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조상 묘를 이장하여 한 곳에 정리하는 데에 3년이 걸렸다. 산소 주변에 깔아 놓은 잔디가 뿌리 내리고 자리 잡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8월 초, 산소에 잡초가 무성하여 잔디가 죽게 생겼다는 현지인의 연락을 받고 부모님과 남동생 가족이 고향으로 내려갔다. 금요일 밤에 출발하여 토요일 아침 일찍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다는 계획이었다.
토요일 아침, 나는 출근하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탔다. 핸드폰이 울렸다. 친정엄마였다.
“여보세요”
엄마는 말없이 울기만 했다.
“엄마 무슨 일이야? 왜 그래?”
아무리 물어도 묵묵부답이고 흐느끼는 소리만 들렸다. 뭔가 큰 사달이 난 게 분명했다. 온갖 못된 상황이 떠올랐다. ‘어린 조카들이 심하게 다쳤나? 넘어져서 눈을 다쳤나? 큰 사고가 났나?’ 그때까지만 해도 조카들에게 큰 탈이 난 줄 알았다.
“엄마, 울지 말고 말해봐. 뭐 때문에 울어?”
“아빠가 쓰러졌다. 네 동생이 119 불러서 함께 타고 병원으로 갔다.”
그렇게만 말하고 엄마는 전화를 끊었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자세한 얘기를 들을 수 없었지만, 한여름이었기에 일사병으로 잠시 정신을 잃은 것으로 생각했다. 병원에 가서 안정을 취하면 금방 깨어날 줄 알았다. 나는 크게 걱정하지 않고 출근했다. 아버지가 빨리 정신을 차리고 회복하도록 기도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출근하여 자리에 앉자마자 섬기고 있는 교회의 지인들과 친구에게 중보기도를 요청했다. 나도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오전 열시쯤 다시 엄마한테서 전화가 왔다.
“뭐라고!”
“아빠 돌아가셨어…….”
무슨 말을 어떻게 하고 전화를 끊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핸드폰을 통해 들려오는 엄마의 이 한 마디에 내 모든 미움이 산산조각이 났다. TV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아버지가 내게 했던 것이 필름처럼 휘리릭 지나갔다. 필름 속 아버지는 사랑의 화신이었다. 나에 대한 사랑과 걱정으로 똘똘 뭉쳐있었다. 그동안 아버지는 자신을 미워만 하는 내 마음을 돌이킬 방법을 몰라 묵묵히 자신의 사랑을 전할 뿐이었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큰일을 당하니 실감이 나지 않았다.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아무 생각 없이 회사 일을 마무리 짓고 있는 내가 정상인가 싶었다. 그만큼 아버지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었고, 사실로 느껴지지 않았다. 부장님에게 일을 넘기기 위해 일 층 사무실로 내려가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나 보다.
“남 대리, 왜 울어?”
“……”
“왜 그래?”
“아빠가 돌아가셨어요.”
사장님과 직원들 모두 놀랐다. 사장님은 얼른 퇴근하라고 했다. 엄마도 안 계시고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멍한 상태에서 운전했다. 문득 상조보험에 가입한 게 떠올랐다. 상조회사에 연락하여 장례식장에서 담당자를 만났다. 상조회사에서 나온 분들이 분주히 움직여 빈소를 마련하고 아버지가 오기를 기다렸다. 언제 왔는지 여동생이 보였다. 혼자가 아니라 조금 안심이 되었다.
저녁때가 다 되어서야 아버지와 남동생을 태운 119구급차가 도착했다. 남동생이 초췌한 모습으로 먼저 내리고 아버지가 들것에 실려 나왔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아버지는 영안실로 옮겨졌다. 스치듯 지나가는 찰나에 아버지 얼굴을 보았다. 너무나 평온한 모습이었다. 잠을 자는 것처럼 보였다. 경상북도 의성에서 인천까지 거리가 먼데다 토요일이어서 차가 막혀 늦었다고 했다. 119 사이렌을 계속 울리면서 왔기에 그나마 빨리 온 거라고 했다. 이른 아침 아버지가 쓰러진 후 줄곧 동행했던 동생이었다. 이미 사망 선고를 받은 아버지와 함께 긴 시간을 오면서 동생은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허망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안쓰럽기 그지없는 상황이지만, 우리는 각자 자신의 감정 추스르기도 박찼기에 누구의 마음을 헤아릴 여유가 없었다. 한참을 더 기다리니 올케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엄마와 조카 둘이 무사히 도착했다.
영정사진으로 쓸 사진을 가지러 집에 갔다. 아무리 뒤져도 쓸 만한 게 없었다. 아버지는 가족과 함께 여행하는 것보다 친구들과 낚시 다니는 걸 더 좋아하셨다. 원래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또 정면으로 찍은 것이어야 해서 더 찾기 어려웠다. 온 집안을 뒤진 끝에 낚시터에서 모자 쓰고 찍은 사진과 헝클어진 머리에 러닝셔츠 차림의 사진을 찾아 장례식장에 가져갔다. 모자를 쓴 것은 영정사진으로 안 된다고 하여 러닝셔츠 차림의 사진을 포토샵으로 보정 했다. 얼마 후에 아버지는 머리를 올백으로 단정하게 정리하고 양복을 입고 나타났다.
장례 첫날은 아버지와 가까이 지내던 몇 분이 다녀가셨다. 갑작스러운 일에 놀라서 한걸음에 달려오신 분들이었다. 둘째 날엔 예상보다 훨씬 많은 문상객을 대하느라 우리는 온전히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그 와중에도 눈물이 시도 때도 없이 왜 그렇게 나오던지. 오랜 세월 아버지를 미워했었기에 눈물이 나지 않을 줄 알았다. 그동안 쌀쌀맞고 냉정하게 대했던 것이 어찌나 후회되던지 가슴에 돌덩이를 올려놓은 것 같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눈물이 안 나면 어떡하지?’이게 늘 걱정이었다. ‘장례식장에서 많이 우는 사람은 망자와 관계가 좋았던 사람이 아니라 좋지 않았던 사람이다.’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눈물이 멈추지 않는 것을 보니 이 말은 진실이었다. 성가대 총무님이 조문 오셔서 “남 집사 눈물 바구니 터졌어. 그만 울어”라고 하셨다. 그 말에 다시 눈물이 쏟아졌다. 장례식 치르는 동안 아버지에 대한 미안함으로 미칠 것만 같았다. 아버지가 안 계시면 마음이 편안할 줄 알았다. 이렇게 후회하며 가슴 아파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다. 아버지를 향한 미안함으로 어쩔 줄 모르는 나를 보며 내가 놀랄 지경이었다.
경황이 없는 중에도 많은 분의 도움으로 무사히 장례를 마쳤다. 마음이 미어져 아버지의 물건을 도저히 볼 수가 없었다. 장지에서 영정사진과 옷들을 모두 불태웠다. 그러나 집안 여기저기에 아버지가 계셨다. 늘 낚시도구를 만지며 앉아 있었던 아버지 자리, 베란다 쪽 창가를 밟고 지나갈 수가 없었다. 꼭 아버지를 밟는 것 같았다. 아버지의 부재가 뼈저리게 느껴졌다. 아버지와 함께 낚시하러 다니던 분이 얼마의 돈을 주고 낚시도구를 모두 가져가겠다고 하여, 그러라고 했다. 남동생이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불같이 화를 냈다.
“어떻게 집에 오자마자 낚시도구를 팔아?”
“우리가 판 게 아니고 그분이 그냥은 못 가져가고 얼마의 돈을 주겠다고 했고, 우리는 마음이 너무 아파서 도저히 못 보겠어서 그러라고 했어.”
“내가 우리 집에 가져갈 거야!”
“네가 우리 마음 알아? 어디를 봐도 아빠가 있어. 너무 힘들어.”
“나도 마찬가지로 힘들어. 누나는 같이 살았잖아. 나는 결혼하고 따로 살면서 자주 보지도 못했어. 내 마음을 누나가 알아?”
우리는 각자 감당하기 힘든 감정을 토해내고 있었다. 건강했던 아버지였기에 쉽게 떠나보낼 수 없었다. 아버지를 잃은 비통함에서 헤어 나올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시간이 약이라고 어느 정도 마음을 추슬렀다고 생각하던 때에 최 권사님이 “한 달 넘게 지났는데 이제 그만 슬퍼하셔도 될 것 같아요. 얼굴 좀 펴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잖아요”하셨다. 나는 한 달 넘게 아버지가 돌아가신 그날을 살고 있었다. 그렇게 아버지에게 용서를 구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버지가 가족들에게 말 한마디 못하고 세상을 떠난 후에야 아버지에 대한 나의 사랑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