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취할 수는 없는 일
2022년 말, 나이 오십에 마지막으로 한번 더 해외에서의 직장생활을 꿈꾸고 있던 터에 감사하게도 외국계 기업의 일본지사에서 일할 기회를 얻었다. 그렇게 십수 년 만에 일본으로 돌아와 직장생활을 한지도 벌써 2년이 지나고 있다.
두 아이가 모두 성인인 덕에 조금은 홀가분하게 결정한 도쿄로의 단신부임. 부부 사이가 전혀 나쁘지 않았지만, 본의 아니게 아내와 떨어져 지내며 타국에서 자취생이 되었다. 지난 2년간의 여정을 돌아보면, 고독과 자유는 역시 연결되어 있음을 하루하루 깨닫는 경험이었다. 혼자이지만 외롭지 않고 자유롭지만 가끔은 적적한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일상 속에서 소소한 고마움들로 충만한 알찬 날들을 보냈다고 자부한다. 물리적으로 거리가 생겨버린 가족들과의 유대도 오히려 더 좋아진 것 같다.
원래부터 만 55세 생일 즈음에 경제적 자립을 이루고 자발적 ‘은퇴’를 하겠다는 목표하에 이런저런 준비를 해왔던 터였기에, 일본으로 오면서는, 이대로 몇 년 더 일하다 매일 출근하는 삶에서 졸업하자고 마음먹었다. 한국을 떠나 누구를 의식할 필요 없이 오롯이 나 자신에게만 집중하며 조기 은퇴의 꿈을 실현해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나는 또 한 번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그 자체로 소중하고 감사하다. 다만, 원하는 모든 것을 취할 수 없기에 선택은 언제나 변화와 포기를 때로는 희생마저 수반한다. 최근 몇 달간 예상치 않게 생긴 선택지를 놓고 많은 고민을 해왔다. 30년 가까이 직장생활을 하며 낭비하지 않으면 먹고 살만큼 벌었고 과분할 만큼 많은 것들을 누려 왔지만, 여전히 알량한 미련이나 욕심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닌지? 너무 이른 나이에 현실에 안주하고 편안함만을 추구하려는 것은 아닌지? 등등. 내가 나에게 묻고 답하고 또 묻는 날들이 이어졌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갈팡질팡, 어느 쪽이 나을지 엎치락 뒤치락 때로는 아침저녁으로 생각이 바뀌곤 했다. 이제 고민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다행히 선택의 방향이 조금씩 잡혀가고 있다.
지금의 회사에 남아 도쿄에서 몇 년 더 일하다 원래 계획대로 은퇴하는 것은 어찌 보면 가장 무난한 선택일 것이다. 적지 않은 나이에 외국인임에도 대기업 임원급 이상으로 대우를 받는 데다 내가 원할 경우 정년까지 있을 수도 있는 지금의 회사는 그야말로 최고의 직장이라고 할 수 있다. 복잡한 인간관계 신경 쓰거나 사내 정치할 필요 없고 한국에 비하면 경쟁이 그렇게 심하지도 않은 현재의 직장을 두고 이직을 고민하는 것 자체가 사치로 비칠 수도 있다. 누군가는 나를 미쳤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부터 마음 한편이 그저 허전했다. 일 자체가 엄청 어렵다고 할 수는 없지만, 조직 없이 실무를 거의 혼자 처리해야 하는 것은 고단하고 힘들었다. ‘이 나이에 외국에 나와서 내가 뭐 하고 있는 거지?‘ 스스로에게 따지듯이 문득 질문하는 날들이 늘어갔다. 회사에서의 공허함은 일상생활에도 영향을 미쳤다. 자유로운 고독보다 외롭다고 느끼는 순간들이 많아졌다.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는 홀아비 신세가 사뭇 처량하다고 느낄 때도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횅댕그렁한 내 마음의 원인이 뭘까? 조용히 그렇지만 집요하게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그래서 네가 원하는 게 뭐니?
사실 일본으로 넘어오면서 한국에서 임원질하던 시절의 물이 충분히 빠졌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환경에서 흔들림 없이 마지막 불꽃을 태우기 위해 다 버리고 내려놓았다고 착각했다. 그런데 내 마음속에는 꺼지지 않는 또 다른 불씨가 있었다. 단순히 전문가로서만이 아니라 리더십을 발휘하고 싶다는 욕구, 조직과 사람들에게 더 많은 영향을 주고 싶다는 열망이 아직도 내 속에 많이 남아 있음을 깨달았다. 아마도 지금의 조직에선 쉽지 않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내가 돌아갈 자리는 있을까? 주말마다 드리는 매일미사에서 막연한 내 소망을 하느님께 기도로 드리기 시작했다.
더 늦기 전에, 지금까지의 경험을 바탕으로 의사결정권을 가지고 조직을 이끌 수 있는 역할을 한번 더 맡아보고 싶습니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하느님은 내 넋두리를 그냥 흘려듣지 않으셨다. 작년 여름이 끝나갈 무렵 한국에서 제의를 받았다. 회사의 성장과 효율적인 조직운영을 위해 내가 와서 도와줬으면 한다고. 막상 제의를 받고 보니 큰 줄기는 거의 기도 내용 그대로였다. 원하던 대로 기회를 얻었지만 바로 결정을 못하고 몇 개월을 끌어왔다. 고맙게도 오퍼를 준 한국의 회사는 계속 기다려 줬고, 파괴적이지는 않지만 어떤 선택을 할지 나의 고민은 길어졌다. 팽팽하던 균형의 추가 서서히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90% 결정
내가 내 마음을 모를 때가 많기에 아직은 90%라고 하고 싶다. 이대로 가면 성과보너스가 나오는 3월 급여일 지나고 회사에 정식으로 알릴 예정이다. 최종적으로 후회 없는 완벽한 결정을 하기 위해 남은 기간 마음을 다져나가려 한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언제나 힘들고, 특히 일과 관련해서는 더욱 쉽지 않다. 아쉬움과 설렘, 미안함과 고마움, 두려움과 자신감이 교차하는 이 복잡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중심을 잘 잡아야 할 것이다.
오십 줄에 접어든 나를 바다 건너서까지 불러준 지금의 회사를 떠나는 것에 대해서는 당연히 미안함이 있다. 최근 관리자급 인력 몇이 연속으로 퇴사하여 조직이 어수선한 속에서 내가 최소 2년은 더 있어 줄 거라고 단단히 믿고 있는 대표님께도 어떻게 말을 꺼내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생활환경으로서의 일본을 떠나는 것이 내겐 아주 큰 결정이다. 조용하고 평온했던 그간의 생활을 버리고 다시 번잡한 속세로 돌아간다고?.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고 비교당하지 않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오롯이 나의 행복을 위해서만 살아도 크게 죄책감 느끼지 않는 지금의 생활을 버리고 복마전과도 같은 예전 생활로 돌아간다고? 마음속 노이즈들이 끊임없이 일렁이며 가스라이팅을 시도하고 있다.
그래봤자 당초 목표 달성까지 채 2년도 안 남았다. 설령 당분간 평온함이 무너져도 ‘기간 한정’일 텐데, 무엇이 두려우랴. 최선을 다하되 제대로 즐기면서 마지막 불꽃을 태워보자. 일본이 됐든 한국이 됐든, 회사든 집이든 여행하듯 일상을 즐기며 여기저기 구석구석 일상 같은 여행을 다니며 그렇게 살아가자. 다짐에 다짐을 거듭하는 2월 첫째 주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