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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엠은주 Mar 03. 2023

꿈을 이루다

아버지의 반대로 편집디자인 배운 것을 한 번 써보지도 못하고 결혼했다. 결혼 후 바로 아이가 생겨 취업은 더 멀어졌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나는 편집디자이너의 꿈을 놓지 않았다. 디자인 학원에 같이 다니며 친하게 지내던 동생 C가 그쪽 분야에서 일하고 있어서 더 그랬다. 편집디자인 책을 사서 혼자 연습했다. 아이가 먹고 버린 과자 봉지에 쓰인 과자 이름을 오려서 레터링 연습을 했다. 잡지의 그림을 오려서 여기저기 붙이며 전단지를 만들어 보기도 했다. 이렇게 만든 결과물을 모아서 나만의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두었다. 기회가 되면 언제든지 면접을 보기 위해서였다. 


나름대로 열심히 노하우를 쌓아가고 있던 어느 날 C가 전화를 했다. “언니, 우리 사장님이 나보고 컴퓨터학원 다니래. 매킨토시 컴퓨터를 사주신대. 우리 회사도 이제 컴퓨터로 책 만든대.” 내가 혼자 사부작거리며 연습하는 중에 시대가 변해 수작업에서 컴퓨터 디자인으로 넘어갔다. 그동안 연습했던 것이 무용지물이 되는 순간이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 같았다. 그동안 투자한 시간과 돈이 아까웠다. 그뿐 아니라 내 노력이 물거품 되어버려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좌절하며 포기하기엔 편집디자인을 향한 나의 열망이 너무나 컸다. 매킨토시를 배우기로 하고 당장 컴퓨터학원에 등록했다. 매킨토시에서 사용하는 편집 프로그램인 ‘쿽’을 배웠다. 매킨토시로 처음 컴퓨터를 접했다. 컴퓨터란 기계는 만만한 대상이 아니었다. 저장한 파일이 어디 있는지 찾지 못하고, 새로운 ‘서류 파일’ 하나 만드는 것도 어려웠다. 학원에서 배우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매킨토시 OS와 쿽을 배울 수 있는 책을 샀다. 그러나 문제는 집에 컴퓨터가 없으니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큰돈을 들여 매킨토시 컴퓨터를 샀다. 언제 취업할지, 취업할 수나 있을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컴퓨터를 먼저 산 것이다. 나 같은 쫄보가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다. 이루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으면 없던 용기도 생기나 보다.


아들을 어린이집에 보내고 혼자 있는 시간 대부분을 컴퓨터와 씨름하며 보냈다. 쿽을 배우고 일러스트, 포토샵을 배우며 편집디자이너의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준비했다. C가 다니는 회사가 바쁠 때는 간단한 워드나 일러스트로 지도 그리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간간이 실무를 접하기도 했다. 언제 기회가 올지 모르지만 조금씩 준비하고 있었다. 지루한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컴퓨터까지 배우고 나니 취업하고 싶은 마음은 더욱 간절했다. 


취업도 못했는데 IMF사태가 발생했다. 이때 남편이 하던 일을 접으면서 빈털터리가 되었다. 남편이 퇴사한 후, 계획했던 일이 모두 어긋나고 생각하지 못한 어려움이 눈앞에 닥쳤다. 남편은 소규모 회사에 취업했지만, 월급은 생활비에 턱없이 부족했다. 아들의 어린이집 원비마저 밀리기 일쑤였다. 가진 것이 없기에 담보대출을 받을 수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보험을 하나씩 해약했다. 그래도 부족한 생활비는 현금서비스를 받아서 충당했다. 빚이 늘어가니 불안했다. 회사마다 긴축재정에 들어가서 인력을 줄이는 마당에 전문적인 기술도 없고 내놓을만한 경력도 없는 내가 취업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웠다. 더구나 아이가 어려서 ‘파트타임’으로 일해야 했다. 벼룩시장을 펼쳐놓고 여기저기 문을 두드려 보아도 소득이 없었다.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기에 그림 색칠해주는 부업을 신청했다. 구슬을 꿰어서 인테리어 소품 만드는 부업도 했었다. 둘 다 소득 없이 가입비만 날렸다. 영업은 자신이 없어서 아이들 학습지 배달하는 쪽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영업을 겸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알고 있는 대기업에서 배달사원 모집 공고하는 것을 보았다. 영업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여 면접을 보러 갔는데 사실과 달랐다. 영업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 것은 미끼였다. 잔뜩 풀이 죽어 집으로 돌아왔다. 미래를 생각하면 한숨만 나왔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하며 지내던 어느 날 C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언니, 취직할래? 우리 회사랑 같은 일 하는 곳이야. 그 회사 여직원이 퇴사한다고 사람 구해달라는데, 언니 얘기해볼까?”

“응, 당연히 해야지. 잘 말해줘.”


지역광고 책자 만드는 회사에서 구인모집 한다는 것이었다. 드디어 꿈에 그리던 디자이너의 꿈이 코앞까지 왔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한참 동안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취업이 확정된 것도 아닌데, 이미 마음은 그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원고를 보며 시안 작업을 하는 멋진 커리어 우먼이 그려졌다.


일주일 후 나는 상상이 아니라 실제로 디자이너가 되었다. 선임자에게서 인수인계를 받았다. 취업한 회사는 일 년에 세 권의 책자를 발행했다. 3월에 인천지역, 6월에 검단・김포지역, 10월에는 인천・경기지역 업체들의 광고를 실어주었다. 그중 6월에 발행되는 책이 가장 얇고 난이도가 낮았다. 그 책 편집하는 과정을 인수인계 받았다. 책이 얇아서인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다음은 인천과 경기지역 전체가 대상이다. 책 두께도 전보다 4배나 더 두꺼웠다. 회사에서 중요하게 생각하고 매출도 가장 큰 책이었다. 이 책을 발행하여 육 개월을 버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지난번 책을 쉽게 발행한 탓에 이 책도 만만하게 보았던 것이 큰 실수였다. 책이 두꺼워지니 본문 편집하는 게 무척이나 까다로웠다. 예정보다 늦게 발행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오타가 너무 많았다. 발행된 책을 휘리릭 한번 훑어보는데, 잘못된 부분이 눈에 쏙쏙 들어왔다. 전화번호가 틀리면 광고비를 받기 어렵다. 광고주가 손해배상을 청구하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다.


책이 발행되고 2주 동안 집중적으로 수금을 했다. 예년에 비해 매출이 반 토막 났다. 나는 몸 둘 바를 몰랐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동안 풀이 죽어 지냈다. 회사에 엄청난 손해를 끼쳤기에 퇴사할 각오까지 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장님의 배려로 계속 일할 수 있었다. 신고식을 혹독하게 치른 후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일에 집중했다. 오타를 줄이기 위해 꼼꼼하게 교정을 보고 또 봤다. 오타가 하나도 없이 책을 발행했을 때의 기쁨과 자부심은 말할 수 없이 컸다. 편집디자이너로 인정을 받으며 즐겁게 일했다.


토스카니니는 이탈리아 출신으로 역사상 최고의 지휘자 중 한 사람이다. 그가 처음부터 지휘자를 꿈꾼 것은 아니다. 그는 첼로 연주자였다. 선천적으로 시력이 많이 안 좋았던 그는 보면대 위의 악보를 보고 연주할 수 없었다. 악보가 보이지 않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기에 연주하기 전에 미리 악보를 외웠다. 아무리 까다롭고 복잡한 악보라도 통째로 외워서 연주했다. 1986년 6월 30일, 토스카니니는 로시 오페라단의 첼리스트로 브라질 공연에 참여했다. 공연작은 베르디의 ‘아이다’였다. 리허설 도중에 지휘자와 오케스트라 사이의 마찰로, 지휘자가 몸이 아프다며 퇴장해 버렸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당황한 연주 단원들은 ‘아이다’의 악보를 다 외우고 있는 토스카니니를 지휘자로 추천했다. 애송이가 지휘 단상에 올라서자 관객들이 야유를 퍼부었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보면대 위의 악보를 덮고 공연을 시작했다. 공연이 끝났을 때 객석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얼떨결에 대타 지휘를 맡았으나 실패로 끝날 뻔했던 공연을 성공리에 마쳤다. 평소 악보를 모두 외우는 습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기회와 운은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아무나 그 기회를 잡는 것은 아니다.

기회와 운이 좋은 사람은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기회는 준비된 자만이 잡을 수 있다. 토스카니니가 그런 경우다. 악보를 잘 볼 수 없을 정도로 시력이 좋지 않다는 것은 음악가로서 치명적인 결점이다. 그러나 거기에 굴하지 않고 악보를 모두 외워 암보로 연주하는 습관이 있었기에 지휘자로 발돋움할 기회를 잡았다. 나 역시 편집디자이너가 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포기하지 않고 꿈을 이루기 위해 준비했다. 그리고 어느 날 우연히 찾아온 기회를 잡고 지금까지 그 일을 하고 있다. 기회는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준비된 자만이 우연히 찾아온 기회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 내가 포기하려는 그 순간, 한 발자국만 더 앞으로 나가면 성공이 기다리고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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