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의 대전환을 읽고 by 김혜숙
1. 서론
임마누엘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은 철학사에 남겨진 대작이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로 알려진 그의 철학사상은 세상의 중심을 신과 자연에서 인간으로 옮겨왔다. “존재와 시간”, “정신 현상학”과 같은 철학 대작의 숙명일까? “순수이성 비판”은 위의 두 책과 함께 어려운 책으로 유명하다. 물론 칸트의 삶과 칸트가 “순수이성 비판”을 써낸 이유를 생각해 보면 그의 책이 가진 어려움은 이해가 간다. 칸트는 누구보다 규칙적인 삶을 살았다. 칸트가 정해진 시간에 동네 산책을 빼먹지 않았기 때문에, 동네 사람들이 시계보다 칸트를 믿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또한 칸트는 규칙성과 정교성에 정신병적인 애착을 가지고 있음이 “순수이성 비판”에도 드러난다.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을 집필하던 당시, 독일 철학은 ‘사변철학’이라는 비판 속에 방향을 잃고 있었다. 과학, 수학 등의 학문은 학문으로의 기반을 단단히 하고 성장해 나가는 반면, 철학은 사변철학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표류하고 있었다. 칸트는 철학을 학문의 왕좌로 복귀시키기 위해, 오류가 없는 정교한 체계를 목표로 ‘순수이성비판’을 집필했다. 이러한 성격과 목적이 “순수이성 비판”을 정교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논리적 완벽성을 위해 심오한 내용을 담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을 어렵다고 지나치기에는, 현대철학사에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나 크다. 칸트 이전의 철학은 모두 칸트로 흘러들어 가고, 이후의 철학은 칸트로부터 흘러나온다는 말이 있듯이 그의 철학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현대철학을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인식의 대전환”은 칸트 원서를 읽기 전에 입문서로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 칸트 전문가인 김혜숙 교수님은 그녀의 책을 통해 칸트의 이론을 알기 쉽게 설명해 준다. 철학책의 난해함은 내용 혹은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 전이해(先理解)의 문제가 주를 이루기에, “인식의 대전환”을 통해 칸트의 원서로 향하는 길이 열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2. 형이상학의 위기
서양 철학은 변하지 않는 실체를 찾는 형이상학의 역사였다. 과거 플라톤으로부터 데카르트, 그리고 라이프니츠까지 실체, 존재 그리고 실체는 서양철학의 핵심 주제였다. 그러나 형이상학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경험할 수 없는 그 무언가를 연구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과학이 발달하기 전, 인간은 경험하지 않는 그 무엇, 예를 들어 “신”과 같은 존재를 찾는 것이 의미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학과 기하학 그리고 과학의 발달과 그와 관련된 학문의 성행으로 형이상학은 사변철학으로 조롱당하는 처지가 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칸트는 “순수이성”을 비판하는 방법을 택한다. 그가 생각하는 새로운 형이상학의 목표는 궁극의 실재를 찾는 것이 아니라, 실재를 탐구하는 도구인 이성을 비판적으로 탐구하는 것이었다. 칸트는 이성이 자기가 알 수 없는 분야를 탐구하기에 철학은 사변으로 빠질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칸트는 비판을 통해 이성의 한계를 밝히고 이성의 능력을 확고히 한다면 철학 또한 엄밀한 학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순수이성과 이런 시성의 ‘원천과 한계’를 판정하기만 하는 학문을 순수이성의 체계에 대한 예비학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학문의 효용은 사변에 관해서는 사실상 소극적일 뿐이겠고, 이성의 확장을 위해서 쓰이지 않고 이성의 정화를 위해서 쓰이며, 순수한 이성을 그 과오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 순수이성비판
3. 선천적 종합명제는 가능한가?
“선천적 종합명제는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기 위해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을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식은 선천적 명제, 후천적 명제 그리고 분석명제와 종합명제로 나뉜다.
a. 선천적 명제란 경험하지 않아도 우리가 알 수 있는 명제를 말한다. ‘2+2=4이다’와 같이 경험하지 않아도 이성에 의해 참·거짓을 판단할 수 있는 명제를 말한다. 수학적 명제는 선천적 종합명제에 속한다. 수학 명제와 기하학 명제는 칸트가 ‘선천적 종합판단’의 대표 예로 든다.
b. 후천적 명제란, 경험에 의존하는 명제를 말한다. “아이스크림은 맛있다.” 혹은 “한국은 살기 좋다”와 같은 명제는 경험하고 나서 참·거짓을 판단할 수 있는 명제다.
c. 분석명제는 주어가 술어를 포함하는 명제를 말한다. “총각은 결혼하지 않은 남자다” 혹은 “수박은 과일이다”처럼 주어를 분석해 보면 술어를 알 수 있는 명제다. 분석명제는 주어를 서술하는 술어를 가지기에 새로운 지식을 만들지 않는다.
d. 종합명제는 주어가 술어를 포함하지 않는 명제를 말한다. “이 방은 따뜻하다” 혹은 “남산은 좋은 경치를 가진다”와 같이 주어를 분석해도 술어를 찾을 수 없는 명제다. “이 방은 따뜻하다”라는 술어는 ‘방’의 정의에 들어 있지 않고, 남산 또한 “좋은 경치”라는 술어와 연관 지을 수 없으므로 새로운 지식을 생산한다.
칸트에 따르면, 선천적 종합명제만이 보편적·필연적이면서 새로운 정보를 추가한다. 아이스크림이 맛있다는 것은 개인의 경험에 의존하기 때문에 보편적이면서 필연적일 수 없다. “삼각형은 세 변을 가진다”는 선천적이기는 하지만, 분석명제이기에 새로운 정보를 추가하지 않는다. 따라서, 칸트는 선험적 종합적 지식이 진정한 지식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철학의 목표는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지식에 도달하는 것이고, 또한 새로운 지식을 통해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다만 “삼각형은 세 변을 가진다”의 경우, 기하학 명제 전반을 칸트가 ‘선험적 종합’으로 보았다.)
4. 코페르니쿠스적 전회
칸트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이용해 위의 질문에 답하려고 했다. “인간은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대해 관념론과 경험론은 다른 방식으로 답한다.
관념론은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식은 이성과 관념에서 비롯될 뿐이다. 세상 밖에 실재하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관념이 실재를 만들어냈다고 말한다. 인간의 경험은 불완전한 것이므로 우리 관념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경험에 의해 습득된 지식은 관념에 의해 일차적으로 영향을 받은 이차적 지식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경험적, 즉 선험적인 체계를 가지고 있어야 관념론이 설명이 가능한데, 이를 위해 이들은 본유관념, 즉 인간이 내재하고 있는 지식을 주장한다. (이는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의 계열에 속한다. 이들은 신을 자신들의 철학의 기초로 삼기 위해, 이러한 개념이 인간의 인식에 기반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인간의 외부세계는 우리의 관념이 만들어낸 세계로,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알 수 없다.
경험론은 모든 지식은 감각적 경험에서 시작된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마음은 태어날 때, 백지상태로 태어난다. 인간은 감각적 경험을 통해 백지를 색칠하고 채워나가기 시작한다. 외부세계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외부 세계로부터 감각적 자극이 필요하고, 인간은 반복된 자극을 통해 법칙을 만들고 세상을 이해한다. 인간의 외부세계는 존재하고 우리의 관념은 경험을 통해 형성된다. 칸트가 봤을 때, 관념론과 경험론으로 선천적 종합명제의 존재를 설명하지 못한다. 관념을 통해 얻은 지식은 선천적이기는 하지만, 종합적이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지식을 만들지 못한다. 경험적 지식은 종합적이기는 하지만, 선천적이지 않기 때문에 보편적·필연적이지 않다. 칸트는 인간이 관념론과 경험론적 방법을 섞어서 세상을 인식한다고 주장했다.
칸트는 세상은 물자체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한다. 물자체란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그 무엇인가이다. 이는 관념론과 유사하다. 인간은 물자체로부터 현상을 목격하고, 표상으로 우리의 인식기관에 받아들인다. 우리의 인식기관은 선천적, 즉 경험 전에 주어진 감성과 오성의 형식으로 표상을 분석하고, 이성의 작용을 통해 개념화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인간은 물자체로 이루어진 세상에 살고 있다. 인간은 물자체 그 자체는 인식할 수 없지만, 물자체로 촉발된 형상을 통해 표상을 습득한다. 인간은 표상을 감성을 통해 먼저 받아들인다. 인간의 감성은 공간화·시간화되어 있어 모든 표상은 공간화와 시간화의 형태를 띤다. 무분별하게 받아들여진 표상은 인간의 오성의 범주를 통해 분류된다. 이렇게 분류된 표상은 이성을 통해 개념화되고, 인간은 이를 통해 인식하고 행동한다. 칸트는 이를 ‘선험적 관념론이자 경험적 실재론’이라 규정한다. 이러한 그의 입장이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 불리는 이유는 인간이 세상을 인식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원인이 신이나 세상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 내부에, 즉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의 특징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는 어떻게 선험적 종합명제를 가능하게 하는가?
먼저 인간은 감성과 오성이라는 선험적 형식을 통해 자극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선험적이다. 감성과 오성은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보편적이면서 필연적이다. 받아들여진 표상은 인간이 이성을 통해 분류되고 구상되기 때문에 새로운 정보를 창출한다. 따라서, 종합적이다.
5. 직관적 감성과 추론적 오성
칸트는 우리가 인식할 수도 없고 만들지도 않은 물자체의 세상에 관해 확실히 알 수 있는 방법은, 내가 ‘사물에 집어넣은 것’, 즉 나의 인식능력이 가진 고유한 기능으로 인해 어떤 인식이 가능해지는지를 탐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인간이란 주관과, 세상이란 객관 사이를 이어주는 것은 신도 물자체라는 실체도 아니라, 인간에게 내재된 선천적 원리들뿐이다. 인간은 직관적 감성과 추론적 오성을 가진다. 직관적 감성이란 시간과 공간의 형식으로 표상이라는 감각을 받아들인다. 무엇인가를 인간 밖에 있는 것으로 표상하는 외감의 형식은 공간이며, 나 자신과 내 안의 상태를 직접 감지할 수 있게 하는 내감의 형식이 시간이다.
공간과 시간이 선험적임을 증명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먼저 어떠한 방을 생각해 보자. 그 방에서 빼낼 수 있는 모든 물건을 빼 보자. 그러면 방만 남는다. 방에서 벽과 바닥 그리고 천장을 빼 보자. 그러면 공간만 남는다. 그렇다면 공간을 빼낼 수 있을까? 없다. 그 이유는 공간이란 특정 물체가 아니라 그냥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어떨까? 눈을 감고 콘서트장에 왔다고 생각해 보자. 콘서트장에는 피아노, 바이올린 등 여러 가지 소리가 들릴 것이다. 모든 악기 소리를 제거하면, 남는 것은 단지 고요함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 속 고요함이다. 하지만, 여기서 시간을 제외할 수 있는가? 지금 내가 느끼는 고요함은 소리를 제외하고 나서 흘러가는 시간과 함께 존재한다. 시간도 공간과 마찬가지로 특정 물질이 아니라 항상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선험적이다.
칸트가 시간과 공간을 오성의 범주가 아니라 모든 것을 아우르는 감성에 포함시킨 이유는 또 있다. 칸트는 뉴턴의 「프린키피아」를 보고 학문의 정수라는 생각을 가졌다. 자연을 수학화한 뉴턴의 학문이 세상의 모든 것을 계산하고 예상할 수 있다고 느낀 그는, 자신의 철학이 뉴턴과 같은 자연과학 학문의 기반이 되기를 원했다. 원인과 결과로 세상을 설명하려는 물리학, 그리고 공간으로 세상을 예측하는 기하학이 인간이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의 근원이 되기 위해서는, 인간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 선험적으로 물자체의 현상을 파악해야 한다. 칸트의 예에서 볼 수 있듯, 사변철학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철학자들은 당대의 과학을 따르는 철학으로 세상을 설명하려고 한다. 하이데거의 경우도 비슷하게 설명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존재를 과거, 현재, 미래라는 탈자체의 종합으로 설명하려 했다. 이는 우리가 “과거는 지나간 때, 현재는 지금, 미래는 오지 않은 때”라고 생각하는 것과 다른 해석이다. 아인슈타인은 그의 상대성 이론에서 과거 현재 미래는 동시에 존재한다는 생각을 피력했는데 이 두 가지 해석은 매우 유사하다. 하이데거의 철학도 사변적 철학에서 벗어나 현실적인 철학이 되는 길로 상대성 이론과 유사한 길을 택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또한 내재적 감성인 시간은 자아에 대한 독창적 설명을 해 준다. 자아 존속성은 가장 큰 철학적 문제 중 하나다. 5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같은 사람인가? 5년 동안 쌓인 경험과 지식, 그리고 변화한 관념을 가진 두 가지 자아를 같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가?
헤라클레이토스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말로 자아 존속성을 부정했다. ‘테세우스의 배’라는 유명한 일화도 자아 존속성에 질문을 던진다. 테세우스의 배를 소유한 박물관이 테세우스의 배를 수리하고 가지고 있는 테세우스의 배는 진정한 테세우스의 배인가? 아니면 박물관이 수리하면서 내다 버린 테세우스의 배 조각을 가지고 만들어진 배가 진정한 테세우스의 배인가? 칸트는 통각이라는 개념으로 자신만의 자아 개념을 설명하고 또한 시간성이 가진 의미를 설명했다. 인간은 감성으로 외부의 감각자료를 수용하기에, 감각자료를 시간에 따라 정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를 통각이라고 하는데, 통각으로 인해 우리는 세상을 인식할 수 있다. 사과나무를 보고 있다가 잠자리가 날아들어 잠자리가 앉아 있는 사과나무를 어떻게 사과나무와 잠자리로 구분하는가? 인간이 감각자료를 시간 순서에 따라 배치할 수 있기 때문에, 잠자리가 없었을 때의 감각자료(사과나무)와 잠자리가 날아든 후의 감각자료(사과나무+잠자리)를 구분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칸트에게 자아란 세상을 인식하기 위한 선험적 존재이다. 고정적이거나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받은 감각자료를 모으고 통합하는 통합체이다. 다시 설명하면, 감성과 오성으로 인해 시시각각 수용되고 분석된 감각자료는 “나는 생각한다” 아래로 집결한다. “나는 생각한다”로 대표되는 자아는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이제까지의 자료를 모으고 모아진 기반에 따라 감각자료를 분석하는 것이다. 이는 하이데거가 주장한 ‘이해의 지평’을 통해 존재를 해석하는 구조와 유사하다.
감성은 외부 자극을 직관적으로 수용하고, 오성은 이를 개념으로 조직한다. 오성은 4개의 범주를 가지고 각 4개의 범주에 3개의 하위 범주를 가진다.
분량
성질
관계
양상
단일성
실재성
속성과 자존성
가능성-불가능성
수다성
부정성
인과성과 의존성
현존성-비존재성
전체성
제한성
상호성
필연성-우연성
이처럼 인간은 직관을 통해 수용한 감각자료들을 자발성으로서의 오성 범주를 매개로 종합하고 분석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인간은 감성과 오성 없이는 물자체에 의해 발생한 현상을 인식할 수 없다.
정리하면, 물자체에 의해 파생된 현상은
감각자료가 되고 ⇒ 감성의 형식으로 받아들여지고 ⇒ 오성의 범주로 분석해 ⇒ 이성의 기능하에 개념화되면서 인식된다.
6. 이성이 사변적 형이상학으로 치닫는 이유
물자체로부터 촉발된 현상에 반응하는 것은, 감각을 시간과 공간이라는 형식에 의해 받아들이는 감성과, 감성이 받아들인 정보를 범주를 통해 조직화하는 오성이다. 이성은 표상 그 자체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감성과 오성에 의해 조직화된 정보만을 다룬다. 이런 정보를 추상화하고 개념화해서 우리 인간이 대상을 인식 가능케 한다. 그러나 이성은 어떤 정보를 받았을 때, 끝까지 가고자 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위로는 대상의 공통점을 뽑아내 가장 보편적인 존재를 상정하려 하고, 아래로는 대상들의 차이를 뽑아내 가장 세밀한 단계까지 세분화하려고 한다. 이러한 이성의 욕망으로 인해 인간은 형이상학에 빠지게 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인간은 물자체를 직접 경험할 수 없다. 신은 지적 직관을 가지기에 다른 존재를 매개하지 않아도 물자체를 직접적으로 인식하고 판단할 수 있지만, 근본적인 한계를 가진 인간은 이러한 인식활동을 할 수 없다. 인간은 인간이 가진 감성과 오성을 통해서 물자체의 현상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형이상학이 추구하는 가장 보편적인 존재 혹은 가장 세밀한 단계를 알 수 없다. 이성은 이렇게 자기가 파악할 수 없는 지식을 갈구하는 경향이 있고, 이는 사변적 형이상학으로 변질된다. 칸트는 그의 책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이성의 한계를 명확하게 하고, 이성이 할 수 있는 영역 안에서 인간은 마음대로 이성을 활용하고 사용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칸트가 신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말 그대로 신은 학문적으로 탐구할 수 없는 영역의 존재인데, 이것은 신이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인간의 능력으로 신의 존재 유무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이성이 신존재 증명에 사용되는 것은 월권이라고 말한다. 칸트는 이성이 신·자유·도덕에 대해 존재 여부를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요청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인간은 모순이 아닌 이상 그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있다. 신·자유·도덕 또한 마찬가지다. 인간은 자연이 정한 인과법칙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자연은 생존을 위해 종들이 이기적인 싸움을 벌이는 전쟁터다. 이러한 자연의 인과법칙이란 자기 생존을 위해 다른 종과 대립하고 희생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도덕·양심 그리고 문화를 통해 이러한 인과법칙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다. 우리는 자연의 법칙에 어긋나는 것을 자유라고 부른다. 그리고 인간은 이기적 행동이 긍정적인 효과를 바라고 행동한다. 이런 점에서 형이상학은 실천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도덕과 신은 요청된다고 말한다. 인간이 자연의 인과법칙에서 벗어나 자유를 통해 이타적 행동을 할 때, 신은 요청된다. 요청된 신은 이타적 행동이 내세에 혹은 가까운 미래에 보상받을 것, 혹은 신이 정해 놓은 기준에 맞는 행동이라고 선언한다. 따라서, 이성이 신의 존재를 판단할 수는 없지만, 실천이성은 신을 요청한다. 그리고 이는 인간이 가진 기본적 능력이자 특권이다.
7. 칸트의 중요성
칸트는 형이상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형이상학으로 돌아간 독특한 철학자다. 그의 저서 “순수이성 비판”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순수이성에 대한 비판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려 노력했다. 여기서 비판의 뜻은 순수이성을 비난한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순수이성의 능력과 한계를 설정하고 순수이성에게 정당한 권한을 부여하는 긍정적인 의미로 해석된다. 위기는 어떤 객체의 능력이 더 이상 사용되지 않을 때 촉발된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가장의 위기란, 가장이 더 이상 가족 내에서 긍정적이거나 이전과 같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할 때 발생한다. 가족의 위기는 가족이 사회의 기본 단위로서의 역할을 상실했을 때 발생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인간의 위기의 시대다. ChatGPT와 같은 AI 기술은 일부 영역에서 인간의 인지 능력을 초월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글 또한 Chat GPT가 더 빠르고 설득력 있게 써 내려갈 수도 있다. AI와 자본주의가 결합한다면, 대부분의 인간 노동은 AI에 의해 대체될 것이고, 인간은 위기라는 구렁텅이에 빠져 허우적댈 것이다. 그렇다면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대부분 사람들은 위기의 극복을 능력 향상으로 생각한다. 가장의 위기는 더 많은 돈을 벌어 가족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면 극복된다. 가족의 위기는 국가에서 사회보장 제도의 명목으로 안정적인 가족을 만들면 회복된다. 이러한 접근법은 능력주의적이다. “능력의 부재가 위기의 원인이기에, 더 큰 능력으로 위기를 극복하라”는 해결책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인간이 과거의 인간을 대체하는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능력의 부재가 자발적이지 않고 필수불가결하다면, 인간은 위기에 잡아먹히는 먹잇감에 지나지 않는다. AI 시대에는 이러한 능력주의적 접근이 현실적인 대안이 되기 어렵다. AI를 능가할 수 있는 인간은 극소수다. 아마 그들 또한 AI에 의해 곧 대체될 것이다.
칸트는 위기를 능력의 부재로 보지 않고, 능력을 사용하는 인간의 오만함에서 찾는다. 형이상학의 위기는 형이상학 자체의 능력 부재가 아니라, 인간의 이성이 인식할 수 없는 분야를 인식 대상에 포함했기 때문에 발생했다는 말이다. 인간은 감성과 오성으로 세상을 파악하는데, 신·자유·세계와 같은 대상은 인간의 감성과 오성으로는 실재를 파악할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의 이성의 특징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개념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를 강요받는다. 탐구를 강요받은 인간의 이성은 자기 위치와 능력을 망각한 채 탐구하고, 사변철학으로 변질된다. 따라서 칸트는, 순수이성의 역할과 자리를 찾는 방식으로 위기를 해결하려 한다. 자기의 능력을 확실히 하고, 능력이 발휘될 수 있는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위기를 벗어나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인간 또한 마찬가지다. 인간의 능력은 무엇인가? 그리고 인간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AI에 의해 대체될 수 없는 인간의 고유 능력에 대한 우리의 탐구가 인간을 위기로부터 구하는 출발이 되어야 한다.
물론 민주주의가 자본주의와 결합했기 때문에 이는 쉽지 않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효율성을 추구하고, 효율적이지 않은 객체는 폐기 처분한다. 자본주의는 비효율적 존재를 배제하는 방식에서 냉혹함을 드러낸다. 자본주의가 효율적으로 전진하기 위해서는 모든 인간이 효율성을 추구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폐기 처분은 비인간성을 포함하고 한계까지 끌어내린다. 돈이 없는 인간은 사회적으로 비난받고, 심한 경우 매장당한다. 가족 구성원들은 무책임하고 무능력하다고 몰아세운다. 국가체계가 자본주의에 매몰되었다면, 폐기 처분은 기본적 삶을 살 권리조차 박탈한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의 고유 능력을 판단하고, 자본주의가 정해 놓은 방법이 아니라 우리의 능력 안에서 노력한다는 것은 큰 결단을 요구한다.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가 결단해야 한다. 물질적 행복 추구에서 벗어나고, 효율성으로 개인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체 능력에 따른 평가와 새로운 방식의 행복 추구법을 찾아야 한다. 이것이 “순수이성비판”이 지금의 사회에 내놓는 해법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