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꾼을 읽고 by 발터벤야민
(1) 서론
발터 벤야민이 말하는 “이야기꾼”은 누구인가. 그리고 이야기꾼의 소멸은 무엇을 뜻하는가. 인터넷과 복제 기술의 발달로 이야기가 넘쳐나는 오늘, 벤야민의 「이야기꾼」은 얼핏 시대착오적인 에세이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글은 오히려 지금 우리 시대를 더 선명하게 비춘다. 벤야민의 이야기꾼은 단순히 이야기를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라, 삶의 경험을 전통 속에서 현재로 건네는 매개자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야기꾼의 소멸은 단순히 옛날식 서사의 쇠퇴가 아니라, 경험이 전승되고 조언이 공유되며 삶의 의미가 공동체 안에서 이어지는 형식의 붕괴를 뜻한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새로운 예술 형식이 전통적 아우라와의 관계를 흔들어 놓았듯이, 대량 복제와 즉각적 유통의 시대에 넘쳐나는 이야기들 역시 더 이상 이야기꾼의 경험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 이 리뷰에서는 벤야민이 말하는 이야기꾼의 의미와 중요성을 살피고, 그 소멸 속에서도 그가 끝내 놓지 않았던 가능성과 희망을 함께 읽어보고자 한다.
(2) “이야기꾼”이란?
내 생각에 벤야민의 「이야기꾼」은 지금은 선명하게 남아있지 않은 “이야기꾼”이라는 형상을 여러 작가와 사례를 통해 우회적으로 드러내는 에세이다. 헤벨, 그라프, 레스코프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꾼적 성격을 보여주지만 벤야민이 말하는 이야기꾼은 어느 한 사람에게 완전히 환원되지 않는다. 더욱이, 벤야민은 “이야기꾼”을 개념적으로만 정의하지 않고, 비유와 여백, 반복과 변주의 형식 속에서 서술하기 때문에 그 의미는 쉽게 붙잡히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글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은 분명하다. 벤야민의 이야기꾼은 단순히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 아니라, 전승 가능한 경험을 다음 세대에 건네는 매개자라는 점이다. 나는 이 이야기꾼의 의미를 더 분명히 하기 위해 아도르노의 문제의식을 잠시 빌려오고 싶다. 아도르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계몽이 어떻게 새로운 야만으로 전락하는지를 폭로했다. 교회와 군주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출발한 계몽은 전통을 미신과 억압의 이름으로 해체했지만, 그 과정에서 인간 삶을 지탱하던 경험과 의미의 뿌리까지 함께 침식했다. 세계가 점점 더 계산 가능하고 실용적인 것으로 환원될수록, 전승 가능한 삶의 지혜와 조언의 자리는 점차 좁아졌다. 이런 점에서 벤야민의 이야기꾼은 단순히 옛날식 화자가 아니라, 계몽이 남긴 폐허 속에서 사라져 간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벤야민의 “이야기꾼”은 계몽에 의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자다. 벤야민은 경험이라는 개념을 통해 “이야기꾼”이 전통을 전달하는 매개자라고 했다. 벤야민은 “권태의 부재”, “수공업의 증발”, 그리고 “오래된 물건의 소멸”이 “이야기꾼”을 사라지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이 중 선장의 파이프에서 그가 말하는 “이야기꾼”의 모습을 선명하게 볼 수 있다. 선장의 오래된 파이프는 과거에 만들어진 물건으로, 선장의 세월이 묻어 있다. 그러나 그 위에 남은 시간의 흔적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선명하게 이야기해 주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선장의 모습과 품성 등을 통해 그 상흔의 내용을 유추할 수밖에 없다. “이야기꾼”은 파이프처럼 과거의 전통을 개인의 경험담을 통해 다음 세대에게 조언의 형식으로 들려주는 매개자다.
(2-1) 이야기꾼, 소설 그리고 정보
벤야민은 “소설의 전성시대”와 “정보”의 범람이 “이야기꾼”이 소멸의 원인 중 하나라고 이야기했다. 벤야민은 “이야기꾼”을 그리워하며 헤벨, 그라프 그리고 레스코프같이 현대의 “이야기꾼”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3가지 장르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이야기꾼”은 조언을 들려주는 존재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에는 그의 흔적이 남아있다. 다시 말하면, “이야기꾼”은 삶의 조언을 전통에서 찾지만 치열한 삶을 산 개인의 흔적이 조언을 다양한 형태로 변형한다. 그리고 이야기꾼의 이야기는 여백을 남겨 수용자에게 사유의 공간을 마련해 준다.
벤야민은 소설을 “조언을 찾을 수 없고, 조언을 할 수도 없는 자”의 서사라고 말한다. 소설은 특정 개인의 내면을 파고들어 개인의 이야기를 전달한다. 개인의 내면은 타자와 공유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소설에서 “삶의 의미”를 찾지만 그 삶의 의미는 우리에게 조언이 될 수없다. 이처럼 고립된 소설의 끝은 흘러감이 아니라 죽음이다. 벤야민에게 소설의 주인공은 죽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신의 삶의 의미가 확정된다. 죽음이 없으면 소설은 끝날 수 없는 것이다.
정보는 사유의 공간이 아니라 정보전달의 공간이다. 여백은 존재하면 안 되고 초단위의 정확성이 정보의 가치를 결정한다. 정보는 듣는 순간 소비되고 즉각적으로 중요성을 잃어버린다.
(2-2) 전통은 왜 중요한가?
벤야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통”의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아도르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인간중심주의와 자유를 추구하는 계몽에게 전통은 의심스러운 것이다. 이런 전통은 마르크스에게까지 이어져 “교회는 인민의 아편이요”, “이데올로기는 억압의 기제”일 뿐이다. 벤야민은 전통의 두 가지 측면을 제시하면서, 전통의 긍정적 의미 또한 함께 드러낸다. 벤야민은 경험지의 소멸이 근대 사회의 문제점이라고 말하면서 경험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여기서 경험지란 단순한 개인적 체험이 아니라, 삶의 시간이 축적되어 타인에게 전해질 수 있는 지혜의 자리다. 하지만, 젊은 시절의 벤야민은 “원숙한 상대는 이른바 더 나은 경험지를 내세움으로써 청년의 태도를 억누르고자 하지만, 경험지는 대개 어른의 가면일 뿐이다.”라고 주장했다. 이는 얼핏 보기에 경험지가 계몽이 극복하고자 했던 억압적 전통이라는 말로 들린다. 「이야기꾼」의 한 챕터인 “경험지와 부족함”은 이러한 혼란을 해결할 단서를 제공한다. 그는 “새로운 야만”을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라고 말하면서 “아인슈타인”, “미키마우스”, “데카르트”, “클레”등을 새로운 야만의 소유자로 소개한다. 벤야민에게 전통이란 다음 세대가 가져야 할 삶의 지혜의 뿌리임과 동시에 지배계급이 지배를 위한 수단으로 변하는 양가적 성격을 가진다.
(2-3) 새로운 야만과 벤야민의 희망
이런 점에서 벤야민이 말하는 “새로운 야만”은 전통 일반의 파괴를 뜻하지 않는다. 그것이 극복하고자 하는 것은 민중의 삶에 뿌리 박힌 전통이 아니라, 지배계급의 도구로 굳어버린 전통이다. 긍정적 전통마저 파괴해 버린 계몽은 벤야민에게 “새로운 야만”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벌거벗겨 버린 그런 야만이다. 인간은 전통을 완전히 벗어난 자리에서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 문제의식은 가다머의 해석학과도 맞닿아 있다. 가다머는 선입견은 해석을 위해 지양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수용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인간은 전통이라는 뿌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오히려 자신의 뿌리를 받아들일 때만, 올바른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지식은 이미 만들어진 지평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자연뿐만 아니라 인간이 만든 도구도 이미 주어진 역할과 해석이 있을 것이고 이는 우리 지식의 기반이 된다. 칸트가 감성과 오성을 통해 변화하지 않는 앎의 형식을 파악했다면 가다머는 전통을 통해 앎의 내용의 뿌리를 드러낸 것이다. 벤야민은 가다머와 유사하지만 전통을 지식이 아니라 삶이라는 더 큰 장에 녹여낸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드러난 것처럼, 벤야민은 기술발전과 역사적 변화 속에서도 새로운 가능성을 본다. 「이야기꾼」에서는 전통의 전승이 완전히 소멸하지 않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벤야민에게 인류는 전통에서 비롯되며, 개인의 삶이 녹아든 경험지를 통해 전승된 지혜는 역사를 움직이는 중요한 힘이 된다. 1차 세계대전을 경험하고 나치의 억압에 의해 스스로 목숨을 끊어내야 했던 벤야민이 역사의 진보를 믿은 것이 아이러니하게 들릴 수 있다. 하지만, 벤야민은 지배계급의 도구적 전통으로 전락해 버린 전통 아래에서도 인류 진보의 뿌리를 찾은 것이다. 벤야민은 자연의 야만으로부터 약자를 보호했던 과거의 공동체로부터, 종교 혹은 인간에 대한 믿음으로 타자를 돕고 살았던 시대까지 그 내면에는 항상 인간의 전통을 보았다. 따라서, 벤야민은 “이야기꾼”이 다시 전통의 매개자로 부활하는 세상을 꿈꾼 것이다. 그러나 벤야민의 독창성은 이야기꾼의 의미를 개념적으로 정의하는 데만 있지 않다. 오히려 그는 「이야기꾼」이라는 글 자체를 반복과 변주, 비유와 몽타주의 형식으로 구성함으로써, 사라져 가는 이야기꾼의 전달 방식을 자기 글 안에서 다시 불러내고자 한다. 이 점에서 「이야기꾼」은 하나의 이론적 설명인 동시에, 그 이론을 형식으로 수행하는 텍스트다.
(3) 좋은 이야기꾼이란? 권태는 꿈꾸는 새가 경험지라는 알을 품는다
(3-1) 권태와 수공업
벤야민은 “권태”와 “수공업”이 “이야기꾼”을 만드는 데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요소들이 왜 중요한지, 그리고 그것이 좋은 이야기꾼의 어떤 능력으로 이어지는지는 글 속에서 충분히 풀어지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아도르노의 계몽 비판은 벤야민이 말하는 좋은 이야기꾼의 의미를 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데 도움을 준다. 아도르노는 체제의 비판에 몰두한 계몽이 목표설정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형이상학적 상상을 거부한 실증주의로 빠져들면서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했다고 폭로했다. 사유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시민들은 지배자의 이데올로기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그 과정에서 안에 억눌린 욕망을 잘못된 투사를 통해 사회적 약자를 억압한다. 특히 아도르노는 자본주의의 계몽은 개인보다는 추상화된 집단의 일원을 더욱 선호하고 이는 지배 피지배관계를 물화해서 법칙화한다고 말했다.
벤야민의 논의를 따라가면 “권태”는 사유의 거리로 “수공업”은 추상화된 개인에게 개성을 부여하는 행위로 읽을 수 있다. 벤야민은 헤로도토스의 「역사: 3권 14장」에서 권태를 통한 사유의 거리를 보여준다. 이집트의 왕 프사메니투스는 페르시아의 캄비세스에게 정벌당한 후, 다른 귀족들과 함께 자신의 딸과 아들이 치욕당하는 것을 본다. 딸은 노예가 되고 아들은 사형장으로 끌려가는데도, 프사메니투스는 땅만 바라볼 뿐 어떤 슬픔도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한때는 왕의 친구였고 그와 겸상하는 사이였지만 이제는 모든 재산을 잃고 병사들에게 구걸하는 한 노인을 보자 프사메니투스는 오열한다. 그리고 타고난 “이야기꾼”인 헤로도토스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권태를 견디지 못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독자들은 이런 시간을 낭비로 여긴다. 그리고 작가들은 모든 행위에 설명을 가져다 붙인다. 그러면 독자들은 스스로 사유할 거리를 잃고 주어진 내용만을 따라간다. 설명을 줄이고 비유와 상징을 통해 사유의 틈을 벌리는 것이 “이야기꾼”의 능력이고 권태의 쓰임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수공업”은 노동자가 “이야기꾼”의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 작업하는 삶의 장으로서, “이야기꾼”의 무대가 된다. 뿐만 아니라 수공업은 노동자가 노동을 통해 자신을 외화 하고, 노동과 자연의 조화로움을 경험하면서 개성을 형성하는 장이 되기도 한다. 효율을 추구하는 자본주의는 분업을 통해 생산량을 최고로 끌어올렸다. 하지만, 이는 노동자들이 부분의 생산만 경험하고 제품의 완성으로부터 소외되는 소외의 세계를 만들었다. 완제품을 만들어보지 못한 노동자들은 내재해 있는 자신을 외화 시키는 기회를 박탈당했고, 개성보다는 주어진 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개인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권태의 부재”와 마찬가지로 사유와 비판의 능력을 상실한 개인이 된다.
(3-2) 죽음 그리고 전통
벤야민은 조언을 구할 줄도 모르고 조언을 할 줄도 모르는 소설은 항상 죽음과 닿아 있다고 말한다. 소설은 부르주아의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하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미 언급한 대로, 계몽과 자본주의는 과거의 전통을 파괴하고 효율의 시대 그리고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의 시대로 우리를 이끌었다. 이를 루카치는 「소설의 이론」에서 “초월적 본향”과의 연결이 끊어진 시대라고 이야기했다. 이는 세계와 자신과의 의미 있는 관계를 맺지 못하는 개인에 대한 한탄이다. 소설은 무의미한 세계 속 개인에 대한 서사다. 소설은 “삶의 의미”를 표현하지만 이 의미는 소설 안의 개인에게만 적용된다. 그리고 소설은 개인의 선택, 욕망, 신념 등을 표현하기 위해 공동체와 동떨어진 등장인물의 내면에 집중한다. 소설은 벤야민의 말처럼 과거 공동체의 조언을 현세대와 이어주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소설밖의 세계는 소설과 다르기 때문에 소설의 끝은 죽음과 함께 끝난다. 하지만, 이런 점에서 “이야기꾼”의 이야기는 전통의 변증법적 계승으로 읽을 수 있다. 벤야민이 변증법이라는 단어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이야기꾼의 개인적 경험을 통한 전통의 계승은 “이야기꾼”이라는 매개자를 통한 전달이라는 점에서 변증법적이다. “이야기꾼”의 이야기는 끝이 없다. 이야기들은 “앞으로도 쭉, 계속해서”처럼 다음 세대로 전승된다. “이야기꾼”의 이야기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매개자에 의해 변화하는 새로움을 의미한다”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상투적인 윤리가 아니라 실생활에서 적용될 수 있는 윤리와 지혜가 된다.
벤야민은 “죽음에 대한 사유가 공동체의 정신에서 일상적, 구체적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 것은 수세기 전부터였다”라고 말한다. 이어 그는 “어쩌면 이것은 부르주아 사회에서 생긴 부작용이라기보다 부르주아 사회가 무의식적으로 추구한 궁극적 목적이었을지도 모른다”라고 덧붙인다. 여기서 벤야민은 자본주의의 생산방식이 개인에게서 시간을 빼앗고 그를 고립시켜 죽음을 경험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오히려 자본주의를 유지하는 데 필연적이라고 비판하는 것처럼 보인다. 벤야민이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지만, 하이데거의 죽음에 대한 성찰이 우리에게 해답을 준다. 하이데거는 사회에 사는 우리를 “세계-내-존재”라고 불렀다. “세계-내-존재”는 실존적인 선택보다는 타자가 원하는 선택을 한다. 하지만 “세계-내-존재”가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확실성을 진실로 경험했을 때 실존적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세계-내-존재” 없이는 유지할 수 없다. 타자의 마음에 들기 위해 유행을 따라 소비해야 하고, 자신을 소외하면서 자본주의의 톱니바퀴를 굴리며 돈을 벌어야 한다. 톱니바퀴의 이탈은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열차의 전복을 의미한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위생적 문화적 혹은 윤리적이라는 다양한 이유를 갖다 붙이면서 개인을 죽음으로부터 유리시킨다.
“이야기꾼”은 죽지만, 파스칼이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죽으면서 무엇인가를 남긴다”라고 한 것처럼 이야기꾼은 이야기를 남긴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듣는 수용자는 “이야기꾼”과 관계 맺는다. 그 관계와 죽음의 경험은 개인으로 하여금 죽음을 진정으로 마주하게 만든다. 하지만 부르주아의 전성기와 함께 죽음은 없어져야 할 것이 되었고, 자본주의는 권태와 수공업의 세계뿐 아니라 죽음마저도 삼켜버렸다. 소멸의 소용돌이 뒤에는 “소설”과 “정보”만이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다. 그리고 벤야민은 소멸해 버린 “이야기꾼”이 부활이 전통의 계승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4) 「이야기꾼」의 형식이 진정한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이야기꾼”의 이야기는 어떤 형식일까? 벤야민은 「이야기꾼」을 전승되어야 할 이야기의 형식으로 구성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4-1) 전통의 계승과 거리
헤로도토스의 「역사: 3권 14장」와 모리츠 하이먼 그리고 파스칼의 이야기처럼 같은 이야기가 반복해서 조금씩 다르게 사용되고 있다. 나는 이것이 흔적이 반영된 전통의 계승이자, 이야기의 구술적 전통이 글쓰기 안에 남아 있는 형식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헤로도토스의 「역사: 3권 14장」은 조금씩 내용이 변한다. 왕을 오열하게 한 인물이 친구로 제시되기도 하고 노예로 제시되기도 하며, 앞부분이 삭제되거나 프사메니투스와 캄비세스의 일화가 덧붙여지기도 한다.
이는 이야기가 구술로 전승되기 때문에 이야기하는 사람에 따라 내용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야기꾼의 기억의 정확도, 그때의 기분, 혹은 강조하고자 하는 점이 달라지면 내용도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이야기의 수용자가 얻는 조언은 이야기의 형태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야기꾼”은 전통의 경험지는 유지하기 때문이다. 「이야기꾼」에 나오는 헤로도토스의 「역사: 3권 14장」는 기본적인 토대를 유지하면서도, 프사메니투스의 감정의 폭발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을 제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을 읽고 있는 수용자들도 각자 다른 버전 그리고 다른 맥락의 글들에서 벤야민의 의도에 좌지우지되지 않는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4-2) 몽타주 기법
벤야민은 되블린의 「베를린의 알렉산더 광장에」이 보여주는 몽타주 기법에 큰 관심을 보인다. 그는 되블린이 전통적인 순수소설과는 다르게 소시민적 인쇄물들, 추문들, 대중가요들 등 다양한 자료들을 끌어들여 소설을 파괴한다고 했다. 그리고 장면의 높은 밀도는 저자의 생각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고 말했다. 이처럼 사실에 기반한 과거 형식의 파괴는 수용자에게는 신선함과 사유의 거리를 제공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야기꾼」도 몽타주 기법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벤야민도 에세이 형식의 파괴를 통해 독자와 자신과의 틈을 벌린다. 그리고 그 새로운 세상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손수건”, “산딸기 오믈렛”같이 동화적이고 아름다운 이야기와 “오스본 지진”같은 역사적 사실을 중간중간에 삽입했다. “손수건”은 나에게 「이야기꾼」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특히 선장이 제삼자의 입장에서 사건을 서술하는 듯 시작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암시하는 장면은 감동적이다. “손수건”은 선장이 아름다운 처자에게 방패문양의 손수건을 주워줬다는 것, 그리고 그 처자가 바다에 빠졌을 때 선장이 그녀를 구해줬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 선장과 벤야민이 손을 흔들 때, 선장이 손수건을 가지고 있음을 묘사하면서 그녀와 선장은 어떤 깊은 관계를 가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녀와 결혼을 했는지 아니면 지금 살아있는지에 대한 상세한 묘사를 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독자들이 둘의 이야기를 상상하게 만든다. 이를 통해 과거 에세이 혹은 철학서적의 형식을 파괴하고 새로움을 통해 수용자에게 사유라는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고 있는 것이다. 벤야민은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연속해서 설명하지 않는다.
벤야민은 새로운 야만을 통해 우리가 지배계급의 경험지에서 벗어나 전통의 경험지를 전승하기를 바랐다. 벤야민은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고자 글을 썼지만, 몽타주 기법을 통해 독자들이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원치 않았던 것 같다.
(5)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과 「이야기꾼」
예술작품의 아우라 상실을 논의한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과 진정한 “이야기꾼”의 부활을 이야기하는 「이야기꾼」은 어떤 연관이 있을까? 언뜻 보기에 두 작품의 연관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은 기술의 발달이 예술작품의 대중화를 이끌었다는 점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반면, 「이야기꾼」은 전통의 계승이 끊겨버린 지금, 그리고 이것이 이어진다면 미래는 암울할 수도 있다는 부정적 메시지를 전달한다.
하지만, 나는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의 내용적 공백이 「이야기꾼」으로 보완될 수 있고, 반대로 「이야기꾼」의 끊어진 전통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통해 다른 방식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은 아우라가 사라진 예술작품이 긍정적일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자본주의와 대중문화의 영향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상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아도르노의 “대중문화 비판”에서 알 수 있듯이, 영화나 대중가요는 사유보다는 자극을 최우선 가치로 여긴다. 영화는 시작부터 결론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장면의 자극이 영화를 차별화하는 거의 유일한 요소가 된다. 이는 아우라가 사라진 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 아우라를 대체할 새로운 가치를 만들지 못한 채 자본주의 가치에 매몰될 수 있음을 보여주며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 반드시 밝은 미래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님을 드러낸다.
나는 벤야민이 「이야기꾼」을 통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 권태와 비유, 그리고 전통의 변증법적 계승이라는 새로운 방향을 암시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은 “이야기꾼”의 끊어짐을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어갈 가능성을 보여주는 텍스트로 읽을 수 있다. 만약 “이야기꾼”의 소멸이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라 생산수단의 변형에 의한 것이라면, 그 부활 또한 수용 방식의 변화와 수용자의 선택 속에서 다시 모색될 수 있다. “수공업의 증발”이 효율성을 위한 분업화의 결과인 것처럼 생산수단의 변형 또한 자본주의의 구조와 맞물려 있다. 그렇다면 수용자가 “이야기꾼”의 내용을 원할 때 미래의 예술작품 역시 그 요구에 일정하게 반응할 가능성이 있다. 제의적 가치를 지닌 과거의 예술작품에서 수용자가 경건한 태도로 작품을 관조하는 데 머물렀다면, 기술복제시대에는 수용자의 태도가 자신의 의견을 반영할 수 있는 방향으로 변화했고, 이것은 “이야기꾼”을 대중문화 속에서 부분적으로 되살릴 가능성의 조건이 될 수 있다.
이처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과 「이야기꾼」은 상호보완적으로 읽혀야 하는 작품이다
(6) 벤야민의 한계: 자본주의 비판은 충분했는가?
벤야민의 아름다운 문체와 여백의 미에도 불구하고 「이야기꾼」은 여타의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비슷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 마르크스와 루카치는 프롤레타리아에게 특권적 지위를 부여해서 프롤레타리아가 어떻게 각성할지 그리고 유토피아 이후의 세계에 대한 상상적 빈곤함을 가진다. 벤야민이 프롤레타리아에게 특권적 지위를 부여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자본주의가 문제의 주요 원인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하지만, 벤야민은 자본주의의 어떤 면이 과거의 다른 체제보다 강력한 장애물이 되는지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다.
나는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에 상세히 설명된 노동의 추상화와 물화가 벤야민 사상의 중요한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추상화된 개인은 타자와 나눌 경험지를 상실했고 소설이라는 소외된 이야기 형식에 더 쉽게 끌리게 된 것이다. 벤야민이 부르주아의 전성기와 소설의 부흥이 “이야기꾼”의 소멸과 시기를 같이한다고 보았다는 점은, 벤야민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문제를 제기한다. 벤야민이 여백과 상상을 통한 사유를 강조했지만, 상상 또한 주어진 소재에서 출발하는 사유의 활동이라는 점에서, 이것만으로는 이야기꾼의 소멸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런 점들이 충분히 설명된다 하더라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말하는 자본주의의 거대함과 자멸의 논리는, 자본주의가 다른 체제보다 특별한 구조를 가진다는 전제에 기대고 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그들은 자본주의가 얼마나 치밀하게 사람들의 삶 속으로 스며드는지를 강조한다. 특히 대중문화와 자본주의의 결합은 우리가 아무 의심 없이 자본주의의 가치체계를 따르게 되는 결정적 이유가 된다. 하지만 예술과 문학이 대중에게 길잡이가 된다는 사실은 예전부터 알려져 있었고, 이를 이용하려는 욕구는 모든 지배계급에 존재했다. 또한, 중세 종교 시대에는 자본주의보다 종교의 영향력이 더 컸을 것이다. 자본과 경제의 물화는 빈틈없는 요새처럼 보이지만, 유물론적 사고에 반대하는 관념론의 등장은 언제든 가능하다. 왜냐하면 벤야민의 생각처럼 사유의 힘은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인간의 관념을 사로잡고 그들의 생활을 그 관념에 맞춰 살아가게 했던 중세의 종교는 더 큰 힘을 가졌을 것이다. 종교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람들이 많은 반면, 자본주의의 힘은 흔히 “먹고살아가기”의 문제에 빗대어 설명된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 차이를 보게 된다.
그렇다면 벤야민이 “이야기꾼”의 소멸을 자본주의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것으로 보는 관점은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다. 아도르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계몽은 신화였다”라고 밝혔는데, 이는 자본주의적 사유의 흔적이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했음을 뜻한다. 그리고 아도르노는 “오디세우스”의 이야기에서 그 흔적을 설명한다. 만약, 자본주의적 사유의 흔적이 신화의 시대부터 존재했다면, 부르주아의 전성기에 소설의 부흥과 함께 이야기꾼이 소멸했다는 벤야민의 설명은 다소 부족한 면이 있다. 따라서 벤야민의 다소 거친 설명은 오히려 “이야기꾼”을 되살릴 열쇠를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왜냐하면 문제의 원인에 대한 설명이 부재하면, 해결책을 찾는 불꽃 역시 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벤야민은 포기하지 않았다.
(7) 결론
벤야민에게 “이야기꾼”의 소멸은 단지 이야기 전달 방식의 변화를 말하지 않는다. 이는 인류를 풍부하게 만들어왔던 전통과 공동체의 부재이다. 과거 이야기꾼은 전통을 이야기꾼 만의 방식으로 다음 세대에 전달했다. 그들은 사유로 인류를 초대한 현자이자 스승이었다. 벤야민은 이들을 추억으로 남기지 않고 「이야기꾼」에서 “이야기꾼”을 다시 호출한다. 중요한 것은 벤야민이 이야기꾼을 단지 내용으로만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반복과 변주, 비유와 몽타주의 형식을 통해 이야기꾼적 전달 방식을 자기 글쓰기 안에서 부분적으로 수행한다. 이것이 자기 에세이의 효율성을 희생시키긴 했지만, 더욱 가치 있는 발걸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특히 “손수건”의 O선장 일화는 사유가 그리고 상상력이 사람을 얼마나 아름답게 기억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이야기꾼”의 소멸의 원인이라는 그의 주장은 아직 깊게 설명되지 않았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통해 「이야기꾼」의 이어짐을 설명하려 했던 것처럼, 그는 또 다른 작품으로 자본주의와 이야기꾼의 소멸에 대해 설명하려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나치로부터 도망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벤야민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순간에도 우리가 자신의 유고집을 통해 사유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벤야민을 추모하는 방법이고 나치라는 야만이 다시 탄생하는 것을 막는 방법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