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립고 고맙고 뭉클했던 시간
"아빠 27일 시간 되나?
"우리 딸이 시간 내라면 있던 약속도 취소하지 ㅎㅎ"
"그날 시간 비워 둬. 효도 데이다"
우연히 딸이 이문세 노래를 가끔씩 듣는 걸 알게 되어 언젠가 지나가는 말로 '나중에 우리 이문세 콘서트나 함 같이 가자'라고 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딸은 그냥 지나치지 않고, 그 어렵다는 콘서트 티켓을 구해왔다. 대기에 걸어놓고 수시로 확인하던 차에 취소 티켓을 거머쥔 것이다. 그것도 앞에서 세 번째 열이라는 황금좌석으로.
웰컴백 패키지의 일환으로 그렇게 딸과 함께 이문세 <2025 the BEST> 콘서트를 다녀왔다. 9천 석이 모두 매진된 대전컨벤션센터에서 두 시간여 너무나 행복한 시간이었다. 관람객들의 나이대는 40-50대가 대부분이었지만, 우리처럼 모녀나 부녀가 함께 온 경우도 꽤 있어 보였다.
The BEST라는 테마에 맞게 그야말로 히트곡들로만 구성된 공연이었다. 국가대표 축구팀 두 개도 너끈히 만들 수 있을 만큼 수많은 히트곡들 중 20곡 정도는 직접 부르고 2곡은 미리 제작된 영상과 관객의 떼창으로 구성되었다.
60대 중반을 넘은 나이가 무색하게 그의 몸과 목소리는 탄탄했다. 밴드와 더불어 약간의 관악기와 현악기, 과하지 않은 코러스와 뮤지컬 배우와 같던 댄서들. 그리고 중간중간 잔잔한 브이로그 같은 영상들이 어우러진 꿈결같던 두 시간 반이었다.
역시나 레퍼토리엔, 영혼의 파트너였던 이영훈과 함께 작업했던 3,4,5집의 노래들이 다수 들어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내가 중학생 시절 이문세를 처음 알게 된 <파랑새>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명곡이라고 간주해 온 <끝의 시작>이 포함되어 더욱 고맙고 감격스러웠다.
첫 곡은 무려 〈소녀〉였다. 이어진 곡은 〈빗속에서〉.
‘초장부터 이렇게 코끝을 찡하게 만들면 어쩌자는 건가.’
노래를 듣고 따라 부르는 내내, 그리움이 밀려왔다. 발라드를 중심으로, 때로는 빠른 템포의 가벼운 댄스곡이 흐르고, 록 버전으로 재해석된 곡까지 더해지며 다채로운 노래와 편곡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그 속에서 나는 속절없이, 완전히 무아지경에 빠져버렸다.
노래 하나하나마다 중·고등학교 시절 내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졸린 눈을 비비며 라디오를 켜놓고 문제집을 풀고 있는 나. 쓸쓸한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오가는 차들의 불빛을 무심히 바라보는 나. 독서실에서 공부를 마치고 터벅터벅 밤길을 걸어오던 나. 소개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별밤’을 들으며 설렘과 기대로 발걸음이 유난히 가벼워지던 나, 등등.
나처럼 두 번의 갑상선암 수술을 겪고도, 이 날 공연에서 이문세 가수는 여전히 무대를 가득 채우는 풍부한 성량으로 고음을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단순히 추억 속 노래에 대한 그리움을 넘어, 그가 버텨온 세월과 내가 견뎌온 시간들이 겹쳐지며 잠깐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단순히 ‘감동’이라는 말만으로는 부족한 밤이었다. 벅찬 울림과 뭉글뭉글 피어오르던 그리움, 그리고 변함없이 건재한 가수에 대한 고마움이 한데 엉켜, 참으로 충만하고 행복한 밤이았다.
문세 형님, 40년 넘도록 늘 제 곁에서 변함없이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의 꾸준함과 일관됨은 그 자체로 큰 감동이었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앞으로도 더욱 좋은 노래와 공연을 기대하겠습니다. 깜짝 선물로 받은 ‘문세라면’도 잘 먹을게요^^
콘서트 끝나자마자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공연에서 불려진 노래들의 제목을 후다닥 메모했다. 기억에 오류가 있을 수 있지만, 어제 공연에서 선곡된 노래목록을 기록 보존차원에서 남겨 본다:
소녀
빗속에서
사랑이 지나가면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깊은 밤을 날아서
이 세상 살아가다 보면
알 수 없는 인생
솔로예찬
가을이 오면 (영상)
옛사랑
휘파람
조조할인
(히트는 아직 덜 됐다지만) 마이 블루스
나는 아직 모르잖아요
나는 행복한 사람
파랑새
그대 나를 보면
이별이야기 (화면을 보며 관객들이 떼창)
광화문 연가
끝의 시작
그녀의 웃음소리뿐
붉은 노을 (앵콜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