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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길의 애정 May 31. 2022

가장 그리던 여행지가 눈앞에 있다

전남 여수  |  향일암

 여수에서의 둘째 날이 밝았다. 일찍 체크아웃을 하고 향일암을 가기 전 버스 시간이 남아 오동도를 다녀왔다. 산책길을 아주 조금 둘러보고 돌아오는데 타야 할 버스가 눈앞에서 가버렸다. 버스 도착 예정 시간보다 12분이나 남았는데 말이다. 대중교통으로 다니는 뚜벅이 여행은 이럴 때 가장 기운이 빠진다. 서울을 벗어나면 일부 대도시를 제외하고는 대중교통 배차시간이 길어 다음 일정에 차질이 생기기에 버스 도착 예정시간보다 일찍 다녀도 이런 일은 예상보다 빈번하다.


 전날 30,000보가 넘는 걸음을 걷기도 했고, 배낭의 무게도 늘어 몸도 지쳐 택시를 타고 가기로 결정했다. 창문을 살짝 열고 왼쪽과 오른쪽에 보이는 차창 밖 세상을 번갈아 담아 본다. 화려하고 번화한 여수 시내가 점점 멀어져 간다. 빠르게 달려 나가는 택시는 어느새 타야 했던 버스를 앞섰고, 비어 있는 도로를 내달리며 더욱 속력을 높이고 있었다.

 어느덧 향일암 주차장에 내려 사찰을 향해 걸어 본다. 몸이 뒤로 젖힐 만큼 가파른 경사는 다리와 심장을 힘들게 만들었지만 고지에서 내려다보는 '그곳'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했다. 매표소를 지나 계단길을 따라간다. 일주문은 왜 이리 멀게 느껴지는지. 도통 평지라는 것이 나타나지를 않는다. 일주문을 지나도 계단은 계속된다. 옷이 흠뻑 젖을 정도로 땀을 흘려 입고 있던 겉옷을 벗자 때마침 바람이 불어오며 열기를 식혀준다. 배낭에 넣어둔 물을 꺼내 목을 축이니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긴다.


 절벽 같은 계단을 지나면 해탈문을 마주한다. 속세에서 얻은 모든 번뇌를 지나기 전 놓고 오라는 듯 최소한의 아주 좁은 틈만 열어준다. 바위 틈새의 짧은 길은 짧은 어둠을 지나 밝은 빛을 보여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석문을 지나가기를 반복하면 대웅전이 기다리고 있다.

 턱끝까지 찼던 숨을 어느 정도 고르게 내쉴 수 있게 되자 눈앞으로 바다가 보인다. 맑은 날씨 덕에 멀리 펼쳐진 남해 바다의 윤슬이 더욱 아름답게 빛이 나고 있었다. 대웅전 뒤 석문을 지나 관음전으로 발길을 옮긴다. 목탁 소리와 염불 외는 소리가 들려오니 주변의 소음이 사라진다. 빼곡히 놓인 누군가의 소원이 담긴 초는 무슨 소원을 빌었을까, 나는 이곳에서 무얼 이루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좋을지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며 생각해본다.  


 여수 여행을 다녀온 뒤, 향일암을 떠올릴 때 바다보다는 석문이 더 많이 생각난다. 좁은 바위 틈새는 시각적인 호기심과 아름다움을 주었다. 20분 남짓 걸어 올라가는 가파른 언덕은 힘듦을 이겨내는 인내와 사색의 시간을 선물해주었다. 다른 여행지와 거리가 먼 것을 핑계로 방문을 고민할 이유가 없는 곳이었다.

 시선을 좌로 옮기니 산길을 걸으며 내내 그리던 '그곳', 경남 남해가 보인다. 어느 가을날, 노랗게 익은 금빛 벼 사이로 난 도로를 달리던 남해에서의 여행길이 떠오른다. 미국 마을에 위치한 숙소 앞에서 본 석양이 지던 논길을. 다랭이 마을을 보며 보성 녹차밭을 떠올렸던 순간을, 한산한 차도, 은모래비치의 적막함을. 죽방렴을 보며 현대 사회임을 잊었던 순간을. 보리암과 금산에서 내려다본 남해의 바다를.


 지금처럼 많은 사람이 가기 전의 남해는 6시가 안 된 시간이지만 많은 식당이 문을 닫았었고, 독일마을의 포토 스팟은 사람의 온기 대신 공기만이 있었다. 문을 열지 않은 가게들도 더러 있었다. 남해는 이런 불편한 것이 매력인 곳이었다. 늘 그리워했다. 아주 오랫동안. 그런 남해가 저 멀리 보인다. 전보다 많은 사람이 가는 곳이 되었으니 예전과 같은 소박함은 없겠지만 여전히 남해를 그리워한다. 더 늦기 전에, 덜 불편한 곳이 되기 전에 가장 그리던 곳을 찾아야겠다. 붉게 빛나는 석양과 노랗게 빛나는 대지가 오랫동안 '그곳'을 잊지 않았던 여행자를 반겨주기를 바라면서.




- 여행 계획 수립 : 여수 1편 바로가기 클릭

- 여수로 향하는 기차 : 여수 2편 바로가기 클릭

- 수수한 여수 섬 여행 : 여수 3편 바로가기 클릭

- 소소한 도보 여행 : 여수 5편 바로가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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