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 약속, 세 가지 바람

새 직장 직원들에게 보내는 편지

by 두기노

도합 7년여의 일본 직장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복귀한 뒤, 새 직장에서 출근을 시작한 첫 주가 지났다. 어느덧 산전수전을 겪으며 직장생활 30년차. 또 한 번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예전처럼 긴장하거나 불안하지는 않았다.


전략발표 자료를 살펴보고, 사장님과 주요 임원 몇 분과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회사 실적이 어느 정도 바닥을 지나 다시 반등 국면에 들어섰음을 실감했다. 조직 전체에 에너지가 차오르고 있는 이 시점에 새 출발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개인적으로는 참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퇴근 후 집에 돌아와서도 다음 날이 기다려졌던, 오랜만에 그런 한 주였다.


물론 늘 그렇듯, 지금의 ‘허니문’ 같은 시기가 지나고 나면 다시 힘들고 어려운 순간들이 찾아올 것이다. 그럼에도 그동안 쌓아온 내공을 바탕으로 차분하게 대처하리라 다짐하며, 월요일 아침에 직원들에게 보낼 편지를 써 내려가 보았다.


안녕하세요 OOOO실 여러분,


제가 ABCD에서 OOOO 담당 임원의 역할을 맡아 출근한 지 이제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새로운 근무 환경에 적응하는 것뿐만 아니라, 출퇴근길의 서울 추위에도 적응하느라 몸이 나름 고생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ㅎㅎ)


다들 아시다시피 저는 직전에 3년간 도쿄에서 직장 생활을 했습니다. 돌아보면 도파민이 터지는 짜릿한 경험들은 많지 않았지만, 여행 같은 일상으로 채워진 평온한 날들이었습니다. 누구와 비교하지도, 비교될 필요도 없이 오롯이 제 생활에만 집중할 수 있는, 조금은 고독하지만 그만큼 자유로운 하루하루였습니다.


그렇게, 재미는 덜하지만 안정된 날들을 보내던 와중에 ABCD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고민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비교적 오래 망설이지는 않았습니다.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개인적인 열망도 있었고, 무엇보다 지금 이 자리에 와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책임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 제 '소명'이라고까지 느꼈습니다.


아직은 의욕만 앞서 있고 제 앞가림조차 충분히 못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하루라도 빨리 회사와 우리 OOOO실의 운영 방식과 현황을 파악하고 여러분과도 자연스럽게 가까워지고 싶습니다.


오늘 저는, OOOO 담당 임원으로서 처음부터 너무 많은 말을 하기보다는, 지금 이 시점에서 여러분들께 꼭 전하고 싶은 마음만 정리해 보았습니다. 새삼스레 잘 부탁드린다는 인사에 앞서, 제가 먼저 지키고자 하는 세 가지 약속과 함께 만들어가고 싶은 세 가지 바람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제가 드리고 싶은 세 가지 약속입니다.


첫째, 어려운 순간에 뒤로 숨지 않겠습니다.

최선을 다했음에도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의도치 않게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지내다 보면 있게 마련인 그 어떤 불편한 순간에도 회피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솔선하고 책임져야 할 일을 절대 피하지 않겠습니다.


둘째, 많이 듣고 충분히 대화하겠습니다.

제가 내리는 결정이 모든 분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의사결정에 이르는 과정만큼은 투명하고 공정하게 가져가겠습니다. 저 역시 사람인지라 잘못된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의견을 충분히 듣고, 제 부족함을 메워가겠습니다.

셋째, 사람을 지치게 하는 최선은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성과는 중요하지만, 누군가를 소모시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성과는 결국 조직의 기반을 약하게 만든다고 믿습니다. 각자의 체력을 살피고, 팀으로 낼 수 있는 하모니와 시너지를 고려하여 조직을 운영하겠습니다. 그 결과, 각자의 일과 삶의 균형이 무너지지 않도록 세심하게 살피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과 함께 만들고 싶은 조직에 대한 세 가지 바람이 있습니다.


첫째, 우리들의 시간이 존중받는 조직

조직 생활을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단기간의 성과를 요구받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궁극적으로 ABCD실이, 조직원 각자가 자신의 시간을 맡길 수 있고 또 맡기고 싶어지는 곳이 되었으면 합니다. 몇 년 뒤 돌아봤을 때, 여기서 보낸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고 느낄 수 있는 조직 말입니다.


둘째, 어제보다 오늘이 조금 더 기대되는 조직

거창한 혁신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내가 맡은 일에 대한 몰입, 작은 개선과 새로운 시도, 그리고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쌓여 오늘은 어제보다 조금 나아졌다고 느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배움의 기회와 성장의 가능성이 보여, 내일이 자연스럽게 기대되는 조직이 되었으면 합니다.


셋째, 몰입하되 소진되지 않는 조직

필요할 때 깊이 집중하고, 그로 인해 내 생활리듬이 훼손될지라도 자기중심을 지키며 일의 의미와 존재의 이유를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몰입과 회복이 자연스레 공존하여, 계속 불타기만 하는 조직이 아니라, 오래 타고 멀리 가는 조직이 되었으면 합니다.


저는 솔직히 완벽한 리더가 될 자신은 없습니다. 다만, 제 자리에서 맡은 바 소임을 성실히 다하겠습니다.


ABCD와 더불어 계속 성장해 나가는 OOOO실을 함께 만들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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