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접을 보기 위해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원래 목적지는 켄터키주 루이빌이라는 도시인데 조지아주 애틀랜타를 경유해서 비행기를 갈아타야만 했다.
14시간의 비행을 무사히 그러나 허리 뻐근하게 마치고 애틀랜타 공항에 내려 입국 수속을 하는데 웬걸 인산인해다. 루이빌로 가는 비행기가 저녁 9시 15분 출발 예정인데 줄 서서 가다 보니 벌써 8시 40분이 되었다.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어 염치 불고하고 앞사람의 양해를 구해 앞줄로 나아가고자 시도. 키가 아주 작으시고 안경을 쓰신 숙녀께서 자기는 괜찮다고 앞으로 보내 주셨다.
다음은 동양계 두 청년. 사정을 얘기했다. 그러나 자기들도 9시 반이라 빠듯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9시가 넘어서야 내 차례가 돌아왔는데 내 뒤로 그렇게 많았던 사람들은 어찌 된 영문인지 대부분 사라지고 없었다.
일단 짐을 찾기 위해 전속력으로 Baggage Claim 벨트로 달려갔다. 입국 수속이 너무 늦었기 때문에 내 가방은 이미 한 곳에 나와 있었다. 가방을 들고 게이트를 빠져나와 항공사 카운터로 부리나케 뛰어갔다. 아, 그런데 거기에도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지 않은가. 이미 시간은 비행기 출발 예정 시각을 넘기고 있었고 나는 다음 비행기라도 있으면 하는 심정으로 카운터의 직원한테 다가갔다.
몸집이 커다란 흑인 여자 직원이 키보드를 열심히 두드리더니 다음 비행기가 한 시간 15분 뒤인 10시 반에 있다며 표를 끊어 주었다. 비록 늦었지만 이거라도 어딘가 하는 안도감이 들었다. 맡기는 짐을 델타 직원에게 주고 안전 검사대로 향했다.
검사를 마친 후 이동 열차를 타고 티켓에 나온 게이트 A31을 찾아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비행기를 놓칠까 봐 노심초사하던 단계는 넘겼기에 이제 렌터카를 픽업할 수 있는지 예약 사이트와 렌터카 업체 등에 전화를 걸었다. 인터넷 연결이 잘 되질 않고 렌터카 업체에서 전화도 받질 않았다. 다시 슬슬 부아가 치밀려고 하는데 시계를 보니 출발 15분 전이다. 그런데 가만 보아하니 보딩을 기다리는 손님들의 줄이 어디에도 없다. 등에 한 줄기 식은땀이 흘렀다.
앗! 게이트가 바뀐 것 같았다!
렌터카 픽업 일정을 변경하기 위해 전화를 거는 사이에 게이트가 바뀌었는지 모르겠으나 안내 방송이나 직원의 통보도 없었다. 비행기를 또 놓치는 건 아닌가 하는 강한 의구심이 들었다. 가만있을 수 없었다. 항공 일정이 게시된 보드를 급히 살폈으나 이상하게도 보드에는 10시 반 비행기 정보가 보이지 않았다. 다급해진 나는 복도를 지나가는 피부가 나보다 까만 공항 직원을 붙들고 사정 설명을 했다. 직원은 항공 일정 보드와 자기 개인 단말기를 비교하더니 비행기가 새벽 1시 반에나 있을 것 같다고 말해 주었다. 가슴속에서 훅 하며 답답한 기운이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어쩌랴! 10시 반 비행기가 없다는 것을? 게다가 이미 10시 반을 10분이나 넘겼다. 차라리 없는 편이 나았다. 있었으면 난 또 비행기를 놓친 게 된 셈이 되었을 테니까.
직원이 알려 준 게이트 T1으로 가기 위해 다시 이동 열차를 탔다. 제발 이번에는 맞는 일정이기를.. 1시 반이라도 비행기를 있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랐다. 그나마 T게이트는 A게이트 다음 정거장이라 금세 도착했다. 손에 들려 있던 귀찮은 짐들을 벤치에 잠시 내려놓고 게이트 위쪽의 보딩 일정을 살폈다.
아!...
안타깝게도 거기엔 다른 도시가 안내되어 있었다. 그러나 좌절하지는 않았다. 그냥, 시간이 너무 일러서 다른 항공기 일정이 나와 있는 것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래서 다시 T 터미널에 비치된 종합 일정 보드를 찾아가 1시 반 출발이 맞는지 확인해 보기로 했다.
아이 씨!
드디어 '씨'자까지 나왔다.
' 대체 내 비행기는 언제 떠나는 거야??? '
' 이넘의 항공사는 대체 손님을 뭘로 알고 이렇게 가짜 티켓을 끊어 주고, 다음 비행기가 언제인지 게이트는 또 어딘지 제대로 알려 주지 않고 사람을 이리저리 굴리는 거야?? '
해당 항공사 카운터를 찾아 직원을 통해 확인을 하고 싶었으나, 이미 시간이 너무 늦어서인지 항공기 출발 쪽 항공사 정보 센터에는 아무도 응대하고 있지 않았다. 결국 그 자리에서는 아무것도 제대로 확인할 수 없음을 깨닫고 안전 검사 바깥쪽에 위치한 항공기 체크인 데스크로 나가기로 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묻고 싶어도 사람이 없었다.
모 여행사를 통해 구매한 미국 항공 일정
체크인 카운터에도 대부분 직원들이 없었으나 이리저리 걸어 다니며 찾아보니 한 곳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나처럼 한밤중에 비행기를 타거나 경유하는 승객들을 위한 안내 직원들로 보였다.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내 차례가 되자 화는 나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차분히 사정 설명을 했다. 역시 피부가 까맣고 덩치가 나보다 아주 큰 여자 직원이 비행기를 놓치고 이리저리 헤매고 다니다 온 나를 안됐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리고 다음 비행기 시간을 확인해 주었는데 그녀가 알려 준 일정은 그날의 카운터 펀치가 되어 나를 후려쳤고 내 불운의 결정타가 되었다.
당신! 다음 비행기는 아침 8시 10분이야!
아흐..... 정말!!!
처음으로 공항에서 날밤을 새어야 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인천공항이었다면 공항 부속건물 안에 있는 캡슐 호텔이나 공항 근처에 있는 호텔을 찾아 몇 시간이라도 편안히 눈을 붙일 수 있었겠지만 이곳에는 그런 편의 시설들이 없다고 했다. 그냥 생짜로 공항에서 새벽을 밝히며 8시간 이상을 죽치고 있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미시간에 있던 친구와 이 상황을 공유하자, 친구는 너무나 안타까운 느낌을 담은 문장으로 나를 위로해 주었다. 출장을 엄청나게 다니는 친구이기에 나와 같은 경험을 해 본 적이 있어서 그 좌절감과 짜증 그리고 극도의 피로함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문을 열고 경험하지 않은 길로 나아가고자 하는 나를 시험하는 순간들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언젠가 뉴스에서 들었던 공항 장기 숙식자 이야기를 떠 올리며 '까짓 하루쯤 거뜬히 넘겨 주마'하고 살짝 전의를 다지기도 했다. 카운터 직원이 건네 준 까만 주머니의 위생키트를 받아 들고 다시 안전 검사대를 거쳐 공항 안으로 들어갔다.
자정이 넘은 애틀랜타 공항은 지난 저녁에 입었던 옷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대부분의 상점들이 문을 닫았고 승객들도 눈에 띄게 줄었다. 나처럼 비행기를 놓쳤거나 새벽 비행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눈에 들어왔다.
외국의 공항을 다녀 보면 재미난 풍경이 하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과는 달리 여러 국적의 외국인들이 공항 대기실 바닥에 잘도 드러눕는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빨간 담요를 목에서 발끝까지 덮고 아주 편안하게 자기 안방처럼 여기며 누워 자는 사람들이 있었다. 솔직히 퍽 부러웠다. 초저녁부터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꽁지 빠지게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했던 나이기에 이미 지쳐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처럼 그냥 바닥에 눕고 싶었다. 반팔 차림이었던 나는 에어컨이 가동되고 있던 공항에서 한기를 느꼈지만 긴 옷가지들이 들어있는 가방은 이미 내 손에 없었다. 그냥 의자에 앉아 쉬는 것이 최선이었다.
전원이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냥 잠이 올 것 같지 않아서 노트북을 열었고 휴대폰도 충전하기로 했다. 뒤가 벽으로 막혀 있는 곳에 자리를 잡고 잠시 글을 쓰고 있는데 주변이 어수선하다는 걸 깨달았다. 진공청소기의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렸고 안전모를 쓴 아저씨들이 전동 사다리차를 이용해 천장까지 올라가 무언가를 고치거나 점검하는 모습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바닥을 청소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어디론가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일단의 유니폼 입은 무리들이 이어졌다. 그랬다. 새벽의 공항은 낮이나 초저녁에 승객들로 붐비는 모습과 판이하게 달랐다. 승객들이 줄었으나 그걸로 휑하기만 한 공항으로 남지는 않았던 것이다.
춥기도 하거니와 앉아서 잠을 자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잠시 눈을 붙였다가도 금세 깼다. 눈을 뜨면 잠들지 않는 새벽 공항 안의 모습들이 눈으로 들어왔다. 비행기를 놓치고 가짜 티켓을 받고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결국 자포자기한 채 공항에서 밤을 지새우지 않았더라면 볼 수 없었던 광경을 몇 시간이고 지켜볼 수 있었다. 피로에 찌든 몸이지만 노동으로 채워지고 있던 새벽의 공항에서 뭔가 생의 에너지가 느껴졌다. 풍경이 많이 다르지만 남대문이나 노량진 수산시장의 새벽 풍경도 비슷한 걸 느끼게 하지 않을까.
허리가 아파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게이트와 게이트 사이를 좀 걸었는데 한 곳에서 문이 열려 있는 걸 발견했다. 일반 승객들이 나가는 게이트가 아니라 공항 직원들이 물건을 나르는 입구처럼 보였다. 한쪽이 열려 있는 문 사이로 바깥의 어두운 풍경이 드러나 있었다. 보통 유리창문을 사이에 두고 바깥 풍경을 보게 되는데 이처럼 아무런 가림막 없이 공항 바깥쪽을 보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자정을 훨씬 넘긴 캄캄한 새벽에 말이다.
그 순간 그 문은 어떤 상징처럼 느껴졌다. 마치 지금의 삶에서 어떤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관문처럼 보였다. 아전인수격 해석일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문은 그 순간 틀림없이 나에게 특별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걸 그냥 흘려보내지 않았다. 그 문 바깥으로 보이는 어둠과 어둠을 살짝 밝히고 있던 가로등 빛과 활주로가 시작되는 공간. 좌절하고 지친 몸과 마음으로 아침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던 문 안쪽의 공간. 틀림없이 나도 지금 이 시점에서 문을 열고 새로운 공간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생각처럼 쉽게 움직여지지 않는다. 문은 열려 있는데 내 몸과 마음이 그 문을 쉽사리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에 잠겨 제대로 눈을 붙이지 못했다. 글을 쓰고 싶었으나 지친 몸상태는 글 쓰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피로한 눈을 뜬 채 밤을 지새우는 수밖에 없었다. 더디고 더딘 시간이 그렇게 흐르고 있었다.
아침이 다가올수록 공항 안의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허기를 느낀 사람들은 몇 개 열지 않은 커피숍이나 패스트푸드 가게에서 줄을 서기 시작했다. 빨리 줄을 서지 않으면 줄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 무얼 파는지도 모르는 곳에서 나도 줄을 섰다. 앞에는 이미 스무 명 이상 되어 보였다. 이십여 분이 지나다 내 뒤로 한 가게가 오픈 준비를 하는 게 보였다. 얼른 그곳으로 자리를 옮겨 줄을 섰다. 직원에게 물어보니 곧 영업을 시작한다고 했다.
너무 배가 고팠다. 보통은 반으로 토막 낸 6인치 샌드위치를 먹지만 욕심이 생겨 12인치 통짜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재료는 Everything으로 했다. 잠시 후 제작되어 나온 샌드위치는 먹기도 전에 기염을 토할 만큼 커다랗고 굵은 녀석이었다.
샌드위치를 포장한 종이를 한쪽부터 뜯고 입을 한껏 벌려 한 입 베어 물었다. 하지만 내 작은 입안에는 푸성귀와 빵조각 일부 그리고 질질 흐르는 소스만이 딸려 들어왔다. 한쪽이 무너진 샌드위치에서는 본격적으로 소스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당황한 나는 전열을 가다듬고 용감히 두 손 모두를 버려 적극적인 자세로 샌드위치를 공략하기로 마음먹었다. 소스가 흘러 옷을 버리지 않도록 포장지를 넓게 폈으며 양 손으로 샌드위치를 잡고 고기와 야채 그리고 빵과 소스가 골고루 흡입되도록 밸런스 감각을 유지했다.
제일 구석자리로 가서 먹기는 했지만 이렇게 게걸스레 먹는 모습을 근처에 있던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 창피했다. 그렇지만 일단 양 손까지 다 버리고 시작된 샌드위치 먹기 작업을 속히 끝내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꾸역꾸역. 오물오물. 음료수도 꿀꺽. 다시 꾸역꾸역. 오물오물. 꿀꺽꿀꺽. 너무 열심히 먹다 보니 턱이 아팠다. 마른오징어 먹을 때나 턱이 아팠는데 샌드위치를 먹으면서도 같은 어려움을 겪다니. 하긴 12인치면 30센티미터가 조금 넘는 크기니 양이 많긴 많았다. 막판에는 버리기 아까워 속에 있던 소스 국물 범벅이 된 데리야키 고깃덩어리를 손으로 골라 먹었다. 손가락 하나하나 모두 양념으로 진득거렸다. 하지만 결국 아깝지 않을 만큼 많은 양을 먹고 배를 채울 수 있었다. 성공했다.
어느덧 동이 트기 시작했다. 그렇게 더디게만 가던 시간도 결국은 흘러 어둠을 몰아냈고 공항 활주로 지평선 위로 불그스레 태양의 기운이 서리는 게 보였다. 애틀랜타 공항에서 결국 밤을 지새워 버린 거다. 녀석은 내게 굴욕을 안겨 주려 했겠지만 나는 버거워하면서도 그럭저럭 잘 버텨냈다.
다음번에는 경유지로 애틀랜타를 선택하지 않으려 한다. 좀 더 비싸더라도 다른 공항을 경유해서 목적지로 향해야겠다는 강한 결의를 다져 본다. 아, 근데 정이 들었다. 미운 정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