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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길의 애정 Jul 03. 2022

손톱달을 만나기까지

서울 용산구 | 한강대교

 지난 일주일이 너무도 힘들었는지 11시간을 넘게 잤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창문 사이로 볕이 따뜻하다 못해 뜨겁게 들이치고 있었다. 주변의 모든 사람이 다 알 정도로 여름을 싫어한다. 여름에는 대부분 집에만 있었고, 약속이 있어도 꼭 실내에만 있는다. 몇 년 만에 연락이 닿는 지인들도 '지금도 이렇게 더운데 여름에는 너 어떻게 사니.'라는 말을 할 정도다. 


 바깥은 이미 30도를 넘어선 것이 확실했다. 후텁지근한 공기의 질감은 집을 나서는 순간 온몸이 젖어갈 것이 빤했다. 눈도 몸도 무거웠지만 이상하리만치 간단하게 갈피를 정했다. 삶이 지치니 마음이 쉬고 싶어졌나 보다. 낮은 종로 근처를, 저녁은 그간 별러 온 한강대교의 노을을 보러 가야겠다. 최소한의 짐과 옷 차림새로 무게와 불편함을 줄였다. 이만하면 제법 괜찮은 준비겠거니 하고 집 밖을 나서니 집회의 메카인 이곳은 이날도 집회로 버스가 제 정류장에 서지 못했고 우회를 했다. 종로로 향하는 버스는 경복궁역에서 광화문과 종로 1, 2, 3, 4가를 가지 않는다고 했다. 대규모 집회구나. 편히 돌아다니기는 글렀다. 


 종로 5가에서 내려 걸어서 청계천 일대와 을지로 일대를 걷다 보니 입이 마르고 현기증이 같아 카페에 들어가 목을 축이고 다리를 쉬이고 에어 팟을 귓바퀴에서 빼내었다. 통창을 바라보며 앉은 좌석에서 밖을 내다보니 바깥은 여름의 모습 자체였다. 데워지다 못해 바싹 익어버린 아스팔트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게 눈에 보였고, 고개를 잔뜩 젖히며 높게 머리를 묶는 사람, 목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을 연신 닦아내는 사람, 모자를 벗어 부채질을 하는 사람이 동시에 지나가며 한여름이 만들어내는 흔한 풍경이 연출됐다. 


  카메라에서 메모리카드를 꺼내어 사진을 정리하고, 휴대전화를 충전하며 커피를 마시다 보니 4시가 넘어 용산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을지로 정류장으로 향했다. 회사에서 텀블러를 챙겨 나올 요량이었다. 그리고 광화문을 지나지 않고 남대문을 경유해 갈 테니 집회를 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였다. 아마 그때 이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이날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앞날을 전혀 모른 채, 맑은 날씨 덕에 가시거리가 좋아 을지로 2가 사거리에서 남산 서울타워가 선명히 보여 카메라에 담아보기도 하고, 뜨겁게 내리쬐는 볕을 두 팔 위로 맞아보기도 하며 귀로 흘러나오는 여름 노래를 들으며 신호를 기다렸다. 을지로는 이미 차로 꽉 차 있었고, 그저 '집회의 여파려니' 속 좋은 소리를 하며 버스정류장으로 가니 우회란다. 한숨이 푹 나오는 상황이었지만 불행이었는지 다행이었는지 신호등 너머 서울역을 가는 버스가 보여 우선 서울역까지 가기로 하고 버스에 올려 타기로 했다. 눈앞에 보이지만 300m도 되지 않는 거리를 도통 오지를 못하는 버스를 바로 눈앞에서 10분을 넘게 기다려 탔다. 한 정거장을 가는데 20분이 넘는 시간이 소요됐다. '에어컨 바람에 흐른 땀을 식히니 좋다'며 두 번째 속 좋은 소리를 하고 있는데 명동 롯데백화점으로 가는 좌회전 신호를 받자마자 서울역으로는 가지 않는다며 여기서 유턴을 할 거니 모두 내리란다. 


 승객들이 당황하며 일제히 버스에서 하차했다. 어차피 집으로 가는 방향의 버스는 종로로도, 광화문으로도 가지 않고 우회하는 상황이었기에 을지로입구에 고립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된 이상 그냥 가려던 곳을 가자는 생각이 들어 인파를 뚫고, 더위를 이겨내며 회현역을 향해 걸어갔다. 


 더운 날씨 탓인지, 집회로 인해 불편을 겪어서인지, 아니면 본디 개인의 성향이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한국은행 교차로에서 교통 통제를 하는 경찰을 향해 지긋한 나이의 두 노인이 어차피 차도 오지 않는데 보행자 적색 신호에서 횡단보도를 건너지 못하게 제지한다며 언성을 높인다. 골목에서 나오는 차가 횡단보도를 향해 오고 있는데 말이다. 제지와 고집이 오가는 사이 녹색 신호가 떨어지고, 모두가 건너는 와중에 도로 한복판에 서 있는 경찰을 향해 씩씩대며 걸어가더니 더 크게 언성을 높이며 나무란다. 남의 화 소리를 들으니 더 더워지는 기분이 들어 발걸음을 재촉했다. 


 충무로도 상황이 좋지 않았다. 남대문 시장 버스 정류장도 대부분의 버스 노선이 우회하고 있었다. 신용산역까지 지하철을 타고 가면 너무 일찍 도착하기에 노을 시간까지 시간이 많이 비어 지하철은 애초부터 염두에 두지 않았다. 어차피 젖은 옷과 머리이기에 '서울로 7017'을 따라 걸어보기로 한다. 걷다 보니 눈앞으로 움직이는 물체에 시선이 꽂혀 따라가 보니 두 뺨이 불그스름하게 물든 두 마리의 새가 보인다. 찌르르르하는 소리를 내며 날렵하게 날아다니다 나뭇가지에 앉아 쉬고, 다시 날아가고를 반복한다. 체구에 비해 긴 꼬리 깃털이 예뻤는데 마침 나와 같은 곳에 시선이 묶인 일본인 여성도 '귀여워'를 연발하며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을 찍었다. 을지로에서 버스를 타고 갔다면 오늘 이 붉은 볼의 새를 보지 못했을 거다. 

 서울역에서 버스를 타고 가다 보니 이번엔 숙대입구부터 삼각지역까지 경찰들이 인간 바리케이드를 만들어 도로 통제를 했다. 가는 길마다 집회를 하는 상황이 황당하기 그지없다. 일부러 그들을 취재하는 사람이 된 것 같다. 그저 난 광화문 근처에 보금자리가 있고, 종로와 용산에 '갈 일'이 있는 것뿐인데. 하필 이날이 역대 최대 규모로 진행했다는 뉴스를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본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해야겠다. 전날 저녁 뉴스와 당일 정오 뉴스를 챙겨보지 않은 벌을 톡톡히 받고 있었다. 


 용산에 도착하니 아직 일몰 시간까지 시간이 남아 회사 아래 카페에서 녹차 음료를 마시며 철길 근처를 걸었다. 며칠 전 회식 장소가 여기였을 때는 1분이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는데 쉬러 오니 자꾸만 골목골목이 궁금해지고 돌아 나오는 길이 없는 골목 끝까지 가보고 싶어 진다. 걷고, 보고, 담다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파랗던 하늘이 주황빛이 되어 간다. 

 완전히 해가 지기 전 볼 수 있는 Magic Hour (매직 아워). 이 풍경을 보고 싶어 7시간이 넘는 시간을 밖에서 떠돌았다. 다리 위로 세워진 높은 벽 틈새로 보이는 여의도 방향의 일몰은 정지된 풍경을 통화하는 열차가 지나갈 때 정취가 더해진다. 고소공포증은 늘 방해가 된다. 결국 바닥에 주저앉아 작은 틈새로 이날 가장 바랐던 풍경을 오랫동안 바라봤다. 


 빛이 만들어내는 감성을 자극하는 아름다움은 오늘이 지나면 같은 풍경을 볼 수 없다는 '오늘에 한정되는 아름다움' 때문인지 괜스레 더 특별하게 느껴진다. 인위적으로 가공하지 않은 매 초, 매 분, 매 시마다 다른 자연스러운 시간의 변화의 따른 아름다움. 지구별 여행자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주황빛의 하늘이 점점 보랏빛이 되어간다. 구름 뒤로 숨은 해가 빛의 산란으로 층마다 다른 색으로 오늘 하루 부단히도 고생했다며 섬세한 위로를 건넨다. 고맙다는 말을 미처 하기도 전에 하늘빛은 더욱 어두워진다. 옅게 남은 보랏빛은 다음을 기약하며 해를 따라 하늘을 떠났다. 어둠에게 자리를 내어주기 전 가장 아름답게 하늘을 장식하는 보랏빛은 내가 지향하는 인간으로서의 이상과 많이 닮아 보였다.


 보랏빛의 하늘은 매일 만날 수 있는 풍경도 아니거니와, 어쩌다 마주친 어느 하루의 하늘빛 중 가장 짧은 시간 모습을 드러내지만 가슴속에 남는 여운과 임팩트가 확실하다. 삶도 매일이 반짝이지 않는다. 다만 반짝이는 날은 그 어느 날보다 확실하게 반짝이고 싶다. 

 어느새 하늘은 짙은 어둠이 시간의 주인이 되었고, 하늘엔 손톱달이 떴다. 보름달이 보고 싶은 날이 있듯 손톱달이 보고 싶은 어느 날이 있다.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선택의 오류로 가득했던 하루였다. 본의 아니게 집회지를 따라 이동했던 동선도 그랬고, SD카드 포맷을 해버리는 바보 같은 실수를 하기도 했고, 카메라 촬영 모드도 잘못 선택하기 일쑤였다. 


 미완으로 가득했던 하루다. 덜 차오른 달이 미완의 하루의 마침표를 찍었다. 부족했던 순간은 다른 날 채워 서서히 보름달 같은 사람이 되면 된다. 어둠이 깔린 하늘 저 멀리 떠있는 손톱달이 유난히 반가운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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