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핀 드 비강의 <충실한 마음>을 읽고
오랜만에 정말 좋은 책을 만났습니다.
이 작품을 만나게 해 준 제 남동생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오늘 이야기할 책은 델핀 드 비강의 <충실한 마음>입니다.
216페이지의 얇고 작은 이 책에는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단위인 '가족'을 중심으로 맺어진 관계들이 등장해 이야기를 이루고 있습니다.
-철천지 원수로 지내는 이혼 부부
-가까스로 결혼을 유지하고 있는, 하지만 사랑이 소실되고 있는 부부
-서로의 구원이 되어 주는 두 친구
-사회생활 동료 사이
-선생과 제자
-쓰레기 같은 부모와 그런 부모를 보호하려는 자식
-방어하는 학부모와 뚫으려는 선생
얽히고설킨 이 관계들이 만들어가는, 인물들이 나락으로 빠져 들어가는 이야기. 주인공 테오, 엘렌, 세실의 이야기만 살짝 들여다보겠습니다.
이혼 한 부모 사이를 일주일 간격으로 왔다 갔다 하며 하루를 보내는 주인공 '테오'가 숨을 쉴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바로 '술'입니다. 친구 마티스의 말을 빌리자면 테오는 '마치 곧 죽으려는 사람처럼 술을 마시는' 아이입니다.
[알콜성 혼수상태]에 빠져버린 테오는 이 '혼수상태'를 지양해야 할 일이 아닌, 지향해야 할 일, 즉 '무언의 약속' '도달해야 하고 동시에 추구하는 지점'이라고 말합니다.
열두 살 반 밖에 되지 않은 어린 테오는 왜 술을 마셔야만 했을까요? 하루하루 죽어가는(정신이 죽어가는 것을 의미) 부모 사이에서 이 어린아이는 무엇을 보호하려고 학교 구석 진 곳에 몰래 숨어들어 술이 가득 담긴 술병을 한 번에 들이켜는 것일까요?
아이들은 자신의 부모를 보호한다.
그 무언의 약속은 때때로 아이들을 죽음으로 이끈다.
(p.168)
테오 담임 선생님인 '엘렌'은 아버지의 무차별적인 폭력에 시달리며 성장해왔습니다. 그러기에 테오의 이면에 두껍게 자리 잡은 채 어린 소년을 갉아먹고 있는 어둠 속 괴물의 존재를 단번에 알 수 있게 되죠. <나의 해방 일지>에서 이민기는 말하죠. "끼리끼리 는 과학이다."
아버지의 폭력을 방치한 결과로 엘렌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자가 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슬프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의 배 속에 '덩어리'로 된 아이들이 많고 많기 때문입니다.
엘렌 역시 테오에게 '끼리끼리'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테오를 보호하려고 그녀 나름대로 필사적인 노력을 하게 됩니다. 물론 그런 그녀의 행동거지를 본 동료 선생들이나 테오의 엄마는 탐탁지 않게 생각합니다. '별 것도 아닌 것에 유난을 떠는' 선생 그 이상, 그 이하로도 보지 않는 것이죠.
테오의 엄마는 자기 아들을 구하고 싶은 담임선생의 진심을 무시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행동은 세상으로부터 '자신이 강박적이고 쓰레기 같은 어미'라는 비밀을 지킬 수 있게 해 주었죠.
이렇듯, 우리 현실 속에서도 어른들의 습관적인 무관심이 얼마나 많은 아이들을 어둠 속에 방치하고 있을까요?
이제는 사랑이 그리 크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남편의 안정과 가정의 화목을 위해 "오랫동안 산소도 없이 고통받으며 살아가는 가정주부"를 자처하던 '세실'은 집안 정리를 하다가 우연한 계기로 남편의 또 다른 이면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녀는 수년 동안 자신과 함께 결혼생활을 이어오던 남자가 지금 자신이 목도하고 있는 이 인물이 맞는지, 어떻게 내 남편과 이 낯선 인물이 한 몸속에 공존할 수 있는지, 혹여나 이 낯선 인물을 자신이 만들어낸 것은 아닌지 자책하며 괴로워합니다.
"달콤하고 맹목적인 무지 속에 머물러야 했는데"라고 말하는 세실 자신의 말처럼 이미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그녀는 더 이상 과거의 평범한 가정주부로 머물지 못합니다. 그렇게 자괴감과 후회 속에 살던 그녀는 '병적인 사고'에 빠져버립니다. 하지만 인간은 모든 환경에 적응한다고 했던가요. 마침내 그녀가 간신히 하나의 탈출구를 찾아내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그녀 '자신'이었습니다.
언젠가 길에서 멀리 있는 엄마를 본 아들 마티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엄마는 혼자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누가 봤다면 미쳤다고 했을 것이다.
(p.188)
열세 살 '테오'가 너무나 가여워 책을 읽는 내내 강도 높은 두통에 시달려야만 했으며 연신 붉어지는 눈시울을 달래야만 했다. 이렇게 절망적이고 가슴 아픈 소설이 또 있을까.
이 책에 대한 제 소감입니다. 모든 등장인물들이 너무 슬퍼서 도중에 끊을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나의 모든 감각을 흡입하는 작품을 만났고, 이 책을 통해 처음 접하게 된 작가 델핀 드 비강의 완전한 팬이 되고 말았죠.
그래서 결국 등장인물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은 비극의 늪에서 빠져나와 자신들의 삶을 무리 없이 살아가게 될까요? 아니면 이보다 더한 비극이 찾아오게 될까요?
부모가 아이의 삶의 전부라고 생각하시는 분들, 꼭 읽어보세요. 이야기의 잔여감이 너무나도 짙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후에도 한 동안 작품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실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