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남아있는지 6시 좀 넘어서 눈을 떴다. 그리고 얼른 샤워를 했다. 어제 공항에서 간단하게 먹고 아무것도 못 먹어서 배가 너무 고프다. 구글맵을 찾아보니 숙소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English breakfast를 파는 곳이 있다. 캐나다 유학시절에 홈스테이 가족이 영국 사람들이라 그때 처음 먹어보고 그때부터 좋아했던 메뉴다.
밖으로 나가니 아침 공기가 꽤 차다. 그리고 흐리다. 스페인의 아침보다 훨씬 쌀쌀하다. 어제 밤에 도착해서 숙소를 찾느라 주변을 볼 여유가 없었는데 밝을 때 보는 건물의 느낌과 날씨는 벤쿠버를 떠오르게 한다. 8시에 문을 연다는 정보를 보고 숙소 직원에게 물어보니 꽤 잘하는 집이라고 한다. 문을 열자마자 첫 손님으로 들어갔다. 다른 메뉴들도 있었지만 Full English breakfast를 시켰다. 그리고 아이스아메리카도 시켰다.
크게 조리할 것이 없는 음식이라 금방 나온다. 베이크드 빈과 베이컨과 계란후라이, 해쉬브라운과 소시지. 완벽하다. 양도 많다. 맛이 없을 수 없는 조합이다. 역시 맛있다. 다 먹고 계산하는데 가격은 맛이 없다. 커피까지 해서 24파운드다. 내 인생에서 가장 비싼 아침을 먹었다. 4만4천원짜리 아침을 먹은적이 있나. 과연 앞으로는 먹을 일이 있을까. 유럽 여행하며 물론 절약은 하지만 다양한 경험에는 돈을 아끼지 않기로 했다.
영국이 물가가 살인적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고 그렇다고 숙소에서 가만히 쉬고 있을 수 만은 없었다.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보고 느껴야 한다.
영국에 살고 있는 미미가 추천해준 일요일에만 열린다는 포토벨로 (Portobello) 마켓에 갔다. 여기가 영화 노팅힐에 나온 배경이라고 한다. 숙소에서는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다. 파스텔톤 색깔들의 건물이 조화롭게 늘어선 예쁜 곳이다. 곳곳에 빈티지 물건들이 있고 맛있는 음식도 판다. 사고 싶은 물건들도 몇 개 있었지만 아직 나는 여행이 많이 남았다. 짐을 더 늘일 수 없다. 빠른 걸음으로 마켓의 끝까지 갔다가 반대편 길로 시작점으로 돌아왔다.
다음으로 런던의 랜드마크 투어를 시작했다. 구글맵을 보니 숙소에서 동쪽으로 6키로 정도 떨어진 곳까지 걸어서 이것저것 보면 되겠다는 판단이 섰다.
첫 랜드마크는 켄싱턴 궁전 (Kensington Palace)이다. 구름이 걷히고 하늘이 맑아지기 시작해서 걷기 좋다. 그래도 공기는 아직 차갑다. 런던에 왔다는 것이 이제 느껴진다. 전세계에서 온 관광객들이 보이고 건물들과 도로와 버스들도 눈에 들어온다. 공원을 따라 걸어서 들어간 켄싱턴 궁전은 공사중 이었다. 빠르게 동쪽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겨 히데 파크 (Hyde Park)로 들어갔다. 런던에는 러너들이 정말 많다. 강아지 산책하는 사람들도 많다. 버킹엄 궁전 (Buckingham Palace)에 도착했다. 저 멀리서부터 보이는 엄청난 크기의 궁전은 가까이서 보니 더 압도적이다.
그리고 트라팔가 광장 (Trafalgar Square)으로 걸었다. 가는 길에 대형 유니온잭 국기가 차가 없는 대로를 따라 걸려 있는 모습은 정말 장관이다. 유니온잭과 사진을 찍으려고 한국인을 찾아봤다. 최소한 동양인이라도 좋다. 동양인들이 사진을 잘 찍는다. 지금까지 많이 걸어서 쉴 겸 앉아서 동양인이 지나가길 기다리는데 30분 넘게 안보인다. 포기하고 트라팔가 광장으로 들어갔다. 큰 광장에서는 이름 모를 어떤 밴드가 공연을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아프리카 국기를 어깨위로 두른 사람들이 시위 같은 것을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빅벤 (Big Ben)으로 걸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보기로 하고 지하철을 타고 숙소로 돌아갔다.
숙소에서 좀 쉬고 도원이와 4시에 소호 (Soho)에서 만나기로 했다. 도원이가 영국에 살았다는 것은 알았지만 한국에 돌아온 줄 알고 있었다. 도원이는 인스타도 잘 안 해서 소식을 모르고 지내다가 스토리에 런던 간다고 올렸더니 연락이 왔다.
아침부터 2만보 넘게 걸었더니 피곤해서 숙소에서 좀 쉬다 다시 지하철을 타고 소호로 가서 도원이와 만났다. 도원이는 여전히 잘 생겼다. 조금은 늙은 모습을 상상했는데 3년만에 봐도 똑같다. 나만 여행하며 시커멓게 타고 늙었다.
일단 맥주 한잔씩 하며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했다. 도원이는 영국에 3년째 살고 있다. 영국에 계속 살고 싶지만 물가가 감당이 안 된 단다. 한달에 200만원을 내야 집안에서 최소 다른 사람과 쉐어하지 않고 방 하나에서 살 수 있단다. 그렇다고 그만큼 엄청난 월급은 주지는 않는다고 한다. 외식은 정말 가끔씩 해야 하고 보통 해먹는다고 한다. 비싸서 술도 밖에서 취할 때까지 마실 수 없다고 한다.
도원이가 친구한테 추천 받은 중국식당으로 가서 괜찮은 가격에 맛있는 국수를 먹었다. 정말 오랜만에 아시아 음식이다. 역시 음식은 아시아 음식이 최고다. 그리고 와인을 한잔하러 갔다. 100년이 넘은 와인집이란다. 런던에서도 유명해서 항상 줄이 길다고 한다. 역시나 가보니 긴 줄이 서 있다.
도원이가 아는 사람이 있어서 우리는 줄 서지 않고 바로 들어갈 수 있단다. 입구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뭐라고 얘기하니 우리를 바로 들여 보내준다. 멋지다 도원이.
신기해서 뭐라고 했냐고 물어보니 런던에 살면서 자주가서 직원이랑 친해졌고 그 직원이 일을 안 하는 날도 이름만 대면 바로 들어가게 해줬다고 한다.
천천히 와인 한잔하며 3년동안 쌓여 있는 이야기를 하고 나니 날이 어두워진다. 9시쯤이다. 맥주 한잔만 더하고 헤어지기로 했는데 와인집에서 나와 걷다가 앞에 보이는 불이 켜진 빅벤이 너무 황홀하다.
"형 그러면 슈퍼에서 맥주사서 빅벤 보면서 한잔하시죠?"
그렇게 맥주 4캔들이를 사서 노랗게 반짝이는 빅벤을 보며 최고의 뷰를 즐기며 한잔하고 헤어졌다.
그냥 비행기 티켓이 싸서 런던으로 왔는데 오길 너무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