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들』: 자유로운 선택은 어떻게 허구가 되는가?

픽션들(피에르메나르, 원형의 폐허들, 불사조교파)를 읽고 by 보르헤스

by 사회철학에서 묻다

(1)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이 짧은 글은 피에르 메나르라는 가상의 작가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와 글자 하나 다르지 않은 텍스트에 도달하려 했다는 설정 위에서, 그의 사후에 친구이자 비평가로 보이는 서술자가 그 작업을 찬양하고 해석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점에서 이 작품은 카프카의 유고를 보존하고 해석함으로써 ‘카프카’라는 작가상을 구성한 막스 브로트의 『카프카 평전』을 연상시킨다. 『픽션들』은 짧은 글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사건의 여백이 적고, 거의 모든 요소가 상징적·구조적 기능을 수행한다. 다만 그것은 단순히 “모든 것이 상징”이라는 뜻이 아니라, 각각의 요소가 보르헤스가 던진 질문을 찾아가게 하는 길잡이로 작동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돈키호테, 메나르의 작품 목록, 그리고 서술자의 태도라는 세 요소를 함께 읽어야 한다.



(1-1) 같은 문장은 어떻게 다른 작품이 되는가?

보르헤스는 피에르 메나르라는 가상의 작가를 통해 예술작품의 가치가 원본성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우리는 예술작품에서 원본이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예술작품 경매장에서 예술품이 몇천억의 가치에 거래되는 데서 알 수 있다. 하지만, 보르헤스는 메나르를 통해 작품이 단순히 한 번 창조된 원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시대 속에서 다시 외화 되고 새롭게 수용될 때 또 다른 의미를 획득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세르반테스는 우연히 『돈키호테』라는 작품이 만들어질 수 있는 시대에 살았고, 그 시대상을 열정적으로 창작했다. 반면에, 세르반테스와 동일한 문장에 스스로 도달하려는 메나르는 “필리프 2세도 없고 신비주의자도” 없는 세상에서 세상의 흐름을 거스르는 노력을 통해 “외화”하고 있는 것이다. 예술이 직접적 사고에 물들어 있는 수용자에게 틈을 통한 사유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라면 적어도 서술자의 논리 안에서는 메나르의 작품이 더 높은 가치를 갖는 것처럼 제시된다. 뿐만 아니라, 『돈키호테』를 읽는 동시대 사람들은 거부감 없이 『돈키호테』를 받아들일 것이지만, 『돈키호테』의 의미가 달라진 20세기의 독자들은 오히려 낯섦과 불편함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이 불편함이 사유의 틈이라는 것을 보르헤스는 말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메나르가 세르반테스와 스페인어를 배우면서 똑같아지려는 노력은 오히려 퇴보이자 쉬운 방법이며, 20세기의 메나르가 그의 입장에서 『돈키호테』를 쓰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지만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1-2) 글 속의 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메나르 그리고 이 글의 저자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얽혀있다. 먼저 세르반테스는 기사소설의 패러디로 『돈키호테』를 만들었다. “그리스도를 대로변에, 햄릿을 카네비에르 거리에 돈키호테를 월스트리트에 갖다 놓는 그런 기생적인 작품이다”라는 말에서 메나르가 이런 창작 활동이 의미 없는 모조품이라고 생각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메나르는 시대를 거스르면서 20세기에 『돈키호테』를 만든다. 그리고 글의 저자는 과거의 『돈키호테』와 동일한 텍스트를 새롭게 산출하려 한 메나르의 『돈키호테』를 최고의 작품으로 찬양한다. 메나르는 불가능에 가까운 동일한 문장에 도달하려는 창작 행위를 통해 “작품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반면 서술자는 메나르의 작품을 해석하면서 또 다른 의미를 생산한다. 그러나 그 해석은 열린 읽기라기보다, 자신의 친분과 문학적 권위를 통해 메나르의 의미를 독점하려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는 바루크 남작 부인의 승인을 통해 권위를 획득하고 메나르와의 생애의 친분을 통해 본인이 메나르의 작품을 평가할 수 있는 최고의 적임자임을 선언한다. 그리고 “위대한”, “비교할 수 없는”등의 형용사를 통해 메나르의 작품을 평가한다. 이는 메나르의 의도와는 다르게 그의 작품이 어떻게 이용될 수 있는지를 밝히는 부분이다.


메나르와 글의 저자의 태도 차이에서 보르헤스의 예술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다. 보르헤스에게 예술은 손쉬운 모방이 아니라, 불가능에 가까운 반복을 감수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산출하는 지난한 작업이다. 동일한 문장에 도달하려는 작업은 겉으로는 쉬워 보이지만,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은 메나르에게는 고통스러운 여정이다. 왜냐하면 메나르에게 『돈키호테』는 그가 가지는 생각에 반대되는 인물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신비주의가 없는 세상에서 신비주의와 대항하고 기사가 사라진 시대에 기사도에 빠진 인물을 그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물론 보르헤스에게 근대의 신비주의는 은폐되었을 뿐, 무존재는 아닐 것이지만). 반면 서술자는 메나르의 작업을 찬양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그 작업을 해석하고 평가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신을 세움으로써 비평가의 권위를 획득한다. 친분이라는 특권과 상류층의 승인을 통해 어떤 고통도 없이 만들어진 창작품은 보르헤스에게 예술로서의 가치를 가지지 못할 것이다. 메나르의 글 목록은 이를 다시 한번 확인해 준다. 19편의 메나르의 글 중, 어떤 권한으로 저자는 『돈키호테』를 최고의 작품으로 선택했는지 혹은 퀸이 빠진 체스의 변화에 대한 글이 라이프니츠의 “보편적 언어”에 대한 논문과 같은 의미를 가지는지 치열한 고민 없이 단순히 나열할 뿐이다. 이는 앙리 바슐리에 부인의 선택이 오히려 고결해 보이기까지 한다.


결국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는 단순히 기괴한 작가의 불가능한 시도를 다룬 글이 아니다. 이 작품은 작품의 의미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저자와 시대와 수용의 조건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세르반테스, 메나르, 그리고 글의 저자를 통해 보여준다. 글의 저자는 외부의 권위를 빌려 작품을 해석하면서, 작품의 의미가 언제나 권위의 관계 속에서 구성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 작품의 핵심은 원본과 복제품의 단순한 차이가 아니라, 텍스트가 누구에 의해 어떤 권위 속에서 다시 읽히고 다시 쓰이는가에 있다.



(2) 원형의 폐허들

버려진 신전에 도착한 이방인이 꿈을 통해 인간을 창조했지만, 자신 또한 누군가의 창조물임을 깨닫는 『원형의 폐허들』은 『매트릭스』를 떠올리게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로봇들이 뇌에 창조한 시뮬레이션에 지나지 않는다는 『매트릭스』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하지만, 창조자가 뒤로 밀려나는 이런 류의 이야기는 과거부터 찾아볼 수 있는 이야기였고, 『원형의 폐허들』 또한 마찬가지다. 이야기의 뿌리가 신화에 있다는 것은 이야기가 가진 힘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뿌리가 인간의 관념에 있을 때, 이야기들은 다른 형태로 계속해서 존재할 뿐 없어지지 않는다. 나는 「원형의 폐허들」을 종교를 단순히 거짓으로 폭로하는 작품이 아니라, 종교적 창조 서사가 어떻게 우연한 전통, 장소, 꿈, 믿음의 반복 속에서 필연적인 것처럼 구성되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읽고자 한다.



(2-1) 종교의 우연성

종교는 스스로를 우연한 믿음이 아니라 필연적인 진리로 제시한다. 신이 세계를 만들었고, 인간은 그 창조의 결과라는 식의 창조 서사는 종교에 강력한 기원을 부여한다. 그러나 「원형의 폐허들」은 바로 이 필연적 기원이 사실은 우연한 장소와 반복된 전통 속에서 구성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어디서 온 지도 모르는 이방인이 우연히 폐허가 된 신전에 도착한다. 그리고 피투성이가 된 몸을 이끌고 호랑이 혹은 말의 형상을 새긴 형상으로 기어오른다. 이를 본 사람들은 이방인이 종교적 힘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방인에게 음식과 물을 바친다. 이를 통해 기력을 회복한 이방인은 마치 창조자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진다. 보르헤스가 이방인의 창조활동을 꿈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설정한 것은, 그의 창조가 순수한 현실의 영역이 아니라 상상, 소망, 제의 등을 통해 현실적인 효과를 만들어내는 영역에 속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 을 통해 꿈이 계시의 장소가 아니라 무의식이 발현되는 장소가 될 수 있음을 밝혔다. 이에 따르면, 이방인의 꿈 또한 마을 사람들로 인해 착각에 빠진 그의 소망이 꿈에서 실현되는 것일 수 있다. 실제로, 이방인의 꿈은 처음부터 곧바로 실현되지 않는다. 이방인은 포기하지 않고 자기보다 더 높은 창조자를 찾고 기도한다. 창조자가 자신보다 더 높은 창조자를 찾는 행위는 종교가 필연적이지 않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종교라는 관념이 쉽게 없애질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창조자는 역시 꿈에서 “불의 신”을 만나고, 그의 도움을 얻어 소년을 얻는다. 소년이 실제 인간인지, 꿈이 현실화된 존재인지, 혹은 종교적 상상이 부여한 형상인지는 끝내 명확히 밝혀지지 않는다. 바로 이 불확정성 때문에 창조의 기원은 더욱 불안정해진다. 소년에게 모든 것을 가르친 이방인은 소년을 떠나보내고 이 소년은 또 다른 폐허의 신전으로 보내지고, 그곳에서 이방인의 역할을 반복한다. 이는 과거 전통에서 정당성을 얻은 신전이 어떻게 종교에 의해서 이용되는지 또한 종교의 전파가 어떤 경로를 따르는지를 묘사한다. 이방인과 소년이 창조자가 되는데 어떠한 계시도 없지만, 제의의 공간인 신전과 전통에 들어감으로써 창조자의 지위를 얻는 것은 종교의 우연성을 폭로하는 것이다.



(2-2) 종교적 사유의 양가성

사유는 지배계급의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는 동아줄로 묘사되어 왔다.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피지배계급의 사유를 소유하려고 하지만, 시작된 사유는 멈추지 않고 피지배계급이 새로운 세상을 상상할 수 있는 단계에까지 이른다. 기독교 도덕의 계보를 의심한 니체, 이야기의 몰락 속에서 경험의 가능성을 다시 사유한 벤야민까지, 사유는 기존 질서를 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게 만드는 힘이었다. 피지배계급은 노동에서 혹은 현실의 불합리성으로 인한 고통에서 지배계급의 부당함을 깨닫는다. 현실의 한계가 생각의 경계를 허물도록 개인을 채찍질하는 것이다. 하지만, 『원형의 폐허들』에서 보이는 사유의 모습은 암울하다. 여기서 사유는 경계를 허물어 나가는 몸부림이 아니라 현실의 한계를 정당화하려는 움츠러듦이다. 폐허가 된 신전은 적어도 과거의 종교적 권위가 약화되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 스스로가 이방인에게 창조자로서의 지위를 부여한다. 이방인은 꿈을 통해 새로운 인간을 창조하려 했지만, 현실의 한계에 부딪힌다. 이방인은 사유를 통해 “불의 신”을 떠올리고 창조자로서의 행위를 완성한다. 이방인이 만든 소년은 이방인과 같은 방식으로 폐허가 된 신전에서 사람들의 사유를 통해 창조자가 된다. 이방인은 자신이 창조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는 몇 번의 경험을 한다. 자신이 며칠을 꿈을 꾸지 못하던 나날들과 자신의 창조활동이 실패하고 절망했던 그 순간 그는 포기가 아니라 새로운 사유를 통해 자신의 활동을 정당화시킨다. 이처럼 사유는 방향에 따라 희망의 전주곡이 될 수도 있지만, 때로는 진실로부터 자신을 고립시키는 만리장성이 되기도 한다. 마지막 이방인은 신전을 덮치는 불을 보고 죽을 각오로 불에 뛰어든다. 이방인이 현실의 인간이라면 그는 불에 타 죽어야 한다. 그러나 보르헤스는 그의 죽음을 보여주지 않는다. “불길은 그의 살을 물어뜯지 않았다. 불길은 그를 쓰다듬었고, 아무런 연기도 없이 아무것도 연소시키지 않은 채 그를 불로 뒤덮었다.”라는 장면은 이방인이 실제 죽지 않았다는 뜻이라기보다는 그의 죽음이 종교 서사의 표면에서 은폐되었다고 읽힐 수 있다. 그가 육체적인 죽음을 맞이했더라도 그를 따르던 무리들이 그를 신이라는 이름으로 남겨뒀을 것이다. 불은 태워 없앰과 동시에 문명을 유지하는 것처럼 파멸의 의미도 가지지만 전승의 의미도 가진다. 여기서 불 또한 파멸과 전승 둘의 역할을 떠맡는다. 불은 이방인이 창조자라는 정체성을 무너뜨리지만, 그가 따르는 종교적 사유의 씨앗까지 없애지는 못한다. 이 장면은 종교적 관념이 물질적 파괴만으로는 쉽게 사라지지 않으며, 다른 형태로 계속 반복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인다.



(3) 『불사조교파』

『불사조교파』는 보르헤스의 픽션들 중에서 가장 신비스럽고 상징으로 가득 찬 글이다. 불사조교파를 번식으로 그리고 비밀을 성행위로 해석하려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런 해석은 보르헤스의 글을 반만 살아있는 글로 만든다. 픽션들은 짧은 글로 대부분의 요소들이 상징성을 지닌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보르헤스가 서문에서 이야기한 “별로 도움이 되지 않고 정신 나간 짓”인 “방대하게 쓰기”를 스스로가 답습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불사조교파가 사람들 틈에 끼어있다는 말에서 불사조교파는 모든 사람들을 칭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번식과 성행위는 인간 일반에게 열려 있는 보편적 행위이기에 이런 해석은 충분치 않다. 그리고 불사조교파의 기원이 이집트나 흐라바누스 마우르스에게서 명확히 시작되지 않는다는 점 또한, 이 작품을 단순한 성행위의 은유로만 읽기 어렵게 만든다. 나는 불사조교파를 자기 유지를 위해 자신의 욕망을 비밀과 관습의 형식으로 반복하는 사람들의 상징으로 읽어보고자 한다.



(3-1) 자기 유지를 위한 이기심이라는 욕망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은 인간의 자기 이익 추구가 사회적 부의 형성에 기여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인간은 자애로워야 한다는 과거의 도덕법칙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사상이긴 했지만, 당시 부상하던 신흥 부르주아 계급은 『국부론』을 통해 경쟁에 의한 막대한 부의 축적을 정당화했다. 하지만 자기 유지를 위해 타자를 억압하는 이기심은 태초 이래 인간과 함께 했다. 아도르노는 신화와 함께 계몽의 탄생을 증명했고, 다윈은 『종의 기원』을 통해 인류의 발전 법칙에 이기심이 있었음을 선언했다. 여기서 불사조를 교파의 상징으로 만든 이유도 볼 수 있다. 불사조는 늙거나 죽을 때, 불에 타 들어가 사라지고 재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존재다. 이는 인간이 자기 유지를 위해 자아를 만들고 자연을 지배하기 위해 내적 자연을 죽이면서 자기 유지를 하는 것과 닮아있다. 내적 자연을 죽인 자아들이 문명을 만들고 유지되는 것이다. 이처럼, 자기 유지를 위한 이기심이라는 욕망은 언제나 그리고 어디든지 있었지만, 전통적 도덕법칙은 이를 부인하기 바빴다. 보르헤스가 불사조교파의 탄생에 대해 엇갈리는 분석을 보여주는 것은 다양한 철학자들이 이기심의 탄생에 대해 다양한 견해를 가지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 같다.



(3-2) 비밀과 관습의 형식

‘비밀의 백성’과 ‘관습의 백성’이라는 표현은, 자기 유지를 위한 이기심이 문명의 관습이었음에도 동시에 공공연한 비밀로 남아 있었음을 보여준다. 집시와 불사조교파의 대비는 훌륭한 비유다. 집시는 외부에서 식별 가능한 타자로 제시되는 반면, 불사조교파는 피부색, 언어, 계급, 국적이 달라도 쉽게 식별되지 않는 집단으로 제시된다. 집시들은 자신들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반면, 자기 유지를 위한 이기심은 숨겨야 하는 부끄러운 행위였다. 미클로쉬치가 집시와 불사조교파가 같다고 한 부분은, 둘이 똑같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부분은 지배계급이 자기들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집시를 희생양으로 삼은 이기적 행동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보르헤스는 집시와 불사조교파의 대비를 통해 내용과 형식에서 불사조교파의 의미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 자기 유지를 위한 이기심은 자본주의적 경쟁과 축적의 형식으로 강하게 나타난다. 피부색과 생김새가 다르더라도 현대의 불사조교파들을 하나의 형식으로 묶어주는 가장 강력한 힘은 자본주의라고 볼 수 있다. 루카치는 『역사와 계급의식』에서 노동의 추상화에 대해 설명했다. 계산가능성과 효율성을 추구하는 자본주의는 노동을 추상화하고 관리한다. 추상화되지 않은 노동의 개성은 분업화된 공장에서는 장애물이기에 제거되어야 한다. 노동의 추상화는 자본주의 전반에 걸쳐 불확실성, 형이상학적 요소를 제거하고 실증주의적 직접성의 진리의 척도가 된다. 하나의 전설(우주 발생의 신화)은 창조론을 의미하는 것 같다. “남아있는 처벌” 그리고 “유일한 종교 행위는 의식을 행하는 것”, 교회가 그 의미를 상실하고 교리를 따르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껍질만 남겨진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불사조교파』의 마지막은 자기 유지의 욕망이 어떻게 변화했는가를 보여준다. 신화와 동화들에서 우리는 이기심에 대한 과거의 생각을 알 수 있다. 신데렐라, 백설공주 그리고 그리스 신화 비극등은 권선징악을 통해 “자기 유지가 진부하며 수치스럽고 평범하며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동화를 읽으며 자라난 어린아이들은 자기의 부모가 동화에 나오는 악처럼 이기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산업혁명과 자본주의의 등장과 함께 1차 2차 세계대전을 비롯한 수많은 전쟁이 거듭되었고 살아남은 것은 자본주의였다. 자본주의는 자기 유지를 숨겨야 하는 더러운 욕망으로 보지 않고 인간의 본능이자 사회 발전의 원리처럼 정당화한다. 이 점에서 「불사조교파」의 비밀은 현대에 이르러 자본주의적 경쟁과 축적의 논리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



(4) 결론

이 세 작품은 서로 다른 내용을 다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공통적으로 자아가 스스로 의미를 창조한다고 믿는 순간 이미 어떤 형식과 권위, 관습 속에 놓여 있음을 보여준다. 피에르 메나르는 작품에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지만, 사회적 통념을 따르기도 하는 양가적 의미의 자아를 보여줬다면, 원형의 폐허들과 불사조교파는 판단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자아에 초점을 맞춘다. 과거 종교의 기억은 이방인에게 창조자로서의 지위를 부여하고 창조자는 부여받은 의미를 강화한다. 자기 유지를 위해 내적 자연은 파괴하고 이기심이라는 비도덕적 욕망은 사회에 의해 본능으로 탈바꿈한다. 자유로운 선택은 만들어진 허구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보르헤스의 3편의 작품은 우리에게 절망만을 주는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3편의 작품에 나오는 인물들은 나름의 삶을 살아간다. 메나르는 불가능에 가까운 필사작업을 선택했고, 메나르의 작품을 찬양한다. 창조자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포기하지 않고 관념의 세계를 통해 도전하고 실패한다. 불사조교파들은 세계 곳곳에서 비밀의 의식을 통해 선택을 내린다. 선택의 자유의 부재는 단기간에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 오래된 역사를 가진 역사적 사실이다.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이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다. 보르헤스는 주체가 완전히 자유롭지 않더라도, 인간이 허구와 관습과 권위 속에서 계속 선택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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