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망치의 신이더냐?

by 윤동규

0.

나름 10년이 넘게 영상을 찍다 보니,

가끔 촬영이 좋은게 아니라 카메라가 좋은 경우가 많다.

내 경우엔 정확히는 캠코더에 가까운데

어떤 기능을 지원하고. 버튼이 어디에 달렸고

그립감이 어쩌고 밝기가 어쩌고 무게 크기 떨방 가성비

그러다가 실컷 물고 뜯고 가지고 놀다 보면 다른 캠코더가 궁금해진다. 나는 이게 되게 불량한 태도라 느껴지는 때가 있다.

캠코더를 연애로 치면. 처음 몇 주만 좋다가 데이트 한번 하면 금새 질려서 애인을 갈아치우는 형태가 아닌가?

물론 캠코더는 애인이 아니고. 하나만 써야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중요한건 무언가에 <질린다>라는 감정이다. 익숙해지고 편해지는 것이 아닌, 질리는 것에 사랑이 있는가? 아니지 않나? 금새 질리는 것을 사랑하는 것은, 사랑할 수 있다 해도 좀 문제가 있지 않나?

이런 고민에 오늘. 놀라운 해답을 찾아냈는데-

맙소사. 답은 <오토 촬영>이었다.

1.

말하자면 난 무언가를 담아내고 기록하는 행위를 사랑한다.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는 것 처럼,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하는 것 처럼,

영상을 찍는 것을 좋아한다.

물감을 좋아해, 연필을 좋아해, 마이크를 좋아해, 오디오 인터페이스를 좋아해 하는게 이상한 것 처럼. 나도 캠코더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캠코더가 영상을 찍을 수 있으니 좋아하는거다.

그럼 왜 미러리스보다 캠코더가 좋은가?

빠르고, 가볍고, 편하고, 정확하다.

룩을 좋아하는 면도 있지만,

미러리스로 구현할 수 있는 정도의 룩이다.

그렇다면 굳이 미러리스로 후반 작업 없이 구현할 수 있다는 뜻이니까, 룩 역시 빠르고, 편하다 에 속한다.

심지어 여기서 더 빨라지는 방법을 아시는지?

바로 오토로 찍는 것이다.

2.

오토가 시발 뭐 대단한거라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균일하지 않은 노출 튐. 의도하지 않은 포커싱. 공간 내에서 통일된 화이트 밸런스. 원하는 만큼의 밝기와 콘트라스트 등등의 이유로

한평생 내 눈에 흙이 들어와도 오토는 안돼! 하는 매뉴얼 촬영 병자에게, 오토로 찍는 해방감은 마치 알몸으로 요세미티 국립공원을 내달리는 것 같았다(그래본적은 없다).

그리고 이제서야 느낀다.

아 나는 캠코더를 좋아하는게 아니라

촬영을 좋아하는구나.

카메라건, 캠코더건 모두 촬영을 위해 필요한 것이고

거기에 어떤 형태가 되었든 <조작>이란 행위가 들어가면,

그건 즐거움을 더하는게 아닌

방해를 하는구나.

왜냐면 난 빠르고, 가볍고, 편하고, 정확하게 찍고 싶지

예쁘게 찍고 싶은 사람은 아니니까.

예쁜건 누가 알아서 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3.

그러니까 이제 뭐가 남냐.

<빠르고 가볍고 편하고 정확하게 찍는 도구>와

찍는 행위만 남는다.

굳이 캠코더일 필요가 없어진다.

눈 앞에 펼쳐진 흥미로운 장면? 세로라도 상관 없어?

아이폰으로 찍는다.

저 멀리 펼쳐진 흥미로운 장면? 가로면 좋겠어?

캠코더로 찍는다.

이건 느리고 무겁고 불편해도 되니까, 예쁘게 찍을 필요가 있다?

촬영 감독님을 섭외한다.

뭐 안되면 미러리스 빌려서 찍는다.

그런 촬영만 그렇게 찍으면 된다.

그건 그 나름의 의미가 있다.

그치만 뭘 사랑하냐 물어본다면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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