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우리는 누구인가 by 새뮤엘 헌팅턴
새뮤엘 헌팅턴의 미국 우리는 누구인가를 읽고
대한민국에 사는 나에게 미국은 “멀고도 가까운 나라”이다. 미국은 우리나라에서 서부 기준 9,000km 떨어져 있고 비행기로 꼬박 11시간 정도 걸린다. 교통과 통신이 유례없는 발달을 이루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미국과 한국은 멀리 떨어진 나라다. 하지만, 심리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미국은 매우 가까운 나라다. 텔레비전이나 뉴스를 보면 올해 11월로 예정된 미국 대통령 선거에 관련된 소식을 심심찮게 접할 수 있다. 또한, 미국 고위급 관계자가 방한하거나 대한민국 관련된 정책을 미국에서 발표하면 대서특필 될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주식시장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미국이 9,000km 떨어진 우리나라에 끼치는 영향이 큰 이유는 분명하다. 첫째,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경제적으로 발달한 나라다. 미국의 시장은 그 어느 시장보다 매력적이고 이는 수출을 기반으로 하는 대한민국에도 마찬가지다. 둘째, 북한이라는 존재를 적으로 두고 있는 대한민국에 우리의 든든한 우방으로 불리는(도널드 트럼프의 등장으로 예전만큼 믿음직하지는 않지만) 미국의 군사력은 대한민국의 안보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뿐만 아니라, 미국의 핵우산 영향력 아래 있는 대한민국의 핵 안보는 미국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셋째, 자유무역 민주주의의 수호자인 미국의(이 또한 도널드 트럼프의 등장으로 의심의 눈초리를 받고 있지만) 행동에 따라 세계의 질서가 흔들리기도 더 탄탄하게 유지되기도 한다. 이러나저러나, 대한민국의 운명은 미국이라는 거대하고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지배를 받고 있으므로 미국에 대한 이해는 대한민국 사람들이 가져야 할 필수 교양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에 따라, “새뮤엘 헌팅턴의 미국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책을 선택했지만, 책의 내용은 내가 생각했던 것 과는 매우 달랐다. 이 책은 미국의 대외정책이나 세계질서에 미치는 영향에 관해 설명하는 책이 아니라 미국 시민들이 자신들은 정의하는 정체성에 관해 설명하는 책이다. "새뮤엘 헌팅턴의 미국”이 이야기하는 바는 명료하다. 미국의 시민들은 전통적으로 자기들을 정의하는 독특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데, 미국 엘리트들의 새로운 물결은 미국의 전통적인 정체성을 위협하고 있다. 자신의 전통적인 정체성에 위협을 받는 미국인들은 크게 범세계주의, 제국주의, 국가주의의 세 가지 중 하나로 대응할 수 있는데 새뮤엘 헌팅턴은 미국이 국가주의의 길을 선택하기를 바란다고 말하며 끝을 맺는다.
새뮤엘 헌팅턴의 미국은 크게 4부로 나누어져 있다. 1부에서 새뮤엘 헌팅턴은 정체성은 무엇이고, 사람들이 가지는 정체성과 국가 정체성은 어떻게 형성되는지 보여주고 있다. 사람들이 가지는 정체성은 사람들의 행동양식을 결정한다. 사람들은 다양한 정체성을 가질 수 있고, 국가 정체성 또한 마찬가지다. 또한, 정체성은 홀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나와 차별되는 남이다. 남이라는 존재는 위협적인 존재일 수도 있고, 혹은 그냥 나와 차별되는 다른 존재일 수도 있다. 개인의 정체성과 다르게 강력한 국가 정체성은 강력한 적의 존재가 필수다. “전쟁이 국가를 만든다”는 오랜 격언처럼, 우리 외부에 적이 존재할 때 사람들은 국가라는 하나의 존재로 자신을 규정하게 된다. 미국의 국가 정체성은, 독립전쟁, 남북전쟁, 2차 세계 대전, 냉전, 9/11를 통해서 발전해 왔고, 강력한 적이라는 존재가 없는 지금 미국의 국가 정체성은 와해할 위기에 처해있다. 미국인들이 강력한 국가 정체성이라는 뿌리에서 벗어나면 벗어날수록, 이들은 하부 정체성이라는 곁가지에 집중할 가능성이 커진다. 미국인이 백인 혹은 흑인 또는 캘리포니아인 같이 더욱 작은 정체성으로 이양한다는 이야기이다. 바꿔 말하면, 국가 정체성의 약화는 국가라는 큰 배를 대양으로 끌어 나갈 동력을 잃어버리고 오히려 더 작은 보트에 몸을 실어 자기와 더 많은 공통점을 가진 사람들과 협력해 나간다는 이야기이다.
2부에서 미국의 정체성에 관해서 설명하고 있다. 미국은 이민자들의 나라가 아니라 개척자들의 나라라고 선언한다. 영국 왕정이라는 전근대적인 중력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개척자들이 미국이라는 신대륙으로 넘어오면서 시작된 나라라는 것이다. 이민자들의 나라가 정확한 개념이 아닌 이유는, 미국은 전통적으로 이민자들이 개척자들이 만든 문화와 정체성에 동화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정착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동화 과정에서 이민자들은 미국의 언어인 영어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미국인을 정의하는 또 다른 정체성은 민주주의, 법치, 개인의 권리로 구성되는 미국의 신조와 노동을 소명으로 받아들이고 금욕주의적 생활상을 추구하는 개신교 적 특성이 있다. 미국은 미국인, 영국인, 아일랜드인처럼 민족적 혹은 백인 흑인 아시아인과 같은 인종적 정체성도 가지고 있었지만, 교차 결혼과 여러 가지 법률적 정치적 사회적 노력으로 인정과 민족적 정체성은 많이 희석되었다. 따라서, 영어와 종교 그리고 미국의 신조가 지금의 미국 시민들이 가지는 정체성의 기반이다.
3부는 미국의 정체성이 위협받고 있는 현상에 관해 설명한다. 2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미국은 이민자들은 대거 받아들인 나라이지만, 이민자들의 미국 정체성에 대한 동화를 전제로 했다. 이민자들은 미국의 신조와 언어 그리고 종교적인 특성을 받아들여야 했고 이는 미국 사회는 샐러드 볼(미국은 모든 문화가 각자의 특성을 가지고 어우러지는 사회라는 개념), 멜팅팟(새로운 문화가 어우러져서 새로운 맛을 만들어내는 사회라는 개념)이 아니라 토마토수프(어떠한 문화를 섞든지 간에 미국은 미국의 기본적 정체성에 기반해서 조금 변형된 토마트 수프라는 개념)였다는 것이다. 토마토수프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이민자들의 미국 사회에 고른 분포와 미국의 신조를 지키는 법적인 접근이 필수적인데, 미국 사회는 둘 다 실패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히스패닉계 이민자들은 특정 지역 즉 마이애미나 캘리포니아에 모여 살기 시작했고 이는 히스패닉계 이민자들이 영어를 사용하거나 미국 사회에 동화하지 않아도 미국에서의 삶을 유지할 수 있게 만들어줬다. 또한, 자유주의적 성향을 보인 정치인 혹은 커질 만큼 커진 인구로 인해 무시할 수 없는 쓰나미와 같은 영향력을 가진 이민자 공동체의 로비에 굴복한 정치인들이 이중언어 국가정책을 추진하고 무분별한 이민자들의 유입을 방치하면서 미국의 정체성은 위협받고 있다고 설명한다.
마지막 4부는 새뮤엘 헌팅턴의 개인적인 소망에 관해 이야기한다. 서문에서 그는 학자적인 호기심과 함께 애국자의 마음으로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두 가지 정체성이 충돌할 수 있지만, 그는 애국자의 마음에 대한 설명으로 책을 마무리한다. 미국은 미국의 전통적인 가치를 되살리고(미국의 신조와 종교적 가치) 국가주의의 길을 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또한, 급진적인 정치인들과 사회지도층이 행정명령 또는 법을 새로 해석하는 방법을 통해 미국을 다원주의 국가로 만드는 시도에 대해 비판한다. 이러한 방법은 민주적이지도 않고 시민들과의 소통이 아니라 강압적인 방법이기 때문에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미국의 국가주의로의 회귀가 미국에 밝은 미래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나는 3가지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첫째, 과연 대한민국 국민을 정의하는 정체성은 무엇인가?
둘째, 고령화 사회라는 국가적 위기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이민자의 유입은 과연 합리적인 방법인가?
셋째, 민주주의는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칼포퍼가 이야기한 점진적 공학을 따라야 하는가? 아니면 빠른 문제 해결을 위해 행정명령 또는 법적 해석이라는 급진적 공학이라는 방법을 따라야 하는가?
대한민국 국민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나는 대한민국의 국민 정체성을 한글로 사용하는 한민족 그리고 자유민주주의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은 외세의 침입을 받아왔지만, 이제까지 이민자의 유입을 차단한 채 한민족의 명맥을 유지했다. 또한,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나고, 북한의 위협 속에서 끊임없는 민주화를 위해 희생하고 노력했기에 자유민주주의 또한 우리의 정체성일 것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것은 무엇인가? 아직은 미국인들이 직면하고 있는 커다란 정체성의 위기는 아직은 없는 것 같다. 여전히 우리나라는 한글을 사용하는 한민족이 대다수이고, 우리나라 안에서 정치적 분열은 있지만 큰 줄기의 자유민주주의 신념 또한 지켜지고 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을 정의하는 한민족과 자유민주주의라는 정체성은 바람직한가?” 이에 대한 대답은 약간 부정적이다. 타국의 도움으로 한국전쟁에서 생존하고 수출에 의존하며 그 어느 때보다 K-pop을 위시한 K-문화를 수출하는 국가가 배타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매우 의아하다. 대한민국에 들어온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대한민국 국민들의 시선은 차갑고, 난민을 받아들이는 데는 매우 인색하다. 또한, 우크라이나와 같이 도움이 필요한 국가에 도움을 주는 것 또한 쉽지 않다. 이러한 성향은 대한민국의 배타적 정체성의 영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은 도덕적으로 국제사회에 기여해야 할 의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따라서, 배타적인 정체성을 벗어던지고 조금 더 개방적인 정체성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둘째, 고령화 사회의 해결을 위해 이민자의 유입은 합리적인 방법인가? 이 책을 읽기 전, 이민자의 유입은 고령화 사회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여성들에게 출산을 권장하는 방법은 효과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매우 비인간적이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대한민국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또한, 가능하고 인간적이라 하더라도 출산은 2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이 걸린다. 그 사이에 문제는 누가 해결 할 것인가? 노동인구의 기계화 또한 마찬가지이다. 기계화가 완전히 상용화되기에는 너무 긴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민자의 유입은 짧은 시간에 필요한 노동자의 수를 확보할 수 있다. 또한, 노동자들과 함께 형성되는 정치적 문화적 다양성은 대한민국의 미래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교두보 역할을 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 동화가 전제되지 않은 이민자의 유입은 대한민국을 불안정한 사회로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한글을 사용하는 노동자의 유입은 매우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필리핀, 인도 같이 영어를 모국어와 비슷한 빈도로 사용하는 나라의 수는 많지만, 한글을 사용하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는다. K-문화가 외국인의 한글에 대한 관심을 높이기는 했지만, 애교 수준일 뿐 고령화를 해결할 만큼의 숫자는 없다. 또한, 이민자의 유입을 고령화 사회의 해결책으로 생각하는 나라들과 경쟁은 필수적인데, 이는 이민자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고 이는 필수적으로 동화를 저해한다. 따라서, 이민자의 무분별한 유입은 고령화 사회에 대한 정답이 아니다.
셋째, 점진적 공학이 옳은가, 급진적 공학이 옳은가? 급진적 공학은 민주주의 정신을 파괴하고 무시당한 국민들의 사회 지도층에 대한 분노를 자아낸다. 민주주의를 사는 시민들은 국가의 방향은 시민의 의견에 따라 결정되어야 할 민주주의 개념을 끊임없이 들어왔고 이러한 개념을 굳건히 믿고 있다. 하지만, 엘리트들이 행정명령 또는 법적 해석으로 국민들의 의견을 무시한다면 국민들은 지도층을 믿지 못하고 인기 영합 정치인들에 기대게 된다. 미국 전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의 급부상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미국인의 국가와 법원에 대한 믿음은 거의 바닥을 치고 있고 이를 기점으로 도널드 트럼프의 인기가 치솟고 있다고 한다. 점진적 공학 또한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 사회가 직면한 문제점을 바로 해결할 수 없기에 많은 희생자가 발생할 것이고 희생자들의 분노 또한 사회를 불안정하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결과보다는 과정에 의미를 두는 정치체제이다. 점진적 공학의 장점은 계속된 설득과 의견 교환을 통해 시민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을 같이 형성하는 데 있다. 또한, 사람들의 의견이 존중되고 절차 또한 지켜지고 있기 때문에 시민들의 분노가 인기영합주의자의 선출로 향하는 일도 막을 수 있다.
미국: 우리는 누구인가?”는 2004년에 쓰인 책이지만, 오늘날 미국의 분열을 놀랍도록 정확히 예견했다. 미국의 전통적 정체성이 흔들리고, 외부 위협이 사라진 시대에 수많은 미국인이 배타적인 국가주의를 선택했다. 이는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의 민주주의와 공동체 정신을 위협하고 있다. 각국이 마주한 정체성의 불안은 때로 이기적이고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이제는 우리도 묻고 답해야 한다.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로 가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