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 이야기, 영화를 '살아있게' 하는 힘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비영어권 출신으로는 최초로 영국 로열 셰익스피어 컴퍼니의 연출을 맡았던 일본의 공연 연출가 故 니나가와 유키오는 '공연이 시작된 후 3분 안에 관객을 사로잡을 수 있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그의 공연들은 무대 장치의 스펙터클을 통해서든, 배우의 연기와 등퇴장을 통해서든 관객들을 연극이 펼쳐내는 세계로 곧장 끌어들일 수 있는 도입부를 통해 시작한다.
그의 마지막 작품인 <해변의 카프카>는 국내에서도 공연되어 많은 관객들이 찾은 바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이 공연은 시작과 함께 시규어로스의 음악이 나오며 한 소년이 무대에 홀로 서 있고, 그 소년이 스스로를 찾아 헤맸던 수많은 장소를 표현한 대형 큐브들이 무대 곳곳을 움직인다. 말 그대로 3분 만에 '15세 소년의 자신을 찾는 여행'이라는 공연이 담고 있는 핵심적 메시지를 시각적으로 훌륭히 표현하는 동시에 앞으로 연극이 어떤 공간적 약속들로 펼쳐질지를 확실히 인지시켜주는 장면이었다.
영화 역시 마찬가지이다. 3분이라는 가혹하게 짧은 시간은 아닐지라도 초반 두 세 장면 이내에는 관객을 사로잡아야 한다. 관객을 사로잡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이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인물이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것과 영화가 앞으로 사용할 시청각적 기술의 스펙터클이다. 이 중에 한 가지만 택하라면 인물을 택할 것이다. 스펙터클은 인물이 가진 이야기를 표현하는 여러 수단 중 하나에 불과하며, 어떤 인물이냐에 따라 어떤 기술들이 활용될지도 결정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끔 3분이라는 가혹한 조건 안에 인물과 스펙터클을 모두 보여주는 괴물 같은 영화들도 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 나이트>에서 조커와 일행이 은행을 터는 첫 장면은 음악, 시각효과, 故 히스 레저의 연기가 어우러져 '조커'라는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를 탁월하게 그려낸다. 또한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버드맨>에서 주인공 리건 톰슨(마이클 키튼)이 연극 극장 대기실에서 공중 부양하고 있는 첫 장면만큼이나 몰락한 퇴물 슈퍼스타를 잘 그려낸 장면은 없었다.
영화는 이야기이며, 이야기는 어떤 '인물'의 이야기이다. 따라서 관객들은 영화가 시작된 후 일정 시간 이내에는 영화가 누구의 이야기인지를 알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중심인물이 영화 전반에 걸쳐 끌고 갈 큰 목표가 초반부에 설명되는 것이 중요하다. 그 목표를 달성하게 도와주는 힘과 방해하는 힘이 서로 뒤엉키는 변증법 속에서 변화하는 인물의 이야기야말로 영화를 움직이게 하는 주 에너지원이기 때문이다.
여느 때처럼 일어나 방에서 게임을 즐기던 준우(유아인)는 온라인 상의 친구들로부터 이상한 뉴스가 나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확인해보니 정체불명의 병이 퍼지고 있다는 뉴스와 함께 준우가 사는 아파트 단지 내에서도 난리가 나고 있었다. 좀비들이 출몰한 것이다. 가족들은 외출하고 홀로 남아있던 준우는 집 문을 걸어 잠그고 살아남기 위해 애를 쓴다. 시간이 지날수록 통신도 방송도 점차 두절되어간다.
집 안에 있던 식량도 떨어져 가고, 아파트 단지 내에는 생존자는커녕 좀비들만 보일 뿐이다. 버티는 것도 하루 이틀뿐이지 준우는 점점 희망을 잃어간다. 결국 그의 선택은 자살. 그런데 준우가 거실 전등에 줄을 묶고 목을 메단 직후, 건너편 아파트 건물로부터 레이저 포인터 불빛이 비춰온다. 또 다른 생존자가 있던 것이다. 준우는 있는 힘을 다해 줄을 끊어내고 목숨을 건진다.
레이저를 쏜 것은 맞은편 동의 생존자 유빈(박신혜). 온라인 세상과 컴퓨터가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준우와는 달리 평소 등반과 아웃도어 활동을 즐기던 유빈은 생존에 직결되는 여러 도구들을 가지고 있다. 식량도 아직 남아있는 상태. 둘은 서로의 아파트를 줄로 연결하여 필요한 물건을 주고받고 소통하며 생존을 이어간다. 하지만 그렇게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다. 계속 살아남기 위해서는 보다 안전한 곳으로 이동해 충분한 식량을 확보해야 한다.
평소 망원경으로 준우 쪽 아파트 동을 관찰하던 유빈에 따르면 8층에는 좀비도 생존자도 없다. 둘은 결심한 끝에 죽기 살기로 8층으로 이동한다. 그런데 그곳에는 유빈의 말과 달리 생존자가 있었다. 그 생존자의 도움으로 쫓아오는 좀비들로부터 피해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준우와 유빈. 곧 구조대가 올 것이라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스마트폰은 터지지 않지만 라디오를 통해 소식을 들었다는 것. 하지만 그 생존자는 사실 좀비가 된 아내에게 먹일 살아있는 사람을 구하고 있었다.
그로부터도 극적으로 탈출한 두 사람은 목숨을 걸고 도망치기 시작한다. 구조대 헬리콥터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어떻게든 옥상으로 올라가 헬리콥터를 붙잡기 위해 준우와 유빈은 힘을 합친다. 좀비의 수가 너무 많아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 군인들이 탑승한 헬리콥터가 찾아와 그들을 구해준다. 준우가 얼마 전 SNS에 올린 자신의 생존 사실과 거주지를 알리는 주소를 보고 구조대가 도착한 것이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태그와 함께 올린 그 글이 바로 준우로 하여금 '살아있다'라고 말할 수 있게 해 준 것이다.
<#살아있다>는 좀비 영화다. 좀비 영화에서 등장인물이 가지는 일차적인 목표는 '생존'이다. 이 때문에 좀비 영화들은 곧바로 삶에 대한 은유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앞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리뷰에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의 삶은 문명과 제도로 포장되어 있지만 그 근간에는 생존을 위한 투쟁이 항상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좀비 영화가 '생존'만을 다룬다면 천편일률적일 것이며 굳이 여러 영화들을 볼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다양한 좀비물들이 각각의 특색을 가지고, 종종 장르의 한계를 뛰어넘어 영화적으로 가치 있는 작품이 나오는 이유는 기본적인 '생존' 문제에 더해 그 영화만이 담고 있는 무언가를 그려내기 때문일 것이다.
즉 중요한 것은 '부가 가치'이다. "생산 과정을 거쳐 새로 만들어 낸 가치"(다음 어학사전)를 뜻하는 '부가 가치' 개념은 경제생활에서뿐만 아니라 장르 영화를 즐기는 데에도 유효한 개념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이미 있는 것'들과 약간의 '새로운 것'을 조합하여 만들어내는 장르 영화들의 성패는 '부가 가치'를 발생시켰는지 여부에 달려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장르 영화에서 '부가 가치'가 나올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원천은 그 영화가 담고 있는 '이야기'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인물이 어떤 큰 '목표'를 가지며 사건이 전개됨에 따라 그 인물이 어떻게 '변화'하느냐, 이것이 가장 중요한 지점이다. 이때 목표는 단순히 한 장면에만 국한되고 금세 성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영화 초반부터 끝까지 인물을 움직이게 해주는 것이다. 인물이 가진 목표에 따른 이야기의 차이에 따라 같은 좀비물일지라도 전혀 다른 영화가 되는 것이다.
주디스 웨스턴이 쓴 <감독을 위한 영화 연기 연출법>(권경원 역, 비즈앤비즈, 2012)은 이러한 큰 목표를 '열망'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가령 <대부>에서 마이클 콜레오네(알 파치노)가 작품 내내 가지는 열망은 '아버지를 기쁘게 해주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영화 초반 마피아가 아닌 미국 시민으로서 합법적인 직업을 가지려 하지만, 아버지의 피격과 형의 죽음 이후 대부 자리를 이어받는다. 심지어 아버지의 죽음 이후에도 마이클은 자신이 아닌 아버지를 위한 열망에 따라 삶을 살아가기 때문에 끝내 공허하게 홀로 남게 되는 것이다. (pp.148-152) 이처럼 <대부>는 갱스터 영화라는 전형적인 장르 안에서 마이클이라는 고유한 인물과 그의 이야기를 창조해냈기 때문에 장르를 넘어서 영화사적 걸작으로 평가받는 것이다.
아쉽게도 <#살아있다>는 장르 내에서 고유한 인물을 창조해냈다고 보기는 어렵다. 최근 좋은 평가를 받는 드라마 <킹덤>을 생각해보자. 마찬가지로 좀비물인 이 드라마의 주인공 이창(주지훈)은 '권력이 아닌 옳음을 쫓고 싶다'는 열망으로 움직이는 인물이다. 그가 시즌 2까지 좀비들과 싸우며 보여주는 많은 선택과 행동들은 저 열망으로부터 기인한다. 이 때문에 <킹덤>은 단순한 좀비물이 아니라, 권력을 둘러싼 인물들의 싸움과 그 주변인들의 삶을 통해 '올바른 삶'이란 무엇인지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 되었다.
이러한 '열망'과 더불어 좀비가 등장하기 전과 후 인물의 변화가 보여야 한다. 같은 좀비물인 <부산행>에서 주인공 석우(공유)는 사회적/경제적 '성공'이라는 가치만 추구하다가 좀비들의 등장 이후 '가족'이라는 가치를 추구하는 것으로 변화한다. 평소에는 딸에게 이미 준 적이 있는 선물을 또 줄 뿐이고 학예회도 찾아가지 못하던 아빠 석우는, 부산에 도착할 때까지 기차 안에서 딸을 지키며 좀비와 싸워야만 하는 극단적 상황에 처한 것이다. 이러한 인물의 변화 덕분에 관객들은 이야기를 따라가며 즐길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살아있다>는 준우와 유빈이 어떤 열망을 가진 사람인지, 좀비의 등장으로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 최종적으로 구출된 이후 그들은 사건 전과 어떻게 다른 사람이 되었는지 알 수 없다. 애초에 영화가 시작하고 2분 만에 좀비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으니 관객은 준우가 누구인지도 제대로 알 수가 없다. 영화 중간에 삽입된 장면들도 준우를 설명하기엔 부족했다. 그가 누군지 모르니 그의 이야기도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같은 좀비물 드라마 <스위트홈>을 생각해보자. <스위트홈>의 괴물들은 다른 작품 속 좀비들과는 차이가 있는데, 괴물에게 물리지 않고도 괴물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물리지 않아도 자연히 괴물이 되는 이들의 공통점은 사회에서 왕따, 가정 폭력 등을 통해서 배제되고 억압받은 경험이 있는 이들이다. 괴물에게 물려서 전염된 이들도 역시 자신이 겪었던 가장 억압받은 기억과 연관된 형태로 변한다는 특징이 있다. 이러한 설정은 자연히 괴물이 되는 '인물'들의 사연, 즉 이야기를 펼쳐내게 해 준다.
결론적으로 <#살아있다> 인물 구축에서 아쉬움을 많이 남긴 영화다. 이 때문에 영화는 주요 인물과 좀비들의 싸움만을 그려내다가 '허무하게' 두 사람이 구출되는 것으로 끝이 난다. SNS에 주소지를 공유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는 결말은 "어떤 상황에서도 SNS를 열심히 하자"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것일까? 결국 인물이 구축되지 않으면 이야기가 구축되지 않으며, 이야기가 구축되지 않으면 좋은 결말, 나아가 좋은 영화가 만들어질 수 없다. 영화의 완성도를 떨어뜨리는 디테일한 설정 오류와 여러 옥에 티들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되겠다.
특별한 사연이 없는 인물들을 다루는 영화들을 두고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세상에 평범한 사람들은 없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한 명 한 명이 모두 특별하다. 그들 내면에는 각자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이야기들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결국 영화의 시작은 이야기, 그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인물이다. 어떤 인물과 이야기를 포착하느냐, 그것이야말로 장르와 기술에 앞서는 영화의 본질이다. 말 그대로 장르와 기술은 '거들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