인식이 성장했으니 이런 우려는 사라졌다고 말한다. 하지만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이 질문을 던져야 할 때다. 미국에서는 도널드 트럼프의 패배를 인정하지 못한 무리들이 국회의사당을 습격했다. 일부 정치인들은 표를 얻기 위해, 이전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법을 통과시키고 사회적 소수자들을 억압한다.


이미 우리가 성취한 많은 업적을 파괴하고, 뒤로 돌려놓고 있다. 대한민국 또한 마찬가지다. 대통령이 국가 계엄령을 선포했고, 많은 사람들이 이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야당은 ‘거대 야당’이라는 힘을 통해 협치를 무시하고 예산을 삭감했으며, 정부 요직에 있는 장관들을 탄핵했다. 이것은 개인이 가진 분노를 배려로 변화시켜야 할 국가가, 오히려 그 분노를 이용해 정치적 이득을 얻고 있음을 보여준다. 물리적 폭력만이 폭력이 아니다. 국민이 부여한 힘을 통해 잘못된 정책을 만들고 예산을 마음대로 편성하는 것도 폭력이다.


8. 유령, 자유 그리고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극을 이끌어 가는 방법은 매우 특이하다. 소설적 기법으로 볼 수 있지만, 제주도에 있는 경아가 서울에 있는 인선이를 만나는 설정은 우리의 통상적 이해와는 거리가 멀다. 어떤 사람은 양자역학적 요소를 녹여냈다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끔찍한 사건을 전달하기 위해 비현실성을 활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도 말한다.


하지만 내 생각에 작가의 의도는 두 가지다. 첫째, 끔찍한 트라우마는 인간의 영혼을 파괴한다. 파괴당한 영혼은 인간의 내부에 남아 있지만, 파괴되기 전의 영혼은 육체를 떠난다. 왜냐하면 영혼도 스스로의 자아와 생명을 가지기에 생존을 위해 그런 선택을 한다.


극 중에서 인선이 어머니는 4.3 사건으로 영혼이 파괴되었다. 그 트라우마를 전해 들은 인선과 “소년이 온다”를 쓴 경아 또한 간접 경험으로 파괴된 영혼을 가진다. 그 둘의 영혼은 생존을 위해 잠시 육체를 떠나 있고, 그 결과 서로 다른 공간에 있음에도 만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둘째,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세상에 대한 이해가 전부라고 믿고, 그러한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배척한다. 하지만 우리가 이해하는 삶은 전부가 아닐 수 있다. 인선이는 제주 국제공항 아래 매장된 유골을 보고 난 후 혼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선이 어머니는 인선이가 보고 싶은 마음에,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인선이의 영혼과 만났을 수도 있다.


제주도에 있는 경아는 인선이가 “작별하지 않는다”라는 프로젝트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열망을 품은 영혼과 대면했을 수도 있다. 이런 세상은 우리의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트라우마로 인해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들에게 관용과 이해가 필요함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우리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자주 말한다. 그래서 일본의 침략을 막아낸 이순신 장군을 찬양하고,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품는다. 북한이 남침한 6.25 전쟁을 기억해야 한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4.3 사건 같은 슬픔의 역사를 외면한다.


참으로 모순적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하면서 특정 사건을 외면한다. 그리고 사건의 피해자들에게 발언할 기회도 주지 않는다. 심지어 피해자의 유지를 이어 갈 후손들의 자유도 박탈한다. 인선은 4.3 사건을 이야기하고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의 자유를 빼앗긴다. 왜냐하면 대중이 외면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중의 외면은 치명적이다. 자본주의는 늘 미래를 바라보고 앞으로 나아가길 원한다. 그것이 자유이며 발전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진정한 자유란, 자연의 법칙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효율성 추구와 물질적 삶의 행복을 향한 전진은 오히려 자연의 법칙에 가깝다.


우리가 진정 자유로우려면, 성장과 본질의 추구를 위해 때로는 ‘비효율’을 감수해야 한다. 인선이 같은 사람들의 작품이 존중받아야 하고, “소년이 온다”를 쓰고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경아의 삶 또한 존중되어야 한다. 그리고 인선이의 상처 부위를 대신 찔러 줄 수 있는 다음 세대 작가들이 더욱 많이 존재해야 한다. 그런 태도를 가질 때,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롭고 역사를 잊지 않으며 더 나은 미래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9. 결론

한강 작가는 글 말미에 자신의 소설이 사랑과 관련된 소설로 기억되길 바란다고 썼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그녀가 생각하는 사랑을 잘 보여줬다고 본다. 그녀가 말하는 사랑은 남녀 간의 사랑이나 가족 간의 사랑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녀가 말하는 사랑은 인간이 당연히 품어야 할 사회와 역사, 그리고 희생자에 대한 연대의 정서다. 인선이와 경아가 보여 주는 ‘역사의 피해자에 대한 사랑과 헌신’, 그리고 4.3 사건이라는 무시무시한 국가 폭력 앞에서도 서로를 보듬었던 사랑을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작별하지 않는다”는 ‘한강표 로맨스 소설’이다. 사랑의 감정이 깊이 흐르는 소설이라는 뜻이다. 한강은 우리가 변화하라고 직접 말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에게 직면하라고, 그리고 우리 내면의 목소리를 들으라고 말한다.


우리는 눈을 맞으면 녹일 수 있는 체온을 가진 존재이기에, 내면의 목소리는 분명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고 그녀는 말한다. 그리고 그 시작은 인선이와 경아 같은 사람들의 희생이라고 말한다. 희생이 값진 이유는, 그 희생으로 인해 그들의 사랑이 더 넓게 퍼져 나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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