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진짜 행복하십니까?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 묻다

멋진 신세계를 읽고 by 올더스 헉슬리

by 사회철학에서 묻다

1. 서론

조지 오웰의 “1984”와 함께 대표적인 디스토피아 소설인 “멋진 신세계”는 인간의 자유와 인간다움의 의미를 되묻게 만드는 작품이다. “멋진 신세계”는 1차 세계대전(1914 - 1918년)의 참혹한 여운과 대공황(1929년)으로 경제가 완전히 무너진 1932년에 쓰인 책이다. 전쟁과 공황으로 세계는 침체에 빠졌지만 미국의 포드주의는 기술이 현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낙관주의가 싹트기 시작했다. 하지만, 올리버 헉슬리는 과학만능주의가 지배하는 미래를 유토피아보다는 디스토피아로 생각했고 “멋진 신세계”에 디스토피아를 그려냈다. 비록 “멋진 신세계”가 1932년에 창작되었지만, 지금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오히려 이 소설은 창작 당시보다 오늘날 더 큰 울림을 준다.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이 커져버린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효율성을 기반으로 행복을 추구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종교와 고전으로 대표되는 예술은 자본이라는 거대한 힘에 의해 인류의 삶의 무대에서 조금씩 밀려나고 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의 본질을 돈으로 제단하고 대안적 삶을 살려는 인간에게 비난하고 모욕을 주는 지금의 상황은 헉슬리가 경고하려는 미래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멋진 신세계』는 지금 반드시 다시 읽어야 할 작품이다.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고, 어떻게 진정한 자유를 지킬 수 있는지를 되새길 때에만, 우리는 확장하는 자본주의의 흐름 속에서 우리 자신을 지켜낼 수 있다.


2. 줄거리

“멋진 신세계”는 알파, 베타, 감마, 델타, 그리고 앱실론으로 이루어진 계급사회다. 각 계급은 각자가 할 일이 정해져 있고 계급 간의 이동은 불허된다. “멋진 신세계”에서 결혼과 출산은 금지되며, 모든 출산은 인공적으로 이뤄진다. 인공수정과 배아 조작을 통해 지능과 신체가 설계된다. 알파는 최상위 계급으로, 이에 배정된 태아는 충분한 산소 공급을 통해 높은 지능과 월등한 체격을 가진다. 반면, 앱실론은 최하위 계급으로, 낮은 지능과 열등한 체격을 갖는다. 높은 계급은 지식과 관련된 직업을 가지고, 델타와 앱실론은 하급 노동을 맡는다.


이런 계급사회가 유지되는 이유는 조건화 교육 때문이다. 조건화 교육은 개인이 자신의 계급을 본능적으로 사랑하고, 다른 계급을 경멸하도록 만든다. 예를 들어, 어린 시절 앱실론 계급 아이들에게 책과 꽃을 보여준 후 바로 전기 충격을 가해 공포를 학습시킨다. 이후 성장한 앱실론들은 책을 가까이해야 하는 알파를 가장 불행한 사람들로 여긴다. 이처럼 인위적인 방법으로 계급사회는 만들어지고 유지된다. 디스토피아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의 시민들은 쾌락, 행복, 안정 등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를 충분히 누린다고 믿는다. 그리고 “소마”라는 마약은 불행이 찾아올 기회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계급에 배속된 사람들은 효율성을 위해 일하고 행동하며, “만인은 만인의 소유”라는 구호 아래 모든 구성원들은 자유롭게 성관계를 맺는다. 이들에게 사랑, 출산, 엄마는 구역질 나는 단어일 뿐이다.


버나드 마르크스는 알파 계급이지만 외모가 매력적이지 않고 키가 작다. 소문에 따르면, 마르크스를 관리하던 간호사가 산소를 제대로 공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외모 때문에 마르크스는 알파로부터 소외되고, 베타와 감마로부터 무시당한다. 매력적인 베타 여성인 레니나는 자유로운 성관계를 즐기는 다른 여성들과 달리, 한 남성과 긴 관계를 유지하려는 특이한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 때문에 그녀는 마르크스에게 관심을 갖게 된다. 레니나와 마르크스는 함께 야만인 지역을 방문하고, 그곳에서 린다와 존을 만난다.


린다는 문명인이었지만 사고로 야만인 사회에서 살게 되었고, 존은 그녀의 아들이다. 뚱뚱해지고 늙은 린다와 달리, 존은 여전히 잘생기고 매력적이다. 마르크스는 상부의 허락을 받고 린다와 존을 문명사회로 데려온다. 문명사회에서 마르크스는 존을 이용해 명성을 얻고, 처음에는 그의 뜻대로 행동하던 존도 곧 문명사회에 실망하고 방황한다. 반면 린다는 혐오스러운 겉모습으로 인해 사회에서 도태되고, 소마에 중독되어 죽는다.


이에 폭발한 존은 소마를 던져버리고, 존과 마르크스, 그리고 헬름홀츠 왓슨은 무스타파 몬드에게 끌려간다. 무스타파 몬드와 존은 논쟁을 벌이고, 존은 체제 유지를 위해 과학, 예술, 종교를 포기한 사실을 듣고 충격을 받는다. 그는 지금의 세상에서 살 수 없음을 깨닫고 외딴곳으로 숨어들어 노동과 단식 등을 통해 고통을 느끼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는 곧 매체에 발견되어 문명사회에 의해 철저히 소비된다. 그리고 사랑했던 레니나의 방문으로 삶을 지속할 의지를 잃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3. 정부의 자기 정당화

『멋진 신세계』의 정부는 자신들의 정책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무스타파 몬드는 존과의 대화에서 이렇게 말한다.

“시민들은 모두 행복해. 뭐가 문제야?”

시민의 욕구는 충족되고 있으며, 고통은 존재하지 않는다.


무스타파는 마지막에 존에게 묻는다:


“늙고, 추해지고, 무력해질 권리; 매독과 암에 걸릴 권리; 먹을 것이 부족할 권리; 더럽고 불결할 권리;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끊임없이 불안해할 권리; 장티푸스를 앓을 권리;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모든 종류의 고통에 시달릴 권리.”


정말, 고통 없는 사회는 선인가 악인가? 현대 사회를 사는 우리 모두는 행복을 추구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 체제는 '선'이라 부를 수도 있다. 무스타파가 말한 늙음, 병, 추함, 불결함은 실제로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조건들이다.


이 사회에서는 유전자 조작을 통해 질병은 제거되고, 육체노동은 조건화 교육을 통해 ‘사랑하는 노동’으로 전환된다. 하위 계급은 자신이 낮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다. 소마의 존재는 이 소설이 과연 디스토피아인지 독자에게 다시 묻게 만든다.


오늘날 뇌과학은 우리에게 말해준다. 도파민, 세로토닌, 옥시토신, 엔도르핀이 분비될 때 인간은 행복하다고 느낀다. 즉,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도 이 네 가지 호르몬이 분비된다면 우리는 스스로 행복하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행복은 단지 뇌의 화학적 반응에 불과한가?


자유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가 믿는 자유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행복감을 유발하는 자극일 수도 있다. 만약 자유가 없이도 교육과 소마를 통해 호르몬을 분비시킬 수 있다면, 그 사회는 어쩌면 더 ‘합리적’ 일 수 있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사람이 행복할 수는 없다. 자본은 유한하고, 우리는 타인과 끊임없이 비교하도록 훈련받는다. 내 행복은 누군가의 불행을 전제한다. 그렇다면 ‘모두가 불행하지 않은 사회’, ‘경제 불황도, 전쟁도 없는 사회’, ‘모두가 모두를 사랑할 수 있는 사회’는 어쩌면 우리가 꿈꿔야 할 진짜 유토피아가 아닐까?


4. 무엇이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가? 고통 그리고 감정

야만인 존은 무스타파의 주장에 “나는 고통을 원한다.”라고 대답한다. 그는 “고통만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든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가?


먼저 행복에 대해 이야기해 보도록 하자. 행복은 인간이 추구하는 궁극적 목표인가? 아니면 인간의 선택에 불과한가?


존은 행복이란 선택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존에게 있어서 인간은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할 때,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지능과 자유의지가 인간을 동물과 구분 짓는다. 물론 “멋진 신세계”에 사는 인간들도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동한다. 우리를 규정하는 도덕이나 사회룰은 없다. 그들은 본능에 따라 성관계를 하고 고민할 일이 있으면 소마를 복용한다. 그들은 단지 체제를 따르고 의심하거나 불안해할 자유만 없을 뿐이다. 하지만, 존은 이것이 그들에게서 인간성을 빼앗아갔다고 말한다.


첫째, 본능을 따르는 것은 자유가 아니다. 동물들이 자유롭지 못한 이유는 맹목적으로 그들에게 프로그램된 본능을 따르는 것이다. 본능에 따라먹고 행동하고 자고 사냥한다. 다른 개체에 대한 측은지심은 없다. 단순히 정해진 자연의 시곗바늘만이 그들을 움직이게 만든다. 이런 의미에서 진정한 자유는 본능에서 벗어나, 인간이 생각하는 더 나은 사회와 인간이 되기 위해 문명을 세우는 것이다. 우리를 속박하는 것을 거부하는 자유만이 진정한 자유다. 왜냐하면 인간의 지능은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벗어나 더 나은 세상을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체제의 요구에 따라 본능을 따르고 생각할 의지를 내던진 “멋진 신세계”의 문명인들은 자유롭지 않고 비인간적이다.


둘째, 변화를 추구하는 인간만이 인간적이다. 인간은 한계에 봉착하고 고통을 느낄 때 좌절하고 포기하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의 상황을 뛰어넘고 새로운 세상을 추구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그리고 고통과 감정은 인간이 더 나은 상황으로 나아가기 위해 꼭 필요하다. 인간이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지금의 상황에 불만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고통을 견디기 힘들 때, 고통의 크기가 사람이 생에 대한 집착보다 클 때 인간은 기꺼이 희생하고 방법을 찾아 나선다. 그리고 행동을 위한 고통은 나에게만 적용되지 않는다. 인간의 감정으로 인해 사랑하고 측은해하는 연인이나 가족에게 가해지는 고통 또한 인간을 행동하게 만든다. 인간의 행동과 변화에 대한 추구는 피할 수 없는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셋째, 오직 인간만이 죽음으로부터 진정 자유로워질 수 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인간의 본질은 정해져 있지 않고 실존을 추구한다. 그리고 실존은 모든 다양한 가능성을 내포한다. 하지만, 죽음은 피할 수 없고 언제 다가올지, 어떻게 죽을지 정해지지 않았다. 이처럼 무규정적이고 피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인간은 행동한다. 또한 인간의 행동에 따른 변화는 인간을 죽음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육체적 죽음은 나의 존재를 없앤다는 그 명제는 인간이 언젠가는 죽음에 굴복할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하지만, 인간이 행동과 그로 인한 변화는 인간이 죽고 나서도 남아서 나의 발자취를 남기게 해 준다. 따라서, 변화를 추구하는 인간만이 자유롭고 인간적이다.


이제 존은 정해진 행복을 거부하고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인간성을 지키고자 했던 것이다.


5. 예술, 과학 그리고 종교

무스타파는 자신의 체제를 지키기 위해 예술, 과학 그리고 종교를 없애버렸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예술, 과학, 종교가 안정을 해하고 사람들이 위험한 행동을 하도록 부추긴다고 말한다.


첫째, 예술. 예술은 전통적으로 일반인은 볼 수 없는 어떤 것을 표현하는 매개로 인식되어 왔다. 헤겔은 예술가들은 예술을 통해서 시대정신과 보편적 인식을 표현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헤겔에게 모든 의식은 보편성에서 벗어난 개체성을 가지고 있는데, 의식의 발전은 개체성과 보편성의 합치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개체성이 보편성과 다른 개체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는 개체성의 특징이 밖으로 보여야 하는데 이는 예술작품을 통해서 보일 수 있다. 그리고 하이데거는 그의 후기 철학에서 시가 현존재에게 발견되지 않은 존재자의 존재를 드러낸다고 이야기했다.


인간은 자연을 관찰하고 특정사물을 발견한다. 그리고 발견된 사물은 언어에 의해 포획된다. 그리고 언어로 생각을 표현하는 의식은 언어에 포획된다. 따라서, 언어가 규정하지 않은 사건 혹은 사물은 관찰되지도 공유되지도 않는다. 하지만, 시인은 다르다. 시인은 언어를 소위 가지고 논다. 우리가 생각지도 않은 방법으로 사물을 표현하고 규정한다. 따라서, 시인은 체제와 지배계급으로부터 자유롭다. 특히 시인이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하면 이런 작용은 더욱 극대화된다. 따라서, 시는 사람들을 체제의 억압으로부터의 탈출구가 될 수 있다. “멋진 신세계”에서 왓슨이 자작시를 학생들에게 공유하고 나서 체제의 위험인물로 뽑힌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학 또한 다르지 않다. 인간이 유한한 시간과 자원은 모든 것을 경험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지만, 소설을 통해 감정 공유를 할 수 있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 미국 북부의 반 노예제도 여론에 불을 붙인 것이 이를 보여준다. 특히 비극은 인간에게 고통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 준다. 비극은 경직된 체제에 부딪힌 인간들의 상황을 통해 그들의 고통을 보여주고, 그들이 체제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묘사한다. 이는 고통과 그에 따르는 몸부름은 떼려야 뗄 수 없고 인간의 본성임을 말한다. 이는 사회변화의 출발점이 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의미가 행복과 안녕이 아니라 갈망과 변화임을 알려준다. 오셀로는 사랑과 질투사이에서 고통받는 인간을 리어왕은 사랑을 권력으로 오해한 끝에 파멸되고 진실을 깨닫는 인간을 묘사한다. 특히 비극은 모든 인간은 동일하지 않고 인간은 늘 갈등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정답은 없고 고뇌하는 인간은 어떤 선택이라도 할 수 있다. 비록 그 끝이 파멸일지라도 고뇌하는 인간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특히 셰익스피어는 선한 의도가 선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것을, 이는 선한다고 느껴지는 체제가 그 안에 악을 내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체제를 불안하게 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예술에서 과학으로 이동해 보자. 하지만 과학조차 '과학'이기를 멈추었다.


둘째, 과학. 극도로 발달한 과학문명을 가진 “멋진 신세계”의 정부가 과학을 포기했다는 것은 매우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이 정부가 과학을 포기했다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학이란 무엇인가?”를 먼저 논의해야 한다. 과학은 단지 수치화와 실험으로 세상을 설명하는 것 이상이다. 칼 포퍼는 과학을 ‘반증 가능한 주장’으로 정의했고, 토마스 쿤은 ‘기존 이론으로 설명 불가한 현상이 쌓일 때,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과학 혁명이 일어난다’고 봤다. 『멋진 신세계』의 과학은 이 두 가지 모두를 제거한 상태다. “멋진 신세계”의 과학은 반증가능성과 대체 패러다임의 부재다. 이 세계의 과학은 체제 유지를 위한 사실을 찾는 것을 지상과제로 삼고 있다. 그리고 이 체제는 과학의 궁극적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았다. 과학자들은 어떻게 하면 같은 난자에서 더 많은 수정을 할 수 있는지만 고민하고 있다. 과학자들은 새로운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은 잊어버린 채 지금의 패러다임을 공고히 할 임무만을 부여받은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과학은 도태되고 새로운 학으로 변질된 것이다.


존과 함께 무스타파를 만나러 간 인물이 과학자인 마르크스와 시인인 왓슨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들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못한다. 왓슨은 존이 낭독하는 셰익스피어에 웃음을 터트리고, 마르크스는 무스파타가 과학을 버렸다는 것을 믿지 못한다. “멋진 신세계”에서 고통과 좌절이 없기에 왓슨은 비극을 이해하지 못하고 마르크스는 과학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다. “멋진 신세계”에서 예술과 과학이 통용될 수 없는 사회를 만들어 이 둘을 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종교는 아니었다.


셋째, 종교. “멋진 신세계”에서 종교는 사라지지 않고 포드로 대체된다. 예수탄생일이 기록의 기준이 아니라 포드의 T모델 생산이 기준이 되고 십자가 대신에 T표식이 종교적 상징이 된다. 왜 “멋진 신세계”의 정부는 종교를 버리지 않고 대체했을까?


엘리아데는 “성과 속”에서 종교는 인간의 본성이라고 말했다. 인간은 불안정성을 싫어한다. 인간의 몸은 특정 온도로 유지돼야 하고 특정 비율로 혼합된 공기를 흡입해야 한다. 이처럼 인간의 항상성은 우리의 DNA에 내재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자연의 경이로움과 예측 불가능성은 인간에게 죽음이나 다름없었다. 만약, 예상치 못한 맹수가 사냥꾼을 덮친다면 사망한다. 예상치 못한 가뭄과 홍수는 농사를 마치고 부족을 기아로 몰아넣는다. 내 주변이 통제할 수 없는 변수로 쌓여있다는 이 감정은 인간을 나약하고 쓸모없는 존재로 만들 뿐이다. 용감하게 사냥을 나가도 예상치 못한 맹수가 덮친다면? 혹은 예상치 못한 가뭄이 일 년 농사를 망친다면? 이로 인해 인간은 행동할 동기를 상실하게 된다. 인간은 자연을 통제할 수 없다. 그렇다면? 통제할 수 있는 그 무엇인가를 만들고 그것에 의존하면 된다. 물론 이는 근본적 해결책은 되지 않지만, 자연과 대적할 용기를 줄 수 있다. 자연의 불확실성은 관찰에 의해 법칙화 될 수 있다. 물론, 예외는 항상 존재하지만 법칙화된 자연은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줄 수 있다. 이에 인간은 성스러운 것과 속스러운 것을 분류하고 성스러운 것에 확실성을 그리고 우리에게 행동할 동기를 부여하게 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관념에 충실한 인간이 살아남고 발전하게 된 것이다.


불확실성이 존재는 통치자를 불안하게 한다. 왜냐하면, 확실성의 부재는 통치자의 능력의 부재와 동일화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와 같은 전통적 종교는 절대자를 속세 밖에 설정함으로써 그 자체가 불안정이 된다. 이에 “멋진 신세계”의 해결책은 새로운 종교를 만드는 것이다. 물론 새로운 종교의 절대자는 속세 밖이 아니라 포드라는 가장 세속적인 인물이다. 그리고 포드는 불안 혹은 의심이 아니라 효율성이을 절대적 가치로 만들고 인간들을 따르게 만든다. 그들에게 고효율은 바람직한 행동이다. 그리고 고효율은 체제의 안정과 계급사회에서 달성된다. 이처럼 예술은 인간의 고통을 통해 사회를 흔들고, 과학은 질문을 통해 진실에 다가가며, 종교는 불확실한 세계 속에서 인간의 의미를 찾는다. 『멋진 신세계』는 이 셋을 제거하거나 변질시킴으로써 인간을 안정된 도구로 만든다. 이제 남은 건 하나다. 인간이 직접 세계에 개입하는 방식, 곧 노동의 문제다.


6. 노동과 인간성

노동이란 무엇인가? 능력만능주의와 분업으로 인해, 육체적 노동은 폄하되고 지식노동만 추앙된다. 하지만, 헤겔에 따르면 육체노동은 자신을 외화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는 위에서 인간의 발전을 향한 노력이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만든다고 했다. 발전을 위해서는 적절한 고통과 동기 그리고 불안을 없앨 수 있는 종교의 중요성을 이 이야기했다. 헤겔은 육체적 노동 그 자체가 발전의 시작이라고 했다. 우리는 어떤 사물을 보고 그 사물을 관념으로 받아들인다. 문제는 우리의 관념과 실생활은 큰 차이가 있다. 나는 사과를 빨갛고 싱싱하고 잘 익은 사과를 떠 올렸을 수 있다. 하지만, 실제 사과는 그렇지 않다. 나무에 매달려 있거나, 벌레 먹었거나 혹은 영양분을 제대로 받지 못해 푸석푸석할 수 있다. 관념과 실제의 차이는 인간이 실제를 관념에 맞게 변화시킬 동기를 준다. 인간은 둘을 일치시키기 위해 노동한다. 한 번의 노동으로 관념과 실재를 일치시킬 수 없다. 거름을 주기도 하고 몸으로 사과를 품어보기도 하고 모든 벌레를 제거해 보기도 한다. 나의 관념이 외화 되는 노동이 변화의 시작인 것이다. 린다는 문명화 사회에서 베타 계급으로 지배층이었다. 하지만, 야만인 구역으로 떨어진 순간 갖은 핍박을 받았다. 자유연애 사상이 그녀의 발목을 잡기도 했지만, 그녀가 노동에 취약한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모든 것을 노동으로 해결하는 야만인 사회에서 린다는 의미 없는 인간이 되었다. 그녀는 생산보다는 소비하는 인간이었고, 소비할 수 있는 기반이 없는 사회에서 이는 악이지 선이 아니었다. 이처럼 외화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지 못하는 그녀는 불완전한 인간이자 발전하지 못하는 인간으로 존중받지 못했다. 린다는 노동에 참여하지 못함으로써 공동체 안에서 점점 주변화되었다.


7.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가? 개별적 인간


『멋진 신세계』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바로 이 한 가지다.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가?” 당시 과학, 컨베이어 벨트, 분업으로 대표되는 ‘효율성’의 논리는 인간을 고유한 주체가 아닌, 집단 속 하나의 부품으로 보기 시작했다. 노동자는 노동을 통해 완성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벨트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언제든지 교체될 수 있는 부품이 된 노동자는 생산의 주체성을 잃어버렸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도구적 존재는 도구가 멈추거나 부재할 때 도구 자체에 대한 인식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인간이 도구화되었더라도, 그 부재는 사회가 인간의 존재를 자각할 기회를 줄 수 있어야 한다. 분업은 이런 가능성 자체를 철저하게 차단했다. 인간의 부재는 다른 인간으로 즉시 교체되었고, 특히 대공황 시기의 높은 실업률은 이러한 현상을 더욱 심화시켰다.


이런 사회적 배경은 헉슬리의 문제제기를 적절하게 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사람들의 “먹고사니즘”은 생존과 연관되었다. 그리고 “먹고사니즘”은 경제의 효율성이 우리 시대의 최고 가치로 자리매김했다. 따라서, “멋진 신세계”의 문제제기는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는 지금의 사회가 우리를 노동의 주체가 아닌 객체로 만들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왜 인간의 객체성은 인간성을 말살하는가?


인간은 이성과 지능, 그리고 자유를 가진다. 이 세 가지는 인간을 결코 획일화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인간은 자기만의 가치기준을 가지고 결정한다. 비극에서 같은 고통에 처해있을 때, 인간이 어떻게 다른 선택을 하는지를 보여줬다. 인간은 주체로 존재할 때만 각자의 고유한 선택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객체가 되는 순간, 그는 이미 주어진 가치 기준에 복종하게 되고, 선택도 가능성도 사라진다. 그리고 자신의 가능성의 발현도 볼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가능성의 발현은 물질적 가치의 창출이 아니라 새로운 기준의 행복추구권 그리고 그를 통한 새로운 체제의 창조를 이야기한다. “멋진 신세계”에서 모든 등장인물은 객체에 지나지 않는다. 모진 세월을 야만이 사회에서 견딘 린다는 못생긴 외모 때문에 존중받지 못한다. 레니나는 탄력 있는 여성에 지나지 않고, 야만인 존은 야만인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의 슬픔은 끝내 체제에 소비되고 그는 자살하기에 이른다. 이처럼, 인간을 객체로만 취급할 때 인간의 다양성은 무시되고 그들의 내면은 무시된다. 무시된 내면은 스스로의 자아에게도 존중받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존중보다는 사회 체제에 편입되는 것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내면을 희생한 자아는 체제 편입이 자신의 궁극적 목표가 되고 스스로 자신의 내면과 개성을 말살한다. 체제의 가치를 내면화한 인간은 자신의 고유한 판단을 멈춘다. 그 순간,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선언은 무너지고, 오히려 ‘나는 편입되기 위해 생각하지 않는다’는 모순으로 전락한다. 자아도 없고 자유도 없이 체제만 따르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체제의 부품이 되는 것이다.


『멋진 신세계』의 세계는 얼핏 보기엔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포드를 신으로 모시는 일도 없고, 누가 우리에게서 문학·과학·종교를 빼앗아갈 수 있을까? 그리고 인간은 주체를 회복하려는 본능적 동기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인간의 자만에 찬 이런 외침이 정당한가? 지금 우리 사회를 보면 그렇지 않다. 신은 자본에 의해 대체되고 문학(비극), 과학은 저급한 즐길거리에 압도당한다.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거부하고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벌어 승자의 위치로 올라갈 수 있을까? 만 생각한다. 물론 계급사회도 존재하지 않지만, 부의 되물림과 극단적 능력주의에 대한 찬양은 보이지 않는 계급을 만들고 있다. 하지만, 지금 사회가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글을 쓰고 있는 나,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그대, 그리고 계속해서 소비되는 고전이 그 증거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문제를 직시할 용기를 가지고 있냐는 것이다. 그대는 어떠한가? 그만큼 용감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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