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는 “모더니즘 문학”의 선언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모더니즘 문학”의 선구적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모더니즘 문학이란, 이전 문학의 형식에서 탈피한 문학을 말한다. 특히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는 “의식의 흐름”이라는 방식을 채택해, 등장인물의 행동 동기를 외부의 상황과 함께 내부의 의식에서 찾는다. 의식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흐르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렵고, 율리시스 또한 예외는 아니다. 율리시스는 “의식의 흐름” 기법뿐만 아니라 다양한 장르의 변형을 시도한다. 신문기사 방식의 글쓰기, 셰익스피어 작품을 통해 의미를 전달하기 등 이전에는 시도되지 않은 이러한 새로운 방법은 우리를 율리시스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하지만, 인간이란 도전의 동물 아닌가? 새로운 접근은 독자들을 율리시스로부터 멀어지게 했지만, 또한 율리시스라는 거대한 산을 정복하기 위해 다시금 모이게 만든다. 율리시스는 제임스 조이스의 조국인 아일랜드의 암울한 현실을 비판하기 위해 쓰인 책이다. 제임스 조이스는 아일랜드의 발전을 억누르는 종교, 정치, 삐뚤어진 신념 등을 파고든다. 그리고 힘든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자기 일에 충실한 보통의 아일랜드 사람들이 진정한 영웅이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1장: 텔레마코스
율리시스는 고대 그리스 서사시 오디세우스를 따르고 있다. 1장 ‘텔레마코스’는 오디세우스의 아들로, 율리시스에서는 스티븐을 일컫는다. 텔레마코스는 전쟁에 나간 오디세우스를 기다리며 그리워하는 인물로, 스티븐 또한 진정한 아버지 혹은 진정한 멘토를 기다리고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1장에는 스티븐, 멀리건, 그리고 헤인즈가 등장한다. 스티븐은 아일랜드인, 멀리건은 아일랜드인이지만 영국에 동조하는 친영주의자, 그리고 헤인즈는 아일랜드를 연구하러 온 영국인이다. 이들은 Martello 타워에 사는데, 이는 영국이 프랑스의 침공 위협에 대비해 지은 탑이다. 멀리건은 스티븐을 ‘엄마 살해자’라고 부르며 조롱한다. 스티븐과 멀리건, 그리고 헤인즈는 아침 식사를 같이 하고, 헤인즈는 게일어를 사용하지만 그들에게 우유를 팔러 온 아일랜드 노파는 게일어를 알아듣지 못한다. 스티븐은 일하러 직장으로 떠나고, 그들은 후에 스티븐의 봉급으로 술을 마시기로 약속한다.
1장 분석
a. 스티븐: 스티븐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받지만 이를 거절한다. 이를 조롱하기 위해 멀리건은 ‘엄마 살해자’라는 별명을 붙인다. 스티븐은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으로, 그의 의식의 흐름이 어머니를 향한다. 하지만, 깊게 생각해 보면 스티븐이 어머니에게 기도를 해주지 않은 이유는 자신이 진정으로 믿지 않는 행위가 오히려 어머니에게 모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는 올바른 행위이지만 아일랜드 사회는 그의 행동을 비난한다.
b. 멀리건: 그는 친영주의자로, 모든 것을 풍자적으로 그리고 가볍게 받아들인다. 멀리건과 스티븐이 대조되는 점은, 멀리건은 아일랜드의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기보다 포기한 젊은이들의 전형으로 보는 편이 더 타당하다. 그는 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아일랜드의 상황에 대해 외면하기에 방탕하고 가볍다. <심각하게 고민하고 미래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술에 취해 현실을 잊는다.> 반면에 스티븐은 아일랜드의 상황에 직면하고자 하는 젊은이로, 항상 진중하고 생각이 많다. 멀리건과 같이 행동하지 않는 지식인(어떤 구체적 사례가 있는지 필요)에 대한 비난으로 제임스 조이스는 1장의 말미에 그를 ‘탄 찰 자’라고 명명한다.
c. 헤인즈와 게일어: 헤인즈는 아일랜드를 연구하러 온 영국인으로 실제로는 매우 부유하지만, 스티븐과 멀리건에게 신세를 진다. 이는 영국이 실제로는 부유하지만 식민지를 착취하는 모습과 유사하다. 헤인즈는 게일어를 사용할 수 있지만 노파는 사용할 수 없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식민지의 전통을 영국은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연구하지만 정작 이득을 취해야 할 아일랜드인들은 취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2장: 네스토르
네스토르는 오디세우스에게 결정적인 조언을 주는 왕이다. 율리시스에서는 스티븐이 일하는 학교 교장 ‘미스터 디시’와 같은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는 과거에 얽매이고 새로운 의견은 무시하는 아일랜드의 ‘꼰대’로 그려지고, 스티븐은 그의 조언을 무시한다.
스티븐은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봉급을 수령하기 위해 학교로 향한다. 수업 중에도 그의 머릿속은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으로 가득 찬다. 수업을 마치고 ‘서전트’라는 학생의 개인 숙제를 봐주면서, 자신과 서전트가 어릴 때 어머님으로부터 보호받았고 어머니는 조건 없는 사랑을 줬다는 사실을 다시 되새긴다. 봉급을 수령하기 위해 교장을 만나지만, 교장의 의미 없는 조언을 듣고도 그대로 행동하지 않기로 마음먹는다. 교장은 스티븐에게 아구창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신문사에 전달해 신문에 실어줄 것을 부탁한다.
2장 분석
a. 스티븐은 역사가 객관적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는 에드워드 카가 말했듯,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기에 역사를 서술하는 사람의 생각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역사는 승자의 입장에서 쓰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왜냐하면 승자가 역사를 쓰는 기관이나 그곳에 투입되는 자본 등을 통제하기 때문이다. 패자의 입장에서 역사가 서술되었다 해도, 그들은 희생자의 입장이므로 절대 객관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스티븐이 아일랜드 사람들이 역사에만 의존하고 미래를 대비하지 않는 상황을 비난하는 것 같다.
b. 아일랜드가 처해 있는 문제를 해결하려면 다른 교육이 필요함을 알고 있지만, 자신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저급한 교육을 제공하는 것에 스티븐은 자기혐오를 느낀다. 아일랜드의 미래를 위해 노력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게일어 교육은 등한시하고 영국의 학제를 아일랜드 국민들에게 가르치거나 영국의 목소리가 되어 영국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자신의 안위만 챙기는 지식인들에 대한 간접적인 비난이다.
c. 미스터 디시는 자신이 ‘정답’을 가지고 남을 교화하려고 하는데, 이는 영국 제국주의의 태도와 비슷하다. 오히려 영국 제국주의를 도와 아일랜드 사회를 병들게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3장: 프로테우스
스티븐은 디시와 헤어진 후 해변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스티븐은 지나가는 산파들을 만나고 자신의 탄생에 대해 고민한다. 그리고 숙모의 집을 방문할까 말까 망설이면서, 내부적으로 숙모 집에 방문하면 벌어질 일을 상상하고 방문을 포기한다. 그 뒤 해변에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커플을 만난다. 그리고 끝없는 사유를 하다가 모래에 글을 쓰고 해변을 떠난다.
“나는 죄의 어둠 속에서 태어났다. 만들어진 존재이지, 단순히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3장 분석
a. 제목: 프로테우스는 오디세우스에 나오는 변신하는 바다의 신으로, 고정되지 않고 유동적인 성질을 지닌다. 3장에서 제임스 조이스는 스티븐의 의식의 흐름을 보여주면서, 인간의 의식은 고정되지 않고 ‘~을 향한 의식’ 임을 드러낸다. 이는 후설이 말한 의식의 지향성으로, 인간은 세상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가지는 지향에 따라 해석한다는 뜻이다. <의식은 항상 무언가에 대한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의식을 구성하는 지평은 의식이 가지는 인식에 영향을 미치고 이는 객관적으로 세상을 파악할 수 없는 인간의 특성을 말해준다.> 스티븐이 숙모의 집에 대해 가지는 생각은 과거의 부정적 이미지와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으로 인해 긍정적일 수 없었고, 그는 끝내 방문을 그만둔다. 이처럼 인간에 대한 이해, 그리고 인간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은 의식과 경험 그리고 역사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b. 산파의 등장: 스티븐은 본인의 의지 없이 태어난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는 부모님의 아들이자 아일랜드인으로 태어났고, 그 가족과 조국은 매우 암울한 상태다. 하지만 스티븐은 자신의 의지로 암울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세상에 ‘피투’되었지만, 미래를 향해 ‘기투’하는 성격을 지녔기에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자신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당대의 천재 스티븐이 블룸에게서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는 이유를 알려준다. 자신보다 뛰어난 것은 없지만, 스스로 미래를 찾고 주변 상황에 귀 기울여 도움을 주는 블룸이 스티븐의 진정한 멘토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왜냐하면 블룸은 조이스가 보기에 바람직한 어른이자, 현재를 묵묵히 살아가는 역사의 진짜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c. 개의 등장: 해변에서 스티븐은 사납게 짖어대는 개를 본다. 개가 의미하는 바는 권력에 굴복하지만 약자에게는 강한 존재다. 스티븐과 조이스는 이러한 존재야말로 아일랜드를 망치는 암적인 존재로 봤다. 그들은 국수주의자일 수도 있고, 종교 지도자이거나 친영주의자일 수도 있다. 이들이 가진 공통점은 불합리한 체제에 순응하고 강자에게 굽실대지만, 자기보다 약한 아일랜드 시민들에게는 억압적이라는 점이다. 그들을 ‘개’에 비유한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d. 아리스토텔레스 (피할 수 없는 시각의 양태: 최소한 그것만은, 아니면 더 있나, 내 눈을 통해 생각했다.): 세상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에 대해 서양 철학은 끊임없이 토론하며 발전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위의 말을 통해 “내가 보는 것을 과연 믿을 수 있는가?”를 묻는다. 조이스는 스티븐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것은 결코 과거와 현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보여준다. 내가 가지는 생각, 사상, 그리고 신념은 나의 인식 체계에 심대한 영향을 준다. 오히려 조이스는 현상학의 주장, “사태 그 자체로” 세상을 인식하기를 원한다. 세상이 정해준 모든 기준을 벗어던지고 “사태 그 자체”에 접속해 파악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닌 개인만이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4장: 칼립소
블룸은 아침에 일어나 아침 식사를 하고, 몰리를 위해 아침 식사거리를 사러 밖으로 나간다. 블룸은 거리를 다니며 지나가는 처녀를 보며 외설적인 생각을 하지만 곧 몰리에 대한 사랑스러운 생각으로 이어진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몰리에게 온 편지와 자신에게 온 딸의 편지를 발견한다. 딸을 향한 사랑스러운 감정이 일어나지만, 몰리가 다른 남자와 외도할 것이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 블룸은 몰리에게 사랑을 표하고, 상복을 입고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집을 나선다.
4장 분석
a. 제목: 칼립소는 오디세우스에 나오는 아틀라스의 딸로, 오디세우스를 오기기아 섬에 머물게 한다. 오기기아 섬은 지상낙원으로, 오디세우스는 그곳에서 영생을 얻고 평생을 살 수도 있었다. 하지만 험난한 여정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길 원했고, 제우스의 개입으로 다시 항해를 시작한다. 칼립소는 몰리를 상징한다. 지금의 몰리는 블룸을 배신하고 외도하고 있지만, 여전히 블룸을 소유하고자 한다. 블룸은 이러한 몰리에게 갇혀 있지만, 결국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몰리, 즉 이타카로 돌아가고자 한다. 몰리와 블룸은 서로에게 문제가 있음을 알지만, 현재의 삶에 만족하기에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오디세우스의 이타카처럼, 그들은 서로의 문제점을 직시하고 해결해야 진정한 사랑으로 갈 수 있다. <몰리는 왜 바람을 피우는지, 블룸은 왜 과거 아들의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는지 등은 진솔한 대화를 통할 때만 해결할 수 있는 심리적 문제일 수 있기 때문이다.>
b. 블룸과 스티븐: 블룸은 식사 장면에서부터 대변 장면까지 매우 감각적인 사람이다. 이는 스티븐과 대조된다. 스티븐은 감각보다는 자신의 관념에 의지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블룸은 3장에서 말한 “사태 그 자체로”를 충실히 따르며 현실을 살아가고, 스티븐에게 의지할 수 있는 진정한 어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c. 하이데거의 시간: 하이데거는 인간이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단순히 구분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는 “과거로부터 도래하며, 미래를 향해 가능성을 열어 두고, 그 속에서 현재를 살아간다”라고 말했다. 블룸의 의식은 하이데거가 말하는 시간성을 잘 보여준다. 아직 많이 드러나진 않았지만, 블룸은 과거의 기억으로 문제 있는 결혼 생활을 하고 있으나 몰리와의 진정한 사랑을 꿈꾸며 미래를 지향하는 존재다. 이는 스티븐과 매우 다른 모습이다. 스티븐은 과거의 기억이 현재의 발목을 잡아 술로 인생을 낭비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런 체념적인 태도는 아일랜드인 전반을 비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d. 지나가는 처녀에 대한 블룸의 의식: 블룸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외설적인 생각을 자주 한다. 이는 두 가지를 보여준다. 첫째, 인간의 성욕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성욕을 억누르려는 사회적 시도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 추구에 걸림돌이 된다. 둘째, 프로이트가 말한 것처럼 초자아에 의해 억눌린 모든 욕망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 속에 남아 언제든 돌아온다는 것이다. 블룸이 아내와 성관계를 하지 않고 있음에도 성욕이 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5장: 연꽃과 바다
블룸은 집을 떠나 더블린 거리를 돌아다니며 내면의 흐름을 서사한다. 먼저 우체국에 들러 ‘마사’의 편지를 찾는다. 다른 사람이 알 수 없는 편지를 찾는 블룸의 모습에서 그는 조심스러워한다. 교회를 방문해 미사에 참여하지만, 기부 전에 일어나는 등 교회에 대해 부정적인 관념을 가진 모습도 나온다. 그리고 약국에 들러 약과 비누를 구입한다.
5장 분석
a. 율리시스와 스티븐, 그리고 블룸: 율리시스에서 스티븐은 오디세우스의 아들이라고 해석되지만, 운명에 대처하는 자세로 보면 오디세우스와 스티븐은 유사하다.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전쟁에 참여해야 했고, 전쟁 후에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기나긴 여행을 하게 된다. 물론 집으로 돌아가고자 함은 그의 의지지만, 그 앞에 놓인 장애물들은 그의 의지와 무관하다. 운명에 휩쓸려 방황하는 스티븐과 비슷하다. 반면, 블룸의 하루여행은 자신의 의지로 시작된다. 블룸이 집을 떠난 이유는 아내의 외도가 보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하루 동안 능동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처럼 율리시스(오디세우스)와 상반되는 블룸의 설정은, 운명에 대항해 스스로 길을 만들어가는 인물에 대한 조이스의 찬사를 보여준다.
b. 마사의 편지: 블룸은 아내의 외도에 대한 보복 혹은 대응으로 마사와 외설적인 편지를 주고받는다. 하지만 육체적 관계는 맺지 않고 특정 선을 유지한다. 이는 인간이 어떤 한계를 넘어서면 다시 돌아갈 수 없음을 상징한다. <예를 들어, 전쟁에서 살인을 경험한 군인은 과거로 돌아올 수 없고, 식민지 약탈에 동조한 시민은 결코 ‘일반’ 시민이 될 수 없다는 식의 비유다.>
c. 비누와 꽃: 5장에는 꽃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꽃이야말로 현실을 잠시 도피하고 그 순간을 즐길 수 있게 해주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꽃을 받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기념일에 꽃이 빠질 수 없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꽃은 폭력을 행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모두에게 행복의 이미지를 준다고 생각한다. 비누는 과거의 잘못을 씻어내려는 블룸의 의지를 표현한다. 한편 스티븐은 한 달에 한 번만 목욕하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두 인물의 과거에 대한 인식 차이를 반영한다.
6장: 하데스
블룸은 디그넘의 장례식에 참석한다. 그곳에서 블룸은 과거 아버지의 자살과 아들의 죽음을 떠올린다. 개 두 마리가 성관계를 하는 장면을 보고 과거 아내와 잠자리를 가진 일을 회상하며, 삶이란 우연적이라는 생각을 한다. 장례식이 끝나고 참석자들은 제각기 일상으로 흩어지며, 블룸은 다시 한번 죽음의 불가피함과 인생의 무상함을 성찰한다.
6장 분석
a. 의식은 항상 자기중심적으로 세상을 이해한다: 디그넘의 장례식장에 참석한 블룸은 디그넘의 죽음을 보고 자신의 아버지와 아들의 죽음을 떠올린다. 이는 인간 의식의 지향성은 항상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사람들의 행위를 과학적 데이터만으로 파악하기엔 위험하다는 생각을 제시한다. 오히려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개개인이 가진 상처나 트라우마에 대해 파악하고 그에 맞는 처방을 내려야 한다.
b. 성(聖)과 속(俗): 엘리아데는 그의 저서 『성과 속』에서 성스러운 것은 속스러운 것과 쌍을 이룬다고 말했다. 오히려 성스러운 것이란, 종교나 정치 지도자들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정해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있다. 블룸에게 아들의 탄생은 성스러운 일이지만, 그 계기는 개들의 성관계처럼 가장 ‘속된 것’이었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다시 말해, 이는 아일랜드를 억누르는 종교적 억압에 대한 비판과 연결된다.
c. 죽음의 대리성 불가능: 하이데거는 인간이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이지만, 남의 죽음을 통해서는 죽음을 ‘대리 경험’할 수 없다고 본다. 디그넘의 장례식에서 사람들이 자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장면은, 타인의 죽음을 가볍게 받아들이고 종교적 잣대로만 해석하는 세인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결국 개인적 죽음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이해하지 못함을 드러낸다. 자살이라는 행위가 모든 죽음을 불명예스럽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 그런 행위를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다.
7장: 에올리우스
블룸은 본업인 광고 대행업을 위해 신문사로 간다. 하지만 신문사에 모인 소위 ‘지식인’들은 블룸에게 매우 고압적이다. 블룸은 열쇠가 들어간 광고와 함께 우호적인 기사를 실어주길 바라며, 사정 끝에 대부분을 관철한다. 그리고 열쇠 디자인을 얻기 위해 도서관으로 향한다. 한편 천재라 불리는 스티븐은 환대를 받으며 ‘자두 우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스티븐은 신문사를 떠나며 그곳에 모인 지식인들에게 환멸을 느낀다.
7장 분석
a. 신문사: 진실을 말하고 아일랜드 국민을 대변해야 할 신문사와 지식인들이, 정작 블룸(일반인)을 억압하고 돈을 위해 타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블룸이 지속적으로 열쇠 디자인에 집착하는 것은, 일반인과 신문사 그리고 신문사를 지탱하는 지식인 사이에 가로놓인 닫힌 문을 열어야 한다는 뜻이다. 지식인들이 영국의 억압적 태도엔 분노하면서도, 블룸을 억압하는 모순을 드러낸다.
b. 로마와 유대인 우화: “로마는 제국을 세웠지만 발명한 것은 화장실밖에 없다”라는 말과, “유대인들은 제단을 세워 영적으로 우대받는다”라는 지식인들의 대화는, 자신들이 영국의 제국주의에 짓눌려 있으면서도 영적으로 우수하다고 자위하는 아일랜드 지식인의 문제점을 꼬집는다. 이는 ‘사태 그 자체’로 보지 않고 근거 없는 자의식에 빠진 비겁한 태도다.
c. 자두의 우화: 아일랜드를 구경하러 두 명의 노파가 넬슨 탑에 올라가지만, 탑 꼭대기에서 벌벌 떨며 자두만 먹고 내려온다는 이 우화는 영국의 제국주의를 비판한다. 넬슨 탑은 제국주의를 상징하고, 두 노파는 영국과 프랑스 같은 제국주의 국가를 가리킨다. 그들이 벌벌 떠는 것은, 제국주의 국가들이 자신들이 가진 힘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식민지 확장에만 치중했음을 의미한다. 결국 제1, 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듯, 이들은 인류의 복지보다는 경쟁에만 몰두한다. 자두가 유럽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과일이라는 점은, 그들도 결코 특별하지 않음을 상징한다.
8장: 레스트리고니언족
신문사를 나온 블룸은 열쇠 디자인을 찾기 위해 국립도서관으로 향한다. 가는 길에 “누구든지 종교에 귀의할 수 있다”는 구호를 보고 종교의 세속성을 비판한다. 또 과거 연인이었던 조시 브린을 보는데, 그녀는 남편의 정신 불안정으로 불행한 삶을 살고 있음을 알고 한탄한다. 광고를 몸에 짊어진 사람들을 보며 과거 몰리와 함께했던 행복한 시간을 떠올리기도 한다. 식사를 하기 위해 들른 식당에서는 주변 사람들이 육식을 즐기는 모습에 역겨움을 느껴 채식 식당으로 가고, 자신이 들고 다니는 비누(5장에서의 상징과 연결) 덕분에 마음의 안정을 느낀다.
8장 분석
a. 제목: 8장의 제목인 ‘레스트리고니언족’은 오디세이아에 나오는 식인종 부족이다. 레스트리고니언족이 언급된 이유는, 제임스 조이스가 종교·가부장제·자본주의를 식인종에 빗대어 아일랜드 국민의 삶과 에너지를 갉아먹는 존재로 그렸기 때문이다. 블룸이 첫 번째 식당에서 역겨움을 느끼는 장면에서 이 비유는 극에 달한다.
b. 종교: 아일랜드는 독실한 가톨릭 국가로, 교리에 따라 피임을 부정적으로 보았다. 이 때문에 국가가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많은 인구가 태어나고, 제한된 예산에서 교육과 사회복지를 감당하기 어려워진다. 결과적으로 버려지거나 돌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생긴다. 종교가 식인종과 비슷한 이유는, 자기 교리를 따르는 교인들의 신앙심에 의존해 세력을 확장하지만, 정작 그들의 삶에는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더 나은 삶을 제공하라”는 종교의 본래 취지는 잊힌다.
c. 자본주의와 가부장제: 가부장제 역시 마찬가지다. 가정의 본래 목적보다 군림하는 남편을 추앙하고, 남편은 분노와 결핍을 폭력과 복종으로 해결하려 한다. 이런 제도가 유지되는 것은 자본주의가 가부장제를 옹호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봉건제를 무너뜨리고 자유와 더 나은 미래를 약속했지만, 실제로는 모두를 풍요롭게 하진 못한다. 따라서 노동자는 사회에서는 억눌려도, 가정에서는 군림할 수 있는 가부장제로 보상받는다. 광고판을 몸에 두르고 다니는 노동자들은 광고라는 목적을 위해 자신을 소모해야 하고, 이들이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간 가정에서조차 <폭력과 명령을 통해> 군림하려 드는 모습은 식인종적이다.
9장: 스킬라와 카립디스
국립도서관에서 스티븐과 여러 지식인이 ‘햄릿’에 대해 토론한다. 스티븐은 햄릿이 셰익스피어 자신의 이야기를 쓴 것이라 주장한다. 고뇌하는 햄릿이 곧 셰익스피어라는 해석이다. 그러나 스티븐은 햄릿은 셰익스피어의 아들, 햄릿의 아버지는 셰익스피어 자신, 그리고 왕비는 셰익스피어라고까지 주장한다.
9장 분석
a. 작가중심주의와 작품중심주의: 문학을 해석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갈래다. 작가중심주의는 작가의 생각이 작품에 반영된다고 보고, 작품중심주의는 작품을 작가로부터 분리해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스티븐은 작가중심주의를 옹호한다. 셰익스피어의 생각이 ‘햄릿’에 투영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예술가는 일반인이 볼 수 없는 무엇을 보고 이해한다. 이는 무의식과 현실 세계가 다르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상상력을 동원해 새로운 작품을 창조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술가들이 때로는 고달픈 삶을 살지만, 후대에 재평가받기도 하는 이유다. 이런 점에서 작가중심주의가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다만 작품 자체의 의미가 훼손될 수 있다는 반론(작품중심주의 측면에서의 지적)이 존재한다.
b. 셰익스피어: 반면 셰익스피어는 극작가와 연극배우로서 풍요로운 삶을 살았다고 알려져 있다. 이름과 신분을 숨기지 않았다면 큰 성공을 못 거뒀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그의 작품은 후대에 영어 표현과 단어 사용을 한 단계 끌어올린 작가로 평가받으며 재평가되었다. 제임스 조이스는 자신의 작품 ‘율리시스’가 셰익스피어의 작품처럼 두고두고 다양한 해석을 받는 고전으로 남길 원했을 것이다. 제임스 조이스가 <아일랜드가 영국의 식민지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영국 작가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차용한 이유는, 첫째로 햄릿의 가족 관계가 블룸의 가족사와 유사하기 때문이고, 둘째로 고전은 특정 시대와 문화를 넘어 보편적 가치를 가진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제국주의가 식민지를 확장하더라도 후세에 남아 이야기되는 것은 결국 인류가 공감할 수 있는 문학 작품이라는 메시지다.
10장: 방황하는 바위들
더블린 시내 오후 2시 55분부터 3시 44분 무렵까지 벌어지는 여러 단편적 장면을 19개의 짧은 단락으로 나누어 묘사한다. Father Conmee는 교회에서 나와 학교 쪽으로 이동하며 여러 사람과 스치듯 만나고, 스티븐의 아버지는 가족의 생활고에도 불구하고 딸에게 약간의 돈만 쥐여 주고 지나간다. 블룸은 서점에 들러, 아내와 정부, 그리고 남편의 삼각관계를 그린 책을 아내에게 선물하기 위해 구입한다.
10장 분석
a. 제목: ‘방황하는 바위들’은 더블린 시내를 방황하는 사람들을 비유할 수도 있지만, 내 생각에는 아일랜드가 항해하는 데 위협이 되는 인물들의 묘사라고도 해석된다. 더덜러스로 대표되는 가부장제, 신부로 대표되는 종교 등은 암초와 같은 존재로, 아일랜드가 피해 가야 할 장애물이다.
b. 신부: 겉으로는 인자해 보이지만, 은근히 가톨릭의 억압적 분위기를 드러내는 인물이다. 그러나 자유롭게 관계를 맺은 커플에게 신의 가호를 비는 장면에서 어느 정도 관대한 모습도 엿보인다.
c. 블룸 vs 더덜러스: 스티븐의 아버지 더덜러스는 아일랜드를 망치는 전형적 인물로, 이 때문에 스티븐이 방황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더덜러스는 딸이 스티븐의 책을 팔아 생활비를 마련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술을 마시러 다닌다. 제임스 조이스가 강조하는, 후대를 위해 자기 욕망을 억누르고 희생하는 블룸의 모습과 정반대다.
d. 블룸의 책: 블룸은 아내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지만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관계가 반영된 듯한 책을 선물하려 한다. 이는 블룸이 셰익스피어처럼 ‘문학적 방식’으로 소통하고자 함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성숙하지 못한 인간관계를 드러내기도 한다. 블룸은 버림받는 것이 두려워 진실을 직면하기를 망설이는, 전형적인 인간적 나약함을 지닌다.
11장: 사이렌
더블린의 Ormond Hotel에서 블룸은 점심을 먹는다. 블룸은 식당에서 보일런을 보는데, 보일런이 아내와 외도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직접 대결을 피한다. 식사를 마친 뒤 호텔을 나서며, 여성들의 유혹과 보일런과의 직접 대결 욕구에도 무너지지 않았음을 확인한다.
11장 분석
a. 사이렌과 유혹: 오디세우스에서 인부들은 눈과 귀를 가려 사이렌의 유혹을 피하고, 오디세우스는 자신을 돛대에 묶어 매혹적인 소리를 듣지만 행동은 제한한다. 율리시스에서 블룸은 오디세우스에 비유된다. 그는 유혹과 욕망에 노출되지만, 결국 이를 극복한 인물로 그려진다. 장님 피아노 조율사와 귀머거리 바텐더는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처럼, 자본주의에서 노동자들은 유혹 자체에 잘 노출되지 않는다는 ‘계몽의 변증법’적 설정을 반영한 것이다. <노동자들은 노동에으로 인해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와서 티브이를 튼다. 티브이에서는 각종 유혹적 장면들이 노출된다. 하지만, 자본가들과 다르게 그들에게 그런 유혹은 눈으로만 볼 수 있을 뿐 경험할 수 없다. 멋진 여자 혹은 남자와 데이트할 수 없고, 비싼 차는 탈 수 없다. 지상낙원이라는 관광지에 방문할 수도 없다.> 한편 보일런처럼 유혹을 거리낌 없이 즐기는 모습은 긍정적이라기보다 부정적으로 묘사된다.
결론
너무나도 긴 율리시스 11장까지 줄거리와 분석을 마쳤다. 모던 문학을 자처하는 율리시는 난해한 문체와 숨겨진 의미로 인해 읽기 어려운 작품이다. 하지만,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는 여행이라고 생각하면 그럭저럭 견딜만하다. 나머지 율리시스세계 또한 곧 탐구할 수 있기를 바란다.
<2부는 이번주내로 업로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