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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el Oct 31. 2024

여행 Travel 旅行

여행의 시작

나의 첫 해외여행은 우여곡절의 연속이었다.

2002년, 해외여행이 흔치 않던 시절,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나는 아버지의 큰 결심 덕분에 처음으로 비행기를 탈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께서는 오랜 시간 준비해 반년 동안 계획한 발리 여행을 우리에게 선물해 주셨다. 하지만 출발 당일, 예기치 않은 태풍 루사로 인해 모든 계획이 무산되었다. 실망스러웠지만 우리는 다음 해를 기약하며 다시 발리 여행을 준비했고, 그해 다시 한번 출발을 앞둔 당일 태풍 매미가 또다시 찾아왔다.

그렇게 발리와의 인연을 잠시 뒤로 하고, 우리는 2년 후 일본으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지금이야 흔한 여행지가 되었지만, 그 당시의 일본은 어린 나에게 새로운 세계와도 같았다. 비록 패키지여행이었지만 다양한 경험과 볼거리는 내 어린 마음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하면서, 우리는 점차 여행과는 거리가 먼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나는 스무 살이 되었고, 대학교 1학년을 마친 후 군대를 다녀왔다. 복학 대신 경제적인 이유로 곧바로 사회에 발을 들이게 되었고, 자연스레 남들과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대학 졸업 후 취업이라는 당연한 길이 아닌 선택은 나의 20대를 많은 이들의 청춘과는 다른 모습으로 이끌어 갔다.

직장 생활을 시작한 이후 어느 정도 경제적 여유는 생겼지만, 마음속에는 여전히 한 번도 누려보지 못한 청춘의 여행이라는 로망이 남아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나는 서른을 앞둔 스물여덟에 13년 만의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마치 오랜 꿈을 이루기 위한 긴 여정을 마친 듯한 그 순간, 나는 비로소 잃어버린 청춘을 조금씩 되찾아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떠난 여행지는 10일간의 미국, LA였다. 출발 전 몇 달 동안 검색하고 계획하며 일정을 꼼꼼히 준비했다. 어느 장소를 갈지, 어떤 코스를 따를지, 어떤 식당에 들를지도 세세히 정해 두었다. 그러나 미국에 도착한 지 사흘 만에 모든 계획이 틀어지기 시작했다.

13년 만의 첫 여행, 그것도 어른이 된 이후 처음으로 떠난 휴식이었다. 하지만 정작 나는 어떻게 쉬어야 할지 몰랐다. 매일 짜놓은 계획표대로 움직였지만, 정해진 장소에 도착해도, 추천받은 음식을 먹어도 그저 무감각했다. 눈앞에 펼쳐진 새로운 세상은 그저 배경처럼 느껴졌고, 나는 익숙한 일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무언가를 위해 계속 달리는 기분이었다.

고작 여행지의 배경만 바뀌었을 뿐, 내 삶은 여전히 같은 톱니바퀴 속에 있었다. 쉴 새 없이 돌아가던 일상과 다를 바가 없었다. 13년을 기다린 여행이었지만, 나에게는 쉼이 아닌 또 하나의 일정표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모든 계획을 취소하고 호텔에서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앉아있었다. 그렇게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출근했을 때, 동료들은 연신 물었다. "어디가 가장 좋았어?" "추천한 식당은 갔어?" "뭐가 제일 인상 깊었어?"

그들의 질문에 선뜻 답을 할 수 없었다. 어쩌면 모두 꿈이었던 것처럼, 모든 기억이 흐릿했다. 대답할 만한 감정도, 기억도, 느낀 점도 없었다. 여행을 통해 얻은 것도, 남은 것도 없었다. 그때 문득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여행이란 무엇일까? 왜 떠나야 했을까? 이 여행의 의미는 무엇일까?'


하지만 그 답을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여행이 진정한 쉼이라면 나는 어떻게 쉬어야 하는지조차 몰랐던 것이다. 내게 여행은 그저 일정 속의 한 페이지일 뿐이었다. 그러던 중 나는 결심했다. 매년 단 10일이라도, 내게 여행의 진정한 의미를 찾을 시간을 주기로 했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여정은, 어쩌면 뒤늦은 청춘의 방황 같았다.

나는 블로그나 유튜브에서 쏟아지는 여행이 아닌, 남들이 정해준 명소와 추천 코스를 따라가는 여행이 아닌, 오로지 나만을 위한, 나만의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단순히 '가봐야 할 곳' 목록을 채우기 위한 여행이 아니다. 남들이 정해 놓은 기준과 명성에 맞춰 움직이는 여행도 아니다. 화려한 사진이나 맛집 인증 같은 것들은 잠시 내려두고, 온전히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내가 느끼고 싶은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나만의 진정한 여행을 이제야 찾아 나서기로 했다. 이 여행은 누군가의 만족이 아닌, 오로지 내 마음과 호흡에 맞춘 시간과 공간이 될 것이다. 새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나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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