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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엠은주 Mar 09. 2023

오늘 아침에 사망했습니다

스무 살이 넘은 아들을 둔 부모라면 누구나 하는 걱정이 있다. 바로 군에 입대하는 문제다. 아들은 대학 일학년을 마치고 휴학계를 냈다. 신체검사 결과 공익근무요원 판정을 받았다. 한 번도 떨어져서 지내본 적이 없어서 불안했는데 다행이었다. 공익근무요원은 근무할 기관과 소집 일을 확인하여 자신이 원하는 곳에 신청하면 된다. 2차까지 지원할 수 있었다. 2014년 봄에 소집되는 것으로 신청하는 날이었다. 당연히 합격 되었을 것으로 생각했다. 퇴근해서 합격 여부를 물어보았다.


“엄마, 신청 못 했어.”

“왜?”

“신청 시작하는 그 시간에 할머니가 밥 먹으라고 해서.”

“그게 왜?”

“밥 먹고 와보니까 마감됐어.”

“그게 무슨 말이야?”

“선착순이래.”

“그럼 신청하고 밥을 먹었어야지!”

“그런 줄 몰랐지.”


답답하고 짜증이 났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다음에는 자신이 원하는 곳에 자리가 없어서 신청을 안 했다는 둥 핑계를 대며 속을 태웠다. 미루고 미루다 결국 아들은 1차 부평구청, 2차 교육청에 지원했는데 부평구청에 합격했다. 날씨가 좋은 10월쯤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2014년 11월 27일 입소하라는 통지서를 받았다. 날씨가 춥고 눈이라도 오면 더 힘들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입소일이 다가올수록 나는 더 초조해졌다. 여동생 가족과 아들이 좋아하는 나의 사촌 동생을 불러 함께 저녁을 먹었다. 특별히 준비랄 것도 없지만 나는 그렇게 마음의 준비를 했다.


2014년 11월 24일 아침이었다. 출근하여 가게에 막 들어가려고 하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안 받으려다가 혹시 고객일지 몰라서 받아보았다.

“여보세요?”

“여기는 00경찰서입니다. 000씨 부인이시죠?”

“네”

대답하면서 그 짧은 순간에 온갖 생각이 스쳐 갔다. ‘술 마시고 사고 쳤나? 누구랑 시비가 붙었나? 사고가 나서 심하게 다쳤나?’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000씨 오늘 아침에 사망했습니다. 오랫동안 별거 중이라고 들어서 제가 대신 전화 드렸습니다. 시신은 00병원에 안치되어 있으니 조문하려면 거기로 가시면 됩니다.”


이건 또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란 말인가. 이른 아침에 가족도 아니고 경찰관에게서 그 말을 들으니 화가 났다. ‘그래도 아이 낳고 8년을 살았는데……. 서류상 이혼도 안 했는데……. 이렇게 남처럼 대하려면 기분 좋은 소식도 아닌데 오후에 말해도 되지 않나? 뭐가 급해서 이른 아침에…….’ 나를 무시하는 것 같아서 시댁 식구들에게 화가 났다. 그날은 아이가 논산훈련소 입소하기 사흘 전이었다. 아이는 중학교 3학년 이후 연락 한번 한 적 없는 아빠의 장례를 마치고 훈련소로 향했다. 여섯 해 동안 목소리도 들어본 적이 없는 아빠의 사망 소식에 아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 아이라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남편은 아들이 고등학교에 입학해도, 대학에 가도 문자 한 통 없었다. 남편의 죽음을 훈련소 입소하기 사흘 전, 그것도 경찰관의 입을 통해 들었을 때 나는 심한 배신감을 느꼈고,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 살고 죽는 것이 사람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 하다 싶었다.


아들에게 아빠의 죽음을 알리고 의사를 물으니 장례식장에 가겠다고 했다. 화가 난 마음을 뒤로한 채, 다음 날 아침 일찍 아들을 데리고 장례식장으로 갔다. 아들의 손에 조의금을 들려서 장례식장에 들어가는데 만감이 교차했다. 남편이 스스로 아들을 보지 않겠다고 했지만,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서로가 6년 동안 그리워하고 또 그리워하며 보고 싶었을 텐데, 이런 모습의 만남에 내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다. 평범한 가정이었으면 아들이 상주 노릇을 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는 특수한 상황이었다. 나는 아들에게 상복을 입히고 싶지 않았다. 6년 동안 무심했던 시댁 식구들 앞에 아들을 두고 싶지 않았다. 아침 일찍 조용히 조문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고 싶었다. 문상 온 누구와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우리가 도착하니 시댁 식구들은 반갑게 맞아주었다. 반갑다고 표현하는 게 어울리지 않지만 나는 그렇게 느꼈다. 형님과 작은 시누이 외에는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미워하는 마음과 미안한 마음이 한데 섞였을 것이다. 모른척해 주는 것이 나는 더 편했다. 큰 고모부가 아들에게 하는 말이 들렸다. “00아, 미안하다. 아빠가 너를 안 챙겨도 우리라도 챙겼어야 했는데 미안하다. 우리가 너무 무심했어. 그리고 오늘 와줘서 고맙다.” 그 말이 야속하면서도 고마웠다. 나중에 아들한테 들으니 할머니도 자신에게 미안하다고 했단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시댁 식구들은 남편의 입관에 대해 의논하고 있었다. 입관하는데 아들이 함께하기를 원했다. 아주버님이 “입관할 때 아들인데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라고 했다. 아들에게 입관에 관해 설명해 주고 들어가서 보겠느냐고 물어보니, 그러겠다고 했다. 입관에 참여하겠다고 했지만 불안한 표정이 역력했다. “엄마가 같이 가줄 테니까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중간에 못 보겠으면 엄마한테 말해. 그러면 엄마가 너 데리고 나올게.” 그제야 좀 안심하는 눈치였다. 입관하며 아들은 잠시 상주가 되었다. 상조회사에서 나온 장례지도사가 “유가족들 마지막으로 고인 한 번 만져 보세요.”라고 했다. 아들에게 또 말했다. “상주니까 아버지 한번 안아주세요.” 싸늘하게 식은 아빠를 아들이 조심스럽게 안아주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심장이 칼에 베인 듯이 아팠다. 그렇게 입관을 마치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발인 때도 나는 아들에게 물었다.


“아빠 발인 때는 어떻게 할래? 승화원이 집에서 가까우니까 가겠다고 하면 장례식장 안 가고 바로 데려다줄게. 화장할 거야. 그 모습이 마지막이야. 다시는 못 봐.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엄마는 거기에 따를게.”

“엄마, 못 가겠어.”

“왜? 후회하지 않을까?”

“마음이 아파서 못 보겠어.”


아들의 그 말에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그 모든 것이 들어 있었다.


3일 후, 모든 아픔을 가슴에 품고 훈련소로 들어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찢어지는 듯 고통스러웠다. 군대 보내는 부모 마음이야 다 같겠지만 나는 참담했다. 공익근무라 4주 훈련을 마치면 집에 올 텐데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생소한 환경에서 낯선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을지도 걱정이었지만, 아빠의 죽음에 대한 심적 압박을 견딜 수 있을지 노심초사였다. 우려와 걱정 속에 아들은 훈련을 마치고 무사히 내 품으로 돌아왔다. 이후 부평구청에서 2년간의 공익근무를 마쳤다.


아들이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저녁에 퇴근하니 아들이 옆에 와서 앉는다. “엄마, 오늘 선생님이 가정통신문 주셨는데 아빠가 학교 오는 거야. 나는 아빠가 못 오니까 가정통신문을 휙 버리고 왔어.”하는데 마음이 미어졌다. 초등학교 1학년 여름부터 아빠와 함께 살지 못했다. 이후로 아들은 내 앞에서 아빠에 대한 말을 일절 하지 않는다.


“친구들이 엄마 아빠랑 같이 외식하는 거 부럽지?”

“응”

“우리도 다시 아빠랑 같이 살까?”

“근데 엄마, 아빠랑 또 싸울 거야?”

“조심은 하겠지만 싸울 수도 있지”

“그럼 지금처럼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랑 살래”


내 착한 아들은 이후로 아빠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사춘기도 모르고 지나간 착한 내 아들, 엄마가 고마워!’ 전쟁 같았던 아들의 사춘기는 내가 만든 거였다. 나 스스로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아들에게 화풀이를 했다. 아들을 독립된 인격체로 존중하지 않고 내 맘대로 하려고 했다. 

어린 아들은 내가 준 상처로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다. 그랬던 아들이 성인이 되어 지난날의 많은 아픔에도 불구하고 원망하지 않고, 조금씩 마음을 열고 얘기하기 시작했다. 미안하다. 고맙다. 다행이다. 앞으로도 계속 착하게 있어 줘.


미안하고 고마워……. 엄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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