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무엇이 정상인가: 포스트 구조주의의 질문

현대사상 입문을 읽고 by 지바 마사야

by 사회철학에서 묻다

어제 1부에서는 포스트 구조주의가 구조주의와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데리다·들뢰즈·푸코를 중심으로 그 철학의 핵심 개념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그 철학이 우리의 삶과 사회에 어떤 의미를 던지는지, 더 구체적으로는 자본주의, 능력주의, 공리주의로 요약되는 현대 사회에서 포스트 구조주의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어렵고 복잡해 보이지만, 이 철학은 지금 이 시대의 불안정한 정체성, 억압의 구조, 그리고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것들에 질문을 던지는 데 꼭 필요한 렌즈가 될 수 있습니다.


포스트 구조주의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포스트 구조주의는 경직된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새로운 생각의 기준을 마련해 줄 수 있다. 인본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우리에게 어필하는 여러 종류의 철학 사상이 존재하지만, 단연 인간중심주의, 이성 중심주의가 우리의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유례없는 경제적 발전과 함께 달에도 뿐만 아니라 우주에도 우리의 발자취를 담아내는 인류가 어떻게 인간중심주의, 이성 중심주의와 같은 낙관주의를 의심하겠는가? 비록 우리가 병든 원숭이 이긴 하지만(프로이트와 다윈의 사고를 결합하면 우리는 병든 원숭이다), 리처드 도킨스가 “위대한 유전자”에서 말한 밈, 즉 문화적 모방을 통해서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인간이 가진 신체적 약점은 사회성과 지능이라는 새로운 이름의 힘을 탄생시켰고 새로운 힘은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그리고 신의 축복을 받은 유일한 존재가 어떻게 비이성적일 수 있을까? 이러한 사회적 낙관성은 포스트 구조주의 철학자들에 따르면, 무지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능력의 부재임과 동시에 스스로 억압받는 구조라는 지옥의 구렁텅이로 우리를 내던지고 있다.


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비전과 철학의 개입은 필수적이다. 사회가 구성원의 사회적 에너지를 바람직한 방향(사회 전체적인 생산성의 향상)으로 끌어낼 수 있을 때 발전할 수 있다고 말한다.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막스 베버가 말한 것처럼, 종교적 윤리 즉 사회의 에너지를 절약하고 열심히 일하게 만들게 만드는 청교도적 윤리의식이 부재했다면 현대식 자본주의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포스트 구조주의적인 생각으로 해야 하는 질문은 과연 바람직한 방향이란 무엇인가? 바람직한 방향의 정의는 누가 내리는가?이다. 현대 자본주의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방향은 무엇인가? 또한 이런 방향이 존재한다면 바람직한 방향이라는 정의는 누가 내리는가? 이에 대한 해답은 우리가 유튜브나 뉴스를 보면 단번에 알아챌 수 있다. 현대 자본주의에서 바람직한 사회의 방향은 사회의 물질적 발전이고 이러한 방향의 정의는 미디어와 교육 그리고 정치를 장악한 자본이 내린다. 특히 대한민국에서 물질적인 풍요와 성공은 개인을 평가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다양한 아이덴티티가 존재할 수 있지만, 물질적 풍요 없이는 모든 아이덴티티가 실패한 아이덴티티로 점철된다. 서울에 집이 없어? 성공하지 못한 남편이자 아빠, 노후가 불안해? 열심히 노력했지만, 실패한 은퇴자와 같이 이항 대립에서 부정적인 패배자로 낙인찍힌다. 지배계급은 자신들의 이득 즉 자본의 축적과 물질적 성공을 위해 이러한 이항 대립적 사회를 생산했고 우리는 따라가고 있다. 이러한 사회에서 포스트 구조주의의 접근은 매우 중요하고 우리에게 한 줄기 빛으로 다가온다.


물론, 이는 피지배 계급뿐만 아니라 사회적 방향을 설정하고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지배계급에도 중요하다. 과연, 무의식적으로 물질적 풍요만 쫓아가는 세상을 만든 그들의 삶은 행복한가? 혹은 행복하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미래는 우리의 미래와 다르게 매우 밝은가? 사람들의 이항 대립적 사고에서 뒤처지고 패배자가 되면 패배자가 될수록 그들의 분노는 커진다. 현대 자본주의의 이항 대립적 사고관은 능력 만능주의를 강조하고 이는 어떤 사람에게는 결코 다가갈 수 없는 절벽에 핀 약재와 같다. 이러한 무기력함과 분노의 축적은 이항 대립의 해체가 아니라 이항 대립의 위계질서 변화를 요구한다. 위계질서의 변화는 피지배계급 사이에서 새로운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형성이라는 형태가 될 수도 있고 혹은 사회 유지에 가장 필수적인 행동의 실행에 대한 거부 작용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에서 보여주는 미국 백인 중산층의 이민자와 국제화에 대한 배척은 전자에 대한 예시이고 대한민국에서 나타나는 자발적 실업률의 상승과 아이를 낳거나 결혼을 거부하는 형태가 전형적인 후자의 예시이다) 이러한 사회는 사회에 심대한 타격을 주어 지배계급의 미래에도 불길한 어둠을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포스트 구조주의적 세계관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세계관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복잡한 걸 싫어한다. 복잡한 철학과 사회적 관계에 대해 “생업도 바빠 죽겠는데 왜 ㅠㅠ??”, “그러한 말장난은 아무런 이득이 없어,” 와 같은 반응을 쉽게 볼 수 있다. 포스트 구조주의 또한 마찬가지다. 포스트 구조주의 책은 인기가 없고 포스트 구조주의를 차용한 페미니즘과 같은 책은 잘난 척하는 사상으로 취급받기 일쑤다.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어떤 현상의 종교적 뿌리가 말라죽어 감에 따라 슬그머니 공리주의적 사고가 대신 들어와 그 현상의 의미를 바꾸어놓는다”라고 말했다. 이는 현대 사회를 잘 반영한 말이다. 도덕, 윤리, 다양한 사고, 탈구축과 같은 철학적 이론적 뿌리는 다 말라죽었고, 지금 현대 사회는 공리주의 즉 생산성 향상이라는 사고가 들어와 우리를 조종하고 있다. 매우 모순적이지 않은가? 공리주의의 장점은 편하다. 어려운 생각이나 토론 없이 공리의 향상이라는 기본적이고 원초적인 평가 기준이 모든 것을 평가한다. 인본주의와 인간의 이성에 대한 존중을 중요시하는 현대 자본주의가 더 많은 생각과 더 많은 고민을 요구하는 포스트 구조주의를 버리고 공리주의에 이끌려 다닌 것은 모순적이자 자기 파괴적이다.


물론, 이는 피지배 계급뿐만 아니라 사회적 방향을 설정하고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지배계급에도 중요하다. 과연, 무의식적으로 물질적 풍요만 쫓아가는 세상을 만든 그들의 삶은 행복한가? 혹은 행복하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미래는 우리의 미래와 다르게 매우 밝은가? 사람들의 이항 대립적 사고에서 뒤처지고 패배자가 되면 패배자가 될수록 그들의 분노는 커진다. 현대 자본주의의 이항 대립적 사고관은 능력 만능주의를 강조하고 이는 어떤 사람에게는 결코 다가갈 수 없는 절벽에 핀 약재와 같다. 이러한 무기력함과 분노의 축적은 이항 대립의 해체가 아니라 이항 대립의 위계질서 변화를 요구한다. 위계질서의 변화는 피지배계급 사이에서 새로운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형성이라는 형태가 될 수도 있고 혹은 사회 유지에 가장 필수적인 행동의 실행에 대한 거부 작용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에서 보여주는 미국 백인 중산층의 이민자와 국제화에 대한 배척은 전자에 대한 예시이고 대한민국에서 나타나는 자발적 실업률의 상승과 아이를 낳거나 결혼을 거부하는 형태가 전형적인 후자의 예시이다) 이러한 사회는 사회에 심대한 타격을 주어 지배계급의 미래에도 불길한 어둠을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포스트 구조주의적 세계관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세계관이라고 생각한다.


포스트 구조주의는 우연성을 강조한다. 모든 사건은 우연적이다. 그리고 그 우연에 의해 우리의 행동과 사고가 결정된다. 지금 우리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한 것도 우연이 쌓인 결과이다. 현대 물리학을 지배하는 양자역학도 우연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이제는 우리는 우연이라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개연성을 받아들일 때라고 생각한다. 과거 흥선 대원군이 했던 과오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아이덴티티의 가장 근본에 대한 의문을 일으키지만, 우연성을 받아들이고 모든 이항적 대립에 질문했을 때, 우리의 진보를 지킬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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