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들어진 신을 읽고 by 리처드도킨스
(1) 서론
“종교란 무엇인가?”는 인간에게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인류의 문명은 태초부터 종교와 함께해 왔다. 종교는 개별인간의 협력과 결속을 도모함과 동시에 증오, 폭력 그리고 테러 등의 돌이킬 수 없는 문제점을 일으켰다. 중세 종교 시대를 넘어, 인간에 대한 믿음이 충만해진 우리 인간은 르네상스라는 세계로 향했다. 과학의 발전은 합리적 인간상을 추구했고, 이는 종교적 인간상에 치명상을 입혔다. 그러나 종교는 사회적·역사적 변화에 적응하며 다양한 형태로 존속해 왔다. “이기적인 유전자”와 “눈먼 시계공”으로 유명한 리처드 도킨스는 “만들어진 신”에서 종교를 향한 비판의 날을 본격적으로 벼린다. 그는 종교적 세계관이 과학적 이성과 진보를 잠식한다고 비판하며, 종교는 개인의 자유뿐 아니라 인류 발전을 저해하는 구조적 장애물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 책을 통해서 “신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고 “종교의 해악”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종교가 없는 세상”에 대해 자신의 상상력을 펼치면서 책을 마무리한다. 종교 논쟁은 본질적으로 합의에 이르기 어렵다. 종교의 특성상 객관적 논증이 불가능하고, 대부분의 종교가 유일신을 믿기 때문에, 타 종교나 무신론에 대한 동의는 곧 자신의 신앙 부정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교를 비판하더라도 그 입장을 공개적으로 드러내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리처드 도킨스는 자신이 믿는 바를 밀어붙이며,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논쟁의 불길 속으로 스스로 들어갔다. 그의 용기와 학자로서의 태도는 존중받아 마땅하다. 이 책을 진지하게 읽고, 스스로 사유해 보는 것. 그것이 독자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응답일 것이다.
(2) 신은 존재하는가?
리처드 도킨스는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만들어진 신”을 시작한다. 매우 도발적인 이 질문을 시작하기 전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오해를 바로 잡는다. 신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아인슈타인과 스티븐 호킹이 유신론자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생애에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아인슈타인이 양자역학을 비판하기 위해서 한 표현)”등의 유신론자들이 오해하기에 충분한 표현을 했다. 하지만, 도킨스에 따르면 과학자들이 믿는 신은 종교에서 말하는 인격신이 아니다. “그들은 ‘자연의 질서’나 ‘우주의 경이로움’을 신이라는 은유적 표현으로 썼을 뿐”이다. 반면에,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인격신은 야훼, 하나님, 알라처럼 인간의 기도에 반응하고 자신의 의견을 인간들에게 성경을 통해서 전하는 신을 말한다. 이들은 자연법칙을 총괄하고 인간은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꾸준히 인간들과 소통한다. 물론 소통이 일방적이기는 하지만, 믿음을 통해 구원해 주고 예언하고 보호해 주는 그러한 신이다. 그리고 리처드 도킨스의 종교 비판은 인격신에 한정된다.
도킨스는 이제까지 행해진 신 존재 증명을 반박하며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
먼저 13세기 유명한 신학자는 부동의 원동자를 통해 신을 존재한다고 했다.
“우리가 사는 물리세계는 인과법칙에 영향을 받는다. 모든 현실은 특정 원인의 결과다. 지금의 세상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태초에 행위를 했어야 한다. 태초의 행위자는 원인이 없이 존재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를 신이라고 부른다.”
첫째, 부동의 원동자는 전지전능하다. 하지만, 전지와 전능이라는 특징은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 만약에, 신이 전지하다면(어디든지 존재하고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면), 미래에 전능이라는 능력을 통해 미래를 바꿀 필요가 없을 것이다. 신이 미래를 바꾸려 한다면, 처음부터 그렇게 만들었어야 한다. 신은 항상 자신이 창조한 세계에 직접적인 명령을 통해서 미래를 바꾸려고 하는데, 이는 전지한 신의 입장에서는 모순이라는 것이다.
둘째, 부동의 원동자는 신의 존재를 유추할 뿐 설명하지 못한다. 오현대 물리학의 빅뱅, 다중우주, 블랙홀 이론 등이 오히려 더 간결하고 경제적인 설명을 제공한다. 책에 나오지 않았지만, 이는 영국의 수도사 오컴이 면도날에 따르면 후자가 옳은 논증이다.
두 번째는 신존재 연역증명이다.
“인간은 세계에 없는 것을 떠올릴 수 없다. 지금 눈을 감고 가장 완벽한 실체를 떠올려 봐라. 이는 “신이다.” 따라서, 신은 존재한다.”
이 논증은 철학적·인지과학적 관점에서 쉽게 반박될 수 있다.
첫째, 인간은 세계에 없는 것도 떠올릴 수 있다. 유발하리리는 “호모사피엔스”에서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 무형의 것을 떠올리고 믿을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이를 바탕으로 자연 먹이사슬의 맨 꼭대기에 위치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유니콘을 생각할 수 있다. 왜냐고? 세상에 존재하는 말과 날개 그리고 뿔을 조합하여 존재하지 않는 것을 믿을 수 있는 우리의 능력 때문이다. 따라서, 신을 떠올릴 수 있다고 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는다.
둘째, 우리가 떠올리는 그 신은 “완벽한 존재”가 아니다. 만약에 떠올린 그 신이 “완벽한 존재”라면, 인간마다 다른 존재를 믿어서 발생하는 “종교분쟁”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신존재 연역증명은 모순이다.
세 번째는 개인적 “경험” 논증이다.
도킨스는 많은 사람들이 “신이 존재”한다는 계시를 받았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도킨스는 오히려 이것은 인간의 확신을 추구하는 능력과 후설이 이야기한 지평을 통한 “더 많이 생각함”이라는 능력의 오류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친구의 사례를 말한다. 자신의 친구는 여자친구와 캠핑을 가서 악마의 울음을 듣는다. 그 이후 그 친구는 과학자의 길을 포기하고 성직자가 되기를 선택했다고 한다. 도킨스는 이 일화를 자신의 조류학자 친구에게 들려주었고 그 조류학자는 그 새가 세계 각지에서 악마 새라고 불리는 “맨섬 슴새”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처럼 도킨스는 인간의 종교적 계시 경험을 ‘인지적 착각’ 또는 ‘오류적 예측’으로 간주한다. 물론 그럴 수 있지만, 이는 도킨스의 오만함이 보이는 논증이다.
인간은 자신의 감각계에 한정되어 세상을 바라본다. 도킨스의 친구가 들은 악마의 외침이 “맨섬 슴새”였을 수도 있지만, 현장에 없었던 조류학자의 주장이 친구의 주장보다 정확할 수는 없다. 윌리엄 제임스는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에서 개인적 종교체험이 사례에 대해서 나열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가 직접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이처럼 많은 사람이 종교체험을 경험했다면 이는 사실일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로 인해 개인의 삶이 변했다면 단순히 우연 혹은 착각으로 치부하기에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엘리야데는 “성과 속”에서 성스러운 것은 속스러운 것을 매개로 현현한다고 했다. 속스러운 것은 모든 인간은 다른 인간과의 공통적 감각기관으로 속스러운 것을 느끼지만, 속스러운 것이 성스러운 것으로 변하는 그 순간은 인간의 감각기관을 넘어서 있다. 도킨스는 종교적 신념의 비합리성을 비판하지만, 정작 그의 주장인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 역시 반증 가능하지 않다. 칼 포퍼가 말했듯이, 과학적 명제는 반증 가능성(falsifizierbarkeit)을 가져야 하며, 이를 통해 과학은 신념과 구별된다. 도킨스는 이 기준을 종교에 적용하지만, 자신의 주장 역시 포퍼적 기준에선 과학이 아니라 신념에 가까워진다. 나의 경험에 대해 내가 서술하는데, 도킨스는 “그건 실수이고 이거에 지나지 않아”라고 주장한다. 개인적 경험을 반증하기 위해서는 그 경험이 발생한 시간과 공간에서 증거를 채택하고 반박해야 한다. 따라서, 도킨스의 개인적 “경험”논증 반박은 허술하다.
(2-1) 다윈의 진화론과 지구의 탄생
창조론자들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너무나도 경이롭고 복잡하고 아름답기에 신이라는 완벽한 존재가 설계했을 것이라는 “지적선택”론을 주장한다. 반면에, 진화론자답게 도킨스는 세상이 만들어진 원인을 다윈의 “진화론”을 통해서 설명한다. 다윈의 “진화론”은 진화와 자연선택 그리고 긴 세월에 걸친 축적으로 설명된다. “지적선택”과 다르게 “진화론”은 단순한 존재가 복잡한 존재의 원인이라고 말한다. 단세포 생물이 돌연변이로 인해 새로운 특징을 가지게 되고 새로운 특징이 자연의 선택을 받으면 그 특징을 보유한 생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조상은 원숭이이고 원숭이의 조상은 원숭이 보다 덜 복잡한 그 어떤 생물체인 것이다. “진화론”에서는 어떤 설계도 필요치 않다. 필요한 것은 “한순간의 실수(돌연변이”와 “자연의 선택을 받을 만한 경제성”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변화가 오랜 세월에 걸쳐서 쌓이고 쌓이면 인간과 같은 복잡한 존재로 진화한다.
“진화론” 또한 반증가능성을 가진 도킨스의 주장은 반증할 수 없다기에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는 없다.
첫째, “진화론”은 지구의 존재를 설명할 수 없다. 태초의 존재가 진화를 통해 다음 단계로 진화하기에 진화론은 태초의 존재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태초의 존재는 어떻게 태어난 것일까? “지적설계”는 태초의 존재가 신에 의해 창조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면에 과학계에서는 빅뱅이론을 펼친다. 빅뱅이론은 아무것도 없는 우주가 태초의 폭발로 인해서 생성되었다고 주장하는데, 우주가 완전한 진공상태라면 불가능할 수 있다. 하지만 카시미르효과, 램이동, 진공 극화에서 처럼 진공상태에서 에너지의 이동이 가능하다는 실험결과가 있다.
둘째, 지구는 생명이 존재하기에 축복받은 행성이다. 지구와 태양의 거리는 생명이 살기에 딱 알맞은 골디락스존에 있다. 중력, 질량비등 7가지 우주 상수가 생명이 탄생할 수 있게 딱 맞추어져 있다. 달의 존재, 수소, 탄소, 지구의 자기장등 우연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행운이 깃든 행성이 지구라는 것이다. 이런 축복이 어떻게 우연에 의해서 지구에만 내릴 수 있을까? 여기에 만족할만한 설명은 없지만, 우주의 크기를 생각해 보면 상상할 수 없는 가능성은 아니다. 과학적 근거에 따르면, 생명 가능 행성의 수는 10 ²¹개 중 최소 수백억 개 이상일 가능성도 존재한다. 이렇게 많은 행성 중에 저 모든 조건을 가지는 행성이 있다는 것이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닐 것이다.
셋째, 환원불가능한 복잡성이다. 만약, 인간이 진화의 결과라면 단계별 진화를 거쳤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의식이나 자유의지 등은 더 단순한 부분으로 설명이 불가능하다. 인간의 의식이 이전 단계가 있을까? 도킨스는 환원불가능성에 대해 어느 정도 인정하지만, 도킨스는 이를 지식의 한계에서 비롯된 현상으로 보고, 진화론을 반박하는 사례로 보지 않는다. 여기서 도킨스가 가진 종교의 가장 큰 문제를 보여준다. 종교는 설명되지 않는 것에 대해 설명을 찾으려고 하지 않고 신이라는 존재를 상정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인류 발전을 막는다고 한다.
진화론이 모든 것을 설명하지 못하고, 인류는 그 질문 앞에서 고뇌하고 있다. 그럼에도 진화론은 계속해서 설명의 범위를 확장하고 있으며, 종교는 그 자리를 멈추어 세운다
(3) 종교의 기원
도킨스의 주장처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종교의 기원은 무엇인가? 존재하지 않는 신을 위해 인간이 자유와 목숨을 바치는 것이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도킨스는 이에 대한 해답을 진화의 부산물에서 찾으려고 한다.
먼저, 종교의 기원은 집단선택의 결과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들에 따르면, 인간은 타자와의 교류에서 크나큰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리고 그 스트레스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는 어떤 사회적 제도가 필요하다. 그리고 종교가 그 역할을 이어받았다는 것이다. 또한, 과거에 타 집단과의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단결성과 질서 그리고 도덕성이 필요하다. 생존을 위해 투쟁하는 개별인간들은 근본적으로 이기적이다. 하지만, 단결성과 질서 그리고 도덕성은 이타성을 기반으로 한다. 자기의 혈육을 넘어서서 이타성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사후세계 혹은 절대자의 존재가 필요하고 이를 위해 종교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도킨스는
“자연선택은 개체 또는 유전자 수준에서 일어난다. 자연선택적 진화가 집단으로 넘어가는 것을 사실상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큰 집단에서 배신자는 항상 존재하고 생존에 유리하다. 집단이 커지면 커질수록 배신자의 숫자는 늘어나고 집단은 번성할 수 없다.”
고 말하며, 집단선택론에 반대한다. 이는 “이기적 유전자”에도 설명된 개념으로 겉보기에 이타적 행동을 하는 동물들이 실제로는 이기적 선택을 한다는 것을 기반으로 한다. 사자에 노출된 무리에서 눈에 띄기 위해 날뛰는 얼룩말은 자신이 미끼가 되어 집단을 보호하기 위함이 아니다. 자신이 건강하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사자가 자신을 사냥하지 않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반면에 도킨스는 종교는 진화의 부산물이라고 한다. 자연선택은 유전자 수준에서 일어날 뿐만 아니라 경제적이다. 종교가 경제적인가? 아니다. 종교적 인간은 신이라는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인가를 위해서 매일 기도하고 자기를 억압한다. 또한 종교적 의례를 위해서 쓰이는 물자는 무시할 수 없다. 집단선택론이 일부 타당성을 가질 수 있으나, 초기 집단 형성을 완전히 설명하지는 못한다. 집단선택론에서 집단은 단기적 손해를 장기적 생존으로 갚아준다. 하지만, 장기적 생존이 체험되기까지는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아무도 모른다. 또한, 장기적 생존이 체험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과거에 자기의 손해를 보상할 만큼 가치가 있는가에 대한 설명도 필요하다. 인간은 불합리한 인간으로 단기적 손해를 장기적 이득보다 더 중요시 여긴다. 그리고 이는 다양한 실험을 통해서 밝혀졌다. 따라서, 집단선택론에서 처럼 단순히 집단의 이익을 통한 종교의 성립이라는 설명은 충분치 않다.
도킨스는 마음이론으로 이원론을 보이지 않는 것을 감지하려는 지평으로의 인식을 신의 존재의 원인으로 설명한다. 먼저 인간은 타자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했을 때 생존할 수 있다. 나에게 적의가 있는지 아니면 나의 친구인지 알아야만 그에 적절한 대처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타자를 속여야 할 이유도 있다. 왜냐하면 타자가 나의 의도를 확실히 알게 되면 이는 나의 카드를 다 보여주는 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타자의 행동과 다른 의도를 파악하는 과정에서 몸과 정신이라는 다른 2가지 모습이 있다는 생각으로 귀결되었다. 그리고 이는 종교의 이원론으로 발전했다. 또한 인간은 불확실성을 싫어한다. 왜냐하면 불확실한 자연과 세계는 위협이자 죽음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특정 그림자를 보고 강도로 오해할 수 있지만, 강도를 보고 그림자로 오해하지는 않는다. 이는 진화적으로 옳은 선택이다. 이처럼 인간의 불확실성에 대한 극단적 혐오는 자연세계를 설명해 주고 죽음 이후의 세계를 상정해 줄 신의 존재를 갈망하게 했다. 그리고 종교가 탄생한 것이다.
집단선택론은 종교를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인 요소로 보기 때문에 종교를 반대하지 않고 종교의 수정을 요구한다. 지금 우리 세대가 겪는 정신적 혼란은 필시, 종교의 개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반면에, 도킨스에게 종교는 부산물에 불과하기에, 없어져야 할 것에 불과하다. 이처럼 도킨스는 종교에 대해 서슬 퍼런 날을 세우고 있다. 그리고 그다음 장은 도킨스가 가지는 이런 불만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4) 종교 없는 도덕은 가능한가?
도킨스는 종교가 도덕의 원천이라는 종교적 주장에 반대한다. 오히려 도킨스는 종교가 인간의 도덕성을 해할 뿐이라고 말한다. 도덕성이란 무엇인가? 도덕성은 타자의 존재를 인정하고 집단을 위해 타자와의 관계를 긍정하고 나를 대하는 것처럼 타자를 대하는 것을 말한다. 예로부터, 철학자들은 이성이 도덕의 원천이 될 수 있음을 주장했다.
먼저 칸트는, 신에 의지하지 않고 이성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라고 말했다. 신의 존재하는지 하지 않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사변적 논의는 멈추고 자신의 이성에 따라 행동하라는 것이다. 이는 “나에게 할 행동만큼만, 타인에게 하라는” 정언명령에 잘 표현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후설은 “데카르트적 성찰”에서 타자경험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에게 타자 경험이란, 내부를 알 수 없지만 타자의 신체를 통해 타자가 나와 같음 알아가는 과정이다. 타자가 나와 같기에, 타자에 대한 행동이 과격하거나 비도덕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이 도덕적인 이유는 단순히 종교적이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디킨스의 주장은 합리적이다.
종교인들은 성경에 기대어 도덕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디킨스의 주장을 지지하는 듯하다. 성경에는 지금은 이야기 조차 할 수 없는 여러 가지 내용이 쓰여있다. 천사를 보호하기 위해 자기의 딸들을 폭도들에게 바치기를 서슴지 않았던 롯이나 안식일에 일을 했다고 돌에 맞아 죽는 벌을 당한 노동자의 예시들이다. 종교인들은 성경에 있는 모든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시대에 맞는 내용을 선별해서 믿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자체가 인간의 도덕적 능력을 믿는 것이라고 디킨스는 주장한다. 도덕의 기준이 오직 신의 계시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신앙인들도 경전의 내용을 상황에 따라 취사선택한다. 이는 곧 도덕의 판단자가 신이 아니라 인간임을 반증한다.
디킨스는 종교의 특성, 성경을 있는 그대로 믿으려는 근본주의, 자기 민족 혹은 자기 종교만을 중시 여기는 배타주의 등은 종교가 도덕의 원천이 아니라 비도덕의 원인이라고 말한다. 근본주의자들은 생명을 보호한답시고 정당한 낙태를 반대하고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반대한다. 배타주의자들은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전쟁처럼, 다른 종교를 몰아내고 자기만의 왕국을 세우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자유를 배격하고 특정종교를 강요하고 특히 여성의 인권에 매우 인색하다. 이란에서 도덕경찰의 폭력에 사망한, 마흐사 아미니의 사례는 종교의 이면에 숨겨진 폭력성을 보여준다. 종교는 절대자를 내세우기 때문에 근본주의 배타주의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절대자를 증명할 수 없어, 절대자의 존재를 세뇌시키고 성경을 신성시한다. 이런 교육을 받은 아이들은 근본주의자가 된다. 또한, 유일신의 존재는 다른 종교를 인정하면 나의 종교를 부정하게 되고 이는 배타주의자가 된다. 또한, 사후세계가 목표인 종교에서 개인은 사후세계를 위해 지금의 세계를 희생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는 폭력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는 도덕의 전제조건인 보편성과 충돌한다. 도덕은 타자를 위한 본인 희생이다. 이는 나와 타자는 보편적 존재라는 개념하에서만 성립된다. 그리고 칸트와 후설은 이점을 강조했지만, 위에 말한 배타주의와 근본주의는 보편성을 자기 존재를 위협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4-1) 종교 없는 도덕은 가능하지만 어렵다.
나는 도킨스가 종교 비판에 집중하는 과정에서 그의 과학적 논리의 일관성이 일부 훼손되었다고 본다. 먼저, 성경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성경은 무엇인가? 성경은 절대자의 말을 인간이라는 유한적 매개를 통해 적어 내려 간 책이다. 비록 성경의 저자가 신의 명령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이는 매개에 지나지 않는다. 매개는 언어와 사고체계에 귀속된다. 그리고 절대자의 말을 매개의 언어와 사고체계의 표현이다. 따라서, 지금 읽는 성경에서 보편적 도덕성을 읽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마치 과학이 과거의 패러다임으로 인해 일으킨 문제를 가지고 모든 문제의 원천이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물론 과학은 성경이 없기 때문에 새로운 패러다임의 등장은 과거의 패러다임을 없애고 새로운 교과서를 만들지만, 과학도 같은 과정을 겪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에서 중요한 것은 지금 시대의 매개에게 주어진 도덕적 법칙을 해석하고 전파하는 것이다.
둘째, 종교가 미국이나 유럽 등 선진국에서도 문제가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개발도상국에서 더 큰 문제다. 이는 종교의 매개가 사회의 상황에 영향을 받는다는 첫 번째 반박과 궤를 같이 한다. 그렇다면,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을 가른 원인은 무엇인가? 이는 과학이다. 산업혁명으로 급격한 성장을 한 서구는 그들의 과학적 기술을 이용해 식민지를 건설했고, 이는 지금의 나라 간 빈부격차로 이어졌다. 제국주의 국가는 식민지에서 값싸게 원재료를 수입하고 비싼 가격에 완제품을 팔아넘겼다. 그리고 식민지 통치를 쉽게 하기 위해 민족 종교 간의 반목을 이용했다. 이는 과학과 자본주의가 결합해서 지옥을 만들어낸 역사적 배경이다. 그리고 디킨스는 종교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기 위해 극단적 사례들을 이야기했는데, 이는 과학도 마찬가지다. 1차 2차 세계대전이 많은 사상자를 만든 이유는 과학을 이용한 신무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는 우리는 과학을 비난하는가? 과학을 오용한 정치인을 비난하는가? 명백하게 우리는 후자를 비난하고 이는 종교에도 적용되어야 마땅하다.
셋째, 도킨스의 주장은 다소 오만하게 들릴 수 있다. 종교가 없어도 우리는 도덕적일 수 있고 심적으로 풍요로울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합리적 과학적 인간이기 때문이다. 아니 그럴 수 없다. 대부분의 인간은 약하고 그 어떤 것에 기대고 싶어 한다. 종교가 떠난 자리는 정치극단주의가 자리 잡을 가능성이 높다. 종교적 극단주의는 종교의 특성과 그 사회 특성의 결과이지 종교가 원인이 아니다. 아일랜드의 종교 분쟁은 영국의 식민정책이 한몫했다. 만약, 영국의 식민시절이 없고 경제적 불평등이 없었다면, 이처럼 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도킨스의 주장대로 만약에 인간이 합리적이고 강하다면, 종교가 사라지지 않은 것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합리적인 인간이 부정적인 것으로만 가득 찬 종교를 그대로 믿는 것은 서로 공유할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사람들을 만족시키고 충만하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킨스의 인간에 대한 믿음은 어느 방향으로 가든 공허하고 모순적이다.
(5) 종교는 필요한가?
디킨스의 결론은 “종교는 해악이다. 종교는 인간의 능력과 자유를 억압한다. 따라서, 종교보다는 인간을 믿자”다. 나의 결론은 디킨스의 주장은 옳기도 하고 그르기도 하다. 하지만, 디킨스의 종교에 대한 원망이 디킨스의 과학적 접근법을 오히려 거슬렀다고 생각한다. 물론 도킨스의 비판은 종교가 자행한 역사적 폭력과 반지성주의에 경종을 울리는 면에서 의미 있다. 특히 그는 종교가 과학적 탐구를 억압하고, 근본주의가 여성과 소수자를 억압한다는 사실을 날카롭게 짚는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그러한 비판을 종교 전체로 일반화하고, 종교적 체험의 다양성을 단일한 오류로 환원한다는 데 있다.
칸트는 그의 책 “순수이성비판”에서 우리의 인식 능력에 대해서 말한다. 인간의 인식능력은 오성과 감각에 의해서 바깥의 현상을 인식한다. 인간의 인식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체계와 범주를 따르기에 이를 넘어서는 것은 알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신의 존재를 알 수 없고, 그에 대한 논의 할 수 없다. 칸트에게 신을 증명의 대상이 아니라 요청의 대상이다. 인류에 적용가능한 도덕법이 정당성을 얻기 위해서는 가정되어야만 하는 규범적 필연성으로서의 신을 뜻한다. 디킨스는 칸트에 따르면 자신이 증명하지 못하는 것을 주제로 삼고 증명하지 못했다고 비난하는 것이다. 하지만, 디킨스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를 증명하지 못한다. 그가 날아다니는 찻잔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신의 존재는 주장되고 있다. 하지만, 디킨스가 말한 것은 그 주장들의 비논리성일뿐,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증명이 아니다. 그리고 자신이 증명하지 못하는 것을 기반으로 논리를 펼치고 있기에 이는 과학적 접근은 결코 아니다.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면, 우리의 논의는 “종교의 존재”가 아니라 “종교의 미래”가 돼야 할 것이다. 위에 언급한 것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믿고 있다. 이들이 합리적인 존재라면, 디킨스가 모르는 그 무엇인가가 그들을 붙잡고 있을 것이다.
윌리엄 제임스부터 엘리야데까지 종교학자들은 종교적 경험의 개인성과 다양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윌리엄 제임스는 종교는 체험이고 그리고 체험은 개인적이라고 했고, 엘리야 데는 성스러운 것은 속스러운 것으로부터 나온다고 했다. 그리고 속스러운 것이 성스러운 것으로 현현하는 순간은 종교적 인간에게만 허용된다고 했다. 종교적 인간과 비종교적 인간을 엄밀히 구분할 명확한 기준은 존재하지 않지만, 열린 마음으로 종교적 신호를 받아들이고 수용할 줄 아는 인간이 종교적 인간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디킨스의 종교에 대한 공격은 편협하고 다시 비과학적이다. 다양한 경험의 가능성을 수용하지 않고 오직 편협한 한 가지 방법, 그에 따르면 부르카를 입은 여성의 시선만을 옹호하는 것과 같다. 물론 디킨스의 주요 불만은 종교적 가르침이 탐구보다는 만족과 계시에 따르기에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디킨스도 동의한 것처럼 뉴턴, 칸트 등 당대의 유명한 과학자와 철학자는 종교를 가지고 있다. 이는 종교와 과학적 탐구는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종교라는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 철학자들이 어두운 앞날에 조그마한 빛이 되어 그들을 앞으로 인도한다.
종교는 인간의 운명이 정해져 있고 신만이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이에 어떤 사람들은 회의주의로 순응하지만, 막스베버가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말한 것처럼 어떤 사람은 자신이 운명을 스스로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한다. 미국의 종교인들은 그들이 구원되었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확신하기 위해 낭비를 멈추고 하느님의 세상을 더욱더 발전된 나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이는 근대 자본주의 정신의 토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운명론이란 운명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옳은 일을 행할 때, 그에 맞는 결과가 뒤따른 다는 자기 확신의 기반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따라서, 종교와 탐구 그리고 인간의 역량은 공존할 수 있고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공존의 결과다,.
종교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논란거리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나타난 종교의 부흥(한국은 예외다)이 보여주듯이, 종교는 계속해서 인류에게 큰 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종교 자체를 본질적으로 ‘죄’로 볼 수는 없다. 종교는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개인의 노력 그리고 그에 따르는 도덕적 삶을 요구하는 성스러움과 속스러움이 결합된 그 어떤 것이다. 문제는 인간의 종교적 신념을 이용하는 종교 지도자 그리고 정치인들이다. 그들의 욕심이 종교를 타락시키고 종교적 인간을 변질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는 변화와 보완 그리고 우리가 돌려받아야 할 것이지, 폐기되야 할 것이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