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를 받아들이자 열린 세상
추위 속에서 떠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는 법을 배운다. 겨울바람 속에서 춥지않다고 우기며 벌거벗고 다니는 게 더 우스운 일을 뒤늦게 깨닫는다. 강풍 속에서 내가 옷을 벗어야 할때는 나보다 더 추위에 떨고 있는 이에게 옷을 벗어줄 때뿐이다. 조금 덜 추운 사람이 더 추워하는 사람에게 옷을 내준다. 얼어붙은 손을 잡고 튼 살을 호호 불어 녹여준다. 어린아이가 넘어져 우는 게 전혀 이상할 일 없는 것처럼 두려움도 아픔도 자연스러운 일임을 받아들인다.
혼자서 신이 되려 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초월하기 전에 먼저 나를 받아들이는 연습을 한다. 내가 누구인지 묻고, 내 주변을 한번 더 돌아본다. 문 밖에서 문 열어 달라 애원하는 사람을 그냥 보내지 않는다. 겨울이 두려워 빗장 걸어놓았던 문을 조심스레 연다. 나와 똑같이 추위에 떨고 있는 사람이 문 앞에 서 있다. 문을 열어 불이 필요한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마지막 남은 뜨거운 커피를 나누어 마신다. 내가 들여온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다. 희미하게 흔들리는 불씨를 앞에 두고 마지막 남은 온기를 함께 나눈다. 사실 눈앞의 불씨보다 내 옆에 앉은 사람의 체온이 더 따듯하다. 그래서 추위에 감각이 마비된 손을 붙들어 잡는다. 살과 살이 닿아 꼭 껴안고 있는다. 눈물을 삼키는 법이 아니라 목놓아 우는 법을 배운다. 내 옆에 눈물을 닦아줄 사람이 있음을 위안으로, 마지막 응어리까지 뱉어내도록 축적되어온 응어리를 토한다.
두려움에 떨면서도 내 옆에 따스한 온기가 내가 아직 살아있음을 상기시킨다. 눈앞의 휘청거리는 불씨에 장작을 보탠다. 화르르 타오르지는 않아도 은은한 불빛이 고요히 어둠을 밝혀준다. 아직 살아있음을 느낀다. 춤추는 불꽃에 내가 비친다. 타닥타닥 타는 장작 속에 검게 그을려 춤을 추는 내가 있다. 불꽃은 결코 춤을 멈추는 법이 없다. 마지막 꺼져 죽어가는 순간까지 나는 살아있다고 온몸으로 표현을 한다. 꼬챙이에 옮겨 붙은 불씨도 쌔액쌔액 숨을 쉬고 있다. 숨넘어 갈듯한 호흡으로 어둠을 밝힌다. 자신의 마지막 남은 온기를 나누어 준다. 장작나무와 하나가 되어 기꺼이 남을 위해 발산하는 빛이 된다. 불꽃 속에 내 옆에 있는 이의 그림자도 들어온다. 어느새 솔로무대는 듀엣으로 바뀐다. 나 혼자서는 너무나도 컸던 무대가 조금은 더 아늑해진 느낌이다. 눈 앞의 텅 비었던 관중석도 사라졌다. 더 이상 누가 지켜보느냐가 중요해지지 않는다. 우리의 호흡이다. 우리만의 무대다. 춤을 추다 못해 춤이 된다. 불꽃에 비친 그림자가 아닌 불꽃이 된다. 우주에 퍼지는 온기가 된다. 너무나도 크고 차가웠던 우주를 녹인다. 하나의 행성에 불과했던 무대를 벗어나와 마그마처럼 흘러내리는 우주 속을 휘젓는다. 녹아버린 우주에는 촘촘히 박힌 샛별과, 행성과, 운성들이 있다. 우주는 곧 레드카펫이 된다. 우리가 내딛는 걸음 걸음마다 별이 수놓인 카펫을 깔아준다. 오로지 우리만을 위해 재탄생한 우주다. 이제는 우리도 우주가 된다.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겨울 바다 속으로 걸어들어 갔었다. 신발을 벗어두고, 더 멀리 내다보며 나아가기 위해 살얼음이 낀 겨울 바다 위를 걷고자 했다. 신은 두려운게 없으니, 바다 위를 나홀로 걸어가야했으니. 자극이 필요했다. 발바닥 밑에서 전해오는 한기만이 나를 각성시키고 앞으로 나아가게했다. 그 차가운 겨울 바다를 건너며 그 어떤 두려움도 고통도 마비시키자 했다. 한걸음 한걸음. 아무런 생각도 감각도 없어질때쯤, 미련도 후회도 없이 영영 되돌아오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다가 나를 삼켜주기를 바랬다. 야속하게도 바다는 나를 삼키는 법이 없었다. 내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자신을 얼려 내게 길을 내어줄 뿐이었다. 그렇게 끝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바다를 따라 걸었다. 수십년이 지나, 수백년이 지나 눈물조차 바닥날때까지 나아갔다. 왜 나에게 길을 내어주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걷고 걷고 또 걸어도 원망의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 바다 위를 걷는 건 더 이상 내가 아니였다.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오고, 앞으로 계속 나아가기엔 도저히 끝이 보이질 않았다. 두려움도, 원망도, 불안도 모두 그대로였다. 수억시간이 지나도 달라진 건 없었다. 그제서야 발걸음을 멈췄다. 온몸에 힘이 빠져 눈이 스르르 감길때, 바다는 비로소 나를 거두어주었다.
바다의 품에 처음 안길 때, 물 속에서 바라본 하늘은 내가 항상 걷던 겨울의 모습이 아니었다. 수면 위에 일렁이는 햇살은 너무나도 간지럽고 따스워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기억을 깡그리 없애주었다. 따스함에 취해, 웃음에 취해 점점 더 깊숙히 바다의 품으로 파고 들어갔다. 절대로 헤어나가고 싶지 않은 품속에서 처음으로 어리광을 부리며 오래전에 말라버린 눈물을 또다시 터뜨렸다. 네 품안에선 괜찮았다. 바다인지 눈물인지 구분조차 안되었으니. 똑같이 짰고, 똑같이 투명하고, 똑같이 흐르는 액체였다. 내가 영문도 모르고 나아가던 발걸음을 멈추었을 때, 너는 비로소 나를 안아주었다. 그리고 말없이 나의 곁에서 눈물을 흘려주었다.
<말장난: 태어나버린 이들을 위한 삶의 방법론> 中 "수용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