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김범룡 & 주현미 (내 인생의 노래 26 & 27)
무능하고 사악한 대통령 탓에 두 달 넘게 콘텐츠 편식을 해 오던 중에 웬일인지 오늘 아침엔 유 선생이 얼마 전 방송된 아침마당 <데뷔 40주년! 김범룡&주현미> 편을 추천한다.
어릴 때부터 봐왔던 두 가수들이 활동한 지 벌써 40년이라니. 비현실적인 숫자에 놀라면서도 둘이 한꺼번에 출연해 무척 반가웠다. 자신의 일이나 직업을 40년간 지속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일이다. 한때는 절정의 인기를 누리며 남부럽지 않게 돈도 벌었겠지만, 남몰래 한숨짓고 속으로 눈물을 삼키던 질곡의 순간들도 몇 번은 넘어서야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닐까 싶다. 인생 선배인 두 분이 앞으로도 건강하고 가수로서의 여정이 더욱 빛나길 바라며, 그들의 노래와 관련된 나의 기억을 몇 가지 단상을 기록으로 남겨보려 한다.
https://youtu.be/9imM_dKMPm4?si=uTChM-C1VzZdhnsA
사실 중학교 때부터 김범룡, 주현미 두 가수의 팬이었지만, 미안하게도 둘 다 어디 가서 내가 좋아하는 가수라고 적극적으로 소개하지는 못했다. 그 시절엔 왠지 TV출연을 자제하는 소위 ‘얼굴 없는‘ 가수 한둘 정도 언급해 줘야 트렌디한 문화감성을 갖춘 양 허세를 부리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보니, 여학우들에게 절대적인 인기를 얻는, 외모나 음색이 조금은 얇실해 보이는 남자가수의 노래를 좋아한다고도 대놓고 얘기할 수 없었다. 또한, 나이가 아직 10대에 불과한 주제에 트로트 멜로디가 내 가슴을 때린다고 얘기하고 다닐 수도 없었다.
싱어송라이터인 ‘김범룡‘의 노래는 발라드임에도 살짝 트로트 느낌이 묻어나는 게 일종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그의 곡을 받은 타 가수가 불러도 이건 ‘김범룡‘표 노래라고 단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명징한 김범룡만의 색깔이 있어 왔다. 그의 초기 곡들은 뭔가를 애원하고 회상하는 듯한 문어체 때로는 서간체 가사가 자주 사용되었다.‘ 님‘이라는 고전적인 단어가 가끔씩 가사에 사용되곤 했다. 아마도 노래 가사를 직접 쓰던 20대 시절 김범룡은 고리타분하지만 예의 바른 문학청년이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저 멀리엔 기타 소리 귓가에 들려오는데 언제 님은 오시려나 <바람 바람 바람>
비를 맞으며 우뚝 선 모습 떠나려 하는 내 님이련가 <겨울비는 내리고>
그가 부르거나 만들어서 히트한 곡들은 무수히 많다. <바람 바람 바람> <그 순간> <겨울비는 내리고> <카페의 여인> <현아> 등은 대중음악 순위를 매기는 프로에서 모두 1위를 하거나 오랫동안 상위에 머물렀다. 또한 그가 양수경, 녹색지대, 진시몬, 노사연 등에게 준 곡들도 대중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었다.
https://youtu.be/F6DEL4yFKQw?si=Lve57Da1lewVjqW6
그다지 철저하지 않은 나의 버킷리스트 어딘가에는 ‘드럼을 배워 연주하기’가 기재되어 있다. 만약 드럼을 배워 뭔가를 연주한다면 나는 꼭 김범룡의 <슬픔만 주고>로 하고 싶다. 이 노래를 들으며 따라 부를 때마다 허공에 대고 드럼을 치거나 기타를 치는 시늉을 했던 그 시절 추억이 새록새록 솟아난다. 그는, 사춘기가 시작되던 중학생 시절 내가 가장 즐겨 들었던 카세트테이프의 주인공이었으며 태어나서 처음으로 콘서트를 보러 간 가수였다. 그의 음악성이 얼마나 대단한지 여부는 잘 모르겠으나, 풋풋하지만 불안하던 내 청춘의 궤적 어딘가에 자리 잡고 지금까지 아릿한 추억을 선사하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https://brunch.co.kr/@ndw1452/76
https://youtu.be/BskG7spjlHw?si=9st2vndbjeKJ3TvK
주현미라는 가수를 떠올리면 ‘꾸준함이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시절 무명까지는 아니지만 본인보다 인지도가 훨씬 떨어지는 남자 뮤지션과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이후 스캔들이나 트러블 하나 없이 지금까지 ’꾸준히‘ 음반내고 콘서트 하고 또 요즘은 유튜브 영상 올리고 있는 그야말로 그녀는 ’ 한결같은‘ 가수이다.
중학교 때부터 그녀를 좋아했던 팬으로서 두 개의 에피소드가 떠 오른다. 하나는 고등학교 시절 일이다. 아직 저작권에 대한 개념이 확립되기 전 동네 레코드점에 가면 몇천 원 정도 받고 원하는 곡들을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해 주는 서비스가 있었다. 보통 앞뒷면 합쳐 60분 테이프에 수록을 대략 한 면당 6-7곡씩 들어가곤 했다. 중간이나 기말 시험이 끝날 때마다 신청곡 리스트를 들고 레코드점을 방문할 때의 설레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날도 사징님이 내가 건네는 리스트를 주욱 훑어보시다가 뭔가 잘못된 거라도 발견한 듯 웅얼거리셨다. 주현미? 고등학고 2학년 학생의 신청곡과는 어울리지 않지 않냐는 무언의 눈짓에 짐짓 모른 체하고 잘 부탁드린다는 말을 하고 문을 나섰다. 그때 내가 신청했던 곳은 바로 <신사동 그 사람>이었다.
https://youtu.be/tbVyFY1nCns?si=9cRBw_4suF_PSQ_d
또 한 번은 결혼 전 지금의 아내와 주말에 기차 타고 대성리로 놀러 갔던 시절에 있었던 일이다. 1998년 초여름 정도였던 기억이다. 스마트폰은 당연히 없었고 mp3플레이어도 아직 상용화되기 전이라 보통은 SONY나 aiwa 카세트 플레이어를 들고 다니며 카세트테이프로 노래를 듣던 시절이었다. 대충 집에 있던 두 개 정도 테이프를 들고 갔고, 기차 안에서 이어폰 한쪽씩 귀에 꽂고 음악을 들으며 가는데 대부분 우리 또래들이면 누구나 좋아하던 팝송이나 발라드풍 가요가 하나씩 흘러나왔는데, 중간에 뽕짝이 하나 그것도 처량하기 그지없는 곡으로 흘러나왔다. 바로 주현미의 공식 데뷔곡 <비 내리는 영동교>. ‘뭐 이런 곡이 여기서 나와?‘라는 그 당시 여친(현 아내)의 표정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곡이 너무 가슴에 와닿는다고 위축되지 않고 변명에 가까운 설명을 했던 기억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위에서 말한 레코드 점에서 녹음해서 듣던 테이프에는 왕왕 한곡 정도는 주현미의 노래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 같다. 어렸을 떼부터 부인할 수 없는 주현미의 팬이었다. 확실히 해두기 위해 밝히자면 나는 트로트라는 노래 장르를 절대 좋아하지 않는다. 트로트 관련 tv프로는 혐오하기까지 한다. 나는 그저 단순히 주현미의 팬일 뿐이다.
https://youtu.be/M2-U-ZQitW4?si=yzbMqEBrJwjaHpdI
30년을 꽉 채운 후 ‘매일 출근하는 삶으로부터 졸업‘하는 것을 목표로 지난 10여 년을 살아왔는데, 만약 30년이 아니라 40년이라면 너무 아득하고 조금은 끔찍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김범룡, 주현미 두 분이 더 위대하게 느껴진다. 지난한 세월이었겠지만 꾸준히 좋은 노래를 들려주고 젊은 시절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 준 두 분께 감사할 따름이다.
아마 직장생활에 있어서의 ‘40주년’은 내가 범접하기 힘든 범접하고 싶지도 않은 성스러운 무언가이지만, 몇 가지 내 생활의 루틴에 있어서만은 죽을 무렵에 40년 이상을 꾸준히 지속해 온 게 몇 개는 있을 것이다. 매주 최소 몇 번씩 동네를 뛰기 시작한 게 2005년 무렵이고 20년이 지난 현재도 주 4회 이상 달리고 있으니 앞으로도 20년 건강하게 달릴 수 있으면 좋겠다. 한때는 매주 가곤 했던 등산도 25년 정도 지속해 오고 있다. 그동안 한국의 100대 명산을 전부 다녀왔고, 지금은 여유가 있을 때마다 일본의 백명산을 다니고 있다. 신입사원 때부터 거의 매일 단 5분이라도 수행해 온 영어공부도 내년이면 30년 차를 맞는다. 내년 말 직장생활 30년을 채우고 매일 출근하는 삶에서 졸업한다고 해도 영어공부는 앞으로도 지속할 터이니 어찌 보면 가장 먼저 40주년을 맞이할 가장 강력한 후보이다.
40년이라는 세월의 진중함을 한번 더 되새기지만, 오늘도 나는 지금 여기에 집중하며 그저 한 발짝 더 내딛는 심정으로 하루를 보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