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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기노 Jul 07. 2024

가리워진 길

내 인생의 노래 (18)

어느덧 직장생활 28년 차, 이제 며칠 지나면 만 52세 생일을 앞두고 있다. 또래들보다 이른 나이에 외국계 보험회사에서 임원으로 발탁되어 10년 가까이 내 집무실을 갖고 ‘상무님’ 소리 들으며 지내다 14년 만에 일본으로 다시 왔다. 연봉만 유지하고 직책은 내려놓은 채 거의 원맨 밴드처럼 이 바닥에서 일한 지도 1년 반이 지나가고 있다.


결혼을 일찍 한 덕분에 두 아이들 모두 이미 성인이었던지라, 와이프와 상의 후 비교적 홀가분하게 단신부임 해외생활을 결정할 수 있었다.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일찍) ‘조기 은퇴’하고 싶다는 열망으로 지난 7-8년간 몸과 마음의 준비, 재정계획 등을 그에 맞게 추진해 오고 있었는데, 커리어 마지막은 일본에서 한번 더 능력을 발휘해보고 싶다는 게 오십 줄에 들어서까지 해외로 나오게 된 가장 큰 이유였다. 지금은 출세나 성공보다 계획한 대로 조기 은퇴를 달성하고 남은 커리어를 어떻게 잘 마무리할지가 결국 내 삶의 가장 큰 관심사라고 할 수 있다.


지나치게 경쟁적이지 않고 누군가와 비교당할 필요도 없으며,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남의  시선 따위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점이 일본에서 홀로 직장생활을 하면서 가장 큰 매력으로 느끼는 부분이다. 일이든 일상생활이든 대체로 고독하지만, 그만큼 자유롭고 쓸데없는 감정의 소비가 적어 오롯이 나에게 집중할 시간이 많아 좋다. 가끔씩은 외롭고 쓸쓸하지만, 걷고 달리며 해소하는 나만의 루틴 그리고 가족들과 언제든지 영상통화를 가능하게 해주는 문명의 이기(利器) 덕에 그리 오래가지는 않는다. 다만, 조금은 심심할 정도로 평범하고 단조로운 지금의 내 생활에 감사하면서도 , 보다 의미 있는 시간을 함께 보내기 위해 물리적으로 가족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도 요즘 들어 왕왕하고 있다.  


나에게 일본에서의 두 번째 근무기회를 제공한 지금의 회사는 최근 몇 달간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글로벌 경영진이 재편되고 연쇄적으로 크고 작은 변화들이 이어지더니 최근 몇 달간 일본 동료 여러 명이 회사를 떠났다. 인간적으로야 안타깝지만 조직의 일원으로서 딱히 이런 정도에 영향을 받을 ‘짬밥’은 아니기에 그저 내 일에만 집중해 왔다.


정작 조직개편이나 업무조정은 일단락되어 가고 있는데, 사실 나는 조심스레 또 한 번의 이별과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고 있다. (이 역시) 평균적인 또래들보다 훨씬 많이 직장을 옮겨온 터라, 한때는 한 직장에서 오래 버티는 것을 최대 목표로 삼은 적도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는 최소한의 연한인 1년을 채우고 나면 스스로에게 주기적으로 질문하며 현재의 직장에서 계속 있을지 말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자문(自問)의 기저에는 늘 근본적인 세 가지 질문이 자리하고 있다.

내가 그동안 축적해 온 경험과 스킬을 충분히 발휘하고 있나?
대우받는 것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조직의 발전에 기여를 하고 있나?
나도 그만큼 계속 배우고 성장하고 있나?

내 기준에선 이 세 가지 질문에 긍정적인 답을 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지금의 직장에 만족한다”라고 누군가에게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다. 어차피 주어진 삶은 한정적이고 앞으로 하고 싶은 일도 많은데 미래를 위한다는 명목하에 행복하지 않은 직장생활을 견디면서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다는, 지나치게 단순하고 누군가에겐 오만과 사치로 비칠 수도 있는 나만의 원칙을 이번에도 적용하려고 한다.


몇 번의 경험을 통해 많이 무덤덤해지긴 했지만, 무언가에 변화를 주고 새로운 선택을 한다는 것은 언제나 불안하고 힘든 과정이다. 공자(孔子)는 나이 40이 되어서는 어떤 흔들림도 없고 50이 되어서는 하늘의 뜻을 알았다고 했는데, 천명이나 소명은커녕 아직도 내게 주어진 길이 어디인지 찾지 못한 느낌이 들 때면 유재하의 이 노래 <가리워진 길>을 꺼내 듣는다.


이제는 다 왔다고 생각하면 다시 길이 시작되고, 짙은 안개를 뚫고 힘겹게 걷고 있는데 정작 제대로 가고 있는지 모르겠고, 두 갈래길을 만나 망설이다 선택한 길이 중간에 끊겨버려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야 했던 지난 시절의 힘들고 쓰라린 경험들이 지금의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다. 어쩌면 앞으로도 비슷한 일들을 겪을 수 있겠지만, 나는 다시 길을 떠나려 한다. 어쩌면 또 한 번 길을 잃고 헤맬 수 있겠지만 그 조차도 내가 가는 길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내 삶의 길은 영원히 계속되겠지만. 매일 출근하는 커리어에서의 길은 이제 막바지를 향해가고 있다. 그래서 가리어진 길이어도 상관없고, 좁고 울퉁불퉁해도 경사 심한 오르막길이어도 웃으며 걸어가려 한다.

보일 듯 말 듯 가물거리는
안갯속에 싸인 길
잡힐 듯 말 듯 멀어져 가는
무지개와 같은 길
그 어디에서 날 기다리는지
둘러보아도 찾을 수 없네
그대여 힘이 돼주오
나에게 주어진 길
찾을 수 있도록
그대여 길을 터주오
가리워진 나의 길
이리로 가나 저리로 갈까
아득하기만 한데
이끌려 가듯 떠나는 이는
제 갈길을 찾았나
손을 흔들며 떠나보낸 뒤
외로움만이 나를 감쌀 때
그대여 힘이 돼주오
나에게 주어진 길
찾을 수 있도록
그대여 길을 터주오
가리워진 나의 길


생각을 정리하고 나니 또 한 번 길을 떠날 수 있음에 설렘과 고마움이 밀려온다.


https://youtu.be/aRl2hi1hxVQ?si=vvi82-CHTLUISU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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