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라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옮겨갔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읽고 by 발터벤야민

by 사회철학에서 묻다

(1) 서론

발터 벤야민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아우라의 소멸을 주장했다. 기술복제 이전의 예술작품은 ‘지금-여기’의 유일회적 현존에 기초한 아우라와 긴밀히 결부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진품에서 아우라를 느끼고 이를 통해 예술작품을 동경했다. 하지만, 기술의 발달은 진품보다 더 진품 같은 아니 오히려 더 자세히 표현할 수 있는 사진, 영화 등의 작품을 탄생시켰고 이는 아우라를 소멸시켰다. 벤야민은 예술작품은 제의적 가치와 전시적 가치를 가지는데, 아우라 시대의 예술작품은 제의적 가치가 중요시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우라가 사라지고 많은 복제품이 쏟아지면서 전시적 가치가 더욱 중요시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벤야민의 분석은 몇 가지 설명되지 않은 지점이 있다. 첫째, 예술작품의 아우라는 “지금, 여기”라는 것으로 한정한 점, 그리고 예술작품의 가치를 제의적 가치와 전시적 가치로 이 분법 한 점등이다. 특히 벤야민은 유명인 현상을 설명하면서, 아우라는 '지금 여기'가 아니라 상징성에서 비롯된 것임을 스스로 밝히는데, 이 글은 기술복제시대의 핵심이 아우라의 소멸이 아니라, 작품과 수용자의 관계 속에서 거리와 상징 구조가 새롭게 재배치되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러한 재배치의 시대에 전통적 예술의 아우라적 경험은 수용자의 비판적 분별력을 훈련하는 중요한 자원으로 다시 이해될 필요가 있음을 보이고자 한다.



(2) 벤야민의 아우라: 지금, 여기, 제의 그리고 원본성

벤야민은 아우라를 예술작품의 “지금-여기”, 곧 작품이 특정한 장소와 역사적 맥락 속에 유일회적으로 현존한다는 특성과 연결한다. 이때 아우라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진품이 지닌 유일성·전통·거리의 효과를 가리킨다. 벤야민은 예술작품의 독자성을 제의적 기원과 역사적 진품성의 차원에서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예술작품은 제의를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인류 최초의 벽화나 물건들은 인간들이 자연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제의에 의미를 붙이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벤야민은 원본이란, 예술작품이 위치하는 자리로 인해 설정될 수 있고 이는 “지금-여기”가 중요해짐을 설명한다. 벤야민에게서 원본성은 작품의 유일회적 현존과 전통의 연속성 속에서 보증되며, 바로 이 점이 제의적 가치와 긴밀히 연결된다. 이런 의미에서 제사장의 물건 혹은 제사장이 이런 행위를 할 수 있게 능력을 부여받은 물건 만이 제의적 가치를 가질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제의적 가치와 원본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것이다.


이처럼, 예술작품의 시작은 제의적 가치를 지닌 작품이었고 원본을 보증해 줄 수 있는 “지금-여기”가 아우라를 발생시킨다. 초창기 작품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전시적 가치보다 제의적 가치가 더 중요했기 때문에 동굴 안처럼 모든 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는 곳에 자리했다. 하지만, 기술의 발전과 함께 복제품이 손에서 눈으로 옮겨가면서 예술작품의 의미에 변화가 생기게 된다. 수공적 복제는 원본의 유일회적 현존을 전제한 채 그것을 제한적으로 모사할 뿐이지만, 사진과 영화는 광학적·기계적 장치를 통해 원본의 직접 감상에서는 포착하기 어려운 세부와 반복 가능성을 드러낸다. 이 순간부터 “지금-여기”가 가지는 원본과 제의적 가치보다, 사람들이 소유하고 즐길 수 있는 전시적 가치가 중요해졌다. 과거에는 몇몇 특권층만 누리던 예술의 향유를 모든 사람들이 집에서 누리게 되었기 때문에 벤야민은 현대기술이 평등성이라는 사회적 요구에 걸맞은 예술의 변화를 가져왔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파시즘이 정치의 미학을 통해 제의적 가치를 부활시키고 예술작품을 통해 사람들이 그들의 요구를 따르게 하면서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 부정적으로 오용될 수 있음을 밝힌다. 그는 글의 마지막에 “파시즘이 행하는 정치의 미화란 이러한 것이다. 이 파시즘에 맞서, 공산주의는 예술의 정치화로써 대답한다.”라는 글을 통해 경고를 하면서 끝을 맺는다.



(3) 벤야민의 아우라 개념의 협소성: “지금-여기”로 예술의 본질을 설명할 수 있는가?

벤야민은 아우라를 예술작품의 “지금-여기”에 기초한 유일회적 현존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지금-여기”는 본질적이고 영속적인 규정이라기보다 역사적으로 가변적인 조건이다. 따라서 예술작품의 힘을 오직 여기에만 묶는다면, 시대와 장소를 넘어 지속되는 예술의 상징적 작용과 수용자의 역할은 충분히 설명되기 어렵다. 영화와 사진이 오늘날에도 강한 정동과 비판적 사유를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은 바로 이 한계를 보여준다.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릴 뿐만 아니라 현재 체제의 문제를 비판한다. 종군기자가 찍어낸 사진은 심리적 물리적 거리에도 불구하고 반전운동으로 대중을 인도한다. 이는 여전히 예술작품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벤야민이 가진 예술의 힘에 대한 제한적 사고는 어디서 나오는가?


첫째, “벤야민은 역사적으로 이어져온 예술작품의 힘을 “지금-여기”라는 역사적 특성을 통해 설명하고자 하지만, 이는 몇 가지 문제점을 가진다. 예술작품이 지속적으로 사회번혁과 사유의 촉발제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가변성보다는 “지금-여기”라는 가변적 속성과 함께 지속적 속성을 가져야 한다. 예술작품이 장소와 시간에 한정되었다면, 과거의 미술작품이 현대인들에게 의미를 가질 수 없고, 서양의 작품은 동양에서 가치는 상실되어야 한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지금-여기”라는 감각적 확신의 빈곤성을 이야기했다. 가장 풍부하다고 느끼지만, “지금-여기”로는 어떤 것도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과거 제의가 문명을 유지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 빈곤한 개념으로는 예술의 힘을 담을 수 없다. 또한 “지금-여기”는 변증법에 따라 지각, 이성 등으로 변화하는데 이는 아우라의 개념이 기술복제시대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아우라로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예술의 힘은 단순한 현존성보다 더 지속적이고 매개된 차원에서 설명되어야 한다.


둘째, 예술작품을 보고 모든 수용자가 아우라를 느끼지 않는다. 수용자의 지식과 삶의 지평에 따라 나누는데, 이는 수용자가 아우라에 주도적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지금-여기”라는 정해진 속성은 작품에 아우라 형성의 주도성을 부여하는데, 이는 적절치 않다. 벤야민은, 사진의 시대에 인물사진에서 그리고 아우라가 사라진 현대 영화의 시대에 유명인을 통해서 아우라가 형성된다고 서술했다. 이는 아우라가 단순히 원본성에서만 비롯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벤야민의 논의가 역설적으로 암시하는 대목이다. 결국 아우라는 원본의 단순한 현존이 아니라 작품과 수용자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상징적 거리의 효과로 다시 이해되어야 한다.



(4) 제의적 가치와 전시적 가치: 벤야민이 가진 이분법은 충분한가?

벤야민은 예술을 제의적 가치와 전시적 가치를 가졌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기술복제의 예술작품의 시대가 되기 전부터 제의적 가치는 사라지기 시작했고 지금은 전시적 가치가 훨씬 중요해졌다고 말한다. 먼저, 벤야민은 “지금-여기”라는 원본의 중요성이 사라짐과 동시에 전시적 가치로 이행되었다고 설명하지만 이는 충분치 않다. 벤야민은 설명하지 않지만, 원본의 중요성과 제의적 가치의 선후관계를 분명히 해야 한다. 원본이란, 특정 예술작품은 다른 작품과는 다른 의미를 가졌다는 것을 말한다. 제의적 성격을 가진 예술작품은 마나를 사용할 수 있는 제사장 혹은 제사장이 마나를 사용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제사장은 힘을 의미하기 때문에 자기의 힘을 유지하기 위해 예술 작품을 독점적으로 사용해야 했고 원본성은 제의적 권위와 독점적 사용을 보증하는 형식으로 기능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는 제의적 가치가 없었을 경우 원본은 의미가 없음을 말한다. 그리고 제의적 가치를 가지기 위해서는 전시적 가치가 동시에 존재해야 한다. 제의란, 제사장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는 대중이 있을 때만 가치가 있다. 따라서, 독점적 사용을 위한 예술작품은 대중의 접근으로부터 거부되어 있을 수 있으나, 제의를 가능케 하는 그 관념은 대중들에게 전시되었어야 한다. 이런 이유에서 단순히 제의적 가치를 예술작품으로부터 떼어내어 전시적 가치만을 부여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빈곤하다.


아도르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제의는 계몽의 일종임을 드러냈다. 겉으로는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이 행위는 인간이 자연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자연을 체계화하고 설명하기 위한 일종의 책략이었다. 제의는 자연을 우리가 알고 있는 신 또는 힘으로 분류하고 그 신이 원하는 것을 제물로 바치고 인간의 안전을 보장하는 행위였다는 것이다. 이는 제의적 가치가 예술작품에서 과학, 수학으로 이동한 후 세대의 예술작품에 적절한 설명이 된다. 르네상스 시대의 미에 대한 추구 그리고 부정신학의 예술의 추구는 제의적 의미를 잃어버린 에술작품이 상징성에 부과되는 새로운 가치를 찾는 과정 혹은 제의적 성격이 사라지고 계몽에 의해 강요되어 버린 인간의 삶에 대해 새로운 상징을 부여하는 예술작품으로 해석될 수 있다.


따라서,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의 핵심은 제의를 잃어버린 예술이 어떤 형식으로 대체되는가? 가 아니라 제의를 잃어버린 예술작품의 상징의 자리에 무엇이 자리하는가? 가 돼야 한다. 기술복제시대는 제의의 종말이 아니라, 제의와 상징의 관계가 재조직되는 시대다.



(5) 영화와 사진: 아우라의 재구성

(5-1) 사진과 기억의 아우라

사진과 영화는 아우라를 제거한 매체가 아니라, 전통적 아우라와는 다른 형태의 거리와 상징을 생산하는 매체다. 벤야민은 사진작품은 원본보다 상세함과 복제품의 대량생산으로 “지금-여기”가 주는 아우라를 잃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는 초기 사진작품에서 예술가들은 아우라를 유지하기 위해 인물사진으로 파고들었다고 했다. 전쟁 중에 찍힌 아이를 잃어버린 아버지의 얼굴 혹은 과거의 행복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영정사진등은 과거 예술작품이 주는 아우라를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벤야민 스스로가 “지금-여기”가 예술작품의 힘의 유일한 원천은 아니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앗제의 “파리거리”의 사진은 사진에서 인물을 제거해서 새로운 예술형식으로 제시되는 것 같지만, 앗제의 사진은 전통적 아우라를 해체하면서도, 새로운 거리와 사유의 긴장을 형성한다. 위의 사진들은 “지금-여기”의 원본이 아니라 “사람과 기억”으로 예술작품의 특수성을 유지한다. 사진을 통해서 느끼는 타자의 고통과 고통의 원인을 사유하게 하는 거리의 발생은 새로운 형식의 아우라의 탄생을 예고한다. 사진의 아우라는 원본의 현존이 아니라 기억과 타자성, 그리고 수용자의 사유를 불러일으키는 거리에서 형성된다.



(5-2) 영화와 감정의 총체성

벤야민은 영화는 분절 촬영을 통해 배우들이 감정을 총체적으로 전달하지 않고 기계장치 앞에서 배우는 관객과 소통하지 못해 소외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해석은 무리가 있다. 배우는 분절촬영 도중 자신의 감정을 총체적으로 유지하고 매 촬영 순간마다 감정을 표출한다. 사람의 감정은 표현될 만큼 사라진다면 벤야민의 말이 맞지만 인간의 감정은 오히려 표현되면서 풍부해지는 가능성이 더 큰다. 또한 기계장치를 통한 감정의 표현이 관객에게 더 다가간다면 영화의 상업화는 연극보다 더 직접적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총체적 감정의 부재를 매체 자체의 필연적 한계로 돌리는 것은 성급하다. 그것은 매체의 문제가 아니라 연기와 형식 구성의 문제일 수 있다. 기계장치로 매개되었다는 것이 영화의 단점은 아니다. 매개는 어디서든지 일어난다. 무대 위의 연극배우들이 전달도 그 특정 시기 또는 장소라는 특수성에 따라 매개되는데 오히려 영화는 벤야민의 말처럼 특수적이지 않게 일정하게 매개된다. 그렇다면 질문은 왜 기계장치를 통한 매개가 특별한지가 돼야 한다.



(5-3) 스타 시스템과 조작된 아우라

영화배우가 대중들 앞에 서서 그들의 관심을 얻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 그리고 아우라의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유명인을 만든다는 점에서 벤야민 분석의 한계를 발견할 수 있다. 먼저, 대중들의 관심과 반응을 요한다는 점에서 영화는 제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유명인에 대한 분석은 예술의 상징성이 지배계급에 의해 조작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파시즘이 제의적 성격을 유지하고 정치의 미학을 이뤘다는 것을 강조하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나는 오히려 여기서 벤야민의 논문의 목적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술의 발전으로 제의적 성격이 사라지는 것이 필연적이라는 게 아니라 기술의 발전으로 제의적 성격을 가진 것과 제의적 성격을 벗어던지것이 생길 수 있는데, 벤야민의 생각은 후자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이는 수용자가 아우라의 발견에 분별력을 가져야 함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데, 이러한 분별력은 전통적 예술의 아우라적 경험을 통해 훈련될 수 있는 중요한 능력이다.



(5-4) 초기 영화론자들의 통찰

이 대목에서는 아벨 강스, 세브랭-마르스, 알렉상드르 아루느의 영화 이해가 벤야민의 설명보다 더 설득력 있게 읽힌다. 그들은 영화가 제의적 기반에서 멀어지더라도 상징적 밀도와 집단적 감응의 능력을 유지할 수 있음을 포착했다는 점에서, 그 대목에서는 더 설득력 있는 통찰을 제공한다.



(6) 벤야민의 낙관과 그 한계

벤야민은 고전예술작품에서 대중은 소극적 태도로 행동하고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적극적으로 행동한다고 설명한다. 대중의 영화에 대한 적극적 비평과 참여는 긍정적이라는 것이다. 먼저, 과거에는 집권층만이 예술작품을 누렸지만 이제는 영화관에서 대중이 예술작품을 누린다는 것은 예술의 평등화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관조적인 태도에서 적극적인 태도로 바뀌는 것은 대중의 의견이 적극적으로 반영될 수 있다고 불 수 있다. 하지만, 아도르노는 이러한 변화가 대중의 맹목적 유행추구로 바뀔 수 있다고 경고한다. 적극성은 자율성이 아니라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로 변화할 수 있다. 아도르노는 영화는 내용을 정해놓고 부분들의 차이로 대중의 선택을 기다린다고 말한다. 이는 만들어진 개성의 일환이다. 내용 설정의 능력을 상실한 계몽은 대중이 무비판적으로 영화를 받아들이게 된다. 벤야민 스스로도 파시즘의 정치의 미학이라는 개념을 통해 이런 의견에 동조한다. 만약, 파시즘이 예술작품의 제의적 성격을 이용해서 대중을 선동할 수 있다면, 영화 역시 지배계급에 의해 조직되고 오용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적극성은 곧바로 자율성을 보증하지 않으며,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조직된 반응으로 전락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건축물과 영화를 동일시하면서 대중의 자율성이 가능함을 설명한다. 전통적 예술작품은 수용자들이 작품을 관조하고 작품 속으로 스며든다. 그리고 작품의 상징을 통해 만들어진 거리에서 사유를 시작한다. 그리스 비극은 파멸할 수밖에 없는 등장인물들의 삶을 보여주면서 사회의 부조리를 파혜친다. 벤야민은 습관을 통해 같은 사유가 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건축물은 청각적 효과도 있지만, 건축물 안에서 생활하면서 습관을 통해 사유하고 이는 전통적 예술작품이 주는 거리를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가 빠른 컷편집, 자극적인 부분을 통해서 작품이 수용자 안으로 들어가기는 하지만 이는 습관을 통해 사유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건축물과 영화의 유사성에 동의하지 않는다. 먼저 건축물은 수용자가 사유할 수 있는 기반이 되기는 한다. 하지만 이는 수용자가 편안한 건축물에서 사유에 도움을 주기 때문이지 습관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건축물에 의해 사람들이 건축가에 의도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 동양은 건축물에 의해 좌식문화가 발달했고 서양은 입식문화가 발달한 것이 그 예다. 건축은 인간의 사유를 돕는 배경일 수 있지만, 동시에 인간의 동선과 생활방식 자체를 규율하는 형식이기도 하다. 따라서, 벤야민의 건축물 예시는 오히려 대중문화의 위험을 이야기해 주는 것이다.


벤야민에게 기술발전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예술은 이를 선행해서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그는 다다이즘이 영화와 같은 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예고한 것이라고 서술한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예술작품의 참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술가들은 지배계급에 의해 한계 지어진 예술의 수단에서 사회의 부조리를 폭로할 거리를 만들 수 없다. 따라서, 예술가들은 주어진 형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수단을 시도한다. 이것이 다다이즘이다. 벤야민의 유물론적 기술의 발전은 예술가의 독특한 시각에서 발생하는 관념론을 뒤쫓을 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유물론적 기술 발전의 틀에 쌓여있는 벤야민의 사유는 대중의 관념을 조작하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가 기술 발전으로 파괴될 수 있다는 지나치게 낙관적인 기대에 머무를 위험을 드러낸다. 이처럼 벤야민의 사유는 기술발전이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약화시킬 수 있다는 기대를 품지만, 바로 그 기술이 오히려 지배의 새로운 매개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충분히 제어하지 못한다.



(7) 결론: 아우라는 종말 한 것이 아니라 재배치되는 것

“사진이 예술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은 어떠한 형식으로 변화하는가?”라는 새로운 질문을 던진 벤야민은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통찰을 제시했다. 하지만, 그의 아우라에 대한 좁은 해석과 이분법적 예술작품의 해석은 사유의 한계를 드러낸다. 또한 유물론적 역사관에 입각한 기술발전의 미래에 대한 그의 낙관론은 파시즘의 정치미학의 시대에 이를 방어할 수 있는 새로운 해답을 주기에는 빈약하다. 또한 유명인과 인물사진으로 설명하는 새로운 아우라에 대한 시각을 가지고 있지만 이를 그의 저서에서는 풀어내지 못한다.


새로운 예술작품은 아우라를 잃어버리지 않는다. 오히려 재배치한다. 영화와 사진은 나름의 방법으로 과거 예술이 놓으려 했던 거리를 만들고 수용자를 작품 안으로 끌어들인다. 하지만, 새로운 기술은 과거와 다른 향유를 대중에 제시하고 이는 사유로부터 스스로 달아나는 대중을 만들었다. 파시즘은 이를 적절히 파악하고 정치미학을 통해 이들을 선동했고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큰 상흔을 우리에게 남겼다.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역설적으로 전통적 예술작품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대중문화는 대중의 관심을 먹고 산다. 대중이 예술작품만이 줄 수 있는 거리를 인식하고 요구할 때만 대중문화는 거리를 제공한다. 벤야민은 아우라의 종말을 선언했지만, 그의 텍스트는 역설적으로 전통적 예술작품의 지속적 필요성을 증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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