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버지를 그리워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두 달쯤 지나고 나니 우리가 처한 상황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그제야 아버지가 하던 가게를 어떻게 처리할지 가족회의를 했다. 남동생 말에 의하면, 아버지는 큰 딸인 내가 그 가게를 물려받기를 원했다고 한다. 언제까지 회사에 다닐 것이며, 직장생활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게 아버지의 생각이었다. 당시 나는 인쇄소에 다니고 있었다. 가족들은 비슷한 업종이라며 내가 맡아서 하라고 권했다. 결혼 전에 너무도 싫어했던 일이라 나는 완강히 거부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도 힘든데, 30년을 경영했던 가게마저 정리하는 것이 엄마의 마음을 더 힘들게 하는 것처럼 보였다. 엄마를 보니 마음이 조금 흔들렸다. 내가 계속 결정을 미루고 있을 때 제부가 결정적인 한마디를 던졌다. “처형, 구청 앞이니 구청 직원들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서 가게 문 닫으세요. 아침 9시에 문 열고 저녁 6시에 닫아요. 공무원들 쉬는 날 같이 쉬세요. 이런 꿀 직업이 어디 있어요?” 이 한 마디에 혹하고 넘어가 퇴사했다.
죽기보다 싫어했던 그 일을 다시 시작하면서 주변 상인들로부터 나를 걱정하던 아버지의 마음을 들을 수 있었다.
“여기서 남 사장님이랑 같이 담배 피웠어요. 그때 딸이랑 손자 얘기 많이 하셨죠. 은주씨 걱정 많이 했어요.”
“남 사장님이 얘기하던 큰딸이에요? 회사에서 일 잘한다고 늘 자랑 하셨어요.”
“당신이 이 일을 얼마나 더 하겠냐며, 큰딸이 회사 다니지 말고 이거 물려받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남의 밑에서 일하는 것보다 나을 거라고…….”
“손자가 사춘기라서 딸이 힘들어한다며 속상해하셨어요.”
남편과 별거하고 아이를 키우며 마음고생 하는 나를 많이 안타까워하셨다고 한다. 가게 주변 분들의 말을 듣다 보니 아버지의 각별했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나를 힘들게 한 무정한 아버지로만 알았는데, 내 생각과 너무 다른 모습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그랬다. 아버지는 처음부터 나를 사랑했고, 언제나 나를 사랑했고, 세상을 떠나는 그 날까지 나를 사랑했다. 사랑하지 않은 사람은 나뿐이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변함없이 항상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
일을 시작한 후 6개월은 죽을 것 같았다. 복사, 제본, 코팅, 출력, 도장 새기는 것까지 쉬운 건 하나도 없었다. 전에 다녔던 인쇄소에서 다른 직원이 하는 것을 보기만 했지 직접 하지 않았던 일이다. 손수 하려니 모든 것이 서툴렀다. 나중에는 손님이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게 무서웠다. 수시로 같은 업종의 매장으로 달려가서 물어보고, 때로는 손님에게 배우기도 했다. 아버지가 하던 일에 내가 좋아하는 편집 디자인 분야를 추가하니, 결혼 전과 같이 죽을 만큼 싫지는 않았다. 오히려 일을 할수록 더 재미있어졌다. 편집디자인은 지금까지 하던 일이라 자신 있었고 적성에도 맞았다. 명함이나 전단지 같은 인쇄물을 디자인할 때면, 쌓였던 스트레스가 풀리고 낯선 일에 대한 압박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렇게 하나씩 배우고 익히고 적응하며 나는 자영업자가 되어갔다.
참 많이 미워했던 아버지였다. 돌아가신 후에야 아버지의 무조건적 사랑이 새록새록 보이는 건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 내가 아버지를 그리워할 줄은 미처 몰랐다. 아버지가 생각나는 것이 힘들어서 쓰시던 물품을 그렇게도 정리했는데, 결국 아버지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가게를 물려받았다. 집기 하나하나에 아버지의 손길이 남아있는 그곳이 내 삶의 한 축이 되었다. 아버지를 미워했던 그 시간만큼 아버지의 흔적 속에서 용서를 구하라는 삶의 뜻인지도 모르겠다. 인생의 아이러니한 점은 잊으려고 애쓰는 것이, 때론 내 삶의 큰 자리를 차지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오십 대로 보이는 두 자매가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언니로 보이는 이가 오만 원짜리 신권을 코팅해 달라고 했다.
“돈을요? 코팅하면 사용 못 해요.”
“괜찮아요. 그냥 해주세요.”
“언니, 돈을 왜 코팅해?” 함께 온 동생이 물었다.
“내가 엄마 살아계실 때 용돈을 한 번도 못 드렸어. 그게 너무 미안해서 코팅해서 엄마 납골당에 갖다 놓으려고.”
우리 자식들은 이렇게 어리석다. 중국 한나라 때 한영이 지은 <한시외전>에 이런 말이 있다. “나무가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멈추지 않고, 자식이 효도하고자 하나 어버이가 기다리지 않는다.” ‘살아계실 때 좀 잘해드릴걸.’ 하고 후회해보지만 부질없는 짓이다. 나를 향했던 아버지의 외사랑이 가슴 아프다. 좀 더 일찍 그 사랑을 눈치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자식은 부모가 이해되지 않으면 싫어하기도 한다. 하지만 부모는 자식이 이해가 되지 않아도 사랑한다. 내 아버지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