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든 힐 로드 (Golden Hill Rd)에서 타이모샨
어제 너무 피곤해서 일곱 시 반에 기절해서 새벽 두시 쯤 잠깐 깼다. 물 한 모금 마시는데 코에서 뭔가 주르륵 흐른다. 코피다. 그 동안 쌓인 피로도 있고 어제 특히 많이 힘들었나 보다. 얼른 휴지로 코를 막았다. 그리고 다시 곯아 떨어졌다. 새벽 5시반에 알람 맞춰 놓은 것이 눈을 감자마자 울리는 느낌이다. 너무 잘 잤다. 코에는 여전히 휴지가 끼워져 있다.
텐트가 너무 아늑해서 조금 더 누워있다가 슬슬 다시 짐을 쌌다. 오늘은 홍콩에서 가장 높은 타이모샨에 가는 날이다. 어제의 산행이 너무 힘들었어서 덜컥 겁이 나고 긴장된다. 6시반쯤 배낭을 짊어지고 조금만 걸어가니 수백 마리의 원숭이들이 도로를 점거하고 있다. 무섭다. 꿈인가.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 갈 수는 없으니 일부러 스틱으로 땅을 치며 천천히 걸었다. 다행히 내가 가는 길은 비켜준다. 그렇게 20분쯤 원숭이들 사이를 걸었나 이번에는 멧돼지도 보인다. 긴장되었지만 멧돼지는 나를 신경 쓰지 않는 듯하다.
그렇게 동물의 왕국을 통과해서 걸어가니 캠프사이트에 중국인 커플이 텐트 철수를 하고 있다. 중국어로 뭐라고 하는데 영어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하니 말을 안 건다. 이 친구들도 맥리호스를 돌고 있는 것 같다. 이번에도 자판기에서 콜라를 뽑아먹고 싶은데 옥토퍼스 카드가 안돼서 중국인 남자에게 현금 10달러를 보여주며 콜라를 사줄 수 있냐고 물어보니 쿨하게 도와준다. 시원하게 콜라 한잔하고 물 수급도 충분히 해서 다시 떠났다.
첫번째 만나는 곳은 이름부터 걷기 싫은 니들 힐 (Needle hill)이다. 바늘처럼 뾰족하게 솟아 있어서 다. 어제 푹 쉬어서인지 체력이 괜찮다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발에 생긴 물집 때문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아팠는데 발이 덜 아프다. 물집이 굳은살이 되어버린 건지 터진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좋은 신호다. 니들힐을 올라가니 트레일 러닝을 하고 쉬고 계시는 홍콩 여자분이 앉아서 쉬고 계신다. 말을 걸어와서 영어로 답했더니 영어를 잘하신다. 어디서 왔는지 지금 여행은 얼마나 하고 있는건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서로 사진도 찍어주고 다시 길을 나섰다.
오늘은 날씨가 정말 좋다. 지난 이틀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하늘이 새파랗다. 해가 쨍쨍해서 조금 더웠지만 기분 좋은 바람이 적절하게 불어서 걷기 좋다. 오늘 코스 중 최악이라는 그래시 힐 (grassy hill)도 통과하고 타이모샨으로 가는 입구에 섰다. 일단 의자에 앉아 물을 마시며 좀 쉬었다. 가장 높은 산이라고 하는데 긴장이 안될 수 없다.
한참을 심호흡하고 타이모샨을 오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길이 좋다. 지난 두개의 산처럼 미친듯이 돌계단만 오르는 코스가 아니다. 진짜 산이다. 시커먼 큰 돌들이 산 위에 뿌려져 있는 것 이국적인 풍경이다. 파아란 하늘이 산을 더 예쁘게 보이게 한다. 정상까지는 꽤 쉽게 올라갔다. 정상 근처에는 홍콩 경찰들이 산행훈련을 하느라 단체로 올라가는데 그들에게 응원을 받으며 같이 올라갔다.
정상 이후부터는 계속 내리막인 수월한 코스라 3시반쯤 캠프사이트에 도착했다. 다음 캠프사이트까지는 6.4키로를 더 걸어야 해서 조금 애매하다. 오늘 최대의 걱정은 더 이상 먹을 게 없어 버스를 타고 다른 도시로 가야 하나였다. 다행히 캠핑장 관리인이 여기서 5분만 걸어가면 간단한 음식을 파는 곳이 있다고 안내해준다. 마지막 남은 돈으로 콜라 하나와 컵라면 하나를 사먹었다. 내일 아침에 먹을 음식도 필요할 것 같아 알리페이를 깔고 카드를 추가했더니 결제가 된다. 돈이 생겼다. 옆에 현지인이 먹고 있는 것이 맛있어 보여 나도 두유와 어묵 꼬치를 사먹었다. 비스킷이랑 초콜릿도 샀다. 모든 걱정 해결이다.
오늘의 캠핑사이트에는 다른 사람들도 있어 혼자 고독하지 않을 것 같다. 드디어 내일 맥리호스트레일의 마지막 날이다. 내일은 얼른 끝내고 도시로 가서 맛있는 것 맘껏 사먹고 맥주도 맘껏 마셔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