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

by 안드레아

아무런 배경지식 없이 그저 좋은 친구들이 간다고 하니까 여섯 번째로 이름을 올렸다.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 라니...

얼마 전 책벗구삼에서 함께 나눈 책, 프랑켄슈타인은 '죽은 자를 수선한' 케이스였는데..


'국립정동극장'도 난생처음 들어가 본 거다. 연극을 올리는 무대 치고는 제법 규모가 컸고 시설이 멀끔하니 훌륭했다.

7시 전에 도착해서 입장을 먼저 시켜 주길래 신사인 척하며 점잖게 자리를 찾아 앉았다. 내 오른편으로 경상도 여자분들이 앉아 수다를 떨기 시작하는데 목소리가 상당히 컸다. 불만은 있었지만, 무대 시작 전이므로 그대로 뒀다.

시간이 지나니 내 앞줄로 마담 진기가, 그 앞줄로 30분 턱밑으로 윤정이가 들어왔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 옆자리에 앉아도 좋았으나, 그렇게 떨어져 있지만 한 공간이었으므로 나쁘지 않았다.


이 배우 이름이 '김지현'이라고 했지. 조명을 받고 처음 바라본 그녀의 얼굴은.... 매우 낯이 익은 생김새..

누굴까 누굴까 떠올려보니... 그 끝에 나의 구삼 동기 '옥비'가 있었다. 키도 훤칠하니 내게는 닮은 모습으로 다가왔다.

배우 특유의 똑 떨어지는 딕션과 발음을 오랜만에 음미해 보았다. 듣기 좋았다.

'과연 이 넓은 객석을 100분 동안 홀로 연기하며 무엇으로 채울까...'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팔꿈치 부분이 살짝 늘어지는 셔츠에 몸에 밀착되는 짙은 진 차림 그리고 검은색 구두.


소설을 참 좋아하는 편이다. 그런데 배우가 대사를 치는 걸 가만히 들어보니 이건 딱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작품일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프랑스 소설. 현대의 디스플레이 기술로 파도가 사납게 몰아치는 바다와 서핑하는 젊은이의 모습이 상당히 감각적으로 와닿는 느낌이었다. 시각적으로나 청각적으로 무대의 여백을 메워주기에 효과적인 보조장치이지 않은가.


모노드라마라는 걸 알았으나, 이 단아하고 길쭉해 보이는 배우는 한 사람의 역만을 소화하는 게 아니었다.

두 사람, 세 사람, 네 사람.... 아니, 동시에 여러 사람의 대사를 목소리를 바꾸고 얼굴빛을 바꾸며

서 있는 위치까지 이리저리 바꿔가며 수많은 등장인물들을 소화해내고 있었다. 심지어 오디오로 들리는 제 삼의 인물들의 목소리까지... 이건 뭐지?


평범해 보이는 한 배우가 시간이 지날수록 빛이 나는 게 느껴졌다. '연기'를 업으로 삼는 사람들에 대 생각해 본 적이 여러 번 있었다. 40년 동안 연기 외길을 걸어오고 있는 친구 '조한철' 배우를 생각하면서도 내가 만일 연기를 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며. 그러나 이 배우의 연기는 감히 내가 가정만으로 넘보기에도 벅차고 어마어마한 내공 깊은 퍼모먼스를 무리하지 않은 채 차례차례 꺼내 보여 주고 있었다.

아니, 300페이지짜리 소설을 통째로 다 외버렸구나! 그리고 꼭꼭 오래오래 씹어서 아밀라아제까지 찰지게 섞어 소화를 시킨 후에 액기스 잔에 따라내고 있구나!

신기한 기술을 보는 느낌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경이로움과 존경심이 섞인 감정까지 일었다.


소재와 주제를 전혀 알지 못했다. 작품이 시작되기 전, 원실이의 표를 저렴하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 정민이가 지니고 있던 '장기기증' 증서를 보여줬던 게 떠 올랐다.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이 작품을 느끼면서 제대로 가정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어떤 홍보자료보다도 더 극적이고 효과적으로 관객들은 그 희귀하고 고통스러우며 오감으로 절절히 다가오는 경험을 했으리라 생각한다.


배우의 대사 치는 연기력은 실로 가공할 만했다. 보후밀 흘라발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에서 35년 동안 책과 폐지를 압축하던 노인의 머릿속 이야기들을 말로 꺼내어 주르륵 펼쳐놓으면 이런 연기가 될 법할까.

발음은 결코 새지 않았고, 배우가 그 방대한 대사를 까먹을까 봐 걱정하는 마음도 전혀 들지 않았다.

그녀는 첫사랑의 순정에 들뜬 남자가 되었다가 사랑스러운 여인이 되었다가 그 둘이 동시에 되었다.

생명과 같은 아들을 잃은 엄마가 되었다가, 대상을 알 수 없는 분노로 좌절하는 아버지가 되었다.

출중한 심장외과의의 가벼움과 자신만만한 모습도, 부와 권력을 든든하게 깔고 있는 의사 집안의 인턴이 되었다.

배우 김지현의 다역 연기는 나의 상상과 어우러져 마치 수많은 연기파 배우들이 함께 무대 위를

휘집고 다니며 우리를 압도하고 극에 몰입하게 했다.


영화나 소설도 때때로 배경지식을 전혀 갖지 않은 채 접하고 뜻밖의 수확을 거뒀다 느낄 때가 제법 있다.

어제의 경우도 같았다. 마치 광저우 짝퉁시장에서 꽤 괜찮은 A급 물건을 값싸게 흥정했을 때와도 비슷하다.

문화다방의 친구들이 우르르 가는 길은 왠지 그냥 따라가면 될 것 같다. 충동적인 줄서기는 이유가 있었다.


현보가 마련한 아지트에서 와인과 치즈와 타르트를 나누었을 나의 매력적인 벗들. 어제는 화상회의가 있어 함께 하지 못했지만, 다음번엔 비주류파도 와인잔에 슬며시 뱅쇼를 따라 같이 '쨍'하며 나눌 수 있으리라 기대해 본다.


간만에 만난 나와 비슷한 특질의 여자 원실이의 따뜻한 인사가 기억에 남는다.

그러니 그녀의 숙제를 쉬이 피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