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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보는옆집개 Sep 20. 2021

<그리고 베를린에서>

은유의 폐기, 현실의 직시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국에서 살며 유대인을 직접 만나고 이야기를 나눠보는 일은 흔치 을 것이다. 오히려 유대인들을 접하는 가장 쉬운 통로는 2 세계대전을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나, 그들에 관한 다큐멘터리 혹은 서적들이다. 때문에 유대인이라 하면 쉽게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홀로코스트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그들이 어떤 문화를 가지고 있는지, 유대인이라는 집단 명사 안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자세히 알게 되기보다는 거대한 비극적 사건을 먼저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조르조 아감벤은 그의 저서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 - 문서고와 증인>에서 '홀로코스트'라는 용어 자체를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홀로코스트라는  기구한 (통상 대문자의 ‘Holocaust' 표기된다) ‘무의미한죽음을 정당화하려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것에 의미를 되돌려주려는 무의식적 요구로부터 비롯된 "이기 때문이다아무 의미 없이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600만 명이 학살당한  사건에 '홀로코스트'라는 그리스도교적 전통에서 파생된 은유적 의미가 덧붙여지며 오히려 그들의 죽음을 욕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라틴어 'holocaustum' 『성경』의 「레위기」에서  구분한 제물의  가지 유형인 ‘올라(olah)’, ‘하타트(hattat)', '셸라밈(shelamim)', ' 민하(minha)'  ‘올라(olah)’ 번역한 용어이다. '홀로코스트',  '올라' 살해된 직후 통째로 불태워 바쳐지는 '번제물' 의미하는데, 이는 서구의 오랜 역사를 거치며 그리스도교적 의미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변용을 겪는다. 가령 십자가 위 예수의 죽음이나 믿음을 증거 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의 행위를 '홀로코스트'라고 일컫는 것은 그리스도교 전통 내에서의 은유다. 여기서 나아가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개인의 희생이나 '정의' 혹은 '평화'  어떤 추상적 가치의 상실을 일컫기 위해 '홀로코스트'라는 표현이 사용되며 은유의 폭이 확장된다.

 이처럼 홀로코스트는 서구권에서 종교적 의미인 '번제물'에서 시작해 "신성하고 우월한 동기들에 대한 온전한 헌신의 영역 속에서의 지고의 희생"²을 의미하는 은유적 표현으로 확장되었으며, 나아가 특정 대상의 완전한 죽음 혹은 삭제, 다수의 죽음 등을 지칭하기까지 이른 것이다. 문제는 유대인들의 무의미한 죽음, 그 어떤 동기도 없고 희생을 통해 성취되는 것도 없는 죽음에 대해 '홀로코스트'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아감벤에 따르면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언급되는 것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 무언가를 본래의 의미 대신 표현할  사용하는 완곡어법은 본질적으로 애매모호할 수밖에 없는데, '홀로코스트' 경우  애매모호함이 용납할  없는 수준이다. "가스실에서의 죽음과 ‘신성하고 우월한 동기들에 대한 온전한 헌신 연관시키려는 시도는 희롱처럼 들릴 수밖에 없다.  말은 우리가 도저히 받아들일  없는 화장로와 번제의 제단의 동일시를 내포할 뿐만 아니라 애당초 반유대주의적인 의미론적 전통을 답습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으로  말을 쓰지 않을 것이다."³ 넷플릭스 드라마 <그리고 베를린에서>  여성의 삶을 이러한 완곡어법, 은유로 표현하지 않음으로써 현실을 직시하게 만들어주는 작품이다.


 <그리고 베를린에서>의 원작 <언오소독스: 밖으로 나온 아이>의 저자 데버라 펠트먼은 22세 때 집을 떠났다. 그는 뉴욕 브루클린의 하시딕 공동체에서 살고 있었는데, 유대교 종파인 하시딕은 "홀로코스트를 유대인이 다른 민족과 동화된 것에 대한 천벌이라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폐쇄적인 생활을 강요하고 특히 여성을 억압한다. 여성은 읽을 수 있는 책이 정해져 있고 결혼 후엔 삭발해야 한다. 나치에 희생된 600만 명의 복원을 최우선 목표로 삼고 출산에 전념하도록 강요한다."⁴ 데버라 펠트먼은 17세에 중매결혼을 한 뒤 19세에 아이를 낳고 22세에 아이와 함께 그곳을 '탈출'했다.

 아감벤의 책에서 언급되는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레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집단학살을 예언자들의 방식대로, 그러니까 우리의 죄에 대한 처벌로 해석하려는 일부 종교적 극단주의자들의 시도 때문에 짜증스럽다. 아니! 난 이런 식의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끔찍한 것은 그것이 의미 없는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일부 종교적 극단주의자들' 중 하나가 바로 하시딕일 것이다.

에스더 샤피로와 야코프 샤피로의 결혼 사진 (사진 출처: IMDb)

 에스더 샤피로(시라 하스)는 데버라 펠트먼의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그리고 베를린에서>의 주인공이다. 그는 브루클린의 하시딕 공동체에서 태어나고 할머니의 손에 자란다. 그의 어머니 레아 맨델바움(알레스 레이드)이 공동체를 탈출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인지, 아니면 에스더 자신의 성격 때문인지 그녀는 공동체 내에서 유별난 아이로 취급받는다. 하지만 그녀 역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결혼의 때가 오자 중매를 통해 야코프 샤피로(아미트 라하브)와 결혼하게 된다.

 그들의 결혼 생활은 쉽지 않다. 부부간의 성관계는 남성에 의해 베풀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여성은 항상 남성의 아래에서 성관계에 임해야 하고, 여성은 항상 몸을 깨끗이 해야 하며 생리 중에는 남편과 격리되어 지내야 한다. 이런 수많은 규칙들 속에서 이뤄지는 성관계는 만족스럽기는커녕 에스더에게 고통스럽기만 하다. 또한 가장 사적인 일이어야 할 부부관계는 민족 재생산을 위한 임무이자 남편의 친족들이 모두 염려하고 개입하는 공동의 일이 된다.

 점차 자신의 삶이 감옥 안에서의 삶이라 느껴지던 에스더는 어머니가 남기고 간 서류를 꺼내본다. 에스더를 떠나며 어머니 레아는 언젠가 필요하게 될 것이라며 에스더가 독일 시민권을 받을 수 있는 서류를 건네었던 것이다. 그 '언젠가'가 바로 지금이라 생각한 에스더는 뉴욕을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공동체 내에 세입자로 학원을 운영하는 피아노 강사에게 월세 대신 무료로 피아노 레슨을 받고 있었던 에스더는, 그 피아노 강사의 도움으로 우버를 타고 공동체를 떠나 공항으로 향해 베를린으로 갈 수 있게 된다.

베를린의 호수에서 가발을 벗는 에스더 샤피로 (사진 출처: IMDb)

 베를린에 도착한 에스더는 어머니의 집을 찾아가 초인종을 누르지만 아무도 없다.  외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에스더는 카페에우연히 만난 로버트(아론 아타라스) 따라나선다. 로버트는 근처 음악학교 학생으로, 에스더와 금세 가까워진다. 에스더는 로버트를 통해 음악학교에서 만난 또래 친구들과 근처 호수로 놀러 가는데, 남편만이   있도록 원래의 머리를 가리던 가발을 벗고 수영을 한다. 이를  친구들은 에스더가 없을  많은 추측들을 하는데, 이스라엘 출신 야엘(타마르 아미트 요셉) 하시딕 공동체에 대해 친구들에게 설명해준다. 같은 유대인이지만 극단주의자들인 그들을 폄하하며 여성을 '아이 낳는 기계' 대한다고 말이다.

 이 말을 들은 에스더는 자신은 '아이 낳는 기계'가 아니라고 한다. 사실 이 드라마가 탁월한 점은 하시딕 공동체와 그곳의 남성들을 악으로, 에스더를 피해자로 다루는 단순한 이분법을 택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시딕 공동체 역시 사람이 살아가는 곳이며, 그곳에서의 희로애락이 모두 그려진다. 에스더 역시 결혼을 위해 머리를 밀며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며, 결혼식장에서의 두려움과 행복이 공존하는 그녀의 모습은 세상 어느 곳에서나 만날 수 있는 결혼을 앞둔 이들의 설렘과 걱정을 모두 담고 있다.

 그녀가 떠나온 하시딕 공동체에서는 에스더를 찾기 위해 남편 야코프와 남편의 사촌 모이세(제프  부쉬) 추적이 시작된다.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야코프와 함께 랍비의 특별 허락으로 공동체 내에서 허락되지 않는 온갖 불법적인 일들을 하며 세상을 돌아다니며 살아온 모이세가 베를린으로 향한 것이다. 모이세는 여느 영화에서와 같은 추격 빌런의 모습에 가깝지만 야코프는 단순히 나쁜 남편으로만 그려지지 않는다. 오히려 야코프 개인의 악함이 아닌 그를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게 만든 공동체와 종교의 구조적 모순과 폭력성이  드러난다.

에스더를 찾아 베를린으로 향하는 모이세와 야코프 (사진 출처: IMDb)

 한편 에스더는 음악학교에서 몰래 잠을 청하다가 다음날 아침 청소부에게 발각되어 문제가 될 뻔했는데, 이를 학교의 교수가 도와준다. 이때 연을 맺은 교수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에스더가 피아노를 칠 줄 안다는 말에 교수는 특별 입학 전형을 소개해준다. 에스더는 학교 입학이 베를린에 정착하고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하고 준비하기 시작한다. 동시에 모이세와 야코프는 에스더의 어머니 레아의 집을 찾아가 여러 단서를 모으며 에스더가 음악 학교에 지원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점차 그녀와의 거리를 좁혀온다.


 이 드라마의 힘은 하시딕 공동체, 여성을 ‘아이 낳는 기계’로 대하는 공동체를 기괴하고 이상한 곳으로 그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발생한다. 앞서 언급했듯 그곳에서 탈출한 에스더는 하시딕에서 자신이 ‘아이 낳는 기계’가 아니었다고 한다. 아마 하시딕 공동체를 외부의 시선으로 대상화하여 평가 내리는 듯이 묘사했다면 에스더의 이야기는 여러 모순을 지닌 한 인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평면적인 동정의 대상을 그린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한 이야기는 하나의 은유로서 나의 삶과는 거리가 먼, 혹은 내 삶의 고통스러운 한 부분을 완곡어법으로 비춰줄 그저 하나의 '이야기'로만 읽혔을 것이다.

 이처럼 잘 직조된 이야기 덕분에 아마 많은 여성 관객들은 하시딕 공동체의 에스더, 혹은 데버라 펠드먼의 경험을 은유가 아닌 현실로 읽어낼 것이다. 실제로 한국의 제도와 통계들은 여성들을 이성애 결혼을 전제로 하는 정상 가족에 편입되고, 그 가족을 재생산해야 할 대상으로 본다. 지난 8월에는 성남시 인사 부서 직원이 미혼인 시장 비서실 근무자에게 잘 보이려고 30대 미혼 여성 공무원 150여 명의 신상 리스트를 만들어 바치기도 했다. 균형 있게 그려진 에스더의 삶조차 비현실적인 문학작품 속 일화처럼 읽힌다면 그것이 내가 세상을 경험하는 자리를 대신 말해주는 것이다.

 다시 '홀로코스트' 완곡어법, 은유로 돌아와 보자. 은유는 때때로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도 하지만, '홀로코스트' 경우처럼 설명하려는 현상의 본질을 흐리기도 한다.  드라마는 은유로 작동하기를 거부한다. 원작이 저자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그럴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건의 구성이나  사건 안에서 펼쳐지는 배우의 연기는 드라마  현상들을 하나의 해석으로 읽지 못하게 한다. 복합적이고 모순적인 인간의 모습들을 그대로 담으려는 창작진의 섬세한 노력이 '드라마'라는, 자칫 쉽게 은유적인 이야기로 소비되기 쉬운 매체를 통해서도 데버라 펠트먼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리얼하게' 그려낸 것이다.

 하시딕 공동체의 입장에서는, 그들은 절대로 이런 표현을 사용하지 않겠지만, 그곳의 여성들이 유대 민족의 번영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통째로 바치는 번제,  '홀로코스트'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식과 경험을 통제하고, 그들의 삶이 유의미하며 옳은 것이라 믿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구조의 폭력은 공동체 내에서 영원히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다.  폭력이 드러나는 일은 오로지 그곳에서 탈출한, 변종과도 같은 에스더 혹은 데버라 펠트먼과 같은 이들의 선택에 의해서일 뿐이다.

 우리 사회 안에서 젠더, 종교, 인종, 장애, 계급  여러 이유로 소수자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 혹은 인간이라는 범주에 속하지 못하는 비인간 동물들의 경험들은 은유로 읽히기 쉽다. 나의 경험이 아닌 이상 타인의 경험은  삶의 어떤 지점을 이해하게 해주는 하나의 도구로 사용되기 쉬운 것이다.  은유를 폐기하고 현실을 직시하게  , 어떤 이의 경험이 나와 동떨어진 무언가로 읽히며 나에게 어떤 의미를 발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경험 그대로 오롯이 읽히게   비로소 타인을 이해하고 나의 부족과 무지를 인지하게  것이다.  부족과 무지는  타인을 죽인 힘으로, 타인을 없는 것으로 여김으로써 만들어진 단단한 자리에서 비롯한 것이다.  견고한 자리를 인지하고 폐기하려는 노력을 멈추는 것은,  역시 구조에 편입되고 그것의 본질적 폭력성에 동의하는 것과 다름없.  


¹ 조르조 아감벤,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 - 문서고와 증인>, 정문영 옮김, 새물결, 2019, p.39

² 위의 책, p.42

³ 같은 책, p.46

⁴ 장은교 소통·젠더데스크, <데버라 펠드먼·이길보라 “아프간은 우리와 연결… 잊지 않고 길을 찾겠다”>, 경향신문, 2021. 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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