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독을 사랑하는 사서교사 모임 후기
낭독을 사랑하는 사서교사 모임이 있는 월요일 저녁 줌을 켜고 책상에 앉는다. 오늘은 총 10명의 선생님들이 함께 모여 '당신이 옳다' (정혜신 글) 책을 한 페이지씩 릴레이 낭독하기로 했다.
본격적으로 낭독을 하기 전 지난 주말에 출전했던 '서울시민과 함께하는 근대문학 낭독대회' 후기로 무대에 서서 낭독해 보니 우리가 평소 연습했던 것과는 다르게 마이크의 위치와 발성의 중요성 그리고 청중을 두고 낭독을 함으로써 표정이나 몸짓 등을 생각하고 고려해서 낭독하는 것도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점을 나누었다. 그리고 또 다른 대회나 기회들이 있다면 선생님들도 꼭 지원하고 도전해 보시라고 당부드렸다. 나도 모르는 누군가 앞에서 무대에 서서 낭독을 해보니 이전과는 다른 경험을 해보았기 때문이다.
오늘은 책 86페이지부터 110페이지까지 낭독을 해보았는데 그중 내게 와닿았던 부분은 106페이지에 나오는 '충조평판' 날리지 말고 공감하라 부분이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누군가 고통과 상처, 갈등을 이야기할 때는 '충고나 조언, 평가나 판단(총 조평판)'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대화가 시작된다. 총 조평판은 고통에 빠진 사람의 상황에서 고통은 소거하고 상황만 인식할 때 나오는 말이다. 고통 속 상황에서 고통을 소거하면 그 상황에 대한 팩트 대부분이 유실된다. 그건 이미 팩트가 아니다. 모르고 하는 말이 도움이 될 리 없다. 알지 못하는 사람이 안다고 확신하며 기어이 던지는 말은 비수일 뿐이다.
작은 고민부터 시작해 곧 죽을 듯한 고통 속에 있는 사람에게까지 부모나 교사들 때로 상담가들도 충조평판을 날린다. 친구에게 어렵게 말을 꺼내도 책을 읽어봐도 마찬가지다. 스스로도 고통 속에 있는 자신에게 끊임없이 충조평판의 잣대를 들이밀며 다그친다.
내 고통에 진심으로 눈을 포개고 듣고 또 듣는 사람, 내 존재에 집중해서 묻고 또 물어주는 사람, 대답을 채근하지 않고 먹먹하게 기다려주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상관없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 해주는 사람이 중요한 사람이다. 그 '한 사람'이 있으면 사람은 산다.
문득 나도 충조평판을 자주 하는 건 아닌지 생각했다. 친구에게나 가족에게나 걱정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그들에게 어쭙잖은 충고나 조언으로 힘든 사람들에게 내 이야기에 집중해서 들어주는 거 만으로 큰 위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도 나 자신에게 충조평판은 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친구가 나에게 힘든 점을 이야기할 때도 친구에게 '지금 네 마음이 어떤지?' , '네 고통은 도대체 어느 정도인 거니?' 하고 물어봐야겠다.
그리고 겨울방학에는 본인이 원하는 시, 소설, 수필 등을 선택해서 지인들을 초청해 작은 낭독회 공연을 꾸며봐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낭사모 샘들에게 조촐하게 낭독회를 열어보자고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