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길의 첫 걸음

산티아고 순례길, Day 01

by Nell Kid
자, 갑시다
Saintjean-Pier-de-Port → Roncesvalles

걸었다. 존, 나, 게, 걸었다. 사실 걷는다기보다는 허우적댔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걷는 게 아니었다. 다만, 오르내릴 뿐이었다. 오르막길이 조금 더 많았다는 게 슬픈 사실이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같은 비율로 있더라도 그 여정은 끔찍하다. 하물며, 오르막길이 더 높은 빈도로 있었으니, 오죽했을까. 오늘 걸었던 거리는 27 킬로미터였다. 원래 길치이기도 하고, 내가 아는 킬로미터는 야구 선수의 구속을 측정할 때밖에 없기 때문에, 이 거리에 대한 감이 전혀 없었다. 순례길을 걸으며,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거나, 사색에 빠진다거나, 이런 사람들은, 엄청난 체력을 가진, 제 정신이 아닌 사람들이다. 생각과 사색은 얼어죽을. 정말 아무런 생각도 안 하고 8시간을 걸었다. 처음에는 걸을 만 하다고 느껴졌다. 원래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고 해맑을 때가 있는 법이다. 마치 아이처럼 말이지. 지옥은, 스페인의 국경을 넘어서면서부터 시작됐다. 완만한 오르막 길이, 끝까지 이어졌다. 호기롭게 시작한 걸음은, 어느새 가다마다를 반복하게 되었다. 세상에. 역시 순례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어서도 성당 미사에 참여하지 않은 지 꽤 되었다. 냉담에, 고해성사도 안 한 죄까지 한꺼번에 받는 느낌이었다. 좀 억울한데. 그게 이 정도의 잘못이었나. 신자유주의 시대의 신은 이것도 복리로 계산하는 모양이었다.


이제 이런 걸, 33일을 더 해야 한다. 와, 마치 훈련소로 재입소한 느낌이다. 훈련소에 입소했을 때, 나는 분 단위, 혹은 초 단위로 시간을 계산하여, 그 동안의 퍼센테이지를 확인하고는 했다. 훈련소는 그 만큼이나 시간이 남아 도는 곳이었다. 오늘 걸음으로써, 34분의 1이 되었다. 이건 정말 어마어마한 수치다. 이 것이 남의 이야기면, 그냥 와, 대단한데, 싶은 마음에서 끝나겠지만, 다름 아닌 내 현실이다. 걸으며 했던 유일한 생각은, 등의 짐들 중 무엇부터 처분할까, 였다. 출발 전 며칠동안 배낭의 크기를 걱정할 게 아니었다. 정작 중요한 건, 짐을 더, 아주, 훨씬, 획기적으로, 줄여야 했었다는 점이다. 이 짐을 들고 어기적 걷는 데에는, 어떠한 낭만도, 의미도 없었다. 길은 끊이지를 않았다. 일정표를 보니, 오늘이 유독 벅찬 코스였기는 했다. '유독'일 뿐이지, 남은 날들이 평탄하다는 소리는 절대 아닐 테다. 새삼 앞으로의 아침이 겁난다. 한 두 코스쯤은 하루에 걸을 수 있을 거라 쉬이 장담했던 나의 아둔함을 뼈아프게 자책했다. 되도 않은 소리였다. 덕분에 속도에 대한 미련은 아예 사라졌다. 오직, 하루 동안 정해진 만큼을 걸어내기 위해, 최선을 다 할 뿐이다. 그것도 조금 벅차기는 하다. 많은 사람들이 순례길 위에 있었다. 역시 세상에는 제 정신이 아닌 사람들이 정말 많다. 영화 <라라랜드>의 OST 'Auditin'은, 여기 이 곳의 사람들을 위해 불러져야 할 노래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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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오늘의 목적지인 롱세스바예스에 도착했다. 흙길 중의 흙길이 끝나고, 시원한 아스팔트 도로가 펼쳐졌다. 아, 이 향긋한 석유 냄새. 김훈 작가의 <남한산성>도 생각났다. 거기에 보면 화친의 길, 혹은 배격의 길, 이런 말이 나온다. 화친도, 배격도, 무엇도 아닌 길을 계속 걸었던 하루였다. 알베르게에 들어서니, 길 위에서 본 얼굴들이 이미 짐을 풀고 있었다. 체력들도 좋아라. 젊네 젊어 아주. 침대를 배정받고, 모든 걸 내팽겨친 뒤 가만히 누워있었다. 아, 이럴 줄 알았다면, 나는 지난 80일 이상의 여행 동안 더 호사스럽게, 그리고 더 편안하게 놀았어야 했다. 왜 그렇게 부지런하게 살았던 건가. 그래도 알베르게의 내부는 의외로 깔끔했다. 확실히 순례길에는 그런 게 있다. 뭐 여기도 나쁜 짓 하는 사람이야 있겠지만, 굳이 이렇게까지 힘든 걸음을 하여 여기서 나쁜 짓을 할 사람은 드물 테다. 그러니 자연스레 분위기도 괜찮다. 만나면 서로 반갑게 인사하고 다니고. 훈련소에서도 못 느낀 동지애, 혹은 전우애를 여기서 느끼게 된다. 서로 배려심들도 있다. 사람 때문에 짜증날 일은 드물 것 같아서 다행이다. 같은 날 순례를 시작했으니,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날에 순례를 마칠 것이다. 또 그 중에는 낙오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밖에 없겠고. 부디 그게 나는 아니었으면 좋겠다. 내 모토는 꾸역꾸역이다. 헥, 헥, 헥 거리며 걷다가, 마침내 다음 목적지에 헉, 하고 당도하겠다는, 그런 계획이다. 어차피 선봉에 서서 모두를 앞설 체력도 없다. 내 체력의 한계를 오늘 다시 한 번 절감했다. 남은 날 모두가 평탄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당분간은 오늘보다는 수월하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정말로, 젊어서 가능한 여정이다. 젊다는 이유로 굳이 이걸 해야하나, 싶은 의구심이 자꾸만 들고, 젊어서 할 수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이 길을 꼭 걸어야 하나, 하는 반발심리가 생기는 것도 사실이지만, 어쨌든 젊지 않다면 아예 불가능한 건 맞다. 물론 이 길 위에는, 연세가 지극하신 분들도 많이 보인다. 그 분들의 체력이 내 것 보다 더 좋다. 하지만 될 잎은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지금도 이 모양인 내 체력이 그 분들 나이가 되어서는 정상치를 회복할 리가 없다. 아마도 이 때가 아니라면 안 된다는 절실함이, 남은 날들을 지탱하는 원동력이 되지 않을까 싶다. 어쨌든 오늘은, 이 순례길의 현실을 맛 봤다. 그나마 다행인 건, 길을 잃을 확률은 상당히 적다는 점이다. 사람들을 따라가면 되기도 하고, 또 요소요소마다 방향 표시가 잘 되어있다. 굳이 구글 지도에 의존하지 않아도 괜찮다. 동시에 안타깝게도, 길 잃어서 순례를 못 하겠다는 변명은 못 하게 되었다. 또 하나의 수확은, 내 갤럭시 핸드폰의 배터리 수명을 확인했던 것이다. 절전모드로 해놓았더니, 이 길을 걷는 내내 15퍼센트 정도만 소요됐다. 오, 이제 방수 기능만 나중에 체크해보면 되겠군. 사람이 참 간사해서, 알베르게의 침대에 올라와 잠시 휴식을 취하니, 또 힘든 일은 금방 잊히는 중이다. 역시 망각이 있어야, 내일도 겁 없이 덤빌 수 있다.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는, 디어클라우드의 '행운을 빌어줘'다. 영광의 첫 플레이리스트고, 고행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