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의 변증법을 읽고 by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1) 서론
2차 세계대전에서 유대인 학살을 경험하고 그 지옥의 중심에서 두 명의 유대인 철학자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왜 인류는 진정한 인간적 상태에 들어서기보다 새로운 종류의 야만 상태에 빠졌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근대의 계몽이라고 불린 운동은 물질적 번영뿐만 아니라 보다 자유롭고 인간적인 사회를 만들 수 있으리라 기대되었다. 그러나 현실의 문명은 인간을 고통과 기아로부터 구하는 대신, 전쟁을 어떻게 더 효율적으로 수행할 것인가 라는 질문에 맹목적으로 복무하는 듯 보인다. 유래없는 기술적 발전은 독가스와 신형미사일을 만들었고 이는 유럽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지옥으로 끌고 들어갔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이 파국의 원인을 계몽 자체의 내부에서 추적하고자 했다. 그들은 계몽 내부의 자기 파괴적 경향을 찾아냈고, 역사의 어둠에는 항상 계몽이 함께 해왔음을 고발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로 명명되는 이들의 비판적 고찰은 확실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공격을 받아왔지만, [계몽의 변증법]은 이런 공격이 그들이 제일 경계해야 하는 자세라고 말하고 있다. 서론에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여전히 [계몽의 변증법]이 우리 사회에 큰 의미를 가진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전쟁과 기술, 선전과 혐오가 다시 결합하는 오늘날 세계 평화는 크게 위협받고 있지만, 진보를 의심치 않는 우리 사회 또한 한 번도 읽어야 하는 책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2) 형식에 관하여
[계몽의 변증법]의 난해함은 독특한 형식에서 비롯된다. [계몽의 변증법]은 내 생각에는 선형적 체계화의 거부와 철학적 형상의 적극적 사용이라는 형식을 가진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율리시스]는 소설이 가지는 기승전결 혹은 산문 형식을 따르지 않는다. 다양한 시점과 인물들이 섞여 있고 중간중간에 희극, 고전, 시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 소설을 전개한다. [계몽의 변증법] 또한 마찬가지다. 1장 계몽의 개념은 계몽과 신화의 유사성을 통해 “신화는 계몽이었고, 계몽은 신화로 돌아간다.”를 설명한다. 보통은 신화가 무엇인지 계몽은 무엇인지 그리고 차이점과 유사점을 설명하는 순서를 따르지만,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선형적 논증보다는 반복과 변주를 통해 핵심 명제를 여러 층위에서 전개한다. 또한, “왜 인류는 진정한 인간적 상태에 들어서기보다 새로운 종류의 야만상태에 빠졌는가?”, “계몽의 제물이 된 신화 자체도 이미 계몽의 산물이었다”와 같은 표현에서 보이듯, 논리로 독자를 설득하는 다른 철학책들과는 달리 철학적 상징을 많이 사용한다.
예술을 인류가 직면한 문제이 해결책 중 하나로 간주하는 저자들은 예술의 형식에 치열한 고민을 한 흔적을 보인다. 그들은 문화예술장에서
“위대한 예술가들이란 결코 매끈하고 완전한 양식을 구현한 사람들이 아니라 카오스적인 고통의 표현에 대항하기 위한 강인함으로써 즉 양식을 부정적 진리로서 작품 속에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그러한 작품들의 양식은 표현된 것에 그 어떤 힘을 부여하는데 이러한 힘이 없다면 삶은 아무 소리도 못 내고 죽음 속으로 흘로 들어가 버렸을 것이다”라는 문장을 통해 보편성과 특수성을 동시에 가지는 양식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이들이 예술에서 매끈하고 완결된 양식보다 고통과 비동일성을 품는 형식을 높이 평가했다는 점을 떠올리면, 『계몽의 변증법』 자체 역시 완결된 체계보다 긴장과 파열을 드러내는 형식을 택한 것으로 읽을 수 있다. 동일성은 차이를 부정하고 모든 것을 하나의 총체성에 통합하려 하지만, 비동일성은 파편화된 고통을 그대로 드러내어 동일성의 폭력을 폭로한다. 물론 이는 예술작품에 관한 서술이지만, 그들은 [계몽의 변증법]에서도 이런 양식을 구현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칸트를 위시한 합리주의자와 그 후의 실증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에서 정형화된 체계와 상징을 잃어버리고 기호화된 언어의 문제점을 보여준다. 정형화된 체계는 입력과 산출의 거리를 수용할 수 없고 상징을 잃어버린 언어는 부정적 변증법으로의 길을 차단한다. 결국 이 책은 독자에게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는 전달의 언어와, 체계에 편입되기를 거부하는 저항의 형식 사이에서 위태로운 외줄 타기를 감행하고 있는 셈이다.
(3) 계몽의 개념
“왜 인류는 진정한 인간적 상태에 들어서기보다 새로운 종류의 야만 상태에 빠졌는가?”에 대한 해답을 계몽의 내부에서 추적하고자 한다. 이는 계몽에 대한 찬양적 시선을 가진 내가 1장을 읽으면서 가장 당혹스러웠던 점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가 누리는 자유가 계몽 없이는 성립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는 [계몽의 변증법]은 단순히 계몽을 해체하려는 작업이 아니라 비판적 고찰을 통해 계몽을 되살리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계몽이 스스로를 파괴하는 씨앗을 품고 있다면, 그 씨앗은 어디서 왔는가? 이들은 “신화는 계몽이었고 계몽은 신화로 되돌아간다”라는 문장을 통해 계몽의 내부적 문제를 파헤친다.
(3-1) 신화는 계몽이었고 계몽은 신화로 되돌아간다.
계몽이 극복하려 한 게 신화였는데, 신화가 계몽이었다는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명제는 도전적이다. 하지만, 그들은 계몽의 껍질이 아니라 내부의 형식의 분석을 통해 둘의 유사성을 드러낸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아는 것이 힘이다.”에서 알 수 있듯이 계몽은 과학과 수학적 접근을 통해 자연을 계산 가능하고 예측 가능한 대상으로 만들고 자연이 준 물질을 이용해 오히려 자연을 정복했다. 그리고 논리학과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은 자연 현상을 더 이상 신의 자의적 의지가 아니라 보편적 법칙으로 설명 가능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신화 또한 합리적이고 체계적이다. 천둥, 파도처럼 거부할 수 없는 자연의 힘은 번개의 신 제우스, 바다의 신 포세이돈 등으로 체계화되고 분리된다. 그리고 신탁을 통해 내려진 운명은 단순한 혼돈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확인되고 전승되면서 질서와 필연성의 형식을 띠게 된다. “신들은 소재들의 총합이지 소재 자체는 아닌 것이다.”를 통해 신화가 어떻게 자연의 소재를 다루는지 [계몽의 변증법]은 설명한다. 또한 계몽은 법칙을 파악하고 승인함으로써 힘을 얻고, 신화는 신적 질서에 복종함으로써 힘과 생존의 가능성을 확보하려 한다. 이 점에서 두 형식은 예상보다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계몽과 신화는 “자기 유지”라는 인간적 열망으로 설명된다. 둘 다 자연에 맞서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내면의 자유를 억압한다. 신화는 신들을 달래기 위해 제물을 바치고 목적을 이루는 반면 계몽은 문명을 유지하기 위해 차이를 제거한다. 희생과 자기 유지의 관계는 계몽이 태고부터 이어져 온 계급사회와 친화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낸다.
계몽은 왕과 종교의 보이지 않는 권위를 드러내고 법치주의라는 법적 평등을 달성했다. 하지만,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법은 신화적 정의의 세련된 현대버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폭로한다. 신화의 시대에 운명이라는 거대한 파도에 절망한 인간은 정의라는 나름의 시선을 가지고 운명을 소유하려 했다. 이는 등가의 법칙으로 치환되는데, 아킬레스와 헥토르의 아버지의 대화에서 이는 그대로 드러난다. 아킬레스가 헥토르를 죽였지만, 헥토르가 아킬레스의 친구 파트로클로스를 죽였기 때문에 등가의 법칙은 성립되고 둘은 화해할 수 있었다. 물론 이 장면을 단순한 교환의 논리로 환원할 수는 없지만, 고통과 복수, 손실과 보상이 서로 대응되는 질서 속에서 이해되려는 신화적 정의의 한 단면은 분명히 드러난다. 현대의 법도 등가의 법칙에 지배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거쳐 비례적 처벌과 대속의 금지는 현대적 의미의 등가의 법칙이다. 이는 체계화와 계산가능성이라는 계몽의 형식에 가장 적합한 형식의 정의이기에 과거부터 지금까지 법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다.
(3-2) 계몽의 야만성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철학적 독특성은 야만의 내재성에 있다. 자연을 극복하기 위해 추상화하고 체계화하는 계몽적인 접근은 차이를 용납하지 않는다. 『계몽의 변증법』이 직접 이렇게 말하지는 않지만, 인간이 자연보다 약한 존재라는 점을 생각하면 자연의 극복은 언제나 집단적 형식을 요구한다. 차이는 지배의 적이다. 인류를 하나로 묶고 자연에 대항하는 힘을 내기 위해서는 동일성을 위시로 한 집단화가 필수적이다. 노예제도에서 노예는 개별성을 지닌 인간이 아니라 단지 노예라는 범주로 환원되고, 현대 산업사회에서 노동자 역시 고유성을 지닌 존재라기보다 추상적 노동력으로 파악된다. 억눌린 욕망은 다시 돌아온다는 정신분석학의 기본 명제처럼, 피지배계급은 항상 폭력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자유로운 세상과 사회계약론을 통해 민주주의의 근간을 만든 장 자크 루소와 평화사회를 철학의 이상향으로 제시한 칸트처럼 계몽은 물질적 풍요뿐만 아니라 사상의 발전 또한 이루었다. 하지만, 실증주의자들이 언어의 기호적 기능만을 강조했다. 이에 계몽은 부정적 사유와 상상력의 차원을 점점 상실하게 되었다. 상상력의 부재는 지배계급이 계몽의 지배와 친화적 성격만을 부각하고 계몽이 지배계급에 봉사하는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하게 된다. 계몽은 분류하고 체계화하고 수학적 사고를 가지면서 사실만이 진리가 된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신화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신화적 세계에서도 인간은 거스를 수 없는 운명과 질서 앞에 복종해야 했기 때문이다. 부정과 변증법을 위한 차이는 용납되지 않는다. 그리고 부정적 사유를 잃은 계몽은 유용성만 남으면 도구적 이성이 된다.
헤겔은 절대정신이 변증법을 이루는 중심이 되고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역할을 물려받는다. 하지만,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에게 이는 비판의 대상이다. 헤겔과 마르크스가 정신과 노동자에게 특권적 위치를 부여함으로써, 역사의 약속을 믿었다면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특권적 위치의 타락을 주장했다. 계몽이 내부에 야만성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언어는 개념화를 통해 과학의 발전으로 이어지지만 이는 기호와 상징을 떼어내는 폭력의 씨앗을 가지고 있다. 내재된 부정적 요소는 끊임없는 자기비판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 따라서, 확실한 대안을 가지지 못한다는 비판자체가 이들에게 극복되어야 하는 시선이 되는 것이다.
계몽의 개념 챕터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계몽은 근대 유럽의 사상운동으로만 이해되지만 계몽은 신화의 시대부터 우리와 함께 있었다.
둘째,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계몽적 사유란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대상을 지식이라는 틀에 넣고 예측가능하고 통제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사유의 형식을 말한다.
셋째, 이런 행위는 개인이 외적자연을 통제하기 위해 내적자연을 통제하기를 요구하는데 이를 집단으로 확대하면 집단의 생존을 위해 구성원을 지배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넷째, 계몽은 극단적으로 형이상학을 거부한다는 데에서 이전까지와는 다르다. 계몽은 외부의 억압일 수 있는 내용적 목표는 제거하고 오직 효율성과 계산가능성에만 의지한다. 그리고 실증주의자들과 현대 문화산업 그리고 자본주의는 어느 때보다 사유를 빈곤하게 했다. 내용적 목표를 잃은 계몽은 애초에 가지고 있던 지배와 친화적인 성격이 발현되고 계급의 목적에 봉사하며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한다.
다섯째, 기술의 발전뿐만 아니라 사상과 법 그리고 민주주의의 도입은 물질적 풍요와 자유롭고 인간적인 사회를 만들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빈곤한 사유로 인해 인류는 새로운 종류의 야만으로 떨어졌다.
계몽은 그 자체로 선하거나 악한 것은 아니다. 계몽은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비판하고 반성할 때에만, 야만으로 퇴행하는 길에서 벗어날 수 있다” 고 결론 내린다.
(4) 부연설명 1: 오디세우스 또는 신화와 계몽
부연설명 1에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계몽의 흔적을 호머의 서사시에서 찾는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특히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그리스 신화를 대표적으로 전승하고 형상화한 가장 중요한 작품들 중 하나다. 저자들은 먼저 신화와 서사시의 차이점에 주목한다.
“신화와 서사시는 전혀 별개의 개념이다. 이들은 역사적 발전과정의 상이한 두 단계를 각각 대변하는 것으로서 이러한 발전과정은 호머가 구전되어 오던 설화를 편집하는 과정에서 봉합한 이음새들을 잘 살펴보면 알 수 있다.”
(4-1) 주체로서의 자아의 형성
아도르노에 따르면 호머는 구전되어 오던 신화를 서사시로 조직하고 재구성했는데 그 안에서 계몽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신화와 호머의 서사시의 큰 차이는 자기 유지를 위한 자아의 형성이다. 칸트가 경험의 통일을 가능하게 하는 주체를 상정했다면, 오디세우스는 신화적 세계 속에서 여러 모험과 위험을 하나의 동일한 자아의 경험으로 묶어내는 서사적 형상처럼 보인다. 물론 오디세우스가 곧 칸트의 초월론적 자아라는 뜻은 아니지만, 그는 근대적 주체가 형성되는 과도기의 모습을 보여준다. 신화의 세계에서 인간과 자연은 따로 떨어져서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자연의 힘에 좌지우지되고 스스로 운명을 개척할 힘을 가지지 못한다. 앞에서 우리는 계몽은 자연을 지식의 틀로 파악하고 소유한다고 이야기했다. 이는 자아가 자연과의 거리를 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주체로서의 자아가 형성되는 과도기이다. 하지만, 오디세우스는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의 위험을 해처 나간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통일성을 부정하는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을 갖게 되는 자아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는 자아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는 자아를 억압했던 신화적 힘을 인정하고 적응하면서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4-2) 기만적 책략
모험하는 자아인 오디세우스는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을 버리는 메커니즘인 일종의 책략을 사용한다. 아도르노는 상아를 얻기 위해 색안경을 제공하는 문명인처럼 방랑자 오디세우스는 자연신을 기만한다고 말한다. 오디세우스는 자연신과 선물을 주고받는 중간자가 된다. 오디세우스의 책략은 자연신을 인정하고 그들의 특성을 파악한다. 그리고 자연신을 달랠 수 있는 선물을 주고 위기에서 벗어난다. 키르케의 조언에 따라, 저승에 가기 전에 젖·꿀·포도주·물과 보릿가루를 바치고, 양을 희생해 망자들을 부르는 의식을 치른다. 이건 아주 분명한 제의와 희생 장면이다. 오디세우스의 책략은 당장의 충동과 향락을 지연시키고, 희생을 감수함으로써 더 큰 자기 보존을 얻는 구조를 가진다. 이런 점에서 그의 책략은 즉각적 만족을 미루고 축적을 통해 생존과 지배를 강화하는 근대 자본주의의 형식과 닮아 있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책략에서도 계몽의 지배적 성격을 확인한다. 과거의 희생은 공동체에 의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약자나 피지배적 위치에 놓인 이들에게 희생이 집중된다는 점에서 일방적 폭력의 성격을 가진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 역시 체계의 안정을 위해 일부 노동자의 실업과 불안을 불가피한 것처럼 정당화하며, 그런 점에서 희생의 논리를 반복한다. [계몽의 변증법]은 “오히려 희생제도 자체가 역사상 있어왔던 재앙의 상흥이며 인간과 자연이 당하는 폭력행위이다. 책략이란 희생을 해소시키기 위해 희생의 이와 같은 객관적 비진리를 주관적으로 전개시키는 것에 다름 아니다.” 라며 이를 폭로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신화를 벗어나려는 계몽이 어떻게 신화적인 단계로 다시 들어가는 지를 확인할 수 있다.
계몽이 사회전반의 지배적 사상으로 자리 잡고 계몽적이지 못한 개인을 사회밖으로 내쫓으면서 우리는 내면의 자연을 희생할 것을 강요받는다. 그리고 내면의 자연이 희생됨과 동시에 우리의 목적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가 목적이 되고 만다. 오디세우스의 로토파겐과 키르케의 이야기는 자연에 머무르려는 유혹과 그것을 거부하고 귀향을 향해 나아가려는 자기 보존의 충동 사이의 갈등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이 장면은 자연과의 화해를 꿈꾸는 충동과 자연을 극복하고 문명 속으로 돌아가려는 충동의 긴장을 드러내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우리는 과거 그리스 시대를 화해와 균형의 시대로 읽는 낭만주의적 경향이 있지만, [계몽의 변증법]은 오디세우스를 통해서 과거도 지배와 피지배 폭력의 역사의 연장이었음을 보여준다.
(4-3) 헤겔의 도야의 세계와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계몽이 우리를 억압하는 검은 마음을 들춰내는 역할을 함과 동시에 훌륭한 통치의 기술이었다고 말했다. 계몽은 계몽적인 사회구조를 세워두고 이에 맞는 인간을 길러내는데 최선을 다한다. 자기 유지라는 목적을 가진 개개의 인간은 계몽의사회에 편입되기 위해 내면의 자연을 억압한다. 오디세이아는 헤겔의 “도야의 세계”를 떠올리게 한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외화 된 체제에 편입하기 위해 교양을 배우는 도야의 세계에 대해 묘사했다. 인간들은 사회구성원이 되기 위해 자신을 버리고 교양을 쌓으면서 소외된다. 법에 맞는 인간이 되기 위해 자기의 욕망을 억제하고 사회에서 요구하는 예절을 위해 가족의 법을 버리기도 한다. 헤겔에게 있어 도야의 세계는 인간이 스스로 외화 한 실체에 의해 소외되는 세상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도야의 세계는 정신이 외화 된 실체이기 때문에 화해의 가능성으로 가득 차있다. 내가 만든 실체가 나를 소외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면 이를 변화시킬 힘이 정신에게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정신현상학에서 도야의 세계는 인간을 억압하는 검은 마음을 파괴하는 계몽의 세계로 이어진다.
반면에, 아도르노가 보는 계몽의 변증법에는 자연스러운 화해의 길이 없다. 인간의 합리성의 소산으로서의 계몽은 체제를 형성하고 교육 사상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계몽의 세상을 더욱 공고히 한다. 이는 헤겔적 개념의 소외이긴 하지만 아도르노에 있어서 계몽은 스스로 부정성을 지워낸다. 실증주의자들은 상징을 뺀 기호로서의 언어를 통해서 상상력을 파괴하고 문화산업은 현재 이데올로기에 강력한 토대를 제공한다.
[정신현상학]과 [계몽의 변증법]의 차이는 어디서 기인하는가?
첫째, 위에 언급한 것처럼 헤겔은 정신이라는 관념에 특권적 지위를 부여한다. 그리고 정신이 막혀있는 혈을 뚫어 주는 마나와 같은 역할을 한다. 반면에, 아도르노에게 있어서 누구도 특권적인 위치를 차지하지 못한다. 특권적 위치를 차지한 계급이나 사상은 자신의 성공에 도취되어 비판적 견해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지배 이데올로기에 봉사한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둘째, 헤겔은 현대시대의 기술발달, 문화산업 그리고 자본주의를 경험하지 못했다. 기술과 문화산업 그리고 자본주의는 저승의 문을 지키는 케르베르스처럼, 비동일성을 분쇄한다. 계몽의 실증주의화와 형이상학적 가치에 대한 병적인 거부는 헤겔의 변증법이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파괴해 버린다.
또한 헤겔에게 있어 화해는 외화의 결과다. 내가 만들어낸 실체는 화해의 씨앗을 담고 있다. 왜냐하면 창조자로서의 개인은 변화에 이를 수 있는 길 또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은 인간들의 합리성의 소산이기는 하지만 동일성의 추구라는 근본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는 외화이면서 외화는 아닌 돌연변이적인 성격으로 화해의 길은 자연스러운 길이 아니다. 오히려 뼈를 깎는 노력과 자기 유지라는 본능과 맞설 때만 가능한 것이다.
(5) 부연설명 2: 줄리엣 또는 계몽과 도덕
(5-1) 루카치와 아도르노 그리고 호르크하이머의 칸트비판
헤겔의 변증법을 이어받은 루카치와 아도르노 - 호르크하이머는 모두 칸트를 비판적으로 계승하지만 그 비판의 방향과 결론은 다르다. 그도 그럴 것이, 헤겔의 변증법은 고정된 진리를 붙잡기보다는 매개와 부정을 통한 운동 속에 진리가 드러난다고 본다. 루카치는 [역사와 계급의식]에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칸트에 날을 세운다. 둘 모두 헤겔의 변증법을 방법론적 도구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유사하지만, 칸트에 대한 비판적 차이가 둘의 사상적 차이를 만든다.
먼저 루카치는 칸트의 체계에서 문제를 찾는다. 루카치가 보기에 근대의 형식적 합리성은 계산가능성과 예측가능성에 집착한 나머지 현실을 총체적으로 파악하는데 실패한다. 그 결과 근대 철학은 계산 가능하고 형식적으로 통제 가능한 영역만을 현실세계에 남기고 그 밖의 것은 물자체라는 한계 바깥에 남겨둔다. 이렇게 세계는 총체적으로 매개되지 못한 채 제2의 자연처럼 인간 앞에 굳어지게 된다. 루카치에게 이러한 한계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자율, 시장, 수요와 공급 같은 법칙들이 인간에게 낯선 객관적 힘처럼 나타나는 방식과 연결된다. 따라서, 루카치에게 칸트의 체계에 대한 해결책은 파편화된 현실을 역사의 총체성 속에서 다시 파악하는 데 있다. 파편화된 물화의 세계에서 자본주의의 질서는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실을 역사의 총체성으로 바라보면, 사물처럼 보이는 관계에서 인간의 역사적 실천을 다시 발견할 수 있고, 바로 거기서 변증법의 가능성이 열린다. 루카치가 총체성 안에서 해방의 가능성을 찾으려 했다면, 아도르노에게 총체성 자체가 이미 지배의 언어였다.
반면에,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물자체보다는 계몽의 동어반복적 체계에 주목한다. 칸트는 계몽이란 다른 사람의 인도 없이 이성에 의해 인도되는 오성이라고 정의했다. 이는 인간이 오성을 이끌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인간의 자율에 대한 신뢰로 보이지만, 이는 이미 세계에는 오성이라는 흔적이 모든 사물에 묻어있다는 설정에서 인간에 대한 불신으로 해석될 수 있다. 칸트는 “인식의 체계화란 하나의 원리에 입각한 수미일관성이다.”라는 말을 했는데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에게 체계적 통일성이라는 이념은 개념적으로 고정된 상관관계에 기여하는 고정된 능력일 뿐이다. 칸트에게 이성은 보편자로부터 특수자를 이끌어 내는 능력이고, 원리와 사실 판단의 올바른 결합을 유지하는 것이다. 따라서, 칸트에게 있어서 세상은 발견되고 주어진 것을 반복할 뿐이다. 계몽의 무창조성은 계몽이 내용적 목표를 설정하는 것을 거부한다. 이에 계몽은 항상 중립적이라고 여겨지지만, 지배계급이 계몽 내에 있는 지배와의 친화성을 발견하고 도구적 이성으로 이용한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지배된 총체성이 해방의 티켓이라는 시각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세상의 총체성은 지배계급의 지배하에 있기 때문이다.(문화산업 챕터에서 조금 더 상세히 논의하도록 하겠다) 따라서, 이들에게 해결책은 부정성을 통한 변증법적 운동과 비판적으로 구출된 비지배적 관계가 실현된 자연과의 화해다. 이미 정해진 총체적 사회현혹은 인간이 자연과의 화해를 통해 찾은 틈에서 비동일성이 고개 들 수 있다. 그리고 비동일성은 새로운 변증법의 토대가 된다.
[계몽의 변증법]은 사드의 소설과 니체의 철학에서 계몽의 어두운 측면을 본다. 사드의 소설은 목적을 위해 감정을 배제하고 과학적이고 체계적이라는 칸트의 계몽적 성격을 공유하지만, 도덕이 아닌 개인의 욕망이 이성을 도구로 사용할 때 나타날 수 있는 세상이다. 반면에 니체는 다른 사람의 인도가 될 수 있는 미성숙적 이념을 파괴하고 도덕의 위선과 약자의 원한을 폭로한 뒤, 강자의 법칙을 남겨둔다. 사드와 니체가 증명한 문제는 부정성의 부재로 비롯된다. 사드는 개인의 욕망의 문제점에 대한 부정성의 부재이고 니체는 매개 없이 강자에 기대는 자연을 찬양하는데서 발생하는 문제다.
(5-2) 사드백작과 니체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이성의 내용적 목표란 정신에 대한 자연의 힘을 드러내는 것 또는 이성의 자기 입법적 기능을 훼손시키는 것이라는 사실이 이성에 의해 드러난 이후, 이성은 그 형식적 성격에 따라 그때그때의 자연적 이해관계에 봉사할 준비가 되어있다.”라는 문장을 통해 이성의 내용적 부재를 지적했다. 이는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스스로 서지 못하고 종교 혹은 왕의 권위를 파괴하는 능력으로 등장한 계몽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과 유사하다.
계몽은 인간을 억압하는 검은 마음에 대한 반동으로 대중의 지지를 얻었기 때문에, 지속적인 이념의 부정이 동반된다. 계몽이 자신을 완성된 진리나 고정된 이념으로 절대화하는 순간, 자기비판의 능력을 잃고 도리어 신화로 퇴행한다. 따라서, 계몽은 스스로 목표를 설정하고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을 잃을 때, 어떤 이해관계에도 봉사할 수 있는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할 위험에 놓인다. 칸트는 오히려 계몽이 자기 입법을 통해 보편적 도덕을 세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정언명령을 통한 객관적 도덕이 계몽에게 내용적 목표를 세워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증주의자들은 경험적으로 경험할 수 없는 보편도덕의 요구를 형이상학적 잔재로 간주했고 공격 대상이 된다. 목표에 대한 소유권을 박탈당한 계몽이 개인의 욕망을 쫓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를 묘사한 작가가 사드 백작이다. 그는 악덕의 번영에서 부도덕한 줄리엣이 도덕적인 누이보다 성공적인 삶을 사는 세상을 그린다. 또한 줄리엣은 누구보다 과학적이고 체계적이며 종교라는 검은 마음을 거부한다. 사드의 인물들은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마저 계산과 지배의 형식 속에서 조직한다. 이는 사드가 반계몽주의가 아니라 내용 설정 능력을 상실한 계몽이 어디로 흘러갈 수 있는지를 충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이처럼 칸트가 세운 계몽의 목적과 사드가 본 인간이 세울 수 있는 계몽의 목적 사이에 건널 수 없는 심연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가능성이 개인의 단계가 아니라 집단의 단계로 번졌을 때, 2차 세계대전과 같은 야만으로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니체는 도덕의 위선과 약자의 원한을 폭로한다. 니체에게 있어서 동정은 약자를 약하게 만드는 원인이고, 불합리한 체제를 정당화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약자를 돕고 사랑하라는 당시에 널리 받아들여졌던 기독교적 도덕을 파괴했다. 허위 보편성 해체 이후 니체에게 남는 것은 힘과 위계의 논리를 긍정할 위험이 큰 세계다. 니체는 지배계급의 지배 수단으로써의 도덕의 위선의 폭로에는 탁월했지만, 자연상태의 미화와 보편적 도덕이 부재는 우려할 만하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선의와 자비는 죄가 되며 지배와 억압은 덕이 된다. 모든 좋은 것들은 예전에는 나쁜 것이었다. 모든 원죄로부터 원덕이 나온다.”라는 문장을 통해 니체의 사상이 파시스트들에 의해 어떻게 악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니체는 초인을 통해 기존 도덕의 붕괴 이후에도 새로운 가치 창조가 가능하다고 보았지만, 목표 설정 능력과 자기비판을 잃은 초인은 파시스트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쉽게 전유될 수 있었다.
[계몽의 변증법]은 이기심이 사회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계몽의 밝은 철학자들보다 사드와 니체 같은 계몽의 어두운 철학자에 주목한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독창성은 흔히 반계몽주의로 보일 수 있는 사드와 니체를 오히려 계몽의 가장 극단적인 진실을 드러내는 사상가로 읽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계몽이 야만으로 떨어지는 것이 외부의 영향이 아니라, 계몽의 내부에서 발생할 수 있음을 여실히 증명한다. 이는 자기반성과 부정성을 상실한 계몽이, 해방의 힘이 아니라 지배와 야만의 수단으로 쉽게 전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6) 문화 산업: 대중 기만으로서의 계몽
(6-1) 헤겔, 루카치와 아도르노-호르크하이머의 차이
문화산업장은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철학적 입장이 왜 헤겔, 마르크스 그리고 루카치와 결정적으로 차이를 가지는 지를 보여준다. 먼저 마르크스와 루카치는 기술발전을 부정적으로 사유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기술은 인류의 진보를 말함과 동시에 프롤레타리아트 유토피아에서도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 물론 기술에 의해 노동자들이 소외되기는 하지만 그건 기술의 적용에 대한 문제이지 기술자체가 가지고 있는 내재적 모순은 아니다.
헤겔은 절대정신이 매개와 부정의 운동을 통해 역사의 발전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절대정신이 내용적 목표를 설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감각적 확신에서부터 시작된 운동은 내부적 모순을 발견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변증법적 운동을 한다. 그리고 이 변증법적 운동은 항상 모순을 해결하고 보다 풍부한 감각 혹은 사상으로 넘어간다. 감각적 확신이 지각이 되고 자기의식이 이성으로 가는 식이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기술발전과 문화산업이 융합된 근대의 상황이 루카치와 헤겔의 이상향에 대치될 수밖에 없다는 의견을 피력한다. 기술발전이 중립적이라는 루카치의 인식과는 달리, 기술발전은 지배계급의 선호도에 맞게 재조직되고 선별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동일성을 추구하는데, 문화산업의 기술 또한 이 방향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계몽의 변증법]에서 자세히 설명되지 않았지만, 자본과 정치적 힘을 가진 지배계급이 자신의 이득에 어울리는 기술발전을 택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또한, 이를 통해 다양성을 사상하고 지배계급이 원하는 내용을 설정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지게 되기 때문에 헤겔이 생각하는 정신의 진보를 향한 성장 또한 의심스러워진다. 계몽의 파괴의 씨앗을 내부에서 찾으려는 [계몽의 변증법]은 기술의 파괴적 씨앗을 기술 내부에서 찾는 것이다. 이는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지속적으로 제기하는 비판적 사고의 중요성이 두각 된다.
(6-2) 문화산업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문화산업가 기술발전의 융합은 외부의 진실을 오염시키고 내부의 거짓을 재생산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아도르노는 보편적 형식을 뒤틀고 그 틈에서 비동일성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예술이 현대사회에 균열을 내는 자리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이는 의미심장하다. [계몽의 변증법]의 독창성은 우리가 가지는 선호도가 연출된 선호도라는 것을 폭로하는 데 있다. 대중은 많은 영화나 가수 그리고 다양한 매체에 노출되어 있고 그 안에서 자유로운 선택을 하고 있다고 느낀다. 영화관에 걸린 포스터의 개수나, 자국뿐만 아니라 타국의 가수와 드라마에 접근할 수 있는 현실에서 선택의 자유를 느끼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분석은 보다 심층적이다.
첫째, 문화산업이 제공하는 작품에 대한 형식은 정해져 있다. 영화는 영화의 형식을 드라마는 드라마의 형식을 따라야 한다. 이런 형식이 창자자의 독창성에 따라 결정된다면, 형식의 다양성이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대중매체는 대중매체의 기술을 따라야 하고, 이에 어긋나는 형식을 가진 작품은 소비자에게 다가갈 수 없다. 따라서 형식은 결정되어 있다. 아도르노는 소비자는 수동적이고 매체만 능동적인 기술의 형식이 문제라는 뉘앙스를 풍긴다. 따라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은 유튜브와 같은 소비자 주도형 매체가 발달했기에 아도르노의 문제의식이 극복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내 생각에, 아도르노의 문제의식은 더욱 커졌다. 왜냐하면 소비자들이 내용을 설정할 수 있는 능력이 오히려 대중매체에 의해 조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앞에 [계몽의 변증법]이 제기한 도구적 이성의 문제와 유사하다.
둘째,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은 짜인 스케줄에 따라 생활한다. 그리고 이는 교양의 궁핍으로 이어진다. 너무 힘든 노동으로 노동자들은 문화산업에서 오락과 향락을 쫓는다. 오락과 향락은 노동자들이 문화산업을 소비하는 순간, 힘든 사유는 벗어던지고 값싼 웃음과 즐거움을 즐기게 구성된다. 영화나 음악은 소비자가 예상 가능한 구조와 정서적 반응을 기대하게 된다 왜냐하면 기대와 다른 형식이나 장면 전환은 사유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전체적 플롯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부분이 전체적 내용의 완성도 보다 중요해진다. 어떻게 진행될지 대강 감을 잡고 있다면 남는 것은 부분 부분의 스펙터클이다. 낯선 내용도 결국 익숙한 정서적 안정으로 회수된다. 그렇지 않은 문화산업의 작품은 대중의 관심과 문화산업의 주변부로 밀려난다. 마틴스콜세지는 마블시리즈는 영화가 아니라 놀이동산과 같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요즘 영화는 리스크가 없고 소비자들이 예상할 수 있는 줄거리를 가지고 정해진 요소에 똑같이 웃고 울고 재미를 느낀다는 말로 설명했다.
마틴스콜세지와 아도르노는 오늘날 상업영화가 위험을 피하고 예측 가능한 형식에 의존한다는 점을 비판한다. 형식적 반복과 익숙한 화해의 구조는 그리스 서사시를 떠올리게 한다. 정해진 내용에서 정해진 대립이 드러나고 정해진 방식으로 화해하는 문화산업의 작품들은 틈도 비동일성의 가치도 보여주지 못한다. 이는 앞에 이야기한 소비자 주도의 매체가 아도르노의 문제의식을 재생산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문화산업의 형식과 내용에 길들여진 소비자들은 문화산업의 십자군이 되어, 비동일성이라는 이교도를 처단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쇼츠라는 도파민을 뿜어내는 형식을 생산한다. 즉각적인 도파민 형성을 해주지 못하는 작품은 쓰레기통에 담아버린다.
셋째, 문화산업은 욕망을 관리한다. 총체성이 정해져 있고 부분들이 총체성에 반란을 일으켜 작품의 중심으로 자리 잡을 때 부분은 자극적이 된다. 장사꾼이 되어버린 창작자들에게 부분의 자극성은 예술성 보다 더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이들은 성적 욕망, 폭력의 욕망과 같이 모든 사람들이 가진 욕망을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소비자를 흥분시킨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가질 수 없는 욕망들은 철저히 처벌하고 소비자들에게 이런 욕망을 가지는 것은 파멸의 길이라는 것을 재교육한다. 욕망에 노출된 소비자들은 욕망을 갈구하지만, 이런 욕망을 가질 수 없다. 금발의 글래머러스한 배우들에 대한 성적 욕망은 관람의 수준에서만 충족되고 현실에서는 철저히 무시된다. 이런 과정 속에서 소비자는 욕망은 충족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번 교육받는다. 예술작품은 특히 그리스 비극은 욕망의 충돌을 가감 없이 보여줌과 동시에 욕망이 파멸되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욕망을 가지는 것이 문제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가져야 했던 이유를 세심하게 다룸으로써 욕망이 파멸되는 사회로 눈을 돌리게 한다. 안티고네가 가지는 신의 법을 지키려는 욕망과 크레온이 가지는 인간의 법을 지키려는 욕망은 대립하고 둘 다 파멸한다. 이를 아도르노는 예술의 심미적 승화라 한다. 예술은 약속의 좌절을 실현으로 보고 문화산업은 충동을 억압하는 것이다.
넷째, 문화산업은 예술의 가치를 폐기한다. 모든 예술작품은 대중문화의 형식에 담길 때만 상품의 역할을 할 수 있다. 과거 오페라의 형식은 단순화된다. 오페라 가수가 오페라 무대에서 마이크를 써야 하는지 마는지는 해묵은 논쟁이다. 마이크를 사용하는 순간, 오페라 가수에게 요구되는 것은 비동일성을 끄집어낼 틈을 버리는 성량이 아니라, 미모와 몸매가 된다. 영화화할 수 없는 발자크 사드의 소설들은 폐기되고 마블의 만화영화만이 시리즈화된다. 예술의 형식은 창자자들이 예술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선택되고 발전해 온 것이다. 하지만 문화산업은 이를 축소하고 자신들의 요구에 봉사할 수 있도록 거세해 버린다. 뿐만 아니라, 과거에는 돈을 지불하고 오페라 하우스에 가고 책을 읽어야 하는 모든 수고를 제거한다. 사람들은 무료로 집에서 예술작품을 소비할 뿐이다. 돈을 지불하고 방문하는 수고는 소비자들이 어떻게든 예술작품과 관계 맺는 노력을 요구한다. 일생에 오페라 하우스에 몇 번 방문할 수 없다면 방문자체가 소중할 것이고 예술작품에서 의미를 찾으려 한다. 하지만, 티브이를 틀면 나오는 오페라는 k-pop가수에 비해 그리 소중한 작품이 아니다. 아도르노는 값싼 작품이 예술적 의미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술작품은 역사적으로 하층계급을 배제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는 “하층 계급의 계기를 포함할 때에야 진정한 보편성은 가능한 것으로서 애술은 잘못된 보편성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자유에의 열망을 통해 진정한 보편성에 충실하고자 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통해 예술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그가 비난하는 것은 싸구려 보편성을 위해서 예술 작품이 수정되고 폐기되며 이데올로기에 봉사하는 새로운 야만성이다.
(6-3)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엘리트주의적 비판에 대한 비판
문화산업은 [계몽의 변증법]에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파트이자 가장 큰 비판을 받는 파트이다. 사람들은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엘리트주의적이라고 비판한다. 문화산업장은 대중문화를 비판하고 고전 예술작품을 찬양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또한 가벼운 예술은 삶에 지친 우리에게 즐거움과 에너지를 준다는 점에서 나름의 가치가 있지만 이 또한 아도르노에 의해 평가절하 된다. 예술작품은 과거부터 지배계급에 의해 생산되고 지배계급이 즐기는 방향으로 조직되어 왔다는 사실에서 이런 비판은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생각하는 예술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본다면 엘리트주의라는 비판은 예술의 위계만 보고 문화산업의 지배에 대해서는 사유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기분풀이나 가벼운 예술’ 그 자체는 데카당스의 형식이 아니다. 누군가가 이것들을 순수한 표현에 대한 배반이라고 불평한다면 그는 사회에 대해 어떤 환상을 품고 있는 것이다.”라는 문장에서 알 수 있듯이 [계몽의 변증법]의 비판은 예술 작품의 깊이에 향하고 있지 않다. 이들이 비판하는 것은 지배계급의 이념에 봉사하는 문화 산업이다. 기분풀이나 가벼운 예술이 사회지배 구조의 부당함을 파해친다면 이는 고전 예술작품 보다 큰 가치를 가질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 우리는 이미 현대 문화산업의 오락물이 어떻게 욕망을 관리하는지 이야기했다. 엘리트주의는 엘리트적 지배계급의 유지에 봉사하는 이데올로기라고 해석되어야 한다. 피지배계급이 선호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자유로운 선택은 아니다. 그 선호가 지배 구조 속에서 형성된 것이라면, 바로 그 선호의 문제를 폭로하는 일이 오히려 반엘리트주의적일 것이다. 과거, 제도에 편입시키고 글을 가르치는 대중교육이 엘리트주의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실제론 해방의 계기가 되었다.
둘째, 문화산업은 웃음을 생산한다. 그리고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를 엘리트주의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은 웃음의 즐거움이 의미 있다고 말한다. [계몽의 변증법]은 문화산업의 즐거움을 값싼 웃음이라고 폄하한다. 이는 동일성의 비판과 같다. 문화산업의 웃음은 계산된 웃음이다. 소비자는 정해진 형식에 따라 정해진 순간에 웃음을 터뜨린다. 아이언맨이 인류를 위해 희생할 때, 시청자들은 눈물을 터뜨릴 것을 요구받는다. 하지만, 인간의 감정은 다 다르다. 각자가 가진 성향에 따라 울음도 웃음도 포인트가 다르다. 문화산업은 개별적인 감정 차이를 지우고 표준화된 반응을 요구한다. 또한 행복과 웃음은 전혀 다르다. 웃음과 향락과 행복은 동일하지 않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봄에 흔들의자에 앉아 미소 짓는 노부부는 향락적 웃음이 아니라 세월과 자연에 대한 고마움에 대한 미소다. 이런 잔잔한 즐거움은 사상된다. 또한, 선택한다는 즐거움은 값싼 개성이다. 구레나룻, 빡빡이머리, 긴 체인의 힙합 목걸이 이런 것들은 문화산업이 허용한 범위 안에서의 개성일 뿐이다. 형식에 포섭되지 않은 개성은 대중문화에 의해 아웃사이더라는 낙인이 찍힌다.
따라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엘리트주의라기보다는 쉬운 향락과 선택에 빠져있는 대중에게 체제의 비합리성의 논리를 폭로하고 대중에게 비판적 사고를 요구하는데 가깝다. 엘리트주의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본다면, 그 비판은 오히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보다 문화산업에 더 적절하게 적용될 수 있다. 문화산업장은 파시즘과의 유사성을 드러내면서 끝마친다. 개성과 사유가 사라진 문화산업은 총통이 발언이 다음날 유행하는 당시 독일사회와 동조와 반복의 형식에서 닮았다. 유행을 따르려는 사람은 유행이 내포한 문제보다 유행을 따르지 못한다는 사실에 큰 공포를 느낀다. 개성이 사라지고 사유가 사라지면 유대인을 저주하는 총통의 말은 단지 따라야 할 슬로건일 뿐 비판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이는 지배계급과 내용설정의 능력을 잃어버린 계몽의 제물이 된다.
(7) 반유대주의적 요소들: 계몽의 한계
반유대주의와 나치의 유대인 학살은 사회가 우리 사회에 남긴 상흔이다. 2차 세계대전의 잔혹한 현실을 경험하고 계몽에서 파멸의 내재적 요소를 찾으려 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반유대주의로 [계몽의 변증법]을 끝맺는 것은 타당하다. 하지만, 이들은 “그러나 반유대주의는 더 이상 없다. 그들은 다만 반유대주의적 견해를 말하고자 했던 자유주의자일 뿐이었다”라는 말로 반유대주의에 대한 독창적 시각을 보인다.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의 재판을 보고 악의 평범성을 논한 것처럼 [계몽의 변증법]은 반유대주의의 평범성을 밝힌다. 그들에게 이는 피지배계급이 잃어버린 주체성을 찾으려 한 움직임이다.
유대인은 그들의 독특한 사회적 역사적 상황으로 인해 파시스트들에 의해 선택된 것이다. 거대한 자본의 폭력 앞에 자본주의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나뉘었고, 피지배계급은 자기 유지를 위해 내면의 자유를 억압했다. 억압된 욕망은 분출되어야 한다. 그리고 억압된 욕망은 사회적 약자에게 향했었다. 중세 교회에 의해 억압된 성적 욕망은 마녀사녕이라는 명분하에 여성들에게 향했다. 2차 세계 대전 전, 자본주의가 지배적 체제로 자리 잡고 노동자와 자본가로 계급이 이분화되면서 노동자는 욕망 표출이 대상이 될 수 없었다. 내 생각엔 인구의 절반이 넘는 노동자를 희생자로 만들면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원활하게 돌아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당시 유행하던 공산주의가 파시즘을 집어삼킬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파시스트들은 유대인을 희생양으로 선택했다.
자본주의는 노동자와 자본가 모두 노동한다는 이데올로기에 기댄다. 그리고 이는 자본가의 수익을 정당화한다. 하지만 누군가는 노동자의 궁핍한 삶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유통으로 눈을 돌렸다. 생산수단을 가질 권리를 법적으로 차단당했던 유대인은 금융업 유통업에 종사했고 그들은 타깃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희생과 고행을 요규하는 유대교는 믿음에서 손쉬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당시 기독교에 모욕감을 주었다. 그리고 그 모욕감은 파시스트들이 대중의 칼날을 유대인들에게 손쉽게 돌리도록 허락했다.
(7-1) 이데오진크라지와 잘못된 투사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사회가 반유대주의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거의 문제는 이디오진크라지의 내용을 개념으로 끌어올려 그 무의미성을 자각시킬 수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이들에 따르면 “이데오진크라지란 석판 위에서 조각칼이 내는 날카로운 소리, 똥이나 부식물을 연상시키는 퇴폐 취미와 같은 시대의 흐름에서 뒤처진 것이나 수세기 동안의 진보가 축적한 명령들에 해를 입히는 것들로 혐오감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이데오진크라지 앞에서 인간의 개별 기관들이 주체의 지배로부터 다시 빠져나가 생물학적인 근본 자극들에 자율적으로 순응한다”는 것이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에게 반유대주의는 단순한 이데올로기의 결과가 아니다. 비록 인간이 체제와 문화산업에 의해 사유할 능력을 잃어버렸지만, 유대인 학살에 동의했다는 것을 인정하기 어렵다. 이들은 욕망의 억압과 투사에서 해답을 찾는다. 자연을 정복하고 문명을 만들기 전, 인류는 미메시스적 삶을 살았다. 자연과 타자와 닮아가려는 유기적인 순응인 미메시스는 계몽적 사유로 인해 거부된다. 자연을 닮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수치화하고 체계화하여 소유하게 된 것이다. 오디세우스의 키르케와 로토파겐의 설화에서 자연에 동화되고 행복한 삶을 살려는 개인을 문명이 어떻게 좌절시켰는지가 묘사된다. 자연에 동화된다는 것은 단순히 현실로부터 도피하거나 노동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자연과 타자를 지배와 통제의 대상으로만 대하지 않는 비지배적 관계의 가능성을 가리킨다. 문명은 발전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우리 안에 남아있는 미메시스적 잔재를 망각시킨다. 하지만 이런 잔재는 사라지지 않고 인간의 내면 깊숙이 자리 잡게 된다.
지배는 피지배계급이 자신의 욕구를 저주할 때 가능하다. 미메시스적 잔재는 피지배계급에 의해 저주되었고 이는 내부에 꽁꽁 숨겨져 있다. 하지만, 이데오진크라지는 내부에 숨겨져 있는 저 태고의 욕망을 겉으로 드러낸다. 중세시대의 마녀사냥처럼, 내가 억누른 욕망은 깨부수어야 하는 악으로 자리 잡는다. 파시즘은 미메시스적 욕망에 대한 증오를 대중이 효과적으로 표출하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계몽의 변증법]은 “파시스트들의 구호나 의식, 훈련, 제복 등 언뜻 보기에는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파시즘의 모든 장치들은 미메시스적인 형태를 가능케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대중은 이런 장치를 가지고 유대인에게서 자신들의 이디오진크라지를 해소하는 것이다.
“반유대주의는 잘못된 투사 위에 기초하고 있다”는 [계몽의 변증법]의 철학을 그대로 드러낸다. 반유대주의는 계몽에 의해 거부된 내면의 자유가 억압된 형태로 내부에 자리 잡은 것을 파시스트들이 파악하고 이용한 결과라는 것이다. 잘못된 투사는 “대상에서 주체가 책임져야 할 부분과 낯선 외부세계가 책임져야 할 부분을 구분할 수 없는 주체의 능력부족에서 초래된다”는 것이 이들의 분석이다. 그리고 이 능력부족은 실증주의적 관점에서 비롯된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에 따르면 반유대주의는 편집증 환자와 유사한 구조를 가진다. 편집증 환자가 외부 세계를 자신의 불안과 집착을 대상에 투사한 뒤 그것을 객관적 현실이라고 확신하는 것처럼 반유대주의 역시 파시즘이 제공한 왜곡된 틀 속에서 세계를 해석하고 그 해석을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인다. 칸트에게 인식이란, 주어진 자극이 인간의 오성과 감성으로 표상화되는 것이었다. 실증주의자들은 한 발짝 더 나아가, 인간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한다고 주장했다. 불확실성을 거부하는 계몽에게 실증주의적 시선이 정답으로 채택되었다. 형이상학적 접근과 상상력은 불필요하고 비효율적인 것이다. 하지만,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이것이 주체를 궁핍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이들에게 인식작용은 주체와 객체의 상호작용이다. 주체는 겉으로 들어온 객체를 인식하고 판단한다. 판단행위는 주체의 적극적인 행위를 요구한다. 주체의 인식은 단순한 수용이 아니라 판단과 해석을 포함하는 능동적 작용이다. 그러나 그 과정이 객체를 전적으로 구성하거나 그 의미를 마음대로 바꾸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주체와 객체의 매개 속에서 주체는 대상을 더 풍부하게 파악하려고 접근하지만, 대상은 언제나 개념에 완전히 포섭되지 않는 잔여를 남긴다. 주체가 객체를 단지 주어진 사실로만 받아들이고 그에 대한 판단과 해석의 가능성을 차단한다면, 그것은 객체의 풍부성과 주체의 인식능력을 빈곤하게 만든다. 객체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은 주체의 능력을 상승시키고 자신을 더 잘 파악하도록 만든다. 하지만, 편집증 환자의 초일관성은 항상 동일한 판단을 요구한다. 그리고 이성이 내용설정을 할 능력을 잃어버리고 도구화될 때, 객체의 의미는 지배계급으로부터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는 위에 말한 능력부족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반유대주의의 원인이다.
(8) 브라이언 오코너와 매개 비판
브라이언 오코너는 아도르노의 매개 개념이 중요한 철학적 역할을 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구조가 충분히 엄밀하게 제시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아도르노는 주체와 객체가 서로 외부적으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상호 매개된 관계 속에 있다고 본다. 즉 주체는 객체를 있는 그대로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며, 객체 역시 주체의 인식과 완전히 분리된 순수한 즉자적 실제로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동시에 아도르노는 객체가 개념에 완전히 포섭되거나 주체에 의해 전적으로 구성된다고 보지도 않는다. 마찬가지로 지식은 개념을 통해 형성되지만, 개념은 대상을 완전히 소진하지 못한다. 오코너가 보기에 문제는 바로 여기서 발생한다. 아도르노는 매개의 필요성을 강조하지만, 주체와 객체가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매개되는지, 그리고 개념과 대상의 불일치가 어떤 철학적 구조 속에서 설명되는지 충분히 제시하지 못한다. 따라서 오코너는 아도르노의 매개 개념이 풍부한 통찰을 지니면서도 학문적 엄밀성에서는 미흡하다고 본다.
이는 오코너가 헤겔에 대한 독해가 오히려 엄밀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헤겔에게 있어 매개와 지식은 운동이지 고정된 진리가 아니다. 헤겔이 절대정신은 흔히 모든 운동이 종결된 최종 상태로 이해되기도 한다. 하지만 헤겔에게 있어 절대정신은 변증법적 변화라는 형식을 가지고 자기 전개운동을 계속해서 실현하는 정신으로서의 최종 상태이다. 헤겔에게 있어 절대정신은 형이상학적 절대지가 아니라, 변화라는 대체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진 형식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매개는 고정될 수 없다. 주체와 객체가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변화한다는 것은 고정된 매개에서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매개가 고정된다면 변화의 결과도 고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개념과 지식의 관계에도 같은 방식으로 적용되어야 한다. 아도르노의 입장에서는 그 비엄밀성 자체가 개념이 대상을 완전히 포섭할 수 없다는 사실, 곧 비동일성의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일 수 있다. 따라서 오코너의 비판은 부분적으로 타당하더라도, 그것은 아도르노가 거부하려 했던 동일성 중심의 인식 기준을 다시 들여오는 한계를 가진다.
오코너가 요구하는 엄밀성의 기준이 과연 아도르노의 철학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지는 따져봐야 한다. 오코너는 매개 개념이 보다 명료하고 체계적으로 설명되어야 한다고 보지만, 아도르노는 애초에 대상을 완전히 포착하고 정리하는 체계적 사유 자체를 비판한다. 이런 점에서 오코너의 비판은 일정 부분 타당하더라도, 다른 한편으로는 아도르노가 거부한 동일성 중심의 인식 기준을 다시 요청하는 것일 수 있다. 엄밀함은 분과학문이 세운 패러다임의 지배를 공고히 하는 수단이 된다. 이에 아도르노는 엄밀함 보다는 사유를 확장하는 것을 추구한다. 따라서, 엄밀하지 않다는 것은 아도르노에 대한 공격이 아니나 오히려 아도르노의 철학을 사유하고 확장하는 것이 된다.
(9) 결론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파시즘이 조장하는 투사가 어떠한 집단으로도 향할 수 있다고 말한다. 특히 문화산업과 정당이 모든 것을 정하고 사람들에게 전체를 고르게 하는 티켓적 사고방식이 발달한 지금은 더욱 그러하다. 이것이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개정판 서론에서 아직 [계몽의 변증법]이 필요한 이유라고 밝힌 이유다. 1969년 개정판이 발표되고 6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계몽의 변증법]은 과거 보다 더 많은 시사점을 가진다. 특히 양극화된 정치와 생성형 AI의 발달은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우려하던 티켓적 사고가 더욱 많아지고 있다. 세부 사항은 무시한 채 정치적 성향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특정 정당을 선택한다. 또한 생성형 AI는 과거 자료를 찾으면서 스스로 주체가 되어 지식들을 매개하는 과정을 없애고 정답을 준다. 이는 비판적 사고의 결여와 함께 평균적 생각을 받아들이게 만든다. 앞으로 정치적 양극화는 더 심해질 것이고 생성형 AI는 더욱 발달할 것이기 때문에 [계몽의 변증법]의 필요성은 나날이 늘어날 것이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계몽을 부정하는 듯 보이지만, 누구보다 계몽주의자로 보인다. 계몽의 문제점을 계몽의 적들에게 주어 그들이 악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계몽주의자들이 문제점을 파악하는 것이 계몽이 자유의 선봉자로 우뚝 서게 만드는 방법이라는 그들의 생각은 [계몽의 변증법]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잘못된 투사는 인간의 능력 부족이기 때문에 해결책은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능력을 함양해야 한다는 것은 인간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놓고 있지 않고 있다. 그리고 진정한 계몽주의적 접근은 현시점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