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영화> 기생충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초인에 대하여

by 카프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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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u5CVsCnxyXg

They Don't Speak For Us

(그들은 우리를 대변하지 않아. - 'Radiohead - No surprise 중' -



꽉 짜여진 상승과 하강 구조. 숨막히게 차오르는 물에 잠기는 카메라 혹은 우리. 지극히 당연하게 역겹고 추접한 인간의 군상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이 영화는 이 무너진 계급 사다리를 다시 세울 초인을 기다리는 '기택'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장소로 계급을 구분한다. 지하도 아닌 반지하에서 사는 기택의 가족(기생충 1)과 벙커에서 살아가는 문광의 가족(기생충 2) 초호화 저택에서 사는 박사장의 가족. 반지하는 사실상 월세를 더 받기 위한 소유주의 욕심의 결과이다. 4층까지 밖에 허가가 나지 않는 주택에 반지하를 만들어 5층을 만들어 버리는 욕망의 매개체. 그 안에서 개인은 철저하게 유린당한다.(길가에서 오줌세례, 곱등이, 바퀴벌레, 곰팡이까지. 그들이 '더러움'을 벗어나기 위해 소독가스를 마다하지 않는 이유도 그러하다.) 반대로 전쟁이 나면 생존을 위해 지어진 벙커는 전쟁보다 더 한 상황에서 생존을 위해 투쟁했지만 실패해버린 문광의 지켜야하는 가족이 사는 곳이다. 그곳은 의식주 중 주의 기능만 가능한 공간으로서 개인에게 최소한의 생존권마저 주어지지 않는 곳이다. 하지만 문광의 가족은 최소한의 생존권에 대한 투쟁을 포기하고 그저 박사장의 발에 맞춰 불을 껐다 키는 행위를 한다. 결국 삶에 대한 투쟁욕구는 피지배욕구로 산화되고 개인은 처참하게 도구로 전락해버린 공간이다. 반대로 초호화 저택은 청결 그 자체의 공간이다. 넓은 실내는 문광의 노동력으로 청결을 갖추고 있으며 있어야 할 것들이 있어야 할 곳에 위치해 있다. 개인의 사적인 비밀을 소유할 수 있는 자기만의 공간이 있으며 유일하게 하늘을 마주할 수 있는 공간으로 대표되는 정원이 있는 공간이다.


Cool & Simple로 대표되는 그들은 젠틀한 이미지로 덮여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특권이 있다. '청결'과 '불청결'로 개인을 혐오할 권리가 있고 '고용'과 '해고'로 개인을 도구로 전락시킬 권리가 있다. 이 권리는 오로지 계급. 즉, 경제력에서 나온다. 카롤린 엠케는 '혐오사회'에서 혐오의 정서는 더러움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다송은 기택, 충숙, 기우, 기정에게서 공통된 냄새가 난다고 한다. 박사장은 연교와의 대화에서 기우와 기정 앞에서 기택의 냄새를 언급한다. 그 냄새는 모두에게서 나는 냄새임에도 불구하고 기택을 혐오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이는 파티에서 쓸 물건을 사서 돌아오는 차에서 반복된다.) 그 냄새를 무말랭이를 삭힌(정확히 기억이 안남)냄새라고 말하면서 가볍게 웃어 넘긴다. 그때 기택은 스스로 자신의 런닝셔츠를 코까지 끌어올려 냄새를 맡는다. 결국 그 개인은 가족들 앞에서 철저하게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해버린다.(나는 여기서 기택이 박사장을 찌를 수 밖에 없는 개연성이 등장한다고 생각한다.) 이미 직업적으로 굴욕의 대상이 되버린 객체를 직접적으로 뭉개버리는 계급구도를 보여준다.(가벼운 웃음, 쿨, 심플과 같은 단어들은 지극히 굴욕의 대상이 아닌 사람들만 가능한 것들이니까)


나아가 기택은 스스로 '계획'에 대한 언급을 한다. 계획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이들은 오직 기택의 가족 뿐이다. 계획은 필연성을 의미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준비 그리고 해결을 위한 프로세스. 과정과 결과에 대한 이야기는 노력에 대한 대가로 치환할 수 있다. 그러니까, 계획에 대한 믿음은 노력에 대한 대가를 신뢰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세상에 대한 언급은 나아가 개인의 노력만큼 돌아오지 않는 보상을 경험한 ‘기택’의 실패의 결과물이다. 그렇지만 반지하에서 기택의 실패는 그저 조소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김애란의 바깥은 여름 ‘건너편’을 보면 ‘누군가의 불륜, 누군가의 이혼, 누군가의 몰락을 얘기할 때 이수도 그런 식의 관심을 비친 적이 있었다. 경박해 보이지 않으려 적당한 탄식을 섞어 안타까움을 표현한 적이 있었다.’라고 말한다. 즉, 소시민들에게 누군가의 실패는 단순한 안타까움이 아니라 적당한 탄식을 섞어 위장하는 유희의 대상인 것이다. 그것은 사다리를 오르려 한 개인에 대한 시기와 질투다. 인터넷이 되지 않는 기택의 가족이 ‘다음 계획은 무엇이냐’며 기택에게 물어보는 것도 결국은 그의 실패에 대한 조롱으로 보이기도 한다. 결국 기택은 자신을 조롱의 대상으로 만들면서 자신도 기우의 계획을 물어보고 그에 동조하는 소시민으로 돌아가버린다. 하지만, 그는 여럿의 실패를 통해 인생은 타이밍이란 것을 알고 있는 듯 하다. 대만 카스테라집의 실패도 순전히 그에겐 타이밍의 문제였을 테니까.(그의 ‘시의적절하다’라는 워딩이 계속 머리에 남는 이유다.) 결국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계획의 승패도 없다는 이야기는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는 뜻으로 들린다. ‘노력은 정당한 대가를 가져온다’라고 믿는 순수하다 못해 멍청한 개인의 환상을 깨는 순간이다.(나는 기택이 스스로 눈을 손으로 가림으로써 ‘노력은 정당한 대가를 준다’라는 명제가 거짓이다라고 말하는 어른을 표상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러한 불합리한 계급구조에 대한 투쟁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기생충 1, 기생충2)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간의 싸움이다. 운전기사, 가정부라는 직업은 언제든 대체 가능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들을 가볍게 이야기하고 이유가 있더라도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내 잘라낸다.(현대사회의 노동자의 현실) 그러고는 연교가 한다는 소리는 역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최고라고 말하는 현실. 만약, 당신이 이곳에서 불편함을 못느꼈다면 이미 당신은 견고하게 짜여진 계급의식을 받아들이고 살 수 밖에 없는 소시민인 셈이다.

처음 문광을 봤을 때, 그들이 함께 했다면 어땠을까. 이 공간은 제로섬 게임(Zero-Sum)이 지배하는 곳이 아니라 함께 한다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곳. 나아가 함께 한다면 공고화된 벽을 미세한 균열이라도 낼 수 있는 곳이 되지 않을까. 그러나, 그들은 알지 못한다. 이 공간이 불합리하다는 사실을. 그렇게 서로의 생존을 위한 투쟁은 프롤레타리아 사이에서 일어난다. 박사장의 집은 그 사실을 모른다. 아니, 관심조차 없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왜냐면 그들은 우리를 대변해주지 않으니까.


그러나, 기택은 다르다. 기택은 박사장을 찌른다. 즉, 기택이 박사장을 찌르는 순간은 그러니까 프롤레타리아간의 투쟁에서 부르주아를 향한 첫 투쟁이다. 제로섬 게임이라고 생각하던 공간이 연대의 공간이며 이미 어그러진 순간. 그러니까, 세상이 매트릭스라고 아는 순간에는 절대로 파란약을 먹을 수 없다. 위에서 말한 혐오를 직접적으로 경험한 개인이 투쟁의 화살을 부르주아로 돌린 순간. 기택은 드디어 초인이 되기 시작한다.

기택은 칼을 찌른뒤 계단을 내려간다. 계단을 내려가는 장면을 감독은 부감으로 찍었다. 희한하게도 계단을 내려가지만 계단을 내려가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부감으로 보면 계단은 내려가는 모습은 그저 평탄한 길을 걷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투쟁의 대상이 부르주아를 향하는 순간. 그러니까, 이 계급의 문제가 사회 구조의 문제라고 인식하는 순간, 더이상 그는 그 전의 소시민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래서 그는 투쟁을 위해 지하실로 향한다.

그는 지하실에서 오랫동안 아들을 기다리며 메세지를 보낸다. 사실, 그곳에 누가 사는지는 상관없다. 그들은 우리의 이야기에 관심없으니까. 오직 그가 알아버린 것들을 전하기 위해서는 소시민들이 알아야한다. 사회는 부조리하고 결코 이 세상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 세상이라고. 그럴듯한 계획은 오직 부자들. 그러니까, 생일을 위한 번개같은 느닷없는 계획도 성공하는 박사장네만 가능한 것들이니까.

기우는 눈덮인 설산을 오른다. 고행이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의 모스부호를 본다.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밤. 광야에서 그가 기다리는 것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 ‘아들’이라고 말하지만 우리 모두가 될 수 있는 사람. 누군가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라며. 혹은 그런다고 뭐가 바뀌나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은 잘 있다는 인사. 이제 지하실은 개인이 말살된 공간이 아니라 기다림의 공간으로 바뀌어 버린다. 사장에게 감사의 인사를 말하던 문광의 남편과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기택은 완전히 다른사람이기 때문이다.

기우는 잠시 상상을 한다. 직접 그 저택을 구입하는 상상. 관객들은 그를 보면서 ‘또 사기나 쳐서 얻은건가?’라는 생각을 한다. 그들의 과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사기가 아니라면? 기택의 편지를 받아본 기우가 무언가를 깨우친 거라면? 영화에서 보여준 확인편향으로 우리는 그 집의 사람들을 그저 그런 소시민으로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물론 그것은 상상이었지만 말이다.

기택은 그 광야에서 천천이 걸어나와 기우를 마주한다. 맨발의 초인은 그 집을 사야만 나올 수 있는 인물이다. 역설적으로 그 집을 산다는 것은 자본가가 되는 것. 반어법을 통해 절대로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고 보여주는 장면이다.


하지만, 그 밤에 기택은 매일 매일 불을 켤 것이다. 광야의 초인은 그렇게 미세한 균열이 일어날 날만 기다리고 있는 것. 이 영화는 잔인하게 이 현상을 묘사했지만 나에게는 그 초인을 감독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봉준호란 사람이 나에게 수석을 갔다주며 희망이란 이 비극이란 세상에도 우린 나아가야한다고.

“그렇게 우리는 물결을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속으로 밀려나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 위대한 개츠비 마지막 문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