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드레아 Sep 21. 2024

하나의 문이 닫히고 새로운 문이 열린다 1편

24년 5월 이사 가기 하루 전날

 내일 이사를 간다. 사 년 동안 살았던 집을 떠난다. 포장이사라 미리부터 짐을 바리바리 싸놓지는 않았다. 이삿짐센터 아저씨들이, 빠르지만 나의 기호와는 상관없이 순식간에 포장해서 짐을 뺄 것이므로 오늘 먼저 중요한 물건들을 챙겨 차에 가져다 놓았다.


 집이 동쪽에서부터 남쪽에 이르기까지 쭈욱 통유리창으로 되어 있어 여름에는 정말 찜통같이 더워지곤 했다. 더운 계절에는 그래서 멋진 바깥 풍경도 못 보고 늘 블라인드를 내려놓고 있었다. 오늘은 마지막 날이니 블라인드를 올리고 다시 못 볼 밤풍경을 열어두기로 했다. 오후부터 내리기 시작한 봄비가 밤까지 하염없다. 내일이면 이 집의 주인이 바뀐다.


 작년에 일본의 파트너가 누적되는 적자를 이겨내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무역 환경이 순식간에 변할 수 있음을 지난 이십여 년의 경험으로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막상 플랜 B나 플랜 C가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타격을 입은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엄청나게 흔들렸다. 당장 거리에 나앉을 정도는 아니었으나, 물건을 독점적으로 받아오던 공급사가 무너지자 계약을 단 한 건도 할 수 없었고 그때부터 나의 수입은 말 그대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오 년 전, 교육회사 홍콩법인의 주재원으로 일을 하다 풍운의 꿈을 안고 귀국해 나만의 비즈니스를 시작했다. 상사맨 출신 가운데서도 거래가 활발히 일어나는 아이템에 대해 100% 독점 공급받을 수 있는 에이전트십 자격을 얻는 경우는 드물다. 무역 거래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많지만, 잘 되는 아이템의 공급처로부터 독점대리인 자격을 얻는 사람은 지극히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홍콩에서 나는 이런 로또 맞은 기분으로 돌아와 신나게 일을 하게 되었다. 불과 몇 년 뒤에 폭삭 주저앉으리라는 건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말이다.  


 작년 연말에는 줄어드는 통장 잔고의 위력에 휘둘리며 결국 취직까지 했었다. 취직을 하게 되면 포기해야 하는 것들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못한 채, 당장 이 나이에 회사에서 자리를 줬다는 데 안도하며 이전 경력과는 사뭇 다른 철강설비 엔지니어링 해외 영업을 맡게 되었다.  


 철강제품을 해외에 파는 일과 철강설비를 파는 일은 근본적으로 달랐다. 상사에서 빌렛(철근의 원료가 되는 반제품)이나 봉형강 혹은 철광석이나 석탄을 삼국간으로 판매할 때 설계도 같은 걸 보며 일한 적은 별로 없었다. 캐드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진 촘촘한 선과 면들 사이로 눈에도 잘 보이지 않는 수치나 생소한 영문 명칭이 표기되어 있는 도면을 바라보며 여러 생각들이 교차했다. 일은 배워가며 하는 것이지만, 과연 내가 맞는 옷을 입고 있는 것인지 의구심이 들었다.



 -----------------------------

 24년 9월 이사하고 넉 달이 지나


 이사 가기 하루 전날 감회에 젖어 글을 쓰다 마무리짓지 못하고 넉 달이 흘렀다. 높은 건물이 없는 한적한 마을로 이사한 후 조금씩 마음의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경제적인 압박에 굴복해 철강설비 엔지니어링 회사에 취직했다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으며 고민 끝에 사표를 썼다. 회사를 다니면서 초미세기포 특허기술 스타트업을 키우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일임을 깨달았다.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퇴근하기까지 내게 주어진 시간과 에너지는 월급을 주는 회사에 매여 다른 쪽으로 쓰일 여분이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는 걸 확인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돈으로 회사를 다니지 않으면서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매일매일 가늠하고 재어 보는 일을 반복하다 1년이든 2년이든 버텨 보기로 결심했다.


 두려웠다. 이런 결정을 한 그 길 끝에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까 봐서, 더 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며 힘들어질까 봐서, 내 꿈이 우리의 비전이 빛을 잃고 끝내 희망을 잃고 방황하는 인간이 되어버릴 것만 같아서. 그러나 매일매일 맞지 않는 일을 하며, 점점 의지가 꺾여가도록 나 자신을 놓아두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나에게 취업 기회를 주었던 엔지니어링 회사 사장님은 생각보다 아주 덤덤하게 나를 보내 주었다. 나중에 실적에 따른 인센티브 등 처우를 개선해 주려는 생각이 있었다고 했지만, 적극적으로 나를 붙잡으려 하지는 않았다. 붙잡아도 이 인간이 언젠가는 다시 나가려 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회사에 더 기여하지 못하고 중도 퇴사하는 미안함을 느꼈지만, 사장님과 전무님은 내 성공을 빌어 주었고 이후로도 종종 안부를 전하며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먼저 사업을 키워가신 분들이기에 기업부설연구소 설립, 각종 인증 취득, 관련한 컨설팅업체에 대해 유용한 정보까지 나누어 주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경제적으로는 어려움을 느끼면서도 왠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정신적인 안정감을 얻을 수 있었다. 많은 어려움을 안고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내가 너무 나약하고 의지가 약한 걸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스스로 걸어가야 할 목표를 위해 이러한 결정을 했고 그것을 위해 더 많은 노력과 정성을 쏟을 거라 스스로 위안했다.


문이 닫히면 새로운 문이 열린다


 힘들었던 2023년 한 해가 지고, 2024년으로 해가 바뀌었지만 내 상황이 극적으로 바뀌지는 않았다. 스스로 온갖 상상을 하고 자문자답을 하고, 지인들과 고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몸부림을 치는 시간이 이어졌다. 그러다 오랜만에 매우 기분 좋은 일이 생겼다. 고등학교 국제반에서 해외 유학을 준비하던 딸에게서 미국 서부에 위치한 대학의 최종 합격통지를 받게 된 것이다.


 딸은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책 읽기와 더불어 글쓰기를 즐겨했다. 종국에는 글을 쓰는 일을 업으로 하겠다는 단단한 꿈을 갖고 있단다. 그래서 우선 대학에서 인간에 대한 탐구를 학문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철학'을 공부하겠다고 선언했다. 취업도 잘 되고 돈도 잘 번다는 대학 전공들과 사뭇 결을 달리 하는 과였다. 주변 지인 중에서도 이 소식을 듣고 만류하는 부류가 있었다. 그러나 자기 주관이 뚜렷하고 생각에 대한 논리가 탄탄한 딸이 주변인들에 의해 소신을 접을 가능성은 적어 보였다. 나 역시 딸의 선택에 대해 그다지 토를 달지 않았고, 오히려 딸이 살아갈 미래에는 '철학'을 공부한 인재가 더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튼 제법 유명하다는 대학에 당당히 합격했고, 여느 부모처럼 우리도 이 사실에 상당히 고무됐고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런 좋은 기운이 트리거가 되었을까. 좋은 일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잠시 재취업을 했다가 그만두면서 바라던 일자리의 모습이 있었다. 동생과 시작한 스타트업이 본 궤도에 오를 때까지 생활을 위해 어떤 일을 하게 된다면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좀 자유로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직장의 일정한 사무실에서 출퇴근 시간을 지켜야 하는 조건 하에서는 다른 일을 도모하는 것이 무척 힘들다는 걸 피부로 경험했기 때문이다. 바쁠 때 빠쁘더라도 시간활용이 용이하고 장소에 상관없이 일할 수 있는 일이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일본의 공급선이 무너지기 전까지 하던 철스크랩 무역 업무가 바로 그런 일에 부합했었다.


 약 사 년 동안 살던 자곡동에서 좀 더 한적하고 월세도 저렴한 성남으로 이사할 즈음 미국의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 약 칠 년 전에 면접을 봤던 일자리가 다시 생길 가능성이 보였다. 여기 브런치스토리에도 당시 미국으로 면접을 보러 갔을 때의 정황을 담은 글('지금의 직장을 떠나면 11편, 하단 링크 참조)이 있다. 그때 나는 애틀랜타 공항에서 환승하려는 비행기를 놓치며 공항청사에서 밤을 지새운 적이 있다. 배고픔을 느끼며 공항 벤치에 앉아 빼꼼히 열린 문틈 사이로 비치는 새벽의 활주로와 비행기를 볼 수 있었다. 그때 그 낯선 곳에서 느끼는 묘한 감정은 내 인생에서 무언가 새로운 문이 열릴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다음날 다른 비행기를 타고 켄터키 프랭크포트에 도착해서 주정부청사에서 면접을 보았다. 켄터키주정부의 한국대표처를 설립해서 한국 기업을 켄터키로 진출시키는 것이 주요 업무였던 자리다. 이야기가 잘 되었다고 생각했으나, 결국 그때는 주정부 예산이 확보되지 못해 일을 시작하지 못했고 나는 반년을 기다리다 교육회사에 취직해서 홍콩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1980년대부터 켄터키주는 토요타를 위시한 일본 기업들이 대거 진출해 있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에 한국 기업들이 전기자동차와 EV배터리 분야에서 적극적으로 미국시장에 진출하게 되었다고 한다. 켄터키주정부는 한국의 대기업과 함께 관련 기업들이 대거 켄터키주로 진출하는 분위기를 매우 반겼고, 보다 적극적으로 이런 흐름을 키우고 싶은 의지가 강해졌다. 그러다 보니 한국에 누군가가 상주하면서 미국에 진출하고자 하는 유력한 한국기업들과 긴밀히 소통해야 할 필요성이 생겼다. 개인적으로도 매우 적절한 타이밍에 무려 칠 년 만에 다시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때마침 켄터키주지사 일행이 코로나 이후 해외출장에 나서게 됐는데, 아시아 출장이 처음인데다 한국이 그 첫 여정이 되었다. 켄터키주정부 경제개발부에서 이번 일정을 준비하고 한국에서 그 일정을 소화하는 일부터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고 나는 기쁜 맘으로 수락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화상회의를 하면서 주정부 사람들과 방한 일정을 계획하고 만나고자 하는 대상 기업 및 정부 관계자와 소통하며 구체적인 이슈를 조율했다. 비록 닷새에 채 못 미치는 방한 일정이었으나 한 달 반 이상 일찍 준비를 시작하며 매우 촘촘하고 완성도 높게 협업을 진행했다.


- 2편으로 계속 -

 

https://brunch.co.kr/@ndrew/27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