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까지 해야겠냐? 그렇게 네 맘대로 하려면 집을 나가라”
대입시험에 실패하고 나니 꿈이 사라졌다. 아침편지로 유명한 고도원의 『꿈 너머 꿈』에 이런 내용이 있다. ‘의사가 되는 것이 꿈인 학생이 열심히 공부해서 의사가 되었다. 꿈을 이뤘지만 방황하게 된다. 의사가 되면 무엇을 할지 꿈 너머 꿈이 없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12년 동안 대학입학이 나의 유일한 목표였다. 수학교사가 되고 싶었지만, 그보다 대학입학이 더 중요했다. 그저 막연하게 대학을 간다면 수학교사가 되면 좋겠다는 희망 사항이 있을 뿐 그게 인생의 목표는 아니었다. 설령 수학교사가 되었다 하더라도 그 이후의 꿈은 없었다. 교사가 된 이후의 꿈 즉, 꿈 너머의 꿈이 있었다면 그렇게 쉽게 포기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꿈이 사라지고 방황하던 중 눈에 확 들어오는 신문 광고가 있었다. 편집디자인과 그래픽디자인 학생을 모집하는 디자인 학원의 광고였다. 무엇보다 수강료가 무료였다. 디자인을 접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무료로 배울 수 있다는 문구가 내 마음에 훅 들어왔다. 디자이너란 직업이 멋져 보이기도 했다. 배우고 싶었다. 일과를 마치면 아버지와 함께 퇴근하고 저녁상을 봐 드려야 하니 아버지 허락이 필요했다.
“아빠, 저 이거 배우고 싶어요. 무료로 가르쳐 준다는데 퇴근 후에 학원에 가도 돼요?”
“그래, 뭐가 되었든지 네가 하고 싶은 걸 해라.”
아마 아버지도 내가 대학에 가지 못한 걸 안타깝게 생각하고 미안한 마음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허락받은 그날, 퇴근 후에 바로 학원으로 달려가서 수강 신청을 했다. 준비물이 적힌 안내문과 광고 관련 분야의 자격증 취득에 필요한 책을 몇 권 받았다. 문구 도매상에서 와트만지 스케치북과 4B연필, 잠자리가 그려있는 미술용 지우개인 톰보우 지우개를 샀다. 전 과정을 수료한 후에 어떤 일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디자이너가 된다는 기대감으로 가슴이 콩닥거렸다. 새로운 도전에 대한 두려운 마음과 설레는 마음이 동시에 있었다.
당시에는 모든 것을 수작업으로 했다. 첫 시간에 4B 연필로, 선 그리기를 연습했다. 가로, 세로로 직선을 그리고 스프링 같은 곡선을 연습한 후에 간단한 사물을 드로잉 했다. 가장 먼저 공을 그렸다. 다음으로 커터 칼을 그렸는데 잘 그렸다고 칭찬받았다. 갑자기 대단한 화가라도 된 듯 우쭐하며 어깨가 쓱 올라갔다. 두루마리 휴지를 몇 칸 잘라서 그리는 숙제가 있었다. 이번에는 두루마리 휴지가 아니라 밀가루 반죽 같다는 평을 받았다. 때로는 칭찬받고, 때로는 핀잔도 받았지만, 모든 것이 그저 재미있었다. 무료라는 것에 혹해서 시작했는데 한 달이 지나니 정부 정책이 바뀌어서 수강료를 내야 한다고 했다. 약간 기분 상했지만, 이미 발을 뺄 수 없을 정도로 편집디자인에 푹 빠져 있었다.
수강료를 내면서 주경야독으로 1년 동안 다녔다. 그림을 그리는 것 자체가 재미있었고, 서툴지만 콘텐츠를 완성할 때마다 성취감이 컸다. 강사님이 과제를 주시면 듣는 즉시 어떻게 할지 아이디어가 떠올랐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빠르게 완성할 수 있었다. 편집디자인에 푹 빠져서 밤새워 그림을 그렸다. 그림 도구를 사기 위해 남대문에 있는 아톰 문구와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동인천에 있는 대형 문구점에 다니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수업에 도움이 되는 카탈로그와 샘플을 모으기 위해 백화점마다 돌아다녔다.
그렇게 의욕 넘치는 1년을 보낸 후 학원에서도 실력을 인정받았다. 전 과정을 마치고 취업 준비를 하던 중, 당시 인천에서 제일 큰 광고회사에 면접을 보라는 강사님의 전화를 받았다. 나는 뛸 듯이 기뻤고 날아갈 것 같았다. 드디어 내 앞날에도 쨍하고 해 뜰 날이 오는 것 같았다. 그날 낮에 아버지에게 면접 보러 가겠다고 말씀드렸다. 당연히 같이 기뻐해 주실 줄 알았는데 취업을 반대하셨다. 강사님께 면접 본다고 이미 약속했기 때문에 취소할 수 없다고 우겼더니 그렇게 하고 싶으면 해 보라고 허락해 주셨다.
새벽까지 분주하게 포트폴리오를 준비했다. 아침에 집을 나서기 전 주무시는 아버지를 깨워 다녀오겠다고 인사했는데 “그렇게까지 해야겠냐? 그렇게 네 맘대로 하려면 집을 나가라”라고 하시며 또다시 면접을 못 보게 하셨다. 엄마까지 나서서 아버지를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너 하고 싶은 것 해라”라고 먼저 말씀하셨고 내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옆에서 지켜보신 아버지가 반대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대학을 가지 못한 상처가 아직 아물지도 않았는데, 또 다른 미래마저도 사라지는 것 같아 미칠 것 같았다. 내가 꿈꾸던 일들이 하나씩 모두 짓밟힌 기분이었다. 나의 인생도 짓밟힌 기분이었다.
그 일로 아버지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넘을 수 없는 높은 벽이 내 앞을 가로막는 것 같아서 상실감이 컸다. 숨을 쉬는 것조차 힘겨웠다. 사는 게 지옥 같았다. 음식물을 삼키기도 힘들었다. 억지로 삼켜도 소화가 안 되어 며칠 죽을 먹었다. 소화불량은 갈수록 심해지고 속이 쓰려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병원에서는 신경성 위장염이라고 했다. 두 달간 병원에 다니며 원장님의 권유로 수영을 배우기도 했지만, 울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무엇으로도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사라지지 않았다. 미약하게 가지고 있던 자존감마저 나락으로 떨어졌다. 무기력하게 또다시 아버지 밑에서 일해야 했다.
면접 반대 사건 이후로 모든 게 더 나빠졌다. 일이 풀리지 않을 때마다 모든 문제를 아버지 탓으로 돌리고 원망하기 시작했다. ‘그때 나를 놓아주었더라면 다른 삶을 살 수 있지 않았을까?’ 나는 가보지 않은 그 길을 늘 동경했다. 내가 걸어온 길보다 더 나았을 거라는 생각에 이십 년 동안 아버지를 미워하는 마음만 키우며 살았다. 지나온 삶에서 후회되는 것 중 해본 것에 대한 후회는 얼마 되지 않는다. 대부분은 내가 해보지 못한 일들에 대한 후회였다. 나는 지금도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일단 해보라고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생의 어느 시점에서 분명 후회한다는 걸 경험을 통해 배웠기 때문이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는 나도 너무 어렸다. 미워하는 마음만 가득 차서 너무 모질게 했던 내 모습에 아버지께 미안해진다. 내가 받은 상처가 너무 깊어서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릴 경황이 없었다. 아니 그 마음이 어떨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했으니 아버지가 상처받았다고 상상할 수 없었다. 그 일로 내가 온 힘을 다해 끊임없이 아버지를 미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상처받으셨을지 가늠하기 어렵다. 아버지도 나와 같은 무게로 상처받지 않았을까? 언제나 내 생각을 존중해 주는 분이었는데 그때는 왜 그랬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나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그렇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지나간 시간은 잃어버린 지갑과 같다. 모든 걸 새로 만들어야 한다. 아무리 후회해도 돌이킬 방법은 없다. 이십 대, 나의 삶을 살고 싶었지만, 삶은 나의 소망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그 미움은 누그러지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한 모든 책임이, 과연 아버지에게만 있는 것일까? 아니다. 나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아도 되는 좋은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환경이 중요하지만, 그것에 반응하는 것은 나의 몫이다. 안 좋은 일은 모두 아버지 탓이라고 우기며, 그 뒤로 숨기에 급급한 내 모습을 보았다.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것은 모든 부모의 마음일 것이다. 나보다 내 자녀가 더 예쁘기를, 나보다 더 인정받는 사람이기를, 나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가기 원한다.
‘타라 웨스트오버’의 자서전적 에세이 『배움의 발견』에서 묘사한 그녀의 아버지는 완고하고 융통성이 없으며 가족에게 독불장군이다. 자신이 다 옳다고 생각하며 가족들에게도 그 생각을 강제로 주입시키는 독재자였다. 그런 주인공의 아버지가 자녀들이 선택한 길이, 본인의 생각과 다른데도 불구하고 묵묵히 보내준다. 타라의 아버지도 자식을 위해 그의 욕심을 양보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면접 보는 걸 반대하신 이유를 나는 아직도 모른다. 다만 내가 잘못되기를 바란 것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신한다. 서로에게 씻을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긴 사건이지만, 우리 아버지도 나보다 더 나를 생각하지 않았을까?라고 짐작할 뿐이다. 당시에 그 선택이 아버지에게는 최선이었을 것으로 추측해 본다.
정확한 이유를 물어봐도 지금은 답을 들을 수 없다. 다만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고 내 등 뒤에서 고목나무처럼 서서 나보다 더 마음 아파하고 눈물 흘리셨을 아버지가 보일 뿐이다. 내 아이를 키우며 아버지의 애달픈 그 마음이 느껴진다. 그때는 느껴지지 않던 마음이 내가 아버지 나이 정도가 되어서야, 그 마음이 느껴진다. 용서라는 말이 맞을지 모르겠지만, 뒤늦게라도 이제 그렇게 놓아드리고 싶다. 이유를 몰라도 상관없다. 아버지가 세상 누구보다 더 나를 사랑하고 아꼈다는 것이 중요하다. 먼 길을 돌아왔지만, 아버지, 나도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좀 더 일찍 용서하지 못하고 평생 마음 아프게 해서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