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바틀비를 이해하지 못하는가?

필경사 바틀비를 읽고 by 허먼 멜빌

by 사회철학에서 묻다

(1) 서론

성실하게 일하던 필경사 바틀비는 어느 순간 “I would prefer not to”라는 대답과 함께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법으로 질서를 수호하는 변호사는 그를 해고하지 못한다. 이것이 이 소설 내용의 전부다. 이런 소설의 이상함을 실존주의도 번아웃이라는 틀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이 글은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을 통해 이 소설의 이상함을 해명하고자 한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은 이러한 완곡한 거절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왜 끝내 받아들여지기 어려운지를 생각할 수 있는 철학적 시선을 제공한다.


(2) 줄거리 및 이전 해석의 취약점

필경사 바틀비는 바틀비를 고용한 변호사의 시선으로 전개되는 소설이다. 바틀비는 처음 고용되고 자기의 일에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변호사에게서 필경본을 대조하자는 요구를 받자 “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라는 짤막한 대답을 한다. 이후, 그는 필경사일도 그만두고 사무실을 떠나라는 요구도 거부한다. 변호사는 바틀비의 존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건물을 옮기고 바틀비는 건물주에 의해 교도소에 수감된다. 바틀비는 교도소에서 음식 먹는 것조차 거부하고 교도소에서 가장 따뜻하고 부드러운 풀밭 위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실존적인 움직임으로 바틀비를 읽고자 하는 시도가 있다. 하지만 실존주의로는 바틀비의 유예적 거부와 변호사의 서술구조를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 한병철은 『피로 사회』에서 바틀비를 “번아웃”된 현대사회의 구성원으로 해석했다. “번아웃”은 쉴세 없이 무언가가 요구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쉽게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점에서 일정한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번아웃이라는 틀만으로는 월스트리트의 변호사가 왜 1인칭 시점으로 바틀비를 서술하는지, 그리고 변호사의 분노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 오히려 이 소설은 ‘계몽은 신화로 돌아간다’는 『계몽의 변증법』의 문제의식으로 읽는 편이 더 타당하다.


(3) 『계몽의 변증법』의 4가지 렌즈

이 글은 『계몽의 변증법』의 ‘자기 유지’, ‘도구적 이성’, ‘잘못된 투사’ 그리고 ‘미메시스’를 통해서 『필경사 바틀비』를 읽고 자 한다. 본격적인 분석에 앞서 이 네 가지 렌즈를 간략히 소개하겠다.


첫째, 자기 유지.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계몽이 자기 유지를 최우선의 원리로 삼는다고 본다. 계몽은 18세기 중세시대에 대한 반향이 아니라, 그리스 신화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운동이라는 것을 밝힌다. 예전부터 인간은 자연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자기를 유지하기 위해 체계화와 예상 가능성으로 자연을 파악했다. 천둥의 신은 제우스처럼 자연 현상에 신의 이름을 붙이고 그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제물을 바치는 행위를 통해 그들을 통제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자연 현상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과거의 경험을 모으고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현재에 행동하는 자아를 탄생시켰다는 것이 『계몽의 변증법』의 주요 논제다.


둘째, 도구적 이성. 계몽의 맹목적 자기 유지의 추구는 도구적 이성으로 이어진다. 자연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가진 본능적 선호를 희생해야 한다. 『계몽의 변증법』은 외적 자연의 정복을 의해 내적 자연을 희생했다고 선언한다. 목표를 설정하기 위해서는 이를 위한 기준이 있어야 하지만, 정해진 목표는 외적 자연을 정복하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에 내적 자연의 희생은 자연스럽게 계몽이 내용 설정의 능력을 잃게 만든다. 그리고 이성은 자기 유지를 위해 도구가 되는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한다. 자기 유지는 개인의 영역과 집단의 영역에서 발생한다. 집단의 영역에서의 자기 유지는 집단을 유지하기 위해서 집단안의 개인을 억압하고 개인은 집단에 속하기 위해 자아의 내부자연을 억압한다.


셋째, 잘못된 투사. 자기 유지를 위해 희생된 내부자연은 사라지지 않고 무의식의 영역으로 숨어든다. 지배는 피지배계급이 내부자연의 요소들을 혐오할 때 가능하다. 향락이 자본주의 번영에서 숨겨져야 할 내부자연이라면, 자본주의 사회는 향락 자체를 죄악시한다. 하지만, 무의식의 영역으로 숨어든 이런 요소들은 밖으로 나올 기회를 호시탐탐 노린다. 그리고 이것들과의 싸움에서 패배하면 자기 유지가 불가능함을 알고 있는 자아는 이것들을 외부의 대상으로 투사하고 외부의 대상을 공격한다. 중세시대의 마녀사냥은 성적욕구가 좌절된 당시 자아가 여성들을 마녀로 투사하고 그녀들을 사형한 잘못된 투사인 것이다. 그리고 『계몽의 변증법』은 유대인들이 잘못된 투사의 희생양이었다는 것을 폭로한다.


넷째, 미메시스와 화해. 계몽이 자기 유지라가 내부자연을 희생시키기 전, 자아는 자연과의 지배관계없는 화해 속에서 살아갔다. 물론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문명화 전 단계로 이것이 지금의 문명보다 낫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미메시스(따라 하기)는 효율성을 배격한 사랑, 몸, 타자의 고통을 느끼는 것 등을 통해서 진정한 화해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위의 4가지 렌즈를 통해서 『필경사 바틀비』가 왜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지, 그리고 바틀비의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라는 말의 의미 그리고 바틀비가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이유에 대해서 논해 보도록 하겠다.


(4) 왜 1인칭 시점인가?

허먼 멜빌이 『필경사 바틀비』를 1인칭 시점으로 전개하는 것은 2가지 의미를 가진다.

첫째, 이 소설은 바틀비에 대한 묘사가 주된 내용이 아니라 변호사가 바틀비를 고용한 이유와 그가 죽음에 이른 사건에 대해 자기 합리화하는 선언문이다.

둘째, 허먼 멜빌은 1인칭 시점으로 독자들이 변호사의 시선으로 사건을 보고자 한다. 이는 자본주의 시대에 사는 독자들이 자기 합리화에 빠져있고 자본주의 체제 밖의 인물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직접 체험하게 하고자 하는 소설적 장치다.


(4-1) 변호사의 자기 합리화

『필경사 바틀비』는 변호사의 시점으로 소설을 전개한다. 그리고 소설의 상당 부분은 변호사의 자기 합리화다. 도구적 이성은 내용설정의 능력은 없고 자기 유지를 최상의 가치로 여긴다. 이런 점에서 자기 합리화는 도구적 이성이 가진 최고의 수단이다. 행위가 결과로써가 아니라 자기 유지의 논리로 평가된다는 점이다. 『필경사 바틀비』에서 자기 유지를 위해 자기 합리화하는 장면은 다음과 같다.


첫째, 변호사 사무실의 2명의 필경사는 터키와 니퍼는 결함이 있는 인물로 묘사된다. 터키는 낮에 차분하고 오후에 흥분하고 니퍼는 반대다. 터키는 칠칠치 못한 성격으로 실수를 많이 하고 니퍼는 사기꾼 같은 기질로 묘사된다. 광고를 내자마자 바틀비가 지원하고 고용되었다는 점에 미루어 보아, 둘을 해고하고 새로운 필경사를 고용할 충분한 여력이 된다. 하지만, 둘에 대한 평가가 박한 이유는 변호사가 말했듯이 자신이 주는 월급이 작기 때문이다. 변호사는 두 필경사의 결함을 바틀비 고용이 불가피했던 것처럼 보이도록 배열한다. 실제로 한 사람만 교체해도 되었을 텐데, 두 사람의 결함이 하루 종일 이어지는 문제처럼 서술되는 것은 바틀비를 들인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다.


둘째, 바틀비는 변호사가 사무실을 이전하고 예전 사무실에 남았지만, 끝내 교도소로 이감되고 죽는다. 변호사는 소설 내내, 자신이 했던 인간적인 처우에 대한 상세하게 묘사한다. 해고하지 않고 2번째 기회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집에서 지내면서 같이 문제를 해결하고자고 제안한다. 바틀비가 일을 하지 않았지만, 퇴직금을 두둑이 챙겨주면서 떠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새로운 직업에 대한 조던도 해준다. 마지막에 교도소에 수감된 바틀비를 따라가서 사식업자에게 돈까지 챙겨주만 그의 죽음을 막지 못한다. 위의 일련의 과정들은 변호사가 바틀비를 구제하기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했다고 생각하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변호사는 바틀비를 포기하고 사무실을 이전했고 그는 죽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과정들은 사건의 전개와 결말에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또한 변호사의 노력이 변호사의 입장에서만 서술되었다. 사건을 객관적 사실에 따라 파악해야 할 변호사가 오직 자신의 1인칭 시점에서만 사건을 기술한다는 점은, 이 서술이 중립적 기록이 아니라 자기 합리화의 성격을 띤다는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셋째, 바틀비는 지금까지 삶을 살아왔는데, 그 삶을 유지하는 내내 “I would prefer not to”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한 가지 말만 되풀이하는 바틀비의 소설적 장치에 대한 논리적 추측은 다양한 대화가 이루어졌지만, 변호사는 오직 “I would prefer not to”라는 말만을 자기 합리화에 사용했다는 것이다. 바틀비는 바텐더가 될 수 없는 이유, 여행을 따라다 닐 수 없는 이유 등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자신이 바틀비를 위해 했던 행위를 묘사하는 장면에서 바틀비는 여러 가지 말을 한다. 변호사는 바틀비의 말을 자기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변호사는 진실 규명보다 자기 보존을 위해 이성을 사용한다. 이것이 도구적 이성이 가진 무서운 점이 라고 허먼 멜빌은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넷째, 바틀비는 필경대조를 거부하는 것을 시작으로, 필경하는 거 자체를 거부한다. 그 이후에는 사무실을 떠나는 것을 거부하고 교도소에서는 먹는 것조차 거부한다. 이처럼 바틀비의 거부가 조금씩 삶의 모든 영역을 감싸는 이유는, 변호사의 행위가 바틀비를 더욱 절망의 늪으로 던져주고 있음을 비유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변호사는 이를 알지 못하고 계속해서 선의를 베풀었다고만 생각하는데 이는 두 명의 체제에 대한 다른 이해가 화해할 수 없음을 암시한다.


(4-2) 자본주의 체제 밖을 이해하지 못하는 나

3인칭 시점이 여러 인물의 입장과 심리를 비교적 자유롭게 보여주는 관찰의 시점이라면, 1인칭 시점은 독자를 특정 인물의 판단 안에 묶어두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허먼 멜빌이 이 방식을 택한 이유는 체제라는 틀에 갇힌 자아의 사고가 얼마나 경직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독자들은 바틀비를 직접 경험하지 못하고, 바틀비에 대한 이해를 언제나 변호사의 자기합리화를 통해서만 얻게 된다. 그래서 바틀비는 끝내 이해되지 않는 인물로 남고, 독자는 그의 침묵과 거부를 하나의 가능성으로 보기보다 설명되어야 할 이상행동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바틀비의 죽음 앞에서 이런 판단에는 균열이 생긴다. 그 순간 독자는 변호사의 논리가 중립적 설명이 아니라 자기합리화였음을, 그리고 바틀비에 대한 평가 역시 체제의 틀에 박힌 것이었음을 뒤늦게 의심하게 된다. 결국 소설은 바틀비 개인만이 아니라, 인간을 죽음의 끝으로 몰아넣는 구조 자체를 다시 묻게 만든다.


첫째, 변호사가 바틀비에게 하는 행위는 온정에서 비롯된 행위로 느껴진다. “정당한 일 그리고 끝내 필사일 마저 거부하는 바틀비를 사무실에 남기고 일까지 주선해 주는 변호사는 얼마나 따뜻한가?” 하지만, 이는 자기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라는 체제 안에 바틀비를 지속적을 가두려는 변호사의 폭력에 지나니 않는다. 이렇게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노동에 따른 보상, 지배 피지배관계라는 자본주의적 체제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둘째, 변호사는 과거 데이터를 통해 바틀비를 파악하려고 한다. 바틀비의 이상한 행동을 감지한 변호사는 먼저 과거에 어떤 일을 했는지 몰랐다고 이야기하면서 과거의 삶과 바틀비의 현재 모습을 동일시하려고 한다. 그리고 바틀비가 정신적으로 아프다는 말과 함께 바틀비가 사망하고 나서 그는 바틀비가 주인을 잃어버린 편지를 처리하는 일을 했었다고 밝힌다. 그리고 그 행위와 바틀비의 문제를 동일시하려고 한다. 그리고 독자들은 여기서 합리적인 추측을 읽게 된다. 하지만, 이는 외부 자연을 지배하기 위해서 자연을 체계화하고 계산가능하게 만들어 자연을 죽은 물질로 만드는 계몽적 접근이다. 체제의 문제가 아니라 체제가 생각하는 문제의 원인을 찾고 그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성에 따라 바틀비를 파악하는 것은 인간에게 가능한 것은 자본주의 체제뿐이라고 인간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이다.


셋째, 바틀비와 변호사 둘의 행동은 모순적이다. 바틀비는 “I would prefer not to”라는 말만 반복하고 정당한 지시를 거부한다. 변호사는 해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자가 있는 필경사들을 해고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자기의 집에서 같이 지내자는 제안까지 한다. 하지만, 독자들은 바틀비만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바틀비는 체제밖에 있는 사람인 것이다. 그리고 변호사가 바틀비의 “I would prefer not to”라는 말만 들었다는 것이 변호사의 문제가 아니라 바틀비의 문제라고 여긴다. 이는 우리가 체제에 빠져 있기 때문에 바틀비의 행동은 이해하지 못하고 변호사의 행동은 어떻게든지 이해해 보려는 무의미한 몸부림으로 읽힐 수 있다. 바틀비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은 변호사뿐만 아니라 사무실의 모두를 뒤흔든다.


(5) 2명의 필경사 터너와 니퍼 그리고 미메시스

『필경사 바틀비』에는 터너와 니퍼 2명의 필경사가 등장한다. 이들은 하자가 있지만, 어느 정도 능력은 있는 인물들로 나온다.


첫째, 터너와 니퍼가 바틀비에게 느끼는 혐오는 억눌린 내부자연으로 설명할 수 있다. 바틀비가 필사대조를 거부하면서 이들이 분노했다고 볼 수 있지만, 이는 이들이 바틀비의 말을 따라 하는 것을 설명할 수 없다. 이들은 변호사와 체제에 의해 억압된 내부 자연을 바틀비에게서 발견한다. 자신들도 거부하고 싶지만 체제 유지를 위해 억눌렀던 욕망을, 당당히 거부하는 바틀비에게서 발견했기에 더 증오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틀비를 따라 할 수 없는 자신들의 처치를 ‘잘못된 투사’를 통해 바틀비에게 표출하는 것이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시 파시스트를 따랐던 독일 국민들과는 다르게 그들의 분노는 번번이 변호사에게 가로막힌다. 그리하여 그들은 바틀비의 말투를 따라 하는 것으로 그들의 억압된 감정을 달래는 미메시스적 접근이다. ‘억압된 자연’과 ‘잘못된 투사’라는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접근은 이 필경사들의 상반된 반응을 설명할 수 있다.


둘째,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언어가 나무와 마나를 담은 어떤 존재로 불려지던 태고의 변증법적 언어의 의미를 읽어버렸다고 한다. 언어는 실증주의자들에 의해 기호와 상징이 분리되고 오직 기호만이 남은 것이다. 다양한 해석의 의미를 잃은 언어는 지배계급에 의해 악용되고 대중은 사유 없이 주어진 언어의 의미를 따른다는 것이다. 별명은 별명의 기호와 상징이 공존한다. 이들이 별명으로 불리는 것은 『계몽의 변증법』이 말하는 언어의 변증법에 부합한다고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필경사들의 별명은 변호사가 부여한 체제에 의해 정해지고 의미를 가지는 것에 불과하다. 별명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언어의 변증법 마저 강탈당한 사회의 모순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이런 사회에 갇힌 필경사들은 바틀비를 닮고자 하지만 끝내 체제의 부분이 되기 위한 자기 유지에 매몰되어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바틀비는 교도소에서 가장 자연을 닮은 풀밭 위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2명의 필경사와는 다르게 체제에 섞이고 복종하는 것을 거부하고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미메시스적 움직임을 보여준다. 이는 미메시스가 자본주의의 틈 속에서 보이는 것과 함께, 죽음만이 자연과 화해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이중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자기 유지가 효율과 비효율의 경계를 가르는 세상에선 다른 선택을 할 수 있겠지만, 생산수단이 특정 계급에 의해 소유되어 버린 지금의 자본주의에서 자기 유지의 포기는 바틀비처럼 삶을 포기하는 선택일 수도 있다. 그만큼 자본주의는 우리의 삶을 정의할 정도로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6) 결론

『필경사 바틀비』는 바틀비의 행동을 이상하게 보는 독자들에게 “바틀비의 행동은 왜 이상한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바틀비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을 덜기 위해 자기 합리화하는 변호사를 통해 자본주의라는 체제가 바틀비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바틀비가 이상하게 보이는 이유는 그의 행동 자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그렇게 판단하도록 이끄는 독자의 사유 구조에도 있다. 그 1인칭 시점은 독자를 변호사의 판단 구조 안에 묶어두었다가, 그 시선 자체를 다시 의심하게 만든다. 바틀비는 죽는다. 사람들은 죽음에 초연할 수 없고 죽음에 이르기 전에 마지막 저항을 한다. 하지만, 바틀비는 적극적 저항이 아니라 유예적 거부로 일관한다.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바틀비의 행위에 대한 정보를 자기합리화하려는 변호사로부터 얻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는 깊고 깊은 수렁에 빠져 피지배계급이 다른 피지배계급을 재생산하는 순환 속에 빠져 있다는 것이 소설의 깊은 메아리다. 『필경사 바틀비』는 체제를 넘어서는 해답을 직접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변호사의 자기합리화된 시선과 그 시선에 쉽게 동의하는 독자의 판단 구조에 틈을 낸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여전히 예술의 비판적 가능성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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