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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넬의 서재 Oct 08. 2020

문제는 내일 세상이 멸망하지 않는다는 점이였다

죽을 힘을 다해 살아낸 하루가 잔인하도록 덧없었다 


문제는 내일 세상이 멸망하지 않는다는 점이였다. 우리는 내일 당장 죽을 것처럼 사랑하고 살아가라 들었지만, 그렇게 하루를 살아내고 나면 다음날 또다른 태양이 떠오른다는 것이 문제였다. 우리의 최선을 다한 하루 뒤에는, 사랑 뒤에는 드라마틱한 엔딩이 필요했다. 한편의 영화가 끝나듯 장엄한 노래가 퍼지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더이상 주인공들의 뒤훗날 이야기를 궁금해해서는 안됐다. 그것은 하나의 위대한 여정이 끝났음을 인정하는 세상의 존중과 침묵이였다. 하지만 삶에서의 끝은 그렇게 쉽게 일어나지 않았다. 질기고도 질긴 목숨은 죽음을 쉽게 허용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어렵게 살아내고 난 하루 뒤에는 너의 마지막 외침을 비웃기라도 하듯 오래된 태양이 떠올랐다. 지독히도 무관심하고 고집스러운 세상은 네가 함부로 주연이 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하루를 살아낸 너의 노력은 으레 당연한 의식에 불과했다. 네가 얼마나 울고 웃었던 어쨌든 세상의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유한했다. 


세상은 너를 위해 울지도, 시간을 늦추거나 멈추는 일도 없을 터였다. 네 삶이 비극이었다면 그 비극이 더이상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할 때까지 지구는 자전을 할 것이였고, 네 삶이 희극이였다면 네가 또다른 희극이나 비극을 마주할 때까지 해를 띄워보낼 것이었다. 네 삶이 정말 절박했다면 너는 다음날 다시 눈을 뜨면 안되었다. 죽을 힘을 다한 너의 일침에 세상은 마침내 너에게 영원한 평화를 허용해주어야했다. 허나 아무렇지도 않게 반복되는 하루 앞에 너는 매일같이 숨막히는 삶의 공포를 마주했다. 너무나도 쉽게 떠지는 눈꺼풀에 너는 아침마다 울부짖고 절망을 했다. 몸속의 모든 수분을 배출한듯 울어 제낀 후에도 너는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 끊어질듯 끊어지지 않는 숨결에 너는 허탈한듯 광기어린 웃음을 쏟아낸다. 울음과 웃음이 더이상 구분되지 않을때 너는 그 어떤 감정도 표출하기를 멈춘다. 단지 희미한 숨소리만이 너의 생존을 말없이 알린다. 풀린 눈으로 올려다보는 우주가 네 하찮은 몸뚱아리 위에 무너진다. 어쩌면 너는 저주받은 불사의 몸을 가지고 태어난게 아닐까. 그 어떤 절망속에서도, 그 어떤 시련속에서도 너는 살아남고야 만다. 그렇게 수천번의 지옥의 반복 끝에 너는 문득 죽을 힘을 다해 살아낸 하루가 잔인하도록 덧없음을 깨닫는다.


너의 적응은 어쩌면 비겁함이었으리라. 성장이란 맹목하에 상실과 망각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만다. 너는 뒤늦게 지독히도 혐오했던 너 자신을 누구보다 사랑했었음을 깨닫는다.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했던 영혼을 바로 네가 사랑했음을 깨닫는다. 자기애와 자기부정이 충돌을 한다. 역겹다. 사랑스럽다. 혐오스럽다. 아름답다. 수치스럽다. 소중하다. 수백번도 넘게 너를 껴안았다 내친다. 그 과격한 충돌사이에 너의 몸은 멍과 피로 번진다. 살갗이 찢어지고 얼굴이 부어오른다. 너의 하얗고 보드랍던 살갗은 어느새 검버섯이 일고 뼈만 앙상히 남은 노파의 것이 된다. 하지만 이미 잃어버린 어린 너를 그리워하지 않도록 한다. 어른도 아이도 아닌 어정쩡한 너는 떳떳하지 못한 성장에 죽여버린 어린 너를 위한 조촐한 장례식을 올린다. 죽음의 세례를 통해 어린 너의 영혼은 마침내 자유로워진다. 어린아이에게 어울리지 않았던 삶의 무게는 이제 어른아이인 내가 짊어지기로 한다. 버거웠던 삶의 무게에도 불구하고 잔잔히 읊는 추도문은 진부한 문장 몇이 적혀있을 뿐이다. 


특별한 한편의 극인줄 알았던 삶은 그렇게 사소한 몇문장으로 축약되었다. 소중하지 않았다. 대단하지 않았다. 그래서 언어를 버리고, 글을 버린다. 혀뿌리를 뽑고, 손가락을 잘라낸다. 귀를 잘라내고 두 눈알을 뽑아낸다. 두 번 다시 지나간 시간을 그리워 하지 않도록. 그리고 세상을 보지도 들을 필요 없도록. 병신이 된 몸으로 너는 세상앞에 나체로 서보인다. 마치 사과를 따먹기전 이브처럼. 슬픔을, 부끄러움을, 절망을 너는 모른다. 너의 성인식에 천둥번개가 치고 강물이 범람한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잘것 없던 너의 영혼에게 세상이 동정을 보인다. 그렇게 너는 세상에 너의 순결을 내준다. 허나 그마저도 순간일뿐, 세상은 이내 다시 잠잠한 제 모습으로 돌아간다. 세상은 여전히 무관심하고 사람들은 변함없는 하루를 시작한다. 이제 너는 순수함 대신 끔찍한 외로움이란 말을 처음 배운다. 가슴 깊이 각인된 외로움이 너의 평생 동반자 아닌 동반자가 될 것이었다.   


행복보다 절망이 더 쉬웠던 너는 그렇다면 더 어려운 길을 택하기로 한다. 행복해져보자. 외로움을 안고도, 세상의 끝자락에 서고서고 행복하자. 절망과 불안이 일상이었다면 감히 한번 행복해져보자. 유치찬란한 세상을 향한 복수는 아니다. 너의 행복은 너의 슬픔만큼이나 아무런 의미도 담지 못할 것이다. 단지 걸어보지 않은 길을 걷기로 한다. 별 생각없이 걷던 길위에서 몸을 틀어 방향을 바꾼다. 절망이 어째서 이상한 일이냐고 고개를 갸우뚱하던 너는 이제 절망을 깨고 나와야한다. 동굴 밖을 기어나온다. 오랜 시간 암흑에 익숙해진 동공이 처음보는 햇살에 반응을 한다. 그 찬란함을 감당할 수 없어 두 눈을 질끈 감아버린다. 절망보다 두려운 행복이다. 


햇살냄새가 숨막히고 높은 하늘이 너를 압도한다. 허나 이내 동굴 깊숙히 묻어놓고 온 어린 너의 시신을 생각해 다시 한번 세상을 향해 눈을 부릅떠보인다. 멀어버린 눈에서 눈물은 그칠 줄 모르지만 예전과는 다른 노래를 담고 흐른다. 세상의 빛에, 그리고 눈물에 너의 시야는 흐려졌지만 두 동공만은 지평선 너머를 날카롭게 응시한다. 알지 못한다. 행복이 무엇인지. 어떻게 행복해지는지. 단지 그것은 어릴적 동화속 요정마냥 상상의 존재는 아닐까 유추한다. 네가 들은 행복은 환상일지도 모른다. 단지 하나의 전설일지도 모른다. 손으로 만질수도, 귀로 들을수도 없는 행복을 어찌 잡을지 알 길이 없다. 그렇지만 세상 밖에 나와 와르르 무너지는 마음과 터져나오는 울음 속에서 너는 무언가 꿈틀거리는 것을 느낀다. 하나의 작은 생명을 발견한다. 




<말장난: 태어나버린 이들을 위한 삶의 방법론> 中 "성장" 발췌


모두가 한번쯤은 마주해야 할 깊은 무의식으로 떠나는 성장형 에세이. 숨겨두었던 기억 속 어둠을 의식 밖으로 끌어내어 내면의 아이를 자유롭게 해주는 치유의 여정. 태어나버린 모든 이들을 위한 서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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