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보에는 없지만, 인간에게 각인된 죽음: 전쟁의 본질

서부전선 이상 없다를 읽고 by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by 사회철학에서 묻다

(1) 서론

1차 세계대전의 참혹함을 그린 대표적 반전 소설인 “서부전선 이상 없다”는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첫 번째 소설이다. 1916년 18살의 어린 나이로 서부전선에 참전한 레마르크는 그의 경험을 바탕으로 “서부전선 이상 없다”를 집필했다. 사실주의적 문체와 생생한 전쟁 묘사로 찬사를 받았지만, 나치정권에 의해 금지도서로 선정되었다. 그의 책은 독일에서 불태워졌다. 독일인이지만, 독일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낀 레마르크는 미국으로 망명했고, “서부전선 이상 없다”는 영화화되어 전 세계 사람들에게 전쟁의 참혹함을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서부전선 이상 없다”은 전쟁의 참혹함과 그 안에서 희생되는 이름 없는 개인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다. 레마르크는 특별한 줄거리 없이, 다양한 인물을 등장시키고 각 인물들의 개인적 이야기를 다룬다. 특정한 영웅이나 사건의 드라마가 아니라, 평범한 인물들의 고뇌와 감정 그리고 일상을 통해 전쟁의 본질을 보여준다.. 지금 세대에게 1차 세계 대전은 먼 옛날이야기다. 유럽은 2차 세계 대전을 끝으로 평화의 시절을 만끽하고 있다. 하지만 전쟁의 참혹함을 겪지 않은 세대가 정치적 결정을 내리는 지금이 제일 위험한 시기다. 참혹함을 모르기에, 전쟁이라는 수단이 쉽게 선택될 수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동의한 러시아 사람들이 그러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부전선 이상 없다”는 지금 세대가 꼭 읽어야만 하는 소설이다. 이 소설을 통해 전 세계 사람들이 다시 한번 전쟁의 참혹함을 깨달아야 한다. 전쟁의 참혹함을 잊는 순간 전쟁의 마수가 다시 우리에게 뻗어질 수 있다.


(2) 줄거리

“서부전선 이상 없다”는 18살의 어린 나이로 전쟁에 징집된 파울 보이머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파울 보이머는 그들의 친구들과 함께, 학교 선생님에게 등 떠밀려 학도병으로 지원하게 된다. 그들은 신병훈련소에서 훈련을 받고 군인으로 만들어진다. 그들은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지만, 프란츠 캠머리히가 전사하고 그들의 전쟁은 비극으로 시작된다. 파울 보이머는 휴가를 받고 후방의 가족들을 방문한다. 하지만, 그가 후방에서 마주한 것은 병에 걸린 어머니, 경제상황이 더욱 나빠진 그의 가족과 이웃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의 반응뿐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예전과 같은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한다. 그 후 그는 전방으로 복귀하지만, 다시 부상당하고 알베르트 크로프와 함께 병원으로 이송된다. 크로프는 다리를 전달하고, 파울 보이머는 다시 회복하고 전방으로 보내진다. 이번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생존할 거 같던 카친스키마저 사망하고 보이머는 홀로 남겨져 있음에 쓸쓸함을 느낀다. 그리고 몇 달 후, 파울 보이머 역시 사망하지만 그의 죽음은 단한줄의 전보“서부전선 이상 없음”으로 기록된다.


(3) 레마르크의 문체가 빛나는 이유

레마르크는 “서부전선 이상 없다” 신즉물주의적 기법으로 그려내고 있다. 신즉물주의는 1920년대 독일에서 유행한 문학·예술 사조로, 개인감정의 개입을 최대한 배제하고, 사물과 현실을 냉정하게 관찰·기록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위의 두문장에서 우리는 레마르크의 전쟁에 대한 담백한 묘사를 볼 수 있다. 감정, 중심인물, 극적인 사건이 배제된 서술은 자칫 흥미를 떨어뜨릴 수 있지만, 레마르크의 문체는 반전소설인 “서부전선 이상 없다”에서 매우 빛난다.


첫째, 그의 문체는 독자가 아무런 편견 없이 전쟁을 바라볼 수 있게 해 준다. “서부전선 이상 없다”는 국가주의에 빠진 국민들의 비이성적 결정이 전쟁의 원인이라는 견해를 가진다. 의미 없는 애국심으로 자신의 학생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힘메슈트스나, 휴가온 보이머를 데리고 다니면서 전쟁에 대해 이야기하게 한 그의 아버지가 그런 국민들이다. 레마르크는 전쟁에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모든 극단적 감정을 경계한다.. 따라서, 그가 선택한 방법은 감정을 덜어낸 사실 전달이다. 전쟁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현실을 통해 우리가 전쟁을 제대로 이해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둘째, 우리가 경험하는 대부분의 사건은 감정을 동반한다.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말한 것처럼, 인간은 항상 어떠한 기분을 가진다. 그리고 그 기분을 통해 우리는 사건을 평가하고 이해한다. “사랑”은 매우 아름답다. 하지만, 한 커플이 무미건조하게 사랑을 표현한다면, 그저 그런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로미오와 줄리엣”, “타이타닉” 그리고 “노트북”같은 이야기에서 사람들이 “사랑”에 열광하는 이유는 애절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주인공들이 대사와 행동을 통해서 표현되는 애절함에 사람들은 감화되고 그들의 사랑에 찬사를 보낸다. 하지만, “서부전선 이상 없다”는 전쟁의 참혹함을 감정적 표현 없이 그대로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전쟁의 참혹함을 느끼고 슬퍼한다. 이는 전쟁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참혹함은 어떤 감정적 사건에도 앞서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전쟁의 참혹함을 막는 것이 어떤 목적보다도 우선되어야 함을 말해준다.


레마르크는 동료 프란츠 캠머리히의 죽음을 “프란츠 켐머리히는 죽었다. 두 시간 전에. 내가 그의 부츠를 뮐러에게 주었다.” 이렇게 표현했다. 이 문장은 보이머가 캠머리히에게 어떠한 감정을 가졌는지를 묘사하는 것을 배제하고 캠머리히의 죽음과 부츠를 동일시하면서 사실적으로 캠머리히의 죽음을 묘사하고 있다. 위에 언급한 것처럼, 이러한 레마르크의 문체는 전쟁의 참혹함을 보여주는데 매우 효과적이다.


(4) 전쟁은 왜 일어나는가?

“서부전선 이상 없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을 전쟁의 피해자로 묘사한다. 징집된 군인들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후방에 살고 있는 시민들의 삶 또한 매우 열악하다. 그들은 부족한 전쟁 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엄청난 양의 세금을 부담해야 했고 그 결과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없었다. 적군 또한 마찬가지다. 전장에서는 악마와 같은 적군들이 포로로 잡혀왔을 때에는 피해자로 묘사된다. 레마르크는 보이머와 그의 전우들과의 대화를 통해 “피해자만 가득한 전쟁이 왜 일어나는가?” 이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원인은 무엇인가?

첫째, 강대국들의 식민지 쟁탈전이 전쟁을 유발했다. 당시 세계는 식민지 기반 경제 체제였다. 강대국들은 그들의 군사력을 이용해 식민지 개척에 나섰다. 강대국들은 식민지를 값싼 원재료 공급원으로 삼아, 아주 저렴하게 원재료를 들여왔다. 수입한 원재료는 본국에서 완제품으로 만들어졌고, 이 제품들은 다시 식민지로 보내 비싼 가격에 판매되었다. 이를 통해 얻은 수익은 국방 예산으로 쓰였고, 강대국은 더욱 강한 군대를 보유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더 많은 식민지를 찾아 나선다. 식민지를 많이 차지 한 나라는 더욱 부강해졌고, 그렇지 못한 나라는 약해졌다. 하지만, 식민지는 한정되어 있었고 모든 강대국이 원하는 만큼 식민지를 차지할 수 없었다. 비스마르크가 독일을 통일하면서, 독일은 발전된 기술을 바탕으로 강력한 군대를 갖출 수 있었다. 독일은 더 많은 식민지를 원했지만, 영국과 프랑스등 강대국들이 식민지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대로 있으면, 독일은 프랑스와 영국과의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었기에 결국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식민지를 빼앗 오고자 했고, 이는 1차 세계 대전의 직접적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둘째, 급격한 산업화는 국가를 발전시켰지만, 많은 농민들과 실업자들이 불만에 싸여있었다. 산업혁명을 통해 땅을 버리고 도시로 온 농민들은 잠시 쓰이고 버려졌다. 운 좋게 직업을 얻은 노동자들도 고된 노동에 비하면 턱없이 저은 보상을 받았다. 시골에 남아있던 농부들도 기계화와 세계 곡물시장 개방(미국과 러시아등)으로 절망에 빠졌다. 이들의 불만은 자연스럽게 정부로 향했고, 사회주의나 급진적 성향의 정당에 가입하기도 했다. 이들의 불만을 해결하지 못하면, 혁명으로 번질 수 있겠다고 판단한 독일정부는 민족주의 정책을 펼쳤다. 독일정부는 대중선전, 심리전, 교육, 언론등을 통해 영국과 프랑스를 적으로 규정했다. 외부에 강한 적의 존재한다는 인식은 국민의 내부 결속을 높이는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영국과 프랑스라는 적 앞에 독일 국민들은 독일 민족주의를 위해 똘똘 뭉쳤고 적에 대한 적대감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보이머와 그의 친구들을 징집한 험멜슈트스, 아이들을 겁쟁이라고 비난한 부모들 모두 이런 민족주의에 세뇌된 인물들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정치인들이 전쟁을 시작하는 것을 허용했다. 물론, 정치인들도 전쟁이 금방 끝날 것이라고 확신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정치인들의 목적은 민족주의를 통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1차 세계 대전은 4년 3개월 동안 계속되었고 민간인 포함 1,500만 명에서 2,000만 명의 사망자를 발생시켰다.


셋째, 전쟁으로 통해 부당한 이득을 얻는 세력은 늘 존재한다. 전쟁물자를 제공하는 기업들은 전쟁 기간 동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큰 부를 축적한다. 독일의 크루프(krupp)는 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의 핵심무기를 제조해 부를 축적한다. 영국의 비커스 프랑스의 르노 미국의 록히디, 보잉등 지금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기업들도 전쟁을 계기로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들이 직접적으로 전쟁을 일으키는 결정을 일으켰다고 할 수 없지만, 최소한 이들의 입김이 작용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처럼, 전쟁은 소수에게 이익을 주지만, 그 참혹함의 대가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병사들이 감당해야 했다.


(5) 전쟁은 어떻게 괴물을 만드는가?

“서부전선 이상 없다”는 전쟁의 참혹함과 함께 괴물로 변해버린 군사들과 장교들 그리고 후방의 시민들을 보여준다. 먼저, 보이머를 포함한 독일군인들과 프랑스군인들은 괴물처럼 살아간다. 보이머의 전우들은 사회에서 학생, 농부, 구두장이, 자물쇠공등 다양한 직업군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단기간의 군훈련을 통해 군인으로 길러진다. 훈련소에서 일반인을 군인으로 기르는 것은 간단하다. 간단한, 재식과 군사훈련 그리고 명령에 복종하는 인간으로 만들면 된다. 군대는 처벌이라는 비인간적 수단으로 명령 복종을 강요한다. 군인들이 스스로 사유를 통해 명령의 정당성을 따지기 시작하면, 그들은 좋은 군인이 될 수 없다. 좋은 군인에게 필요한 것은 다양성이 아니라 부품이 되는 것이다. 군대는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최종목표다. 그를 위해 적을 사살하고 희생하고 진지를 지키고 점령한다. 이를 위해 군인은 아무 말 없이 명령을 따라야 한다. 명령을 따르지 않는 군인은 군대 전체의 목표달성에 방해가 되고 전쟁터에서 즉결 처분되거나 사살된다. 물론, 인간이 비록 적군이라고 하더라도 다른 인간을 죽이는 것은 쉽지 않다. 이를 위해, 군대는 얼차려와 경직된 분위기를 통해 군인 한 명 한 명의 마음에 분노를 조금씩 쌓아간다. 그리고 그 군인들은 전쟁터에 풀어두면 생존에 대한 인간의 본능이 그들의 분노를 발판 삼아 괴물로 변하게 된다. 이를 위해 전쟁 중에도, 병사들은 상급자의 명령에 복종하고 경례를 해야 한다. 계급은 군대 유지에 필수적이다.


보이머가 만난 군의관들은 한결같이 비인간적이다. 치료할 가능성이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환자가 고통에 못 이겨 소리를 지르거나 군의관들의 심기를 건드리면 망설임 없이 신체를 절단한다. 의사는 환자들을 치료하는 것이 목적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기분에 따라, 환자에게 최악의 결정을 내리기도 한다. 보이머가 종교 병원에서 만난 의사는 자신의 연구를 위해 환자를 평생 불구로 만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편평족 수술을 강행한다. 이들은 어떻게 괴물이 된 것일까?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에서 “사유하지 않는 인간은 유죄”라는 말을 남긴다. 그녀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을 효율적으로 가스실로 보내는 역할을 한 아이히만의 재판을 취재한다. 많은 사람들은 아이히만이 괴물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재판과정에서 본 그는 지극히 평범한 인간이었다. 좋은 아빠이자 친절한 이웃이지만, 그는 아무런 생각 없이 상부의 명령에 따라 유대인들을 학살한 것이다. 그는 재판관에게 “나는 군인이고 군인은 명령에 따르는 것이 미덕이다. 그리고 나는 명령에 따랐을 뿐이기에 무죄다.”라는 변론을 한다. 이에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유죄인 이유는 “무사유(생각하지 않는 것)”라고 규정한다. 이 “무사유”야 말로 군의관 그리고 후방의 시민들을 괴물로 만든 핵심 원인이다.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된다. 내가 맡은 직책에 따라 명령을 받기도 하고 명령을 내리기도 한다. 명령을 따라야 하는 사람은 명령을 어길 시에 큰 문책을 받을 수 있다. 자신이 받을 문책이 두려워 명령을 따르는 것이 정당한가?


첫째, 내가 받을 문책의 크기와 명령이 실행되었을 때, 일어날 피해를 비교해야 한다. 아이히만은 만약, 나치의 명령이 부당하다고 느꼈다면 사임하고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선택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명령을 따르는 것을 선택했다. 비록 그가 선택하지 않아도 누군가가 그 자리를 대신했겠지만, 아이히만만큼 효율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지금 누리는 명예와 편안함을 위해 유태인을 가스실로 보냈고, 그 피해는 아이히만이 가졌을지도 모르는 피해와 비교조차 할 수 없다. 군의관 또한 마찬가지다. 만약, 군의관이 많은 환자를 빨리 다루지 못한 것으로 인해 문책을 받았다면, 문책을 감수하거나, 군의관을 그만두고 일반병사로 복무할 수 있다. 이처럼, 다른 선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타자에게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줄 수 있는 선택을 했기에 그들은 유죄다.


둘째, 인간은 사유하는 동물이다. 그리고 인간의 사유는 우리 문명을 발전시켰다. 아이히만과 군의관들은 현대문명의 혜택을 받았다. 그들이 받은 교육, 법적 보호 그리고 인간적 권리 모두 사유의 결과다. 그렇기에 모든 인간은 스스로의 사유를 통해 다른 인간의 삶을 향상할 의무를 가진다. 하지만, 그들은 사유하지 않았고 명령에 따르거나 본능에 따랐다. 그들은 자신의 누린 특권을 사회와 타인에게 되돌려야 하는 인간적인 책임을 외면했고, 그 점에서 유죄다.


(6) 기술발전과 전쟁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전, 유럽 전역은 승리의 기분에 도취되어 있었다. 러시아-튀르크 전쟁 이후로 36년 동안 유럽을 뒤흔드는 대규모 전쟁은 없었고, 엄청난 속도로 기술 발전을 이뤄냈다. 이에 발맞추어, 인간중심사상이 유럽을 지배했고, 사람들은 발전한 기술 덕분에 인간이 세계를 지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1차 세계 대전으로 이들의 꿈은 산산조각 났다. 특히 인간 진보의 결정체인 기술발전은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파괴력을 가진 전쟁무기를 만들어냈다. 결국 독가스, 기관총, 전투기, 미사일 등은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격언 이후, 인간은 지식을 습득하는데 온갖 노력을 쏟아부었다. “아는 것이 힘이다”는 인간이 가진 태초의 공포를 극복하는 선언이었다. 인간은 자연이라는 거대한 존재에 압도된 채, 살아왔다. 자연이 축복을 베풀면 배불게 먹었지만, 자연의 변덕에는 많은 사람들이 굶어야만했다다. 어두컴컴한 숲에서 우리를 쏘아보는 맹수의 눈은 우리를 공포에 떨게 했다. 하지만, 인간이 지식을 습득하면서 관계는 역전되었다. 무기를 제작한 인간은 맹수를 압도했고, 날씨를 예측할 수 있었다. 간척을 통해 새로운 땅을 만들기도 했다. 이러한 자신감은 인간이 자연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들게 했다. 하지만, 기술 발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여전히 자연을 정복하지 못했다. 늘어나는 유럽의 인구를 기술은 감당할 수 없었다. 자연의 정복으로 농업 혹은 상업 생산력이 끊임없이 성장해야 했지만, 그 성장은 오래가지 못했다. 꺾여버린 기술의 자존심은 자신이 정복할 수 있는 쪽으로 눈을 돌렸다. 자연이 총량을 늘려주지 않는다면, 타자의 것을 빼앗아 나만 총량을 늘리는 과거로 돌아간 것이다. 그리고 기술은 나보다 떨어지는 기술을 꺾고 정복하고 희열을 느꼈다.


1차 세계 대전은 오히려 기술이 인간의 진보를 가로막고 끝 모를 구렁텅이로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기술은 오히려 자연재해보다 훨씬 더 많은 인명을 앗아갈 수 있다는 것을 드러냈다. 뿐만 아니라, 전쟁은 그 자체로 반진보적이다. 인간의 진보란 무엇인가? 단지 기술의 향상인가? 아니면 더 많은 사람에게 안락함을 주고 타인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인가? 만약 진보가 인간이 자연을 이겨내는 것으로 정의된다면, 그 목표는 모두의 안락함과 타인의 권리 보호여야 한다. 하지만, 전쟁은 타인의 것을 빼앗고 죽이는 것을 조장한다. 뿐만 아니라, 전쟁은 한참 전에 사라진 신분제를 마저 군대에서 부활시키고 사유하지 않는 도구로 인간을 전락시킨다. 이처럼, 기술발전이 인간 진보가 아니라 인간 퇴보로 우리를 이끈 것이다. “서부전선 이상 없다”는 기술이 자연을 지배하지 못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쏟아지는 폭탄은 땅에 깊게 파낼 수는 있지만, 땅을 없애지는 못한다. 군인들을 쏟아지는 폭탄을 피하기 위해 참호를 단단히 파서 그 안으로 숨는다. 이처럼, 기술 발전은 자연을 정복하지 못했지만, 그 오만함은 넘치는 힘을 발휘하려는 충동으로 이어져 결국 전쟁을 불러온 셈이다.


(7) 전쟁에 대한 해결책은? “인간을 인갑답게”

그렇다면, “서부전선 이상 없다”는 우울한 소설에 지나지 않는가? 단순히 반전사상을 기반으로 쓰인 소설인가?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얻어야 하는가? 레마르크는 보이머를 통해 전쟁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인간을 인간답게”라고 생각한다.


첫째, 인문학과 철학

보이머는 참혹한 전쟁터에서 여러 가지 일을 겪지만, 전쟁과 그 참상 그리고 그곳에서 고통받는 군인들에게 측은지심을 갖는 인물이다. 물론 그의 마음은 그의 전우뿐만 아니라 러시아군 포로 그리고 프랑스군에게 까지 미친다. 보이머는 전쟁 전에, 시와 학문 그리고 인문학적 성찰을 즐기는 청년이었다. 그는 소설에서 인문학의 무의미성에 대해 여러 가지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보이머가 가장 인간적 성찰을 하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가 전쟁과 인간에 대해 성찰하고 그 부조리를 밝히는 것을 전쟁 후, 인생의 목적으로 삼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군의관과 아이히만 그리고 힘메슈트스와는 다르게 “사유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사유는 그의 책장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인간은 언론과 이야기 그리고 국가의 교육으로 인해 국가가 원하는 삶을 살게 된다. 이는 하이데거가 그의 책 “존재와 시간”에서 현존재와 비본질적 삶에서 여실히 보여줬다.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다. 그 누구도 교육을 받지 않고 살 수 없고 sns와 미디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는 우리를 속박하는 세상의 생각과 이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가? 자유를 위해서는 우리는 인문학과 철학 그리고 예술로부터 전통을 계승해야 한다. 끊임없이 사유할 수 있는 공간으로 우리를 던져놓고 인간의 본질과 국가의 역할 그리고 나의 역할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전통을 계승한 인간만이 자유로울 수 있다.


둘째, 전우애와 인류애

보이머는 끊임없이 전우애를 느낀다. 총탄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그는 동류를 찾아 헤맨다. 자신이 죽을 수 있는 상황에서 카친스키를 등에 업고 뛰었고, 크루프가 미안해서 목발에 기대어 걷는 것조차 조심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러시아 군인들에게 측은한 감정을 느끼고 자신이 살기 위해 찔러 죽인 프랑스 군인에게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프랑스군인과 참호에 갇힌 보이머는 프랑스군인에게 계속해서 물을 가져다주고 그의 가족의 주소를 적어간다. 이때만큼은 적군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으로 서로 대치하는 것이다. 보이머는 전우애와 인류애를 통해 모두를 인간 그 자체로 받아들인 것이다. 국가와 민족주의라는 허상을 넘어서,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마주한다. 인간과 인간의 교류가 전쟁을 막는 방법이 아닐까? 적군은 도깨비나 숫자가 아닌 나와 같은 피와 땀 그리고 생각을 가진 타자로 느끼고 양심의 가책을 느낄 때, 국가에 저항할 수 있지 않을까?


(8) 국가란 무엇인가?

“서부전선 이상 없다”에서 그리는 독일은 이상적 국가의 모습이 아니다. 오히려 국민의 인권을 빼앗고 전쟁으로 내모는 괴물로 그려진다. 그렇다면, 이상적인 국가는 무엇인가?


장 자크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국가는 국민에게서 권한을 위임받은 것으로 본다. 국민은 국민이 원하는 바를 달성하기 위해 국가에게 권한을 위임하고 우리를 보호해 줄 것을 명령한 것이다. 쉽게 말하면, 국민은 주인이고 국가는 그에게 봉사하는 존재다. 하지만, 독일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국왕과 정치인은 그들이 주인이라고 착가해 국민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국가란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 따라서, 국가는 국민들이 의견을 듣고 그들의 원하는 것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상적인 국가란 “민주주의”국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재 “민주주의”는 공격받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으로 인해 미국의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졌다는 기사를 우리는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이상적 국가는 단순한 “민주주의국가”가 아니라 필수요소를 갖춘 “민주주의국가”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는 무엇을 갖추었을 때, 이상적 국가가 될 수 있을까?


첫째, 민주주의는 헌법을 수호해야 한다. 민주주의의 문제는 소수의 의견이 무시되고 다수가 폭정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독일 나치당은 독일 국민에 의해 선출된 민주정부다. 그리고 독일 나치가 학살한 유태인들은 독일 내 소수 국민이었다. 독일의 다수가 소수 유태인을 죽이고 전쟁을 일으키는 것에 동의한 것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헌법이 중요하다. 헌법은 모든 법 위에 있는 법으로 행정부와 입법부 모두 헌법을 따라야 한다. 헌법은 다수의 의견이 결정할 수 있는 최대치를 정한다. 헌법은 소수자의 생명권과 재산권을 보호하기에, 헌법이 있었다면 나치가 유태인을 학살하고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둘째, 민주주의는 삼권분립을 지켜야 한다. 권력은 고이면 썩는다. 유능한 엘리트도 실수할 수 있다. 다양한 의견이 종합되고 권력의 폭주를 막을 때만 우리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수호할 수 있다. 행정부는 입법부의 견제를 받고 사법부는 행정부와 입법부의 견제를 받아야 한다. 물론 입법부 또한 마찬가지다. 전쟁을 하기 위해서 행정부가 이법부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면, 무분별하거나 무리한 전쟁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소수당의 입법부에서의 존재는 소수를 보호할 수 있다.


셋째, 소수의 의견도 자유롭게 표현되고, 언제든지 다수의 지지를 얻어 다수가 될 수 있어야 한다. 태어날 때부터 소수가 죽을 때까지 소수라면, 그들의 삶은 나아질 수 없다. 하지만, 정치 발언의 자유를 통해 소수가 타자를 설득하고 다수가 될 수 있는 장을 마련한다면, 민주주의의 다수결의 원칙은 무리 없이 지켜질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좋은 국가는 민주주의 필수 요소를 갖춘 “민주주의”다. 따라서, 민주주의 국가를 단순히 표방하는 것이 아니라 위에 이야기한 필수 요소들을 실질적으로 수호하는 국가가 진정으로 좋은 국가다.


(9) 실존주의 ‘죽음’ 개념의 한계와 해체

하이데거는 죽음의 공포 앞에서만 인간이 본질적 삶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전쟁터는 인간에게 “실존이란 무엇인가?”를 가장 극적으로 묻는 장소가 된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죽음에 선험 할 때만, 자신의 피할 수 없지만 특정 지을 수 없는 가능성을 직면하고 인간이 본질적인 삶을 살 수 있게 한다고 했다.


하지만, “서부전선 이상 없다”에서 묘사되는 군인들은 전쟁터에서 실존을 찾지 않는다. 오히려 매일매일을 견디기 위해 살아간다. 죽음이 너무 가까이 있기에 오히려, 죽음에 대한 생각은 그들을 미치게 만든다. 그리고 그들은 미래의 가능성을 위해 오늘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즐거움과 생 그 자체를 위해 산다. 보이머와 그 친구들은 전우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2명분의 식사와 담배를 받고 즐거워한다. 대변보는 시간이 가장 평온한 순간이며, 친구의 죽음 앞에서도 장화를 챙길 생각이 앞선다. 극도의 긴장감과 죽음의 공포는 실존에 대한 성찬보다 생존에 집중하게 만든다.


오히려, 알베르 카뮈의 부조리와 죽음이 더욱 현실적이다. 알베르 카뮈는 이해받기를 원하는 인간과 무관심한 세계사이의 부조리를 말한다. 인간은 죽음이 인간적 도덕성에 따라 내려지기를 원한다. 도덕적 인간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고, 비도덕적 인간은 천벌을 받기를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세계는 인간의 도덕체계에 무관심하다. 인간의 도덕은 인간이 정한 규칙일 뿐, 세계는 도덕적 인간에게 고난을 비도덕적 인간에게 축복을 내리기도 한다. 그렇다면, 부조리에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인간은 세계의 무관심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반항해야 한다. 인간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삶의 의미를 찾고,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 절망 앞에서 절망에 굴복하지 않고 나만의 삶을 살아야 한다. 보이머는 전쟁이라는 부조리에 대항해 살아간다. 전쟁은 보이머가 비인간적이길 원하지만, 끝내 인간성을 놓지 않는다. 세상은 군인이 절망에 빠져있기를 바라지만, 그들은 음식 거위 그리고 프랑스 여인들과의 밀회를 통해 행복을 추구한다. 이것이 카뮈가 말하는 “반항하는 삶”이다.


인간에게 죽음 앞에 초연하기를 바랄 수 없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삶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죽음 앞에서 좌절하지 않고 우리 인간만의 삶을 살고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실존일 것이다. 실존은 언젠가 다가올 미래가 아니라 지금 내 앞에 있다. 힘든 삶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미래를 기대하고 다양한 가능성을 추구하라는 조언은 공허하다. 오히려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고 그 안에서 의미와 행복을 찾으라는 말이 더욱 실존적 조언이다.


(10) 결론

“전쟁은 참혹한가?”, “전쟁은 일어나서는 안되는가?” 이런 질문은 너무나 자명해서 더 이상 고민의 가치가 없는 질문이다. 전쟁은 참혹하고 일어나서는 안된다. 진정 우리가 해야 하는 질문은 “전쟁을 막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이다. “서부전선 이상 없다”는 다양한 방식으로 전쟁을 막기 위한 노력을 한다. 전쟁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해 우리에게 경고하고 또는 전쟁의 원인에 대해 파해친다. 그리고 소설이 영화화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전쟁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가지는데 한몫했다. 하지만, 여전히 전쟁은 우리의 인식 바깥에서 시시 탐탐 우리를 노리고 있다. 러시아는 푸틴의 독특한 민족주의 기질과 러시아 내부의 경제적 상황 그리고 외부의 적을 설정해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시작했다. 종교적 사상에 지배된 테러리스트 하마스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희생이 불 보듯 뻔하지만, 이스라엘 국경에서 학살을 벌였다. 이스라엘 벤야민 네틴야후 수상은 이 기회를 이용해 팔레스타인과 전쟁을 했다. 이처럼, 전쟁은 계속해서 일어난다. 이는 “전쟁을 막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우리의 대답에 대해 아직 충분한 답을 내리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소설은 보이머의 죽음으로 막을 내린다. 그리나 사령부에는 단 한 줄 “서부전선 이상 없다”라는 전보만 전달될 뿐이다. 이는 전쟁에서 개인의 죽음이 얼마나 무의미하게 취급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마지막문장을 읽고 책을 덮으면서 슬픔에 잠기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처럼, 인간답게 살고, 인간답게 저항하며, 인간답게 행동하는 것이 전쟁을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보이머의 죽음은 전보에는 기록되지 않지만, 우리 인간의 마음에는 각인되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각인이 우리의 대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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