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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보는옆집개 Feb 12. 2021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스타일과 이야기, 너와 나의 '느낌' 그 사이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는 범죄/액션 영화다. 이런 장르의 영화들을 보러 극장에 들어갈 때 관객들은 역동성, 몰입감, 액션의 쾌감 등의 기대를 하기 마련이다. 잔잔하고 서정적인 범죄/액션 영화를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앞서 말한 기대들은 다양한 요소로 충족될 수 있다. 배우들의 연기, 실감 나는 촬영과 리드미컬한 편집 등. 하지만 이러한 요소들이 제대로 힘을 발휘할 때에는 영화의 이야기 자체가 역동적으로 구성되어 있을 때이다.  

 로버트 맥키는 대부분의 장르 영화에서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게 해주는 주요한 사건을 '도발적인 사건'이라 칭하며, 그 사건은 주인공의 삶의 균형을 급격하게 뒤흔들어놓는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한 예시는 일일이 적을 수도 없이 많다. 가령 <해리 포터> 시리즈는 이모네 계단 밑 골방에서 살던 해리에게 마법 학교 입학 편지가 오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이러한 도발적인 사건에 대해 주인공은 어떤 식으로든 반응하는 동시에 욕망을 가져야 한다. 입학 편지를 받은 해리가 '마법 학교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욕먹기 전에 아침밥이나 차려야지'라며 편지를 구겨 버렸다면 영화는 시작될 수 없다. 편지를 받기 전까지 해리는 친구도 하나 없고 이모 부부에게 무시받고 살았다. 현실에서 불행했던 해리가 마법 학교 입학 편지를 받음으로써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고 싶다는 욕망이 작동했기 때문에 7편에 이르는 대장정이 시작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해리에게 찾아온 호그와트 입학 편지는 '도발적인 사건'의 좋은 예시다. (사진 출처: 다음 영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역시 도발적인 사건과 함께 영화가 시작된다. 전직 국정원 특수 부서에서 살인 훈련까지 받았던 인남(황정민). 부서가 해체된 후 인남은 일본으로 건너가 청부 살인을 하는 킬러가 되어 살고 있다. 그는 마지막 살인을 끝으로 은퇴한 후 파나마로 떠나 살기로 결심한다. 그의 마지막 타깃은 일본 관동 조직 도쿄 지부장 고레다(토요하라 코스케). 무사히 그를 제거한 인남은 1주일 후 파나마로 떠날 계획이다.  

 이때 오래전 연인인 영주(최의서)가 죽었으며 그의 딸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살인과 보복으로 점철된 인남의 일상은 타인이 보기에는 지옥이겠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균형 잡힌 일상이다. 게다가 은퇴 후 평온한 삶에 대한 기대까지. 이때 영주의 죽음 소식과 함께 그 균형이 무너지는 것이다. 이렇게 영화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영주의 죽음과 딸의 실종은 인남에게, 인남이 마지막으로 죽인 고레다의 죽음은 그의 동생 레이(이정재)에게 도발적인 사건으로 추후 영화에서 각 인물들이 움직일 수 있는 첫 동력을 제공한다.   

청부 살인을 그만두고 파나마로 떠나려 하는 인남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인남의 연인이었던 영주는 사실 국정원의 특수 부서가 사라지면서 부서장이었던 김춘성(송영창)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태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부서의 폐지와 함께 완전히 사라져야 할 인남은 영주가 모르는 곳으로 떠나고, 영주는 뱃속의 아이와 함께 한국을 떠나야 했던 것이다. 딸 유민(박소이)과 방콕에서 잘 지내던 영주는 부동산 투자에 바빠 잠시 보모에게 유민을 맡긴다. 그 보모가 유민을 납치하고 끝내 영주도 살해당한 것이다.
 영주의 시신을 인도받은 인남은 그녀에게 아이가 있다는 사실도 이때 처음 알았다. 아마도 자신의 딸일 것이다. 때문에 인남은 방콕으로 향해 살아있을지도 모르는 유민을 찾기 시작한다. 알고 보니 영주는 투자를 빌미로 접근한 사기꾼에게 당한 것. 그 사기꾼은 영주의 투자금을 빼돌리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딸 유민을 납치하고, 일이 더 커져 영주는 살해당하고 유민은 아이들의 장기를 매매하는 조직에게 넘어간 것이다. 이후 인남은 성전환 수술을 위해 태국에 살고 있는 유이(박정민)의 도움으로 유민을 찾아 나선다.
 마찬가지로 레이는 인남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일본에서 인남에게 일을 주며 고레다 살해를 주선한 재일 조선인 시마다(박명훈)를 죽이고, 그에게서 알아낸 정보를 토대로 인천으로 향해 김춘성을 찾아 살해한다. 이 과정에서 유민이 방콕에서 실종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인남이 거기에 있으리라는 직감으로 곧바로 방콕으로 향한다. 이렇게 인남은 유민을 찾아, 레이는 인남을 찾아 서로 쫓고 쫓기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유민을 찾는 인남과, 인남을 쫓는 레이의 만남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이후의 장면들은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 쫓고 쫓기는 추격씬과 남자들의 결투 액션, 그 내용이 진부해서가 아니다. 여기에 충분히 글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정도로 이 영화는 스타일적으로 빼어나며 배우들의 연기와 캐릭터 형성이 압도적이었다. 그야말로 훌륭한 시청각적 경험의 향연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굳이 글이라는 또 다른 매체로 옮겼을 때 직접 영화를 경험한 것에 한참 못 미칠 것이라는 생각이다.

 뛰어난 영화적 표현들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지점들이 있는데, 바로 '이야기적 근거'다. 예를 들어 이 영화에서 방콕은 노랗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말 그대로 노란색이 강조된 영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쿄나 인천 등 다른 장소는 주로 파란색이 기본 색감을 이뤘다면 방콕에서의 모든 장면들은 노란색을 기반으로 처리된 것이다. 이 때문에 방콕의 후텁지근한 날씨나 분위기를 느끼게 해주는 동시에 상대적으로 냉철했던 인남이 딸을 찾아가며 감정적으로 변하는 상태가 더 잘 드러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야기적으로 '왜'라는 질문을 던져보면 그 답을 찾기는 어렵다. 바로 앞 문단에서 방콕의 날씨, 인남의 감정 등을 표현하기에 적절하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반문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이야기적'이라고 다시 물었던 것이다. 왜 그 정도로까지 표현의 근거를 찾아야 하냐고 물을 수도 있다. 칮고 싶다. 왜냐하면 그 노란색은 보통 노란색이 아니라 장면을 지배할 정도로 강렬하고 의도적으로 사용된 노란색이기 때문이다.  

 장면의 전반적인 색감 구성을 이야기적으로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선택했던 영화들도 있다. 대표적으로 <매트릭스>가 이에 해당한다. <매트릭스>는 기계가 인류를 지배하기 위해 구성해낸 가상의 '매트릭스'와, 거기에서 탈출해 기계와 맞서 싸우는 인간들이 사는 실제 현실의 두 세계를 바탕으로 펼쳐지는 영화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 영화는 가상의 매트릭스 세계를 초록색으로 처리함으로써 현실과 구분을 지었다. 그 유명한 타이틀 시퀀스부터 초록색 숫자들이 쏟아졌지 않은가.

초록색으로 표현된 '매트릭스' 안의 세계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사실 색감을 먼저 언급한 이유는 영화 전반적으로 색감을 비롯한 여러 표현 방식들은 좋았지만 내용, 즉 이야기가 아쉬웠기 때문이다. 촬영, 편집 등 영화의 전문적인 영역까지 들어가서 풀어내기에는 내 지식이 모자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지식이 충분하지 않은 나로서도 이 영화를 즐기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을 정도로 이 영화가 제공하는 시청각적 즐거움은 뛰어났다. 그러한 시청각적 즐거움의 근거를 이루는 이야기의 구성이 탄탄할 때 그 즐거움이 배가될 수 있지만 이 영화는 그러지 못한 아쉬움이 남았던 것이다.

 가장 아쉬운 점은 인남에 대한 정보가 영화를 한 번 보고는 충분히 모아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단지 부서 하나 사라지는 것인데 인남이 외국으로 도피만 하면 됐지 왜 자꾸 사람들이 인남을 죽이려 했는지, 인남은 왜 청부살인으로 먹고살아야 했어야 하는지, 그리고 왜 이제는 더 이상 하고 싶어 하지 않는지, 이런 지점들은 여전히 의문이다. 이처럼 인남이 어떤 사람이고 그가 사는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잘 알 수 없기 때문에 영주의 죽음과 딸의 실종으로 그가 어떤 변화를 맞이하게 되는지를 직관적으로 알기 어렵다.

 게다가 딸의 실종과 연인의 죽음에 대한 인남의 반응도 절제되어 표현되어있다. 헤어진 연인이 자신의 아이를 출산하고 키우고 있었다는 사실은 소위 말하는 '신파'로 영화가 흘러가기 쉬운 요소다. 이를 우려해서일까 아니면 살인이 직업인 인남의 성격을 표현하기 위해서였을까, 영주의 죽음과 딸의 존재를 알게 된 인남은 크게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는 것으로 그려진다. 이 자체로는 좋은 선택이었을지 모르겠지만, 인남에 대한 정보 부족과 합쳐지며 이후 인남의 행동에 대한 동기를 찾는 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태국에서 딸 유민을 구출한 인남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주요 인물인 레이에 대한 정보도 부족했다. 레이가 고레다와 형제이며, 사람의 배를 산채로 가르는 무시무시한 사람이라는 것이 '그 백정 놈?' 등의 대사를 통해 전달될 뿐이다. 이 정도의 주요 인물이라면 장면을 할애해 해당 정보들을 풀어냈어도 좋지 않을까? 마치 <죠스>에서 죠스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초반에 장면으로 보여주지 않고, '저 멀리 바다에 죠스가 나타났는데 사람들을 무지막지하게 물어 죽인대요!'라고 대사로 풀어낸 후 후반부에 죠스의 잔인한 모습이 나오게끔 한 것과 같다고나 할까.
 또한 인남이 고레다를 죽이는 첫 장면에서 고레다를 설명하는 대사는 '이 자의 손에 죽은 여자들이 한 둘이 아니다'라고 한다. 이 대사는 고레다를 영화 내적으로 유의미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누가 왜 고레다 살인을 청부했는지, 왜 인남이 그 일을 맡아야 했는지 등을 풀어내다 보면 자연히 레이와 고레다 그리고 인남과의 관계도 설명되지 않았을까. 그 과정에서 인남은 왜 청부살인을 해야 하는지, 왜 그만두고 싶어 하는지도 그려졌을지도 모른다.

 사실 홍원찬 감독이 나홍진 감독의 수작 <황해>, <추격자>의 대본 작업에 참여했다는 사실 때문에 '이야기'에 대한 기대가 커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나 스스로가 영화를 볼 때 '이야기'를 가장 중요한 지점으로 두고 있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액션 영화니까 이야기는 중요하지 않아'라는 말에는 동의하고 싶지 않다.

  <아저씨>는 태식(원빈)이 소미(김새론)를 만남으로써 감정적인 교류를 나누는 '인간'이 되는 이야기가, <본 아이덴티티>는 삭제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제이슨 본의 이야기가, <매트릭스>는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질문을 담고 있는 이야기가 튼튼한 바탕을 이루고 있다. 그랬기 때문에 이 영화들의 빼어난 영상미와 액션 영화만이 줄 수 있는 영화적 즐거움이 빛을 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고민을 하다 보니 제목에 대한 고민까지도 이어진다. '악에서 구하소서'는 그리스도교 종파들이 공유하고 있는 주기도문의 마지막 구절이다. 해당 기도문은 신에게 많은 소망들을 잔뜩 요청하는 내용이다. 신의 뜻이 땅에서 이뤄지며, 일용할 양식을 주시며, 죄를 용서하시며 등등. 그 끝에 오는 요청이 '악에서 구하소서'다.

 지금 생각해보니 '다만' 악에서 구해달라는 이 영화의 제목은 기도의 앞부분에서 청한 것들이 다 이뤄지지 않아도 괜찮으니 다만 악에서만큼은 구해달라고 말하는 듯하다. 유민만이 살아남는 마지막 장면을 생각해보면 다만 이 아이만큼은 살려달라는, 아이를 팔아 돈을 벌려는 악으로부터, 그리고 아버지 자신이 저지른 수많은 살인과 죄악으로부터 이 아이만큼은 살려달라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다시 '도발적인 사건'으로 돌아와 보자. 도발적인 사건이 나올 적절한 타이밍을 위해 로버트 맥키는 다음의 질문을 던진다: "관객들이 완전한 반응을 보이게 하기 위해서는 주인공과 그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어야 하나?" 중요한 것은 전개 부분에서 이와 관련된 정보를 모두 줄 필요는 없다는 사실이다. 영화가 펼쳐지며 인물과 그 세계에 대한 정보는 충분히 전달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가 꽤나 진행된 이후에도 주요 인물과 그 세계에 대해 알 수 없는 부분이 많이 남아 있다면 도발적인 사건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며, 영화가 끝나고도 여전히 의문에 부쳐지는 부분이 많다면 영화 전체의 의미가 정리되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이 제목의 의미도 영화를 보는 도중이 아니라 이렇게 글을 쓰는 과정에서 징리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관객들이 이야기 속의 인물들과 그들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반응하는 바로 그 순간이 도발적인 사건이 일어나야 하는 순간이다. 이보다 한 장면 빨라도 안 되고 한 장면 늦어도 안 된다. 그 정확한 순간을 얻기 위해서는 정확한 분석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작가의 느낌이다." (로버트 맥키, <STORY: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 고영범, 이승민 옮김, 민음사, 2015, p.300)


 무책임한 말일지도 모르겠다. '작가의 느낌'이라니. 그런데 이 말만큼이나 정확한 말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좋은 이야기, 좋은 영화를 만드는 '공식'이란 것은 없을테니 말이다. 그리고 이 영화 역시 작가가 자신의 느낌으로는 도발적인 사건을 던질 만한 충분한 타이밍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다만 그 느낌이 관객 중 한 명인 나의 느낌과 만나지 못했을 뿐이다. 영화를 만들고 경험하는 데에 정답이란 없다. 만드는 이와 보는 이의 느낌이 만나는 그 지점, 그 모호하고 불확실한 지점을 향한 알 수 없는 모험이야말로 영화의 본질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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