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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핫산 Jul 31. 2023

비 오는 날 짝짝이 삼선 슬리퍼

비오는 날 지하철 귀신

※ 이야기에 언급되거나 묘사된 인명, 인물, 지명, 장소는 가명을 사용하였습니다.

※ 목격된 것들에 대한 서술은 개인의 견해이며 이것이 실제라고 강요하거나 증명해낼 생각도 일절 없습니다.



비가 엄청나게 내리는 수요일 저녁이었다. 


평소처럼 야근을 하지도 않았고, 회사 근처 라멘집에서 좋아하는 라멘도 먹고 나름 즐거운 기분으로 퇴근하던 참이었다.


회사에서 집까지는 지하철로는 두 번 환승, 버스로는 조금 오래 걸리지만 한 번에 갈 수 있다. 지하철로는 30여 분, 버스로는 1시간 10분. 두 배가 넘는 시간이 소모되지만 환승이 귀찮기도 하고, 책 한 권 읽다 보면 금방이라서 지하철보다 버스를 선호하는데 오늘은 달랐다.


비가 엄청나게 쏟아지고 있었고, 우산도 안 가지고 왔으며, 버스를 타러 가려는 도중에 신발이 흠뻑 젖었으니까. 이 상태로 한 시간을 넘게 버스를 타고 가는 건 나도 찝찝하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민폐다.


삑-.


램프에 초록색 불이 켜진 걸 보고 개표구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몸을 가로막은 기둥은 부드럽게 밀려 한 바퀴 회전했고 나는 막힘없이 개표구 밖으로 나와 출구로 향했다.


월장역. 집에서 가장 가까운 역이다. 4번 출구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상으로 올라와 출구에 섰을 때 여전히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봤다. 


와. 그래도 여기까지 오면 그새 좀 사그라들 줄 알았는데 전혀. 


잠시 이대로 비를 맞고 집까지 뛰어가 볼까 생각을 해봤지만, 가방 안의 노트북이며 보조 배터리며, 무엇보다 가방이 이 정도 비를 견뎌줄 수 없을 것 같았다.


"응, 난데..."


마침 내일은 공휴일이라서 친구가 집에 놀러 오기로 했었고, 고맙게도 쏟아붓는 빗줄기를 뒤로하고 우리 집으로 오는 중이라고 했다. 솔직히 나였으면 그냥 다음에 보자고 할까 심하게 고민했을 텐데, 한 번 결정하면 어지간하면 밀어붙이는 친구의 성격이 오늘은 꽤 도움이 된다. 


친구가 월장역까지 도착하는데 15분 정도 걸릴 것 같다고 했고, 나는 친구를 기다리기 위해 다시 지하철 역사로 내려갔다.


"어휴..."


4번 출구 에스컬레이터 바로 옆에 놓인 벤치에 앉으니 피곤함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젖은 상태로 벤치에 앉는 게 무척 찝찝했을 뿐, 다행히 역사 내 벤치는 금속 소재라 나 때문에 벤치가 젖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친구를 기다리는 동안 친구들 인스타 업로드나 확인해 볼까 하고 폰을 들었다. 양 팔꿈치를 무릎에 괴고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인 채 시선은 액정 속에 두고 오른손 엄지손가락으로 무심하게 스크롤을 올렸다. 


가끔 왼손 엄지손가락으로 하트를 꾹꾹 눌러주며 추천 게시글로 뜬 고양이 움짤을 보며 실없는 웃음을 터뜨리던 그때였다. 옆자리에 짝짝이 삼선 슬리퍼가 눈에 들어온 것은.


내가 앉을 때 이 3인용 벤치에는 아무도 앉아 있지 않았다. 그도 그럴게 젖은 몸으로 벤치에 앉는데 누가 옆에 있다가 젖기라도 하면 서로 곤란하니까. 아마 내가 인스타 구경을 한다고 잠시 정신이 팔린 동안 앉은 사람 같다. 


음, 지하철역 안에 의자가 여기만 있는 것도 아닌데 굳이 흠뻑 젖은 내 옆에 앉는 걸 보면 이 사람도 참 무심한 사람이네. 


비 오는 날 사람들이 으레 그러하듯 이 사람도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있었는데, 발이 작은 걸 보니 여학생 같아 보였다. 특이한 점은 오른발에는 하늘색, 왼발에는 분홍색 삼선 슬리퍼를 짝짝이로 신고 있었다. 나도 전에 슬리퍼가 뜯어져서 한 발은 슬리퍼를 신고 한 발은 맨발인 채로 집에 가본 적이 있어서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오히려 하늘색과 분홍색을 함께 신은 컬러 감각이 대단하다고 해야 할까. 


갑자기 한 쪽 슬리퍼만 신고 집으로 뛰어가던 기억이 떠올라 피식 웃어버렸다.


눈치챘을까. 아니겠지..? 


얼굴 마주치면 괜히 서로 어색할 거 같아서 나는 그 자세 그대로 폰을 들여다보고 있었지만, 눈은 슬리퍼를 신은 발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슬리퍼를 신은 두 발 아래로 물이 흥건하게 고여 있었다. 아니 고이고 있었다. 


음. 다리를 따라서 줄 줄 흐르는 걸 보니 이 친구도 만만치 않게 흠뻑 젖은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도 좀 심하게 흐르긴 했다. 물을 가득 머금은 솜 패딩을 입고 솜이 잔뜩 머금은 물을 조금씩 조금씩 천천히 짜내면 이런 느낌일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참에, 한동안 손가락 움직이는 걸 잊어버린 탓인지 폰 화면이 절전 모드로 빠지며 까맣게 꺼졌다. 화면이 꺼지면서 액정 유리에 내 얼굴이 비쳤다. 그리고, 내 등 뒤의 게시대도 비쳤다.


게시대에 붙은 [지하철 시 공모전] 포스터의 글자가 거꾸로 비쳤다. 


오- 이런 것도 하는구나.


라고 몸을 돌려 게시대의 포스터를  직접 확인하려던 순간, 온몸에 남아 있는 물기가 얼어 붇는 듯한 소름을 느끼며 나는 그대로 멈췄다. 


없다.

액정 유리에 비에 젖어서 앞머리가 이마에 들러붙은 우스운 꼴의 나도, 등 뒤의 벽에 걸린 대문짝만 한 게시대도 보이는데, 바로 내 옆에 앉아 있을 삼선 슬리퍼의 주인이 없었다. 


오른팔 옆으로 시선을 옮기면 여전히 물이 줄줄 흐르는 짝짝이 삼선 슬리퍼를 신은 맨발이 있다. 


아. 이거, 그거구나. 귀신. 


굳이 고개를 들어 확인해 볼 필요도 없다. 이건 분명히 그거다. 아까부터 쉼 없이 줄줄 흘러 슬리퍼 아래 웅덩이처럼 고이는 물만 봐도 안 봐도 유튜브다.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다시 화면을 켜고 무심한 듯한 손길로 스크롤을 내렸다. 거의 관성적으로 아무 글에나 하트를 꾹꾹 누르며 그렇게 새로운 글을 다 볼 때까지도 짝짝이 슬리퍼를 신은 발은 사라지지 않았다. 


안 되겠다. 인스타 앱을 끄고 전자책 앱을 켰다. 그리고 화면 가득 떠오른 검은색 글자를 눈으로 좇으며 글자를 다 훑으면 다음 페이지로 넘기기를 반복했다. 다행히 책은 한 페이지에 글자 수가 꽤 되어서 속도 조절하기가 인스타보다 수월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내가 무슨 노력을 하든 흠뻑 젖은 짝짝이 슬리퍼의 발은 사라지지 않았다. 


우습게도 그런 노력의 시간을 지나다 보니 도통 오지 않는 친구에게 화가 나기도 잠시, 


'다리까지는 보이는 걸 보면 몸뚱이도 있을까'


라는 쓸 데 없는 생각을 하는 시점까지 왔다. 


아, 그래도 무서우니까 굳이 고개를 들어서 확인하지는 않았다. 


15분은 한참 넘은 것 같은데. 이제 굽힌 허리가 슬슬 아파오기 시작한다.


"아, 왜 이렇게 안 와..."


얘는 정말 왜 안 오는 걸까...라고 욕을 해주려던 참에,


"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친구가 도착했다. 

그런데, 얘가 정말, 

오자마자 내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아!!"


너무 당황해서 아픈 걸 참고 애써 숙이고 있던 허리를 번쩍 들어 친구를 쳐다봤다.

 

"어? 아니, 내가 늦을라고 한 게 아니고~~ 지하철역으로 오는 데 어떤 미친 차가 나한테 물을 확 뿌리고 가는 거야!!.. "


내가 똥그래진 눈으로 쳐다보는 의도를 단단히 오해한듯한 친구는 몸을 좌우로 흔들어가며 늦게 온 것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랬거나 말거나 내 눈엔 친구랑 정확하게 포개져 있는 흠뻑 젖은 여학생의 퉁퉁 불어 허연 눈동자만 보였다. 친구가 좌우로 몸을 흔들 때마다 그것은 친구와 몸이 포개어졌다가 다시 떨어졌다가 다시 포개어졌다가를 반복했다. 


눈동자가 없이 흰자위만 있으니 뭘 보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지만 물에 퉁퉁 불은 얼굴이 계속 보고 있기에 힘들 정도였다. 


아니 여긴 지하철역인데 왜 물귀신 꼴을 하고 있는 귀신이 있는 거야? 


"야, 내 말 듣고 있어?"


친구가 내가 자기 말을 안 듣고 딴 생각을 한다고 생각했는지 내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나를 걱정하는 것 같기도 하고 삐진 것 같기도 한 친구 얼굴에 마치 흉터 자국처럼 불룩 튀어나온 그것의 살집이 겹쳐져 정말 토 나올 것 같았다.

 

친구의 얼굴을 보려면 그것하고도 계속 눈이 마주치는 느낌이라 시선을 아래로 돌렸더니 물이 줄줄 흐르는 그것의 다리가 친구의 다리와 겹쳐서 친구 다리가 네 개가 되어 있었다. 


미치겠네 정말.


"됐으니까 이만 가자. 비 맞아서 그런가 추워 죽겠다."


"헐, 야 너 진짜 엄청 안 좋아 보여."


그것을 마주 보면서 토하지 않으려고 참으며 쥐어짜낸 목소리에 친구가 또 오해를 한 것 같지만 굳이 풀어줄 여유는 없다. 


빨리, 여기서 나가야 해. 


"가자, 빨리."


벤치에서 벌떡 일어나서 에스컬레이터 쪽으로 향했다. 친구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일어나 뒤따라왔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며 뒤따르는 친구를 살피는 척 뒤를 보니 다행히 짝짝이 삼선 슬리퍼는 우리를 따라오지 않았다. 내가 연기를 잘해서 보였다는 걸 눈치 못 챈 것인지, 그냥 이곳 지박령인지는 잘 모르겠다. 중요한 건 앞으로 다시는 이 지하철역에 안 올 거라는 것. 


뒤늦게 따라오는 오한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차라리 감기몸살에 걸리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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