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적하고 서늘한 아침을 느끼며 눈을 떴다. 바깥을 굳이 쳐다보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지금 어떤 하늘이, 어떤 구름이, 어떤 태양빛이, 어떤 공기가, 그 어떤 가을 세트장이 되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출근도 안 하는데 굳이 집안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재빨리 씻고 짐을 꾸렸다. 하루나 이틀 묵을 수 있을 만큼의 옷가지와 세면 도구, 박완서 님의 수필집 한 권 그리고 블루투스 키보드.
며칠 전 우연히 집 근처에서 발견한 시외버스터미널로 향했다. 목적지로 정한 공주 직행버스가 없어서 세종시로 가는 버스표를 끊었다.
말로는 수년간 들었지만 처음 가 본 세종시. 처음부터 계획에 의해 만들어진 도시에서 나오는 느낌이 확 다가왔다. 어지럽지 않은 도로와 건물 구획. 반듯한 고층 아파트 단지들과 개천을 따라 깔끔하게 배치된 공원. 다른 신도시들과 다른 특징이 하나 있었다면 공무원 청사 건물들이 상당히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길고 넓게 자리잡고 있는 모습이었다. 높지 않은 건물들이 타원을 그리며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라스베가스나 송도 같은 곳에서 풍기는 비생동감 혹은 무생물감이 느껴졌다. 아마도 거리에 사람들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아서 더 그랬을 거라 생각한다.
세종시외버스터미널에서 공주로 가는 버스표를 샀다. 출발 예정 시간이 지나도록 버스가 나타나질 않았다. 매표소 직원에게 물어 보니 자기들은 판매만 할 뿐 버스 도착이나 출발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뭔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직원에게 표를 파는 곳에 문의하는 게 상식적으로 맞지 않겠냐고 반문했다. 직원은 손님 입장에선 그렇겠지만 자기들 소관이 아니라며 말끝을 흐린다. 버스회사에 전화를 걸어 확인해 달라고 요청을 하자 마지못해 전화를 건다. 하지만 확인해 주겠다던 말만 건넨 채 시간은 또 무작정 흘렀다.
어찌어찌 한 시간을 넘게 기다려 다음 차를 타고 드디어 공주로 향했다. 함께 글을 쓰는 지인들이 먼저 가 보고 만족스러워 했던 공주와 부여 여행길. 그들이 썼던 글과 사진 그리고 감회의 말들이 떠오르며 기대를 부풀게 했다.
당일 예약했던 한옥을 표방한 양옥 게스트하우스에 여장을 풀고 거리로 나섰다. 다음날부터 백제문화축제가 시작되기 때문에 거리는 온통 축제 준비 막바지로 분주하고 어수선했다. 축제 기간인 줄도 모르고 왔던 나도 덩달아 들뜬 기분에 젖어들었다.
차를 타고 다리를 건너오다 만났던 강이 있었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그렇게 많이도 접했던 귀에 익은 이름. 금강. 그 귀에는 익고 눈에는 선 금강이 지금 바로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신기한 기분과 기쁜 감회가 듦과 동시에 오랫동안 비밀로 간직했던 무언가가 맥없이 풀리는 느낌이 함께 했다.
물이 흐르는지 느껴지지 않는 잔잔한 강 위로 나무 돛단배들이 열병식을 하고 있었다. 금강을 가로지르는 금강교는 축제 기간동안 차량통행을 막아 놓았다. 금강교를 공산성 쪽에서 들어가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며 좋은 각도의 풍경을 담기 위해 노력했다.
혼자였기 때문에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 한 자리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져도 괜찮았다. 보고 싶은 걸 물끄러미 쳐다보고 다시 몇 걸음 걷다 멈추어도 신경쓸 일은 없었다.
해가 지려고 폼을 잡길래 더 어두워지기 전에 공산성을 오르고자 했다. 지난 전라도 여행 때 낙안읍성을 방문했었는데 평지 초가마을을 나즈막히 둘러싼 그곳에 비하면 공산성은 꽤 가파른 지형에 높은 구조물로 자리하고 있었다.
산성 안으로 들어간 후 성벽 위로 난 길을 따라 걸어 보았다. 안전대가 설치되어 있지 않아 성벽 앞으로 낭떠러지가 조금은 위험하게 느껴졌다. 한두 발자국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조심스레 성벽윗길을 걸어올라갔는데 바람이 제법 강하게 불었다. 9월이 저무는 가을날 석양빛을 배경으로 불어오는 바람을 온몸으로 받는 느낌이 시원하고 상쾌했다.
성 아랫편 평지 곳곳에는 이미 장터가 빼곡히 들어서 있었고 몇 군데에는 무대가 설치되어 스피커로 커다란 노랫소리와 사회자의 입담이 또렷이 올라왔다. 소리가 성가시게 느껴졌지만 기분을 다운시킬 만큼은 아니었다.
공산성 안쪽으로는 수풀이 우거진 공원길이 여러 갈래로 이어지고 있었다. 햇빛이 기울어 이미 어두워진 안쪽길은 혼자 걷기에 지나치게 고요했다. 그러나 그 적막하고 서늘한 분위기는 묘하게 끌리기도 했다. 수풀의 정령이나 귀신에 생각이 미치기도 했다. 그 순간 살짝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안쪽 숲길을 조금은 빠른 길로 지나치자 오른 편으로 다시 금강이 보이기 시작했다. 햇살이 닿던 그곳에 어둠이 깔리자 전혀 새로운 모습이 되었다. 내가 살던 키타큐슈의 온가강은 인공적인 조명이 별로 없었는데 이곳은 역시 관광지가 맞았다. 금강 위에서 열병식을 하던 목조 돛단배들이 형형색색의 빛을 띠며 화려한 밤을 수놓고 있었다. 여수 밤바다를 생각나게 할 야경이 연출되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마음은 그 화려한 빛의 향연이 아닌 다른 풍경에 더 끌렸다. 화려한 빛으로 반짝이는 금강을 앞에 두고 해 넘어간 석양빛을 뒤에 둔 실루엣. 흑색의 자태로 눈을 사로잡는 산세와 하늘의 구름. 금강 야경 사진을 여러 장 찍었으나 화려한 빛보다는 그 흑빛의 그윽하고 품격이 느껴지는 실루엣이 더 좋았다.
이제 돌아온다. 타향살이를 접고 내가 있어야만 할 것 같은 곳으로 말이다.
요즘의 기분은 뭐라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많은 것들이 지나치고 흐르고 변한 지금 나의 마음은 고요한 호수가 되었다가 파도치는 방파제 앞바다가 된다.
나의 역사는 다시 한 단락을 끝내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내 의지로 그렇게 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나 아닌 내 주변의 사람들을 관찰한다. 그들은 어떻게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는지. 도대체 어떤 생각과 마음으로 이 소용돌이치는 세상을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지.
버스터미널은 언제나 마음을 묘하게 들뜨게 한다. 특히 작은 지방의 버스터미널은 촌스럽게 정이 간다. 그 주변의 풍경은 투박하고 초라한 나의 한 모습을 자극한다. 그리고 위로와 비슷한 무언가를 느끼게 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